2019년 12월호

명작의 비밀

국보 1호 숭례문, ‘1호’ 자격 논란

“차라리 국보 번호를 없애라!”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19-12-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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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98년 건립 후 절제와 균형미 뽐내…

    • 1907년 성벽 헐리고, 2008년 불타고…국보 해제 위기

    • 1934년 지정된 ‘국보 1호’…교체 논란 반복

    • “왜장 입성한 門, 훈민정음을 1호로 변경” 주장

    • “온갖 수난 이겨낸 숭례문 국보 1호 충분한 가치”

    • 600년 영욕, 그 자체가 숭례문의 진정한 미학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국보 1호 숭례문과 보물 1호 흥인지문. 모두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문인데 하나는 왜 국보이고 다른 하나는 왜 보물일까. 숭례문은 현존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고, 장중하고 당당하며 절제와 균형의 건축미가 돋보인다. 그래서 국보가 됐다. 그런데 “국보 1호를 바꾸자”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1996년, 2005년, 2014년…. 왜 그럴까.

    처참한 화재, 국보 해제 위기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오후 8시 50분경, 국보 1호 숭례문 목조 누각 내부에서 불길이 솟았다. 2005년 4월 5일 식목일, 강원도 양양의 고찰(古刹) 낙산사를 덮친 초대형 산불의 충격이 떠올랐다. 그날 밤, 결국 숭례문 문루 1, 2층의 상당 부분이 불에 타버렸다. 현판은 땅에 떨어져 일부가 부서졌다. 70대 노인의 방화였다. 그는 “토지 보상가가 너무 적어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날 초기 진화는 비교적 잘됐고 덕분에 오후 10시경 불길이 잡혔다. 사실은 그때 목조 누각의 벽체나 지붕을 깨고 들어가 건물 내부로 물을 뿌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더 이상의 큰 피해 없이 불길을 잡을 수가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안타깝게도 10시 30분경 불길이 다시 살아났고 11시 30분경 숭례문은 완전히 화마에 휩싸였다. 

    돌이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길이 잡혀가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 누가 감히 국보 1호의 벽체와 지붕을 깨고 들어가 그 내부에 물을 뿌리도록 판단할 수 있을까. 사태가 수습된 뒤, 그리 큰불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왔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분명 이렇게 목청을 높일 것이다. 

    “별로 큰불도 아닌데, 국보 1호를 훼손하다니. 감히 국보 1호의 지붕을 깨고 벽체를 부수면서 진화를 하다니. 우리나라 문화재 방재는 그렇게도 초보적이란 말인가. 건물을 깨라고 지시한 공무원을 문책하라.” 



    국보 1호가 아닌 문화재였다면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보 1호였기에 오히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국보 1호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화재 발생 다음 날인 2월 11일. 문화재청은 긴급 문화재위원회를 열었다. 정밀 실측도면을 토대로 숭례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서둘러 회의를 연 것은 “국보 1호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가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숭례문은 2층짜리 목조 누각이 거의 모두 타버리고 석축만 남은 상태였다. 숭례문의 목조 누각을 복원한다면 조선시대 석축에 21세기 누각이 합쳐지는 형국이다. 따라서 복원 숭례문을 놓고 ‘조선시대 건축 문화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국보 해제에 대한 논의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위기를 딛고 숭례문은 국보의 지위를 유지했다. 당시 문화재청 관계자는 “숭례문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누각의 일부와 석축이 남아 있는 데다 정밀 실측도를 통해 원형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보에서 해제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있었다. “화재로 인해 조선시대 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은 부정하고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핵심이 사라졌는데 석축만으로 국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라고.

    국보 1호와의 인연

    1894년 숭례문 모습. 성문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돼 있다. [동아DB]

    1894년 숭례문 모습. 성문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돼 있다. [동아DB]

    일제는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서울 성곽 철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의 통감부는 이렇게 주장했다. 

    “선인(鮮人) 동화를 위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산성(山城)이란 것이 조선 도처에 있고, 고명찰(古名刹), 가람(伽藍·스님들의 수행 장소) 등은 거의 배일(排日)이란 역사적 재료를 가지고 있다. 몇 년에 왜적을 격퇴했다든지 하는 등의 글귀가 변기에조차 쓰여 있다. 점차적으로 제거해야 선인 동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해 일제 통감부는 숭례문 바로 옆의 한양도성 성곽 일부를 헐어버렸다. 일본 왕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숭례문 좌우의 한양 도성 성벽은 무너졌고 그 옆으로 전찻길이 놓였다. 

    숭례문과 국보 1호의 인연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8월 27일 일제가 조선의 보물을 지정하면서 숭례문(당시는 경성 남대문)에 보물 1호의 번호를 부여했다. 당시 일제가 숭례문의 가치를 특별히 평가했던 것이라기보다는 편의상 1호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일제가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거쳐 한양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보물 1호로 정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 1955년, 1962년 우리 정부가 국보, 보물을 지정하면서 일제가 부여한 번호를 계속 이어받았고 그렇게 해서 숭례문은 국보 1호가 됐다.

    절해고도가 된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오후 10시 40분경 현판과 천장 사이에서 불길이 다시 살아나며 숭례문 지붕을 뒤덮었다. [김미옥 동아일보 기자]

    2008년 2월 10일 오후 10시 40분경 현판과 천장 사이에서 불길이 다시 살아나며 숭례문 지붕을 뒤덮었다. [김미옥 동아일보 기자]

    1960년대 이후 숭례문 주변에 차도가 생기면서 수많은 고층빌딩이 올라갔다. 주변엔 넘나들 수 없는 도로와 질주하는 차량들뿐이고, 사람들은 국보 1호 숭례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은 절해고도(絶海孤島)가 됐다. 저 멀리서 혹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볼 수밖에 없는 국보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숭례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다양한 논의가 진행됐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숭례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만드는 것만으로 관람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다. 숭례문 주변이 바로 차도에 붙어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차도 일부를 걷어내고 그곳에 관람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횡단보도를 건너간 시민들이 숭례문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안은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1990년대 말 논의의 방향이 바뀌었다. 숭례문에 접근할 수 있는 지하 통로를 설치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숭례문 주변의 지하통로 가운데 한 가닥을 숭례문의 입구인 석축 가운데 홍예문(虹霓門)과 연결되도록 10여 m 연장하겠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지하도를 통해 홍예문으로 나와 숭례문을 가까이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하통로 공사 시 진동으로 인해 숭례문 구조물이 흔들릴 수 있다며 반대했다. 여기에 일반인의 접근을 허용할 경우 원형을 훼손할 우려가 크다며 숭례문의 접근 또는 개방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도 가세했다. 

    그리고 5년여가 흘러, 도시 공간의 주인은 빌딩과 차량이 아니라 사람과 역사여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결국 2005년 5월 숭례문 남쪽 주변에 광장이 조성됐다. 사람들은 숭례문 옆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고립됐던 숭례문이 드디어 사람들과 호흡하게 된 것이다. 2006년에는 한발 더 나아갔다. 숭례문 석축 한가운데의 홍예문을 개방해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사람들이 홍예문을 통과할 경우, 자칫 훼손이나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우려는 2008년 2월 현실이 됐다.

    무의미한 국보 1호 재지정 논란

    복원된 숭례문은 2013년 5월 4일 일반에 공개됐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복원된 숭례문은 2013년 5월 4일 일반에 공개됐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1996년, 국보 1호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50년 넘도록 국보 1호의 지위를 구가해온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프로젝트가 한창일 때였다. 정부는 그해 12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1996년 논쟁은 뜨거웠다. 당시 국보 1호를 재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 의견은 이러했다. 

    “국보 1호는 한국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숭례문으로는 약하다. 우리의 대표적 문화재로서의 상징성이 부족하고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 훈민정음이나 석굴암처럼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화재로 국보 1호를 바꾸어야 한다.” 즉, 국보 1호는 다른 국보와 다른 특별한 것이어야 하는데 숭례문으로는 부족하다는 논리였다. 국보 1호 재지정론자들이 내놓은 대안은 훈민정음, 석굴암, 팔만대장경 등이었다. 재지정 반대론자들은 이렇게 맞섰다. 

    “국보 1, 2, 3호의 번호는 좋고 나쁨의 순위가 아니라 단순한 순번에 불과하다. 문화재라는 것은 장르별로 개성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열을 매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국보 1호를 새로 지정할 경우, 기존의 관념을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각종 자료와 기록을 고쳐야 하는 등 엄청난 혼란이 발생한다. 이번에 국보 1호를 바꾸고 그 후 더 좋은 문화재가 발견된다면 또다시 국보 1호를 새로 지정할 것인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이미 지정한 문화재를 그대로 유지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측의 의견은 팽팽히 맞섰다. 고심하던 문화재관리국(현재의 문화재청)은 여론을 물어 국보 1호 재지정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1996년 10~11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대상은 문화재전문가 144명과 일반 국민 1000명이었고 결과는 반대가 높았다. 문화재관리국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국보 1호를 그대로 두기로 최종 결정했다.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은 이후 잠잠해졌다. 그러나 9년이 흐른 2005년,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 당시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은 다소 의외의 지점에서 시작됐다. 감사원이 ‘상징성 부족’ ‘일제 잔재 청산’ 이라는 이유를 들어 문화재청에 국보 1호 교체를 권고했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를 바꾸는 데 (국민 사이에) 큰 이론은 없고, 새로운 국보 1호로는 훈민정음이 적합하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을 두고 이런저런 평가가 나왔다. “문화재청장이 의견을 말할 수는 있는 것 아닌가”라는 옹호론부터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인데도 교체를 기정사실처럼 몰아간 것 아니냐. 부적절했다”라는 비판론까지. 여기에 감사원이 나서고 문화재청장이 이에 호응했다는 점에서 “정치논리가 문화논리를 지배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동안 논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2005년에도 국보 1호는 바뀌지 않았다. 문화재위원회가 ‘현행 유지’로 결론지었고, 그 결정을 문화재청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숭례문 복원 공사는 2013년 5월 마무리됐다. 전통 방식으로 복원 작업을 진행한다고 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단청 작업의 부실이 두드러졌다. 복원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아 숭례문 목조 누각 80여 곳에서 단청이 갈라지고 벗겨지거나 들떠서 탈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단청의 색깔도 변했다. 부실 복원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듬해인 2014년,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데다 부실 복원으로 국보 1호의 가치가 사라졌다”며 한 시민단체가 국보 1호 해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국보 1호 논란은 잠재된 불씨다.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본다면 국보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적 시각이 개입하기라도 하면 논란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 국보 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다시 불러내는 순간 곧바로 사회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묘안은 없을까. 어찌 보면 간단하다. 국보의 지정 번호를 없애면 된다. 국보 1호 숭례문, 국보 24호 석굴암,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이 아니라 국보 숭례문, 국보 석굴암,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칭하면 된다. 사실 국보나 보물 등에 번호를 매긴 나라는 우리나라와 북한뿐이다. 일본의 경우, 국보의 번호가 있지만 문화청의 관리용 번호일 뿐 그 누구도 번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을 잠재우는 것은 번호를 없애는 일밖에 없다. 오해의 소지가 높은 번호를 그냥 둘 이유가 없다.

    숭례문의 미학

    조선 건국 직후인 1398년 처음 건립돼 1447년 수리한 숭례문. 현존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숭례문은 당당하고 장중하면서도 절제와 균형의 미를 갖추고 있다. 건국 당시 조선왕조의 자신감과 넉넉함을 건축적으로 구현했으며 한국 건축의 전형적인 미감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1869년에 완전히 새로 지은 흥인지문은 과도하게 장식과 기교에 치중했다. 흥인지문에 왕조 말기의 분위기가 반영됐다고 할까. 

    숭례문은 새 시대에 지어졌다. 숭례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한다. 당당하고 힘차다. 그래서인지 온갖 수난을 잘 이겨냈다. 숭례문은 역사적, 미학적, 건축사적인 면에서 국보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엔 어떠한 이견도 없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논란이 인다. 문제는 숭례문이 국보라는 사실이 아니라 국보 1호라는 점이다. 국보 1호라는 지위가 주는 운명적인 부담이라고 할까. 

    국보 1호를 바꾸면 후유증이 적지 않다. 국보 1호를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이 해례본을 수집할 때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훗날 복원해 추가했다. 국보 1호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국보 1호가 국보 2호(원각사지 10층 석탑)나 50호(도갑사 해탈문)보다 더 가치 있고 더 상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국보 1호가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국보 1호를 바꾼 뒤, 앞의 두 장이 모두 붙어 있는 온전한 상태의 또 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국보 1호를 또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300여 건의 국보를 놓고 끝없이 우열을 판단해야 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대신, 숭례문의 국보 1호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보 1호의 교체가 아니라 아예 국보의 번호를 없애면 된다. 

    조선시대 이래 수많은 사람이 숭례문을 드나들었다. 성벽이 파괴되고, 섬처럼 갇히고, 화마에 시달렸어도 이 땅의 사람들은 여전히 숭례문을 지나 어디론가 향하고 다시 돌아온다. 숭례문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국보다. 우뚝 솟아 그 모든 영욕을 우리와 함께했다. 그 과정이 숭례문의 진정한 미학이다. 

    2008년 2월 11일 아침, 많은 시민이 숭례문 화재 현장을 찾았다. 국화 꽃송이를 바치며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의 자존심이 무너졌음을 인식했다. 숭례문은 우리의 자존심이었고 우리의 삶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여러 상처까지 숭례문의 소중한 역사가 될 것이다.

    [신동아 12월호]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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