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평균보다 훨씬 큰 남녀 수명 격차
한국 여성 평균 기대수명 85.7년, 남성은 79.7년
에스트로겐이 테스토스테론보다 장수에 유리?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 요인
[GettyImage]
그런데 이를 성별로 구분해보면 눈에 띄는 차이가 보인다. 한국 남성 기대수명은 79.7년으로 여성(85.7년)보다 6년이나 짧다. 이러한 격차가 인간 고유의 숙명인지 아니면 개선이 가능한 일인지 살펴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류는 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간을 극대화하려는 염원을 갖고 살았다. 최대한의 수명을 향유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더욱이 남자와 여자는 자손을 낳고 서로를 지키면서 상호 보완적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존엄을 지키는 데도 큰 영향을 준다.
필자가 남녀 수명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우리나라 백세인(百歲人)을 연구하면서부터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전국을 돌며 장수인을 만나 조사를 시작했다. 그 가운데 백세인을 판별하려면 대상자의 연령 확인이 매우 중요했다. 장수인의 경우 연령 과장이 심하다. 이 조사의 초기 대상자 대부분은 1890년대 즉 19세기 말 태어난 분이었다.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출생 기록이 확실하지 않았다. 당사자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 숫자나 연도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월남한 경우는 연령을 과장해 신고한 경우도 적잖았다. 따라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해당인의 연령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백세인 중에는 여성이 훨씬 많다
[GettyImage]
그런데 연령이 확인된 백세인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초기에 확인한 백세인 120명 가운데 남성이 6명밖에 안 됐다. 백세인의 남녀비가 1:20 이라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남녀 수명 차이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인구통계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연도별, 지역별 남녀 수명 차이와 백세인 성비를 조사했다.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의 지역 및 성별 장수도 차이는 매우 크다는 걸 확인했다. 전국은 장수 지역과 단명 지역으로 구분됐다. 단순 평야 지대보다는 중산간 지역의 주민 장수도가 높았다. 성별 차이를 보면 강원도 같은 산간 지방은 남성 장수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반면 호남과 제주도에서는 여성 장수도가 현저하게 높았다. 특히 여성 장수도가 높은 제주도의 경우는 초기(2001년) 조사한 백세인 37명 가운데 남성 백세인이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당시 전국적으로는 백세인 남녀 성비가 1:12 정도로 나타났다.
당시 백세인 남녀비의 세계적 평균은 1:7~8 정도였다. 선진국의 경우는 1:4~5 정도로 격차가 다소 줄었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1:4 정도로 나타났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지방은 1:1~2 수준에 불과했다. 여러 통계와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현재 우리나라도 백세인 남녀비가 1:8 정도로 개선됐지만 여전히 남녀 평균수명 차이가 매우 크고, 장수도 면에서 여성이 현저히 우세한 현상을 보인다.
러시아 11.6년, 말리 0.1년
지난 100여 년 동안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났다. 선진국의 경우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이 50세가 채 안 됐다. 그러나 20세기 말에는 80세에 이르렀다. 단 1세기 만에 평균수명이 30년이나 늘어났다. 미증유의 일이다.역사적으로 남녀 간 수명 차이를 살펴보면 원래부터 여성이 일방적으로 우세하지는 않았다. 선진국에서도 19세기까지는 여성 수명이 더 길었다는 증거가 없다. 20세기 들어 수명이 전반적으로 길어지면서 여성 수명이 상대적으로 더 늘어난 게 세계적 트렌드다. 문화적 사회적 환경이 개선되면서 나타난 수명 연장 혜택을 여성이 더 크게 받은 것이다.
최근 들어 선진국을 중심으로 남녀 평균수명 격차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100세 이상, 105세 이상 등 초장수 연령으로 올라가면 여성 비율이 크게 높다. 고령화 현상과 더불어 초고령 여성의 증가는 여성 위주 또는 여성 독점의 초장수사회를 예고하는 지표로 보인다.
한편 지역에 따른 남녀 수명 격차 정도를 비교해보면 인간 수명은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남녀 수명 격차가 10년 이상이 벌어지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남녀 간에 수명 차이가 거의 없는 지역도 있다.
남녀 수명 격차가 큰 대표적인 지역은 소비에트연방권 국가들이다. 러시아의 경우 평균 기대수명이 남자 64.7년, 여자 76.3년으로 11.6년이나 차이가 난다.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도 모두 남녀 간에 10년 정도 수명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 남성 수명이 극히 낮은 요인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소비에트연방의 사회문화적 유산이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이에 버금갈 만큼 남녀 수명 차이가 큰 비(非)소비에트연방권 국가로는 르완다, 시리아, 엘살바도르, 베트남 등이 있다. 모두 극히 가난하거나 전쟁을 겪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남녀 수명 차이가 작은 국가로는 말리를 꼽을 수 있다. 기대수명이 남성 58.2세, 여성 58.3세로 성별 격차가 0.1세 정도에 불과하다. 부탄, 시에라리온, 기니아, 바레인, 니제르, 파키스탄, 이란 등도 남녀 간 수명 차이가 1~2년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런 지역은 대부분 평균수명이 짧으며 경제적으로 가난하거나 종교적으로 이슬람문화권이라는 특색이 있다.
에스트로겐 vs 테스토스테론
2016년 4월 29일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잔디밭에서 열린 ‘어르신 야외 체력관리 교실’에 참가한 60세 이상 참가자들이 전담 지도자의 동작을 보고 체조를 따라하고 있다. [김경제 동아일보 기자]
남녀 간에 수명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도 난제로 분류할 만큼 풀기 어려운 문제다. 다만 많은 과학자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가 수명의 성별 격차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보다 생체 보호 기능이 우수하다. 에스트로겐은 항염증, 항산화 기능과 면역증진 기능을 갖고 있다. 또 지방의 피하 축적을 가져와 신체 구조에도 영향을 준다. 여성호르몬의 영향으로 매달 일어나는 월경이 체내 철분을 감소시킴으로써 철분에 의한 유해산소 발생을 상대적으로 억제해 여성의 장수에 도움을 준다는 의견도 있다.
유전적인 면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데 적합하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 X염색체가 쌍으로 있다. 그 덕에 DNA 손상 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의견이 있다. 최근에는 생체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질병인 이른바 유태복합증후군(幼態複合症候群)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X염색체에 있음이 밝혀져 여성의 유전적 우수성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해 분명한 결론이 나온 건 아니다.
한편 세포 내에 존재하며 호흡, 에너지 생성, 대사, 유전자 제어, 세포 사멸 등에 불가결한 영향을 미치는 미토콘드리아도 모계 유전한다는 게 밝혀졌다. 이 또한 여성 수명 우세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해부학적 측면에서도 여성은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 사이 소통을 담당하는 신경망인 뇌량 크기가 남성보다 10% 정도 더 크다. 그 덕에 여성은 양쪽 뇌를 원활하게 사용해 환경 적응력이 높고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며, 뇌가 손상됐을 때 복원도 상대적으로 잘된다는 가설이 제안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오래 살지만, 장수인 사이의 건강 상태를 비교할 경우 남성이 상대적으로 더 좋다는 점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여성이 남성보다 병원을 더 자주 방문한다. 신체 다양한 부위에 통증도 더 많이 생긴다. 이를 여성 패러독스(Female Paradox) 또는 수명-질병 패러독스(Mortality-Morbidity Paradox)라고 한다. 여성이 오래 사는 대신 잔병치레를 더 많이 한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남녀 수명 격차 작은 이슬람문화권
[GettyImage]
사회환경적 요인이 수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우리나라 백세인 조사 과정에서 보면 남성이 장수하는 지역은 주로 지형이 험하고, 춥고 강설량이 많은 곳이었다. 반면 여성이 장수하는 지역은 지형이 험하지 않고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을 봐도 여성 장수 지역인 오키나와는 기후가 따뜻하고, 남성 장수 지역인 나가노현은 산악지역으로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이러한 생태 및 기후 특성이 주민 생활 패턴에 영향을 주고, 이에 대응하는 남녀의 서로 다른 행동 양식이 수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문화적 전통의 중요성도 확인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랭카스터 지역의 아미시 마을 주민들은 스위스에서 이주해 온 청교도의 후손으로 아직도 마차를 타고, 곡괭이로 농사를 지으며 가족중심체제로 살아간다. 이들은 남녀의 수명 격차가 거의 없다.
앞서 남녀 수명 차이가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으로 이슬람문화권을 꼽았는데, 이 사회 남성들은 금주하고 매일 다섯 차례씩 코란을 외운다. 또 메카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육체적 정신적 운동을 지속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특징을 보인다. 백세인의 남녀 비율이 거의 같은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지방 남성들 또한 신체 활동이 많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매일 산에 올라가 양을 키우면서 산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중국 신장성 지역이다. 이곳은 남성 백세인 비율이 여성의 두 배가 넘는다. 중국에 속하면서도 이슬람문화를 지키고 사는 신장성 주민의 특수성은 생물학적 요인 외에 문화적 요인이 장수 여부를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회·문화적 해결책
세계 여러 지역 사례를 살펴보면 남녀 사이에 비록 생물학적 차이가 있더라도 후천적 노력으로 수명 격차를 극복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지역의 상하수도, 전기, 도로망, 위생상태, 의료시설 등을 개선해 평균수명을 연장했다. 이런 조치는 초장수인 증가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남녀 간의 수명 격차와 장수도 괴리를 해결하려면 추가적 노력이 필요하다.필자가 백세인 연구를 통해 확인한 내용에 따르면 많이 움직여야 오래 산다. 백세인 상당수는 매일 무언가 일을 한다. 한국 남성이 여성보다 오래 못 사는 건 노년기에 특히 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남성이 가부장제에서 습득한 우월감을 버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기능과 의무를 다해야 수명이 길어진다.
또 백세인의 특징은 나이에 관계없이 주위 사람들과 교류한다는 점이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 남성의 사회참여를 유도하고 남성이 이웃과 관계를 잘 형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방안을 마련해야 남성 장수도가 여성만큼 올라갈 수 있다. 금연과 절주도 중요하다. 이 또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의 수명을 결정짓는 요인은 다양하다. 이것들을 잘 결합해야 장수할 수 있다. 필자는 과거 이 과정을 집짓기에 빗대 ‘장수결정요인의 집짓기 모델(Park’s Temple Model of Longevity)’ 이론을 발표한 일이 있다. 집을 지을 때는 기초를 튼튼히 하고 기둥을 건실하게 세운 뒤 지붕을 촘촘하게 올린다. 이것을 인간의 삶과 연결해보자. 인간에게는 유전, 성별, 성격, 문화, 생태 등 개인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 이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의 기초와 같다. 인간 장수의 기둥 요인은 영양, 운동, 관계, 참여 등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붕은 사회안전망, 경제적·정치적 안정성, 의료수혜제도 등 사회 환경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장수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인류는 그동안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을 차례로 극복하며 발전해왔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남녀 수명차별이다. 이를 해소하는 건 인권 평등과 인간존엄성을 지키는 중차대한 일이라는 의식을 갖고 사회·문화적 해결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신동아 12월호'
박상철
●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학박사(생화학 전공)
● 전 서울대 의대 교수
● 전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장,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
● 전 삼성종합기술원 부사장 겸 웰에이징연구센터장
● 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 국제노화학회장, 국제단백질교차결합학회장, 국제백세인연구단 의장 역임
● 저서 : ‘생명의 미학’ ‘마그눔오푸스2.0’ ‘당신의 100세:존엄과 독립을 생각하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