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식 선생님과 스타일이 똑같다”는 말은 내게 최고의 찬사다. 아무리 복잡한 토론이 벌어져도 간단하게 흐름을 정리하는 논리력,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품위 있는 말투…. 선생님의 모든 것을 흠모한 나는 그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주최 출판기념회에 참가한 정원식(왼쪽) 선생님과 나(오른쪽). 가운데는 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소장.
정원식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에 입학하던 해인 1967년 봄이다. 이후 지금까지 선생님 곁에서 맴돌며 지내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제자다. 무수한 제자가 선생님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으나, 나처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선생님과 계속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는 이도 그리 흔하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선생님에 관한 글을 개인적 경험과 결부시켜 쓸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더욱 흔치 않은 일이다. 물론 선생님을 독점하는 듯하여 다른 제자 분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대학 3학년이던 1969년 5월쯤으로 기억한다. 봄 축제가 막 시작되던 무렵 동대문구 용두동의 사범대 캠퍼스엔 화사한 봄기운이 한창 피어올랐다. 학과 선배들로부터 전갈이 왔다. 소강당에서 외국 학자 초청 강연이 있으니 모두 참석하라는 지시였다. 그때만 해도 외국 학자가 내한하는 일이 드물었고, 또 우리 학과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니 동기생 모두 호기심을 가득 품고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당당한 풍채, 유창한 영어
연사는 풍채 좋은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백인 교수였다. 통역을 맡은 정원식 선생님이 그 옆에 서 계셨는데, 선생님의 키는 그 백인을 압도했고 풍채도 훨씬 좋았다. ‘한국 사람이 더 크네…’ 하는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정 선생님이 당시로는 드물게 큰 키(180cm)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 선생님은 검정색 양복을 잘 갖춰 입으시고, 조끼엔 회중시계의 금속 줄까지 달고 계셨다.
학생들의 시선은 연사보다는 오히려 정 선생님에게로 쏠렸다. 유창한 영어와 간결하고 재치 있는 통역, 후리후리한 키와 큰 몸집에 어울리는 멋진 제스처와 당당함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대학생이 외국 유학을 선망했다. 그래서 외국어, 특히 영어에 매달려 사는 학생이 많았다. ‘타임’지나 ‘뉴스위크’지를 가방이나 옷 어딘가에 꽂고 다니는 것이 멋이던 시절이었다. 정 선생님은 바로 그런 꿈을 현실로 만든 본보기였던 것이다.
나 또한 그때 선생님께 반한 학생 중 하나였다. 시골 촌뜨기에 불과한 내게 선생님은 놀라운 현실을 보여주셨다. 한국 사람도 저렇게 영어를 잘할 수 있고, 저렇게 멋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저분이 우리 학과의 교수님이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고, 나를 흥분시켰다. 아마도 이때의 흥분과 감격이 내가 공부를 지속하고, 외국유학을 선택하며, 교수생활을 꿈꾸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외국인 초청연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 심리학회(APA) 회장을 지낸 리 크론바흐 스탠퍼드대 교육심리학과 교수였다. 그는 아세아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한국에서 유일하게 열린 공개강연을 우리가 들은 것이다. 크론바흐 교수가 창안한 ‘크론바흐 알파(Cronbach Alpha)’라는 신뢰도 계수를 모르면 교육학자나 심리학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유명한 학자인지 알 수 있다.
정원식 선생님이 무진(戊辰·1928년) 생이시고 내가 정해(丁亥·1947년)생이니, 선생님을 처음 뵌 1967년에 나는 만 20세가 안 된 청년이었고, 선생님은 39세의 장년이셨다.
학부 시절엔 교육심리학과의 ‘생활지도’라는 과목을 수강한 기억이 난다. 서울대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인 용두동 캠퍼스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서울대 전체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던 어수선한 시절에 대학원을 다녔는데, 선생님의 ‘성격이론’ 과목을 수강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상당히 두꺼운 린제이의 ‘Theories of Personality(성격이론)’가 주교재였는데, 선생님은 그 책의 모든 내용을 수십장의 독서카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해 갖고 계셨다. 그 독서카드를 보면서 강의를 진행하셨는데, 명강의 중 명강의였다.
군대 적성검사 개발 전문가
그 무렵 나는 공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저녁에 대학원 과목을 수강했는데, 근무처인 대방동 공군본부에서 관악 캠퍼스로 군복을 입은 채 등교하는 날이 많았다. 선생님은 그런 내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힘들지는 않은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주 묻곤 하셨다. 그러고는 당신의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정 선생님도 육군 장교 신분으로 용두동 사범대를 1년 가까이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 6·25전쟁 통에 입대한 군대에서 하신 일이 바로 공군본부에서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일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사병과 장교를 선발하고 분류하는 데 필요한 군대용 적성검사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선생님은 20년 전에 육군본부에서 그 일을 하셨고, 나는 20년 후에 공군본부에서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정 선생님은 한국의 군인 적성 및 자질검사 개발의 일등공신이자 유일한 전문가다. 6·25전쟁 중 육군본부의 특명을 받아, 미국 군사고문단에서 파견돼온 장교들과 더불어 그 검사를 직접 개발하셨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정 선생님의 이런 이야기가 그저 흔한 군대 생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금쪽 같은 조언이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내가 몸담고 있는 일의 생생한 역사였기 때문이다.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가 군대 내에서 나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던 상관이나 동료 장교들도 정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일부만 털어놓으면 나를 ‘꽤 많이 아는 친구’로 인정해줬던 것이다. 정 선생님은 이렇게 내 군대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 분이다.
“네가 간사를 맡아다오”
제대하고 대학원을 마친 후 세종대에서 약 2년간 전임강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81년 봄에 유학을 떠나서 1986년 봄에 돌아올 때까지 만 5년을 미국에 있었다. 이 기간이 아마도 정원식 선생님을 가장 오래도록 뵙지 못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서 미처 짐도 풀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선생님이 틈나는 대로 연구실에 들르라는 전갈을 보내셨다. 며칠 후 시간을 내 관악산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그때 선생님은 사회봉사직의 일환으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직을 겸하고 계셨는데, 윤리적 또는 교육적 관점에서 도서를 분류하는 모형이나 기준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이미 저명 학자들로 연구진용을 짜놓은 상태였다. 그러고는 연구를 맡아서 추진할 젊은 간사를 찾고 있었는데, 나의 귀국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으시고는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질 않자, 마침내 사람을 시켜 날 부르신 것이었다. “네가 간사를 맡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나는 그때부터 연구진의 간사로 활동했다.
연구진의 첫 모임이 마침내 열렸다. 송복, 손봉호, 김윤식 등 쟁쟁한 교수들이 속속 나타나셨다. 정 선생님의 주재로 회의가 진행됐는데, 화기애애하면서도 진지하며 아카데믹한 논의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나는 간사에 불과했으므로 말할 위치도 못 됐지만, 말할 기회를 준다 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른바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며 감탄하기에 바쁜데,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정원식 선생님의 말솜씨는 익히 아는 바였지만, 학교강의나 대중강연을 통해서였지 동료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대화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대화에서 선생님은 말씀을 극히 절제하신다. 유려하게 술술 풀어가는 대중 강연 때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자신의 말은 줄이되, 참석자 모두에게 골고루 말할 기회를 배분하신다. 한 사람의 말이 끝나면, 아주 간략하게 그러나 핵심 내용을 자신의 말로 요약해서 확인 한 후에 다음 사람에게로 말 차례를 옮긴다. 사회자 또는 주재자로서 참석자 하나하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요약을 선생님은 놀라울 정도로 잘 해내신다.
이런 연구모임은 열 차례도 넘게 지속됐고, 내가 하는 일은 그날그날의 토론 내용을 정리해서 연구가 목표로 하는 모형과 기준의 얼개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연구가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여러 개의 나무 블록을 한 무더기로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3차원 기준의 도서분류 모형 아이디어를 내 선생님께 보고드렸다. 나는 열심히 설명했는데, 선생님은 선뜻 이해한 표정이 아니셨다.
그렇게 미진한 채 보고를 끝내고 나서, 며칠 후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시더니 책상 위에 무언가를 쏟아 놓으셨다. 10개도 넘는 작은 나무 블록이었다. 내가 말씀드린 모형을 실제로 확인해보기 위해서 어디에선가 나무 블록을 구입해오신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내 눈앞에서 쌓아올리시면서, 세 가지 기준을 검토하셨다.
정원식(왼쪽) 선생님은 제30대 문교부 장관을 거쳐 제23대 국무총리를 지내셨다. 선생님이 입각하신 지 12년 후 내(오른쪽)가 제40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니 깊은 인연이다.
선생님에게서 나는 연구를 어떻게 이끌어가는지, 막강한 연구진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실무 간사를 어떻게 다루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배우고 느꼈다.
‘절묘한 타이밍’
여러 교수가 모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 있다. 서둘러 식사 자리를 마련해서 둘러앉으면 선생님의 독무대가 펼쳐진다. 선생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선뜻 음식 메뉴를 고르지 못한다. 음식 내력에 대한 정 선생님의 해박한 강의를 듣고 그 권고를 따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란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식, 중식, 양식을 불문하고 선생님의 음식에 대한 지식은 놀랍도록 넓고 깊다. 경우에 따라서는 요리방법까지 소상하게 일러주실 정도다.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주선(酒仙)을 넘어선다. 스카치위스키와 보드카에 대한 설명은 술 제조회사의 전문가급이고, 포도주에 대한 식견은 정말로 그 깊이가 한이 없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대식가(大食家)는 아닐뿐더러, 호주가(好酒家)는 더욱 아니다. 동반자들과 함께 음식과 술을 즐기는 것이다. 그 폭넓은 지식은 식사에 동참한 모든 이를 즐겁게 해주고, 품위를 더해준다. 교양 있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갖게 해준다.
한잔의 포도주를 마실 때도, 와인이 비싼 것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갖던 내가 선생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와인의 향기와 맛이 어떻고, 일조량과 기후가 어떻고, 얽혀 있는 사연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음미하는 교양인으로 변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을 닮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그 반의 반도 못 닮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선생님께서 중요한 포도품종 몇 가지를 차근차근 불러주셨지만, 그것조차 외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는 중 선생님께서 학교를 떠나는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988년 12월에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2개월 뒤인 1989년 2월 말, 나는 선생님이 떠나 빈 그 자리를 메울 조교수로 임명돼 서울대 교수가 됐다. 선생님이 담당하시던 교육심리학 관련 강의를 물려받은 것이다. 나의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정 선생님의 문교부 장관 진출이 곧바로 나의 서울대 교수 진입과 연결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우연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만, 나는 선생님과 나 사이에 어떤 끈이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이러한 끈의 느낌을 더 강화해준 ‘사건’이 이후 몇 개 더 있다. 정 선생님은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로 계시다가 제30대 문교부 장관으로 나가셨는데, 꼭 12년 후인 2000년에 나도 똑같은 위치에서 제40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 사이엔 우리 학과에서 입각(入閣)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정 선생님으로부터 내게로 그 일이 전달돼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 선생님은 젊은 시절의 나를 가르치고 일깨워준 스승일 뿐 아니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의 삶 전체를 이끄시는 분이란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 선생님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이끌어온 중요한 일에 선생님의 뒤를 이어 열심히 끼어들고 있다. 천원 오천석(吳天錫) 박사를 기리는 모임, 한자교육추진위원회, 그리고 금성출판사가 후원하는 독서새물결운동추진위원회가 그것이다.
2년 전 선생님은 독서새물결운동의 이사장직을 내게 물려주셨다. 독서 확산 운동을 벌이는 젊은 교사를 격려하는 정 선생님의 열정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뛰어들었는데,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볼 생각이다.
물론 이런 끈의 느낌은 나만의 은밀한 예감이었을 뿐 누구에게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7~8년 전이었을까. 두 사람으로부터 각기 다른 자리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내가 정원식 선생님을 연상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진지한 언급을 들은 적이 있다.
한 분은 교육개발원장을 지낸 이종재 교수다. 사석에서 나의 화법과 대인관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제스처가 정 선생님을 연상시킨다는 이야길 해주었다. 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설마, 그럴라고요” 하면서 웃어넘기려 했는데, 그는 진짜로 그렇게 느낀다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결코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었기에 속으로 흐뭇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강대인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을 만나서 무엇인가 심각한 내용을 칠판에 적고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느닷없이 “정원식 선생님 스타일과 꼭 같다”고 했다. 자기가 대학생 시절부터 가까이서 뵈어온 정원식 선생님의 설명방식이나 스타일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내겐 너무도 큰 칭찬이었다.
강대인 원장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모여 몇 시간에 걸쳐서 난삽하고 복잡하게 자료를 벌려놓으면 그 이야기를 정원식 선생님은 칠판에 몇 가지 다이어그램으로 간단명료하게 요약 정리하셨다고 했다. 정 선생님의 그런 능력에 결코 빗댈 수 없겠지만, 여하튼 내 스타일 속에 정 선생님의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는 강대인 원장의 말에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웠고 자부심에 가득 찼다. 나 자신이 선생님의 그런 능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게서도 그런 비슷한 낌새가 보였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다.
“정 선생님 스타일과 꼭 같다”
이제 우리 선생님은 여든에 다가서시고, 어느새 나도 예순에 가까이 간다. 나는 여전히 선생님을 닮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싶다. 아무리 닮아도 여전히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선생님은 설령 농담으로라도 상스러운 말이나 욕을 한마디도 않으신다. 내가 기억하는 38년의 만남 중에서 그런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집에서 누구나 쉽게 외쳐대는 ‘짬뽕’조차 품위 없는 말이라며 쓰기를 거부하시고 꼭 ‘초마면’이라고 하신다. 이런 품위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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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한번 만난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끈질기게 만남을 지속시키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분이다. 선생님과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언제나 그의 팬이 된다. 선생님이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매듭과 동아리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1년에 한번 들르실까 말까 하는 카페를 20년 넘게 단골로 두고, 장관과 총리 시절의 직원과 각료들의 모임을 지금도 아름답게 챙기신다. 나는 이런 능력을 닮고 싶다.
엊그제 일요일에도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와 의미 있는 주제로 담소를 나눴다. 선생님을 닮고 싶은 강한 바람이 여전히 마음 가득 차올랐다. 선생님은 이렇게 계속 나를 가르치신다. 배우고 닮고 싶은 욕구를 제자의 마음속에 자꾸 불러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 참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