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젊은 시절, 가난했지만 용감했다. 그래서 더 곤란을 겪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를 지켜보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30년 가까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이가 최상용 고려대 교수다.
- 정 전 장관은 최 교수의 지속적인 코치 덕분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혈기를 잘 다듬어 방송기자로 활약했고, 정계 입문 뒤에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치철학을 실천하려 했다.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 함께 있고 싶다. 그 향기가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을 적실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 또한 그 향기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심고 싶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이정하,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
그리스 델파이 신전에는 ‘도(度)를 넘지 말라’고 새겨져 있다. 도를 넘지 않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에게 일반적 규범이었다. 동양에선 중용(中庸)을 강조해왔다. 중용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강조되며, 특히 정치인과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손꼽힌다.
정동영(鄭東泳·53) 전 통일부 장관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노인은 투표 안하시고 집에서 쉬어도 돼요”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때 일에 대해 당사자인 정 전 장관은 “도를 넘었다”고 표현했다.
“젊은이들에게 연설하면서, 투표율이 저조한 젊은이들이 꼭 투표해야 한다고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도를 넘었습니다. 정치인에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신중하지 못했어요.”
“유신은 망할 것입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 정 전 장관 본인도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일로 아예 몸져누운 사람이 있었다. 주일대사를 지낸 최상용(崔相龍·64) 고려대 교수다. 정 전 장관은 서울대 재학시절 강사이던 최 교수의 강의를 들은 것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사제의 연을 이어왔다. 노인 폄훼 발언의 파장이 일었을 때 정 전 장관은 최 교수에게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정치인으로서는 끝이다”는 말과 함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최 교수는 평소 정 전 장관에게 “정치는 말의 권력”이라고 하며 말의 무게와 깊이를 강조해왔다. 정 전 장관은 당시 의원직과 당의장직, 선대의원직을 모두 내놓았고, 그 일을 계기로 노인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게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이다. 그해 가을, 스물다섯 살 복학생 정동영은 ‘한국일보’와 ‘문화방송’ 기자 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동아리 선배 중 친하게 지낸 두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가 됐는데, 기자실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일보 시험엔 떨어지고 문화방송 필기시험에 통과한 후 면접을 보게 됐다. 면접관으로 들어온 문화방송 사장은 그에게 현재의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눈 가리고 아웅’식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이 내려다보고 있는 입사지원서엔 유신반대 시위에 가담했다가 구류를 살고 구속된 전력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은 망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강압적인 철권통치를 포기하고 민주화로 나아가야….”
면접관은 그의 말허리를 끊고 나가보라고 했다. 면접시험 도중에 쫓겨난 그는 터벅터벅 걸어 학교로 향했다. ‘한국정치론’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교정은 유신 반대를 외치는 확성기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한국정치론’은 60여 명의 학생이 듣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이었다. 수강생 대부분이 정치학과 학생들이었다. 그는 국사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정치에 관심이 많아 수강신청을 했고, 그날은 마침 그가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발표자로 나선 그는 학생들 앞에서 “오늘 문화방송 면접시험을 봤는데, 시국관을 묻는 사장의 질문에 유신은 망할 것이라고 대답하다 쫓겨났다”고 털어놓았다. 수업이 끝나자 강사가 그를 불렀다.
“정군, 입사시험을 본 것은 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함인데, 인생의 선배가 묻는 질문에 그렇게 답하면 합격할 수 있을까?”
“선생님 같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라면 ‘유신은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하고 답하겠네. 문화방송 조용중 전무에게 편지를 써줄 테니 전하게.”
대학생 정동영을 놀라게 한 이 젊은 강사가 바로 최상용 교수였다. 최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조용중 전무하고 몇 번 인사는 나눴으나 사실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조 전무가 언론계에서 양식 있고 신망이 두텁다는 평판이 나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써주면 정군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본업은 가내수공업, 학생은 부업
최 교수가 정동영 학생을 눈여겨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한국의 정치문화’를 주제로 리포트 과제를 내줬는데, 4·19혁명을 영국의 명예혁명에 비유한 그의 글이 매우 뛰어나 학자로 클 재목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 최 교수는 최근 그 묵은 리포트를 찾아내 정 전 장관에게 복사해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한번 쓴 글은 영원히 남고 좋은 글은 언제 읽어도 좋다”면서.
우여곡절 끝에 문화방송 최종 합격자 10명 가운데 ‘정동영’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전한 사람은 최 교수가 아니라 훗날 부인이 된 민혜경씨다. 사실 그가 취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건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민씨에게 당당히 청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복학하기 전까지 제대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복학한 뒤에 고향 친구로부터 숙대 3학년이던 아내를 소개받아 그만 푹 빠져버렸어요. 전주의 완고한 교육자 집안 외동딸에게 청혼하기 위해서 급하게 입사시험을 쳤지요.”
그 시절, 그는 가난했다. 1974년, 전북 순창에서 어머니가 동생 3명을 데리고 상경해 한양대 뒤편 성동구 사근동, 옛 77번 버스 종점이 있던 언덕배기 판자촌에서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그도 군 복무를 마친 뒤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가 만든 옷들을 용달차에 싣고 평화시장에 납품했다. 저녁이면 수금하고, 그 돈으로 다시 원단이며 실, 단추, 액세서리를 사서 사근동 산비탈을 올랐다. 직접 봉제 작업도 했다. 그가 초크로 원단에 본을 그리고 재단을 하면 어머니와 고향에서 함께 올라온 아가씨들이 재봉을 했다. 그러면 다시 그가 오버로크를 치고 실밥을 뜯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부업으로 다녔다”고 할 정도다. 그와 대학 동기인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당시 그의 집안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권만학(경희대 교수), 한범덕(전 충북 정무부지사)과 함께 동영이네 판잣집에 자주 놀러 갔어요. 추운 겨울 냉골에서 까까머리 동생들이 이불을 덮고 자고 있고, 그 한쪽에서 우리는 커다란 양푼을 놓고 김치국물에 찬밥 버무린 것을 안주 삼아 술 마시며 심각하게 토론했어요.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죠. 술 마시다 변소엘 가면 똥 무더기가 삼각형으로 높이 쌓여 있었어요. 그런 집안 사정 때문에 정 전 장관을 잡으러 온 중앙정보부 직원이 ‘너는 데모하지 말고, 빨리 취직이나 해라’며 딱해하기도 했지요.”
“일을 저질러버려”
정 전 장관도 아픈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하루는 새벽에 보따리를 이고 나가신 어머니가 힘없이 돌아오셨어요. 어머니는 전날 밤새도록 만든 바지를 한아름 싸서 머리에 이고 평화시장에 납품하곤 하셨거든요. 어머니의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어요. 버스 차장이 보따리가 너무 크다면서 어머니를 밀쳐버리는 바람에 버스에서 굴러떨어지셨던 거예요. 그 다음날부터는 제가 어머니 대신 보따리를 메고 새벽 납품까지 했어요. 그런 다음에 학교에 가고, 저녁이면 수금하러 다시 평화시장에 들르고…. 고된 날의 연속이었죠.”
이런 형편에 연애며 결혼은 사치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민씨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고, 그는 결국 최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음은 최 교수의 회상이다.
“젊은 날의 정동영은 지식인의 전형이었어요. 야윈 얼굴에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그런 학생이었죠. 그 시절, 다들 어렵게 살기는 했지만, 시골에서 올라와 판자촌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며 사는 장남을 어떤 여자도 좋아할 리 만무했죠. 그래서 ‘일을 저질러버려라’고 했어요.”
최 교수의 조언(?)에 힘입어 그는 민씨를 설악산으로 납치(?)했고, 민씨 부모는 결국 결혼을 허락했다. “아무 일 없었다고 하지만, 정동영이 가만있을 녀석이 아니다”면서.
그가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할 무렵 최 교수는 미국의 TV 뉴스 시대를 개척하고 발전시켜온 독보적 존재 월터 크롱카이트(전 CBS 저녁뉴스 앵커)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뒤로 그는 ‘한국의 크롱카이트’를 꿈꾸게 된다.
방송기자가 되어서도 그는 황지우, 권만학, 한범덕 등과 함께 최 교수 집을 자주 찾았다. 1987년엔 황지우 총장이 무등산 언저리에 칩거하며 시작(詩作)을 했는데, 그때 최 교수와 함께 무등산을 찾은 것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술과 벗과 스승이 함께하는 자리는 언제나 행복했다”며 추억에 젖었다.
MBC 앵커가 된 다음엔 뉴스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를 상의하기 위해 최 교수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그가 만든 앵커 멘트를 최 교수에게 들려주고 의견을 구하면 최 교수는 언제나 명쾌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한다. 1988년 무렵의 일이다.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농민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면서 농민과 경찰 양쪽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깡촌 출신인 그로선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때 ‘0시 뉴스’ 진행을 맡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의미 있게 전할 마땅한 오프닝 멘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또 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뉴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여의도 농민시위는 치안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은 농민 문제이고 농촌 문제인데, 본질을 보지 않고 치안 문제로 해결하면 다음에 또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방송국이 발칵 뒤집혔다. 여권 매체인 문화방송이 정부의 시국 대처방향을 대놓고 비판했으니 잠잠할 리 없었다. 이런 일이 그 뒤로도 반복되자 ‘0시 뉴스’가 폐지되고, 그는 LA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A leader is a giver’
정 전 장관은 1996년 제15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인의 길로 들어설 때도 최 교수에게 자문했다.
최 교수의 말이다.
“그에겐 정치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요. 정치를 해도 대성하리라고 봤지요. 말과 글이 좋은 것은 정치인의 중요한 자질이고, 거기에 도회적이며 단아한 이미지가 플러스 요인이 됩니다. 그가 어느 당을 선택했더라도 그를 평생 동안 힘껏 도왔을 거예요.”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구절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정치철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평생 정치사상을 연구한 최 교수도 평소 ‘구동존이’를 강조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만남에서 동질성을 발견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관용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게 최 교수의 평소 가르침이다. 정 전 장관은 이 가르침에 따라 정치 입문 11년 동안 많은 만남을 아름답게 이어오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최 교수가 그에게 당부한 것이 또 있다. 하나는 ‘Miracle doesn’t happen miraclously.’ 기적은 기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니 진정으로 기적을 바란다면 전력투구하라는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A leader is a giver.’ 지도자는 뭔가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자기의 것을 내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1964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에서 석·박사(정치학) 학위를 받은 일본통이다. 2000년부터 2년간 주일대사를 지낸 것말고는 평생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정치학자로 살았다. 최 교수가 정 전 장관에게 노력하는 지도자, 자기 것을 내주는 지도자가 될 것을 주문하게 된 데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희생된 개인적 경험이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1973년 3월이었어요. 고려대에 첫 강의를 나가는 날 노상에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한 달 넘게 고문을 받았어요. 죄목은 ‘북한 방문죄’. 조작된 거죠. 당시 도쿄대가 주축이 되어 구명운동이 일어났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11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어요.”
그러나 정작 최 교수가 북한 땅을 밟은 건 제자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으로 있던 2005년 6월15일이다. 평화통일 자문위원 자격이었다.
최 교수는 정 전 장관이 ‘민족적 지도자’가 되길 희망한다. ‘정치개혁 노선이 분명한 정치인’ 이미지가 강했던 그가 통일부 장관을 맡은 후 개혁 이미지보다 통일전문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점을 둔 데는 최 교수의 그런 바람이 크게 작용했다.
2006년 12월7일은 최 교수가 고려대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는 날이었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 전 장관은 노교수를 찾아 위로했다. 스승의 존재 덕분에 어려웠던 시절, 젊음을 낭비하지 않고 꿈을 키웠으며 지속적인 관심과 지도 덕분에 흐트러지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나마 감사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