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한 장래 때문에 고민하던 대학시절, 선생님은 어두운 내 인생에 촛불과 같은 존재였다. 내게 숨겨진 문학적 재질을 일깨웠고, 엄두도 못 내던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제자 사랑을 실천한 선생님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
1978년 여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 살고 계신 메리 K. 패터슨 교수님과 부군을 찾아뵈었다.
부모와 자식은 절대적인 혈연관계인 만큼, 자식의 능력개발을 위해 정성을 쏟는 부모의 희생에는 이기적인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스승이 제자의 숨은 능력을 발굴하고 키우는 헌신적인 노력은 부모의 그것보다 훨씬 더 숭고하고 위대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이기적인 사랑이 없고, 오직 진실을 가르치는 교육정신과 따스한 인간애만 있기 때문이다.
내가 험난한 세상에서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벽안(碧眼)의 교수 한 분과의 운명적인 만남 덕분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문학서적을 탐독했지만, 영문학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집안사정이 어려워 주변에선 내가 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접한 문학과 영어 공부가 흥미로웠기에 나는 운명처럼 외국문학을 전공하게 됐다.
그러나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시절, 한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외국문학은 내용이 너무 부실해서 나는 곧 절망하고 말았다. 더욱이 당시 내게 닥친 적빈(赤貧)과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는 문학서적을 탐독하기보다 행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었다. 지금 내가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슘페터의 자본주의 붕괴론과 케인스 이론을 가끔 들먹이는 것도 그때 습득한 짧은 지식 덕이다.
“채플힐에서 영문학 공부해라”
그러나 내가 대학 3학년 때 강사로 오신 메리 K. 패터슨 교수의 영작시간은 내 진로를 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선생님의 강의는 여느 영작 수업과 패턴이 달랐다.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는 연습을 시키기보다, 어느 한 가지 특정한 주제를 놓고 영어로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하셨던 것이다.
한번은 숙제를 제출했더니, 선생님이 나를 자신이 머물던 호텔로 부르셔서 부군과 함께 저녁식사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다. 글쓰기에 더욱 정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날 초대하신 것이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극작가 이근삼 교수의 은사로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오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채플힐) 토머스 M. 패터슨 교수의 부인이며, 스탠퍼드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란 걸 알게 됐다. 그날 저녁 가난하고 초라한 한국 청년에게 기울인 그들의 각별한 관심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것이 계기가 돼 나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 영어로 쓴 단편소설을 교내 영자신문에 연재했고, 처음으로 고료를 받는 기쁨도 누렸다. 그러나 나는 그해 여름 군복무를 치르기 위해 학교를 떠났고, 선생님 내외분은 미국으로 돌아가셨다.
이듬해 겨울, 경북 영천에 있는 육군 부관학교에서 힘겨운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뜻밖에도 선생님의 부군인 패터슨 교수님이 보낸 긴 편지가 도착했다. 너무나 반가워서 편지를 급히 뜯어봤더니 “지금쯤 학교를 졸업했을 테니 내가 있는 대학에 와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나는 “세상에 이렇게 좋은 분이 또 있을까” 하고 놀라워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군복무를 마치면 어디서 무엇을 할까 하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미국 가기가 어렵기만 했던 1964년, 더구나 가세가 기울어 극도로 빈곤한 형편에 유학을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 나를 잠시 동안 가르친 미국 땅의 교수님이 보내신 편지 한 장은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비춰주는 촛불과도 같았다.
비록 내 주변은 어두웠지만 그 촛불을 따라 앞만 보고 걸어가기로 하고, 전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유학시험을 준비했다. 그 결과 미국의 주립대학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은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대학원 입학허가 통지서를 받았다. 등록금 면제 장학금도 함께 받아 기쁨은 더했다.
당시 나는 미국 대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그 대학이 캘리포니아대(버클리)보다 먼저 설립됐고, 미국 전역 대학의 영문학 분야에서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명문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첫 편지에서 “노스캐롤라이나대 문과대학 영문과에서 입학허가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시며 사범대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는 방안도 고려해보자고 하셨다. 그러나 어렵사리 대학원으로부터 나의 입학결정 소식을 들으시곤 “끝내 소원 성취를 했다”는 반가운 연락을 보내오셨다.
1966년 11월 제대한 후 일주일의 여유도 갖지 못한 채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해 겨울 미국 중부에는 몇십년 만에 처음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눈길에 막혀 며칠 밤을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자야 했기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그러나 유서 깊은 남부의 대학 건물들과 우람한 고목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정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벅찬 희망으로 설다. 공항에 마중 나온 선생님 내외분은 나를 기숙사가 아니라 당신들의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 덕분에 나는 개학할 때까지 2주일가량 선생님댁에서 머물 수 있었다.
대물림되는 사제의 정
선생님 내외분은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 속 작은 집에 살고 계셨다. 선생님댁엔 곱게 연세 드신 노인 한 분이 계셨다. 처음에는 그분이 패터슨 교수의 어머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 그분이 패터슨 교수의 어머님이 아니라 은사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래 예일대가 있는 북부, 뉴헤이번에 사는 부인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도그우드꽃이 하얗게 피는 4월이면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패터슨 교수님의 은사는 생전에 부인과 함께 해마다 겨울이면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제자의 집을 찾았던 것. 그분은 남쪽에 내려왔다가 제자인 패터슨 교수님 곁에서 임종을 맞으셨다고 한다.
예일대 교수였던 패터슨 교수님의 은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남부에 있는 제자에게 와서 “내 스승인 세계적인 극작가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패터슨 교수님도 ‘우리 읍내’의 작가로 유명한 손턴 와일더, 즉 은사의 은사를 꼭 한번 뵙고 싶었다고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패터슨 교수님은 돌아가신 은사의 시신을 입관해 북부 뉴헤이번으로 옮기던 중 어느 휴게소에서 손턴 와일더의 시신을 싣고 가는 운구차와 유가족을 만났다고 한다. 비록 두 주인공은 관 속에 있었지만, 삼대(三代)의 스승과 제자가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후 나는 기숙사에 들어와 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 무렵 나는 한국에서 사전을 찾아야 단편소설 몇 편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영문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학원의 강의 수준은 달랐다. 하루에도 소설 100여 쪽 이상을 읽어야 하는 영문학의 바다에 던져져 마치 익사할 것만 같았다. 이때 패터슨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학기말 시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기숙사 문을 열고 나오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선생님께서 “걱정하지 마라. 시험 잘 볼 수 있을 테니”라고 쓴 종이를 기숙사 문 위에 머리핀으로 고정해놓고 가신 것이다.
또 내가 영문학 공부의 어려움과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전과(轉科)를 생각할 때도 선생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중하다 보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그렇게 학문하는 데 있어 지구력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셨다.
그뿐 아니다. 마지막 학위논문은 물론 학기말 논문 숙제까지 제출 전 점검해주시고 크리스마스 때는 책과 책가방을 선물로 주실 정도로 내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셨다. 그러다 보니 내 영문 필치까지 선생님의 필치를 닮아갔다. 1969년 겨울, 내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선생님 내외분이 나보다 더 기뻐하신 건 당연하다.
선생님은 그곳에서 힘겨운 대학원 공부를 할 때만 내게 도움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대학에 자리를 얻는 일에도 크게 도움을 주셨다. 1969년 봄 논문을 쓰기 위해 채플힐을 떠나 캔자스에 머물고 있을 때, 노스캐롤라이나대 영문과 출신으로 오늘날 서강대를 명문으로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전 서강대 총장 존 P. 데일리 신부님이 대학 도서관 건립을 위한 모금차 채플힐을 방문하셨다. 그때 선생님의 부군인 패터슨 교수님께서 데일리 신부님께 나에 대한 말씀을 간곡히 하셨다고 한다.
나는 1970년 귀국해 고향인 대구의 계명대에서 2년 동안 강의한 후 당시 명문대로 발돋움하고 있던 서강대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노스캐롤라이나대의 부총장이자 유명한 영문학자인 C. 휴 홀만 교수의 추천 못지않게 패터슨 교수님 내외분의 강력한 추천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주름살은 ‘무사의 훈장’이야”
이것뿐이 아니었다. 내가 귀국해 선생님 곁을 떠나 있을 때도 선생님 내외분께서는 나를 잊지 않으시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긴 편지를 보내 내게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셨다. 한번은 선생님의 얼굴에 깊어가는 주름살을 슬퍼하는 편지를 보냈더니,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나를 꾸중하시며 그것은 삶의 전쟁을 이겨낸 ‘무사(武士)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인도로 학문 세계에 들어와 문학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뜻깊은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선생님처럼 위대한 교육자가 될 수 없는 나 자신을 늘 부끄러워했다.
세월이 흘러 1978년 나는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초빙연구원 펠로십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하버드대가 있는 보스턴으로 가기 전, 선생님이 계시는 남부의 채플힐을 찾았다. 랄리 공항에 내렸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우산을 쓰고 트랩 아래까지 나오셔서 나를 부둥켜안으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공항에서 선생님댁까지 한 시간 가까이 자동차를 타고 가며 나눈 정담(情談)은 마치 먼 객지에 나갔다가 귀향했을 때의 그것과도 같았다. 이때도 나는 선생님댁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10년 세월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선생님은 대학에서 은퇴하셨고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그곳을 떠나기 전날 선생님 내외분은 나의 논문을 지도했던 J. O. 베일리 교수님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분들과 오랫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고, 선생님 내외분은 내가 펠로십을 받고 하버드대에 가게 된 것을 무척이나 대견스러워하셨다. 그날 밤 선생님은 교통사고를 걱정해서 “보스턴에 가면 지하철이 있으니 자동차를 구입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여전히 내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셨다.
다음날 교수님 내외분은 노구를 이끌고 다시 공항까지 나를 차로 데려다주셨다. 토머스 M. 패터슨 교수님은 그 큰 손으로 내 작은 손을 꽉 잡으시며 “크리스마스 때는 꼭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패터슨 교수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그렇게 간곡히 말씀하셨는데도 그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선생님이 있는 남쪽으로 가지 못했고, 1979년 여름 서둘러 귀국하고 말았다. 그후 3년이 지난 1982년 여름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우체부로부터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토머스 M. 패터슨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흰 봉투의 부음(訃音)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다.
패터슨 교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나의 스승인 메리 K. 패터슨 선생님도 관절 때문에 큰 수술을 받으셨다. 하지만 1년에 몇 번씩 긴 편지와 함께 내게 도움이 되는 신간 문학서적을 보내주시곤 했다. 다행히 나는 1989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듀크대와 스탠퍼드대에 1년 동안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됐다.
10년 만에 미국에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부군 패터슨 교수님이 별세하신 후 숲 속의 조용한 산책로 옆에 있던 집을 떠나 실버타운 시설과 가까운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고 계셨다. 다리를 수술해서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환하게 웃으시면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선사받아 감사한다고 하셨다.
그림으로 확인한 사랑
실내에 들어가니 항상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시던 고(故) 패터슨 교수님이, 램프 옆에 세워놓은 액자 속에서 웃고 계셨다. 창 곁에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선생님댁에서 보았던 마호가니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잠자는 아이를 등에 업은 한국 아낙네를 모자이크 형태로 그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이국땅에서 유난히 향수를 자극하는 이 그림은 패터슨 교수님이 1960년대 초 한국의 여러 대학과 드라마센터에서 극예술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떠나실 때 누군가가 선사한 것이었다. 전에 살던 집에서도, 선생님이 안락의자에 앉으면 항상 눈길이 머물던 벽면에 그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선생님 내외분이 그 그림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뜻한 사랑을 베푼 스승 덕분에 나는 일생을 문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내가 듀크대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스탠퍼드대가 있는 팰러앨토로 떠나기 전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선생님댁을 방문했을 때, 그 그림은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의 등 뒤에 서 있던 나는 순간 그 그림이 박수근(朴壽根) 화백의 작품인 듯한 인상을 짙게 받았다.
이듬해 나는 귀국해서 화랑을 경영하던 가까운 벗이자 늦깎이 제자에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 그림이 4호 내지 5호이면 값이 몇억원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패터슨 선생님의 그림을 뉴욕의 소더비는 아니더라도 한국으로 가지고 와서 팔아드리고 싶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다리가 불편하신 선생님은 부군이 살아계실 때부터 갖고 있던 낡고 퇴색한 벤츠차를 여러 번 수리해서 끌고 다니셨다. 10년 전 채플힐의 선생님댁을 방문했을 때 두 분이 나를 공항까지 태워다주셨던 바로 그 차를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저몄다.
어느덧 팔순을 넘긴 선생님을 떠올리며, 나는 그림을 한국에서 팔면 선생님의 낡은 자동차라도 새것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간곡한 뜻을 선생님께 편지로 전했다. 이후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전화로 “곧 너에게 줄 놀랄 만한 선물이 있다”고 하셨다. 그해 나는 선생님에게서 “돌아가신 패터슨 교수도 좋아하실 테니 그 그림을 네가 가져라”는 내용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선생님의 글은 한 점의 티도 없이,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어느 봄날 그림을 넣은 소포가 도착했다. 그림을 받아든 내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으로 뒤범벅돼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내 의도는 확고했다. 선생님의 뜻이 비록 그러하셨지만 나는 그 그림을 처분해서 돈을 보내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제자를 찾아가 그림을 보여줬다. 그림을 본 그 역시 박수근의 작품이 틀림없는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품인지는 다시 감정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박수근 그림을 전공한 미술평론가 이구열씨를 찾아가 그림을 보여줬으나, 뜻밖에도 그는 박수근 작품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희미해진 기억을 통해서 혹시 1960년대 초 그림을 패터슨 교수님께 그려드렸거나 선사했던 사람을 찾으려고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당시 가까운 분이던 문화부 장관에게 말씀드려 국립미술관에 정식으로 감정을 의뢰했다. 하지만 역시 진품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가. 그림이 진품이 아닌 경우에는 내가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다시 보내드리기로 결심했다. 마침 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제자 편에 그것을 선생님께 다시 전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박수근 화백의 화첩 한 권을 사서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보내드렸다. 그후 선생님은 그 그림에 대해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 선생님도 나도 그 그림에 대한 서로의 진의(眞意)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신 무한한 신뢰는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몇억원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그림을 “돌아가신 부군도 좋아하실 것”이라며 선뜻 보내주신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불편한 손으로 쓴 사랑의 편지
1990년대에 와서 선생님은 관절이 나빠져서 인공관절을 끼워넣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편지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전하셨다. 수술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 지나간 삶을 되풀이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한번도 비관적인 면모를 보이진 않으셨다.
1995년에는 비행기표를 보내드릴 테니 서울에 한번 다녀가시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선생님께 1960년대와는 많이 달라진 서울의 모습과 1962년 처음 서울에 오셔서 한 학기 동안 내게 영작을 가르치셨던 대학의 강의실 등 추억의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미국에 계시면서도 가끔 경주의 왕릉과 해인사 계곡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나의 초청을 받고 기뻐하시면서 몇 번이고 서울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지만 건강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셨다.
결국 나는 선생님의 따님으로부터 선생님께서 또다시 큰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고 싶었으나, 당시 내 생활이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해서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얼마 되지 않은 돈을 간호 비용으로 쓰시라고 보냈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병원에서 퇴원하셨으나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윈스턴 세일럼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고 계셨다.
선생님은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지만, 계절이 바뀌면 어린이가 쓰는 글씨처럼 알아볼 수 없는 필치로 사랑의 편지를 변함없이 보내오셨다. 그것은 제자를 사랑하는 선생님의 처절하리만큼 슬픈 마지막 노력이었다.
그후 2003년 4월 오하이오 주립대 영문과 교수인 선생님의 아들로부터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고향인 뉴욕 부근에 묻히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의 일생을 소개한 신문 스크랩도 함께 전해 받았다. 그때 나의 심정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신문기사 내용 가운데 유난히 내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미국의 명문 여대인 스미스 칼리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여러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지방 신문에 쉬지 않고 많은 글을 썼으며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부군인 톰 패터슨과 함께 한국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셨다는 대목이다. 나는 약간의 부의금이라도 보내려 했으나, 유족들은 이를 거절했고 꼭 보내고 싶으면 자선단체에 기부하라고 했다.
은인, 숨은 교육자, 휴머니스트
|
내 인생의 은인이자 숨은 교육자이며 휴머니스트였던 선생님은 이렇게 나를 은혜도 모르는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영원히 멀리 가셨다. 선생님께서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문의 길로 나를 이끌어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인생을 살았을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선생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헌신적인 사랑을 제자들에게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도 그 생각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다. 유일한 위안이자 변명이라면, 선생님은 내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계시고 부족한 나를 통해서 수많은 나의 제자들이 삶과 문학의 깊은 뜻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