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여서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이에 창간 88주년을 맞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사 종합지 ‘신동아’가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간 월 1회 씩 책 한 권을 고재석 기자와 함께 읽는다. [편집자 주]
3개월이 지났다. 간혹 마찰은 생겼다. 그때마다 일부러 더 ‘오버’했다. 늦을 것 같으면 빠르게 판단해 미리 양해를 구했다. 또 하나 노력을 덧붙였다. 그들의 눈을 보며 최대한 친절하게 대했다. 고개를 모니터에 박고 일하던 그들과 얼굴 마주 보며 대화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귀찮다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5개월차. 개명에 성공했다. ‘야’에서 ‘민정이’가 됐다. 과거라면 큰소리가 났을 일도 넘어갔다. 프로그램 제작도 매끄럽게 진행됐다.
방송국에서 겪던 일상이 수축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투쟁이 된 광장, 경쟁과 제로섬 게임이 일상인 이들에게 타인은 ‘야’에 불과하다. 서초동과 광화문에 있던 이들이 다른 장소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이름을 물어볼 틈은 없다. 눈을 보고 대화 한 마디 나눌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추상적인 덩어리, 더 나아가 ‘극혐하는 적’이다.
개인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마감이 일상인 방송국 사람들이 조연출의 이름을 불러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관계의 공백은 시간에 쫓겨 본인의 생존에만 몰두한 데서 기인했다. 저자는 이런 수축사회를 풀어갈 키를 사회적 자본이라 했다. 사회적 자본은 곧 연결이다. 믿음과 인정이기도 하다. 관건은 어떻게(How)다. 실천 방법을 생각해봤다.
‘이름 불러주기’는 어떨까. 이름에는 힘이 있다. 고유성이다. 야에서 이름이 되는 순간, 특별한 존재가 된다. 책임감도 생긴다. 무책임한 혐오 발언도 이름 드러내고 눈을 바라보면 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면 상호 의존성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집단에서 벗어나, 잘게 쪼개진 작은 개개인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그렇게 사회적 자본은 조금씩 형성되지 않을까.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시작해보는 걸 권해본다. 잠깐의 어색함은 참으면 그만이다. 눈을 보며 말하는 거다. “이름이 뭐예요?” 의외로 간단한 것으로부터 수축사회를 살아낼 힘이 나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