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위작(僞作)은 예술혼 더럽히는 죄악… 환영 못 받는 감정(鑑定)은 나의 업(業)”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8-07-09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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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0원권 지폐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는 가짜다. 경매회사에서 추정가 8000만원에 출품된 ‘산수도’는 사진을 확대한 인쇄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는 영인본이었다. 국립박물관에도 가짜 고서화가 차고 넘친다. 고이고이 모시던 보물급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위작이라니 폭탄선언이었다. 허탈하고 분노할 일이었다. 주장을 제기한 이동천 교수에게는 힐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말한다. 알면서 잘못된 걸 그냥 내버려둘 순 없지 않으냐고. 우선 아프더라도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고.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면 뒷면에 그림이 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보물 585호, 개인 소장)’. 그런데 이게 정선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린 임모위작(臨模僞作)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 나라의 화폐에 사용된 그림이 위작이라니 미술품에 대한 심각한 불감증이다. 어째서 제대로 된 감정을 거치지도 않은 작품을 화폐 도안에 사용하는 일이 생길 수가 있나. 계상정거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동천(李東泉·43) 교수를 만났다.

    그는 머리를 승려처럼 바싹 깎았다. 고등학생처럼 해맑은 얼굴이다. 고미술품 진위논란이란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선, 치열한 싸움판에 뛰어든 주인공이라기엔 너무 젊다. 표정과 태도가 섬약해 보일 정도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의 내용은 결코 여리지 않다.

    “두려워요. 겁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오랫동안 진품인 줄 알던 작품을 가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폭탄을 던지는 것과 같아요. 그런 일을 했으니 당연히 떨리죠. 그러나 살찐 것하고 부은 것은 다른 거잖아요. 고름이 찼으면 짜내고 수술을 해야지요. 그래야 남아 있는 팔다리를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불안하세요?”

    “예, 언제 칼 맞을지 몰라요, 하하. 그래서 사람 많은 데는 안 나가려고 해요. 두렵긴 하지만 내게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 충분히 가난해요. 돈이나 직위가 탐나지 않아요. 가난하게 공부하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겁날 게 뭐가 있겠어요?”



    머리를 바싹 깎은 이유는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라 한다. 1주일에 한 번씩 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밀면서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 허물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단다. 하루 두 끼, 깍두기나 김을 반찬으로 소박하게 먹고 외출도 거의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연봉 400만원 정도로 버텼다. 그러면서 책을 준비했다. 고서화 감정에 대한 사회적 발언의 방법으로는 책이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인 ‘진상(眞相)-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이란 책이 그 결실이다.

    지폐 속 가짜 그림

    계상정거도는 퇴계 생존시 도산서당의 주변 산수를 담은 작품이다. 정선이 1746년에 그렸다고 알려져 있고 그동안 겸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던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가짜란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가짜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뭐가 진짜이고 뭐가 가짜인지를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 비단 서화만 그런 게 아니다. 감정법을 전문으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섣불리 진위를 논할 수가 없다. 아니, 소문난 미술사학자들도 진위를 헷갈릴 만큼 가짜를 만드는 이들의 수법이 지능화하고 있다.

    1000원짜리 지폐 속 겸재 그림을 암만 들여다봐도 나는 그게 진품인지 가품인지 구분할 수 없다. 매사가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품은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그는 어떤 근거로 위작이라 판단했을까.

    “이건 정교한 위작도 아니에요. 정선 그림에 이런 식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림은 없어요. 따라 그리다 보니 산이 커져버려 하늘 둘 자리가 없어진 거예요. 이 그림은 임모위작이에요. 진작(眞作)을 옆에 놓고 따라 그린 거죠. 따라 그리다 보면 긴장이 풀려서 원래보다 커지게 마련입니다. 아니, 무슨 산이 이렇습니까. 겸재는 작품 수준이 대체로 균질해요. 정교하죠. 산을 굴곡 있게 그리지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구릉처럼 그릴 리가 없다고요. 정선은 획을 삐쳐서 그려요. 빠르고 힘차죠. 이 그림은 70대의 겸재가 그렸다기엔 필체가 너무 느리고 필획의 격이 떨어져요. 겸재 그림에선 폐필(쓸데없는 붓질)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이건 폐필투성이잖아요.

    이 나무 방향을 보세요. 방향이 다 달라요. 대체 바람이 어디서 분다는 겁니까. 겸재라면 이런 그림 안 그립니다. 산을 장표(표구) 부분까지 튀어나오게 그릴 리 없죠. 위조품은 화가의 작품세계를 손상하고 왜곡합니다. 가짜를 상품으로 거래하는 것도 죄악이지만 예술품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게 더 큰 재앙이죠. 계상정거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작품을 공개해야 합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해놨다지요. 문화재니까 그걸 꺼내 우리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이동천 교수는 위작의 근거로 ‘호피선지’ ‘연분’ ‘소릉’ 3가지를 제시한다.

    그는 ‘진상’이란 책에서 놀랄 만한 얘기들을 산더미로 쏟아놓는다. 고미술 유통시장에서 사진이나 영인본(影印本), 목판수인본(木版水印本) 등 정교한 복제본이 원작으로 오인되는 일은 흔한 일이라고 한다. 지난해 어느 경매회사에서 추정가 8000만~9000만원에 출품된 북산 김수철, 우봉 조희룡, 대산 강진의 ‘산수도’는 원작이 아니라 사진을 확대한 인쇄물이었고, 2005년에 추정가 3000만~4000만원에 출품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春秋筆法’휘호 역시 인쇄과정에서 생긴 미세한 점들까지 훤히 보이는 영인본이었다는 거다. 심지어 세 사람의 산수도는 설명에 ‘삼베에 수묵담채’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원래 그린 비단 바탕이 확대되어 삼베로 오인된 경우라니 기가 막힐 지경이다.

    20세기 종이에 쓴 19세기 글씨

    문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초보적인 오류가 권위 있는 미술품 경매장에서도 드물지 않다는 점이다. 감정위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져 다른 나라의 위작을 국내 작가의 진작으로 감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단다. ‘진상’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한 패닉 현상까지 경험했다. 그동안 그토록 아취 있다고 탄복했던 추사의 글씨와 단원의 그림이 모조리 위작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별 친절한 설명도 없다.

    아니, 왜, 이게 위작인가. 이게 위작이라면 진품은 어디 있다는 것인가. 분노에 가까운 배신감이 치밀었다. 차라리 입 다물고 말지, 이렇게 위작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이동천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안 그래도 현대미술 쪽에 고객을 다 뺏겨 찬바람 쌩쌩 도는 고미술시장에 이렇게 대량의 위작 타령을 한다는 건 배고픈데 전쟁까지 일으키는 격 아닌가. 우리 예술품을 두 번 죽이는 일이 과연 온당한가. 이 사람 제정신이야?

    그러나 정말 위작이라면?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간 더 큰일 날 일임이 확실하다.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건 작품의 가치 문제만이 아니다. 거짓이 용인되고 통용되는 사회는 거짓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우선 아프더라도 환부를 도려내는 게 백번 옳다는 걸 인정한다.

    그가 ‘진상’에서 위작임을 선명하게 밝힐 근거로 제시하는 내용은 세 가지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것들이다. 고미술시장이 형성된 게 언젠데 아직까지 이런 초보적인 내용마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먼저 호피선지. 호피선지를 말하기 위해 그는 미술사학자 유홍준에게 칼을 겨눈다. 다른 이야기에선 안휘준, 이태호에게도 칼날을 들이댄다. 여간 맹랑한 태도가 아니다. 그런 공격적인 글을 쓰는데 거북하지 않으냐, 망설임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유홍준 선생이 ‘완당평전’을 쓴 게 2002년이에요.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 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아 누군가 호피선지 얘기도 하겠지 싶어 기다렸어요. 그런데 암만 지켜봐도 아무도 말하지 않데요. 2006년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이란 개정판이 나올 때도 똑같은 얘기가 실립니다. 돌팔이가 사람을 죽이면 죽였다고 떠들지만 명의가 죽이면 죽을 만하니까 죽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명성이란 그만큼 무서운 거죠. 그러니 권력을 가진 사람은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호피선지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위조자는 때로 시대별 창작재료에 관한 지식이 없는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위조하기도 한다. 즉 앞 시대 작품에서 쓰인 종이, 비단, 안료 등을 쓰지 않고 위조자 자신이 활동할 당시의 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다. 더 큰 문제는 연구자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는 현실이다. 유홍준은 ‘완당평전2’와 ‘김정희 :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에서 완당의 유별난 종이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완당은 종이의 선택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썼다. 자신의 작품에 걸맞은 아름다운 종이를 고르기도 했고 붓에 잘 맞는 종이 먹을 잘 먹는 종이를 그때그때 면밀히 검토해보곤 했다. 완당이 좋은 종이를 얼마나 좋아했고 중국제 화선지를 얼마나 애용했는지는 그의 연식첩이라는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식첩에 사용한 종이는 중국에서 20세기 초에 제작한 호피선지로 당연히 김정희가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쓰지도 못한 종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다.”

    호피선지와 연분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폭탄선언이다. 그렇다면 호피선지라는 호랑이 무늬 종이가 19세기 말에는 정말 없었다는 근거라도 있나. 그걸 더욱 명확히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자꾸만 이 젊은 학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호피선지가 20세기 종이란 건 중국 감정계에선 공공연한 이야기예요. 종이감정 전문가가 쓴 글도 있고요. 종이도 종이지만 연식첩의 글씨는 원작과 비슷하게 한 개칠이 많아요. 먹의 농담(濃淡)도 좋지 않고요. 필세를 봐도 추사의 진필일 리가 없는 명백한 위작입니다.”

    호피선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20세기 이전 인물이 호피선지에 글씨 쓴 작품들은 모조리 가짜라고 보면 틀림없다는 거다. 위작에 대한 확실한 기준 하나가 생긴 셈이다.

    다음이 연분. 안료는 작품을 제작한 시대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에서 백색안료인 연분은 작품의 창작 시기를 밝히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 그 이유는 연분이 지닌 결점에 있다. 백색 연분은 오랜 시간 빛과 습기의 영향을 받으면 짙은 갈색 또는 흑색으로 변하는 반연현상이 나타난다. 반연현상이 일어난 부분은 과산화수소로 씻으면 다시 백색으로 환원된다.

    19세기 중기까지 조선 화가들은 조개껍데기로 제작한 백색안료인 합분을 주로 썼다. 합분을 사용한 진작은 안견의 ‘몽도원도’, 윤도서의 ‘유하백마도’,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금강내산총도’, 심사정의 ‘화조도’,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다. 거기 시대를 초월해 하얗게 빛나는 안료가 바로 합분이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이러한, 반연 현상이 나타난 연분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기 장승업(1843~1897)때라고 한다. 백색 안료로 기존에 사용하던 합분에 이러한 연분이 새롭게 더해졌고, 연분 사용은 20세기 초 크게 유행했다. 대개 1940년 무렵까지 널리 쓰이다 사라졌다. 지금 전하는 그림에 나타난 반연현상이 그걸 증명한다. 물론 반연현상이 있는 그림이라고 다 진작은 아니다. 반연현상을 위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연분을 놓고서는 두 가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적어도 안견부터 신윤복까지는 그림에 (현재 반연현상이 나타난) 연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따라서 안견부터 신윤복까지의 그림 중 이러한 연분을 사용한 그림은 19세기 말에서 1940년 사이에 위조된 작품이 확실하다. 이쯤 되면 정말 확실한 기준이다. 이런 간단한 원칙을 몰라 시장에서도 감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오류가 빚어졌는지 모른다. 반연현상 위조는 그 특징이 명확해 판별하기가 매우 쉽다고 한다.

    문제는 반연현상만으로도 간단하게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이런 위작들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 서울대나 고려대 미술관에 진품으로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 확인 가능한 대표적인 위작이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김홍도의 ‘단원절세보첩’(보물 제782호)이다. 이 그림의 꽃과 새를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했고 그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위작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곡병’ 중 ‘맨드라미와 쇠똥벌레’(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의 ‘설제화정’(간송미술관)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단다. 사실이라면 정말 통탄할 일이다.

    흥선대원군이 사랑한 ‘소릉’

    세 번째는 소릉이다. 소릉은 중국제 서화창작용 비단의 일종이다. 소릉은 본래 명대 홍치(1488~1505)부터 서화창작에 쓰인 재료지만 당시는 시작단계에 불과했고 천계, 숭정(1621~1644) 연간에 이르러 널리 유행해 청초까지 이어지다 자취를 감춘 그림재료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소릉을 19세기 후반부터 적어도 반세기 동안 서화창작 재료로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기생의 속치마에 난을 그렸다는 얘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중국제 소릉이 명주처럼 보였고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걸 기생의 명주단속곳이라고 소문내고 다녔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지금 전하는 조선시대 서화작품을 보면 진품으로 흥선대원군 이전에 소릉을 사용한 예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소릉에 처음 작품을 그린 사람은 흥선대원군이라고 봐도 된다. 그가 어전에서 소릉 작품 총란도를 그렸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청국에서 3년의 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소릉에 서화작품을 그렸고, 그 비단이 마음에 들어 이후 쭉 사용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1000원권 지폐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흥선대원군 이후 지금까지 많은 서화가가 중국제 소릉을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제 서화용 소릉에 제작한 1880년대 이전 서화는 모두 위조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소릉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므로 대원군 이후 소릉이라고 무조건 진작일 리도 없다.

    호피선지, 연분, 소릉. 자, 이동천 이후 고미술계는 위작을 감별할 수 있는 명백한 세 가지 기준은 가진 셈이다.

    그는 위험하게도 미술사가 이태호가 자신의 책에서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린 듯한 불상의 선묘와 공양드리는 두 선승 표현, 선묘를 쌓은 암준법과 특징적인 수묘법 등 역시 김홍도의 능숙한 수묵담채의 구사와 필치이다”라고 극찬한 김홍도의 ‘묘길상’을 위조라고 못 박는다. “서화창작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위조자가 당시 특정 수요에 맞게 졸렬하게 제작한 것일 뿐”이라고 뾰족각을 세운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까. 아니, 이태호 선생의 눈은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미숙하단 말입니까.”

    “묘길의 길(吉)자를 보세요. 그게 글자입니까. 그리고 인장이 없으면 안 찍으면 되는 거지, 인장을 붓으로 그리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축구선수가 공 차는 걸 보면 연습을 얼마나 한 선수인지 알지 않습니까. 필선도 똑같아요. 획을 보면 어느 수준에 올랐는지 금방 안다고요. 이름난 미술사가들이 착각하는 건 아마도 선입관 때문일 겁니다. 처음부터 진품이라고 보니까, 의심하지 않으니까 다 좋게 보이는 거죠. 우리는 달라요. 감정은 경찰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일단 다 범인이라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거죠. 관찰해서 단서가 잡히면 과학적 검증에 들어가는 겁니다.”

    중국 서화감정 대가의 제자

    지금까지 안평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몽유도원도 제첨(題簽)이 안평대군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편다.

    “안휘준 선생은 왕희지의 행서체를 연상시키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말했지만 그건 당송의 금초서를 배운 글씨예요. 안평대군은 1447년 음력 4월20일에 꿈을 꿨고 사흘 뒤인 23일에 몸소 제기(題記)를 짓고 썼어요.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몽도원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꿈속에 동행한 박팽년에게는 그림의 발문 ‘몽도원기’를 쓰게 했어요.

    본래 이 그림은 두루마리가 아니라 벽에 붙여놓고 감상할 용도로 그렸어요. 수권(두루마리) 형식은 관찰자의 시선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지만 벽에 붙여놓을 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도 가거든요. 몽유도원도 제첨은 후대 소장가가 두루마리로 장표형식을 바꾸면서 첨가한 거예요. 그림 이름도 본래의 ‘몽도원도’라고 불러야지, ‘몽유도원도’는 나중에 붙인 틀린 이름이에요.

    사람들은 늘 처음 알았던 것을 고집하죠. 틀렸다고 해도 좀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뒤늦게 왜 귀찮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응한단 말이에요. 나는 감정가이기도 하지만 감정학자고 교육자예요. 학자와 교육자로서 의무가 있어요. 혼자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외롭기로야 한량없죠. 갈 길이 험하기 짝이 없죠. 그러나 내가 오를 산이 자그만 앞동산이라면 길이 편하겠지만 히말라야라면 갈 길이 험한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난데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 자신의 등정길이 히말라야라고 말하는, 이 겁 없고 강단 있는 청년은 누구인가. 이동천, 아호인 것 같은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는 이, 태(泰)자, 연(淵)자이신 어른으로 문화재위원과 전라북도향교재단 이사장을 지낸,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선비다. 연묵회를 운영해 집 안에 늘 묵향이 그득했다. 강암(剛菴), 토림(土林), 도산(濤山) 선생같은 전주지방 서화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제가 막내예요. 아버지가 절 유난히 귀애하셨고 어려서부터 서화하시는 분들 곁에서 자랐어요. 붓글씨는 5세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한문은 김형관(金炯觀) 선생에게서 배웠어요. 그림, 전각도 조금씩은 해봤죠.”

    전주고교 다닐 땐 전국 서예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기차 타고 서울까지 글씨를 배우러 올라오곤 했다.

    “아버지가 전주서 글씨를 배워서는 지방선비밖에 못 된다고 하시면서 일중 김충현 선생께 보내셨어요. 고1 때 쓴 글씨는 지금도 전북 예총사무실에 걸려 있어요. 고등학생 때 장성 묘장서원(畝長書院)의 묘정비문을 제가 썼어요.”

    미대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선비가 되려면 문사철(文史哲)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고 부친이 말렸다. 명지대 국문과에 진학한다. 글씨는 꾸준히 썼다. 그림도 그렸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양런카이(楊仁愷)가 쓴 ‘중국서화’였다. 박물관 교재로 쓰이는, 미술품 감정에 관한 책이다.

    “제자가 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당시 써놓은 글씨도 같이 넣었죠.”

    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1993년 중국으로 간다. 처음엔 베이징으로, 다음엔 스승이 계시는 선양(瀋陽)으로.

    “특별히 운이 좋았어요. 스승이 감정가라 1994년 이후부터 스승과 함께 중국 전역에서 열리는 경매장을 숱하게 찾아다녔어요.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볼 수 있었죠.”

    당시 베이징만 해도 경매하는 곳이 33군데였다. 한해(翰海), 가덕(嘉德)경매만 해도 1년에 적어도 2번 이상 열리는데 그때마다 서화가 1000점씩 쏟아져 나왔다. 그 그림들을 탐욕스럽게 다 들여다봤다. 재미있고 흥분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스승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되면 날아갈 듯 기뻤다.

    ‘곤이지지(困而知之)’

    중국은 최고의 감정가에게 ‘인민감상가’란 칭호를 붙이는데, 현재까지 이 칭호를 얻은 사람은 양런카이 선생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동천은 양 선생의 수제자가 됐다. 제대로,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스승은 ‘생이지지(生而知之)’보다 ‘곤이지지(困而知之)’가 낫다고 가르쳤다. 괴로움을 겪어가며 배우는 것을 말한다.

    1995년 봄 가덕경매에 함께 갔을 때였다. 평소처럼 스승은 몰려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쪽으로 가고 혼자 종일 그림을 봤다. 저녁에 숙소에서 만났을 때 “동천아, 너는 오늘 나온 것 중에 어느 그림이 제일 좋더냐” 물었다. 명말 충신이자 서화가로 예원로(倪元?)란 학자가 있다. 그의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 답했다. 스승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테스트를 수시로 받았다. “그래, 예원로가 좋거든 박사논문은 예원로로 쓰도록 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스승의 가르치는 방법은 철저했다.

    “한 학기에 한 달 정도는 중국 전역의 박물관을 순회하게 해요. ‘이 사람은 내 제자니 찾아가거든 물건을 보여주라’는 편지 한 통을 써주시죠. 그걸 들고 중국 전역의 박물관을 다 찾아다녔어요. 항저우, 쑤저우, 상하이, 저장성, 후베이성, 둥베이, 선양, 사오싱, 베이징! 베이징에선 역사박물관 고궁박물관 수도박물관 자료실에 틀어박혀 거기 있는 서화와 문헌들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거예요. 7원짜리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온종일 꼼짝도 않는 거죠. 모기에 물리고 추위, 더위 말도 못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틈도 없었죠.”

    박물관, 도서관, 유물 관리실 직원들과 나눈 이야기도 큰 도움이 됐다.

    “후베이성 박물관 유물관리실장은 지금 부관장이 됐어요. 그 사람과 도시락을 나눠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했죠.”

    그렇게 원작들을 보고 난 후 도판을 구해 공부한다. 글씨라면 임서하고 그림도 따라 그려본다. 따라 쓰고 그려봐야 필세나 획의 두께, 농담이나 삐침의 각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시대별 특징을 공부하고 인장이나 종이에 관한 지식도 연마한다. 스승 양런카이는 제자에게 감정의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각 방면의 최고전문가를 소개해줬다.

    “위서체(예서에서 해서로 변하는 과정의 아름다움이 풍부한 글씨)는 스승님이 직접, 공필화(세밀하게 그리는 그림)는 선양루쉰미술학원 교수인 옌샤오샹(晏少翔), 수복표구(미술품을 복원하는 표구)는 수복표구의 아버지 펑펑성(馮鵬生), 고증학은 인민대학 국학원 원장인 펑치용(馮其庸), 전각은 슝보치(熊伯齊) 선생에게 배웠어요. ”

    박물관과 경매장과 여러 스승을 오가면서 7년을 보냈다. 3년 공부 후엔 선양의 스승을 떠나 베이징에서 공부했다. 베이징에 머물 때도 1년에 서너 달 방학 때는 반드시 선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혹독하게 공부시키는 양 선생에게 이동천말고도 다른 제자가 있었을까.

    “저말고 둘이 더 있었어요. 그런데 한 명은 감정이 아니라 미술평론 쪽으로 가버렸고 다른 하나는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죠. 선생님의 외손녀가 미술사를 전공하고 상하이 박물관에 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손녀에게 ‘감정은 이동천에게 배워라’고 말씀하셨대요. 영광이죠. 내가 좀 안정되면 그 손녀를 불러 꼭 미술품 감정을 가르칠 겁니다.”

    “감정학엔 결백이 필수”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감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외국인 최초로 랴오닝성 박물관 연구원으로 근무한다. 선양리공대학에서 감정학 강의도 한다. 2000년 예술의전당에서 명청황조 미술대전을 추진했고 2001년 봄엔 ‘명작과 가짜명작’이란 흥미진진한 전시를 기획했다. 귀국은 2001년에 했다. 명지대 대학원에 국내 처음으로 예술품감정학과를 개설하면서 주임교수가 되고 3년 정도 거기서 학생을 가르쳤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직한다. 지금은 서울대에서 작품감정론과 서예를 가르친다. 강사라 박봉이지만 시간을 많이 뺏기지는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여전히 공부다. 암만 해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공부도 업이에요. 적을 만들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감정을 공부하는 것은 제 업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중국에 있을 때 아름다운 위서체 천자문을 써서 전시했다. 거기 양 선생이 쓴 발문엔 ‘탐미색은(探微索隱)’에 능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탐미색은! 작은 것을 발견하고 숨은 것을 찾아낸다는 뜻이다. 그것이야말로 감정가의 일이다. 탐미색은하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문이 감정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이 분야가 왕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술품의 양이나 시장규모나 애호가의 수에 비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연구가 미미하다.

    스승 양런카이 선생을 말할 때 이동천은 운다. 스승이 없는 세상의 적막이 그를 눈물 흘리게 한다는 거다. 감정은 철저한 도제식 교육이다. 현대식 학교교육을 받은 오늘 우리들이 짐작할 수 없는 사제관계다.

    “학문이란 배움을 묻는 거잖아요. 이제 나는 물을 사람이 없어져버렸어요.”

    스승은 늘 “작은 은혜도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한다. 공부는 오랜 세월 고생스럽게 해야 하고 글은 결코 한마디도 빈말로 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늘 “퉁취안 니 짜이날(동천이 어디 있느냐)?”이라고 했다. 양 선생은 지난 1월 타계했다. ‘진상’의 앞머리에 그는 “이 책을 스승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미술품 감정학은 민감한 학문이다. 미술품이 돈으로 거래되는 상품인 까닭에 자칫 돈의 유혹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일단 돈과 결탁하면 학문을 계속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감정은 특별히 학문 본연의 결백을 유지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 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깨끗한 사람이 많아져야 감정학의 터가 잡힌다. 양 선생이 먼저 인간 되기를 가르치고 서예를 가르친 것도 세속에 오염되기 쉬운 감정학의 위험을 경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화혁명 때 고문을 당해 실명해서 오른쪽 눈을 잃으셨어요. 늘 왼쪽 눈으로 서화를 바싹 당겨서 보셨죠. 60세가 되기까지 단칸방에 사신 분이세요. 그런 분이 늘 제게 ‘學問之道, 如逆水行舟, 不進則退.(학문의 길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과연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등골에 땀이 좍 흘러요.”

    ‘마음의 장애’ 극복해야

    미술품 감정은 결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결과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일정한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필연적 산물이다. 작품 감정학습의 첫걸음은 검증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감정이란 모든 사람을 범인으로 의심해보는 경찰과 같아요. 시대를 막론하고 위조와 사기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에게 무조건 믿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죠. 모든 위조나 사기는 자기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아요. 그러니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죠. 기존의 권위를 무조건 믿어버리는 ‘마음의 장애’를 극복한 후라야 작품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작품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작품에 감춰진 위조자의 제작수준과 의식적, 무의식적 실수까지 알아낼 수 있죠.”

    작품 감정방법에는 목감(目鑑·눈으로 보는 것)과 고증(考證)이 있다. 목감은 오래 교육받고 훈련을 거친 눈으로 작품의 진위를 감별하는 방법이고, 고증은 작품에 대한 사실 검증을 통해 과학적으로 감정하는 방법이다. 목감은 수많은 고증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고증은 목감을 기초로 깊이 있는 검증을 하는 것이니 둘은 분리되지 않는 상호작용이다.

    작품은 작가가 활용한 지식의 결정체다. 그러니 목감에서 인문적 지식은 필수다. 감정에서 과학기기의 사용은 고증의 한 방법이긴 하지만 예외 없이 목감이 먼저다. 합리적 목감 자세는 작품 진위 판별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이야기다. 그 목감의 단계에서 이동천이 저만치 올연하게 도드라진 인물이 된 것은 당연히 오랜 궁구의 힘에서 나온 고증의 능력 덕분일 것이다.

    지금까지 감정학습은 주로 특정 작가나 특정 시대의 진작과 위작 특징만 학습하거나 진작과 위작의 비교를 통해 위조작의 유형분류에만 머물렀다. 전자는 언제든지 위조자가 이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어 극히 위험하고, 후자는 전체를 볼 수는 있겠지만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동천은 ‘진상’에 위의 몇 가지 팁 외엔 위조품 감정방법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 비법들은 스스로 수년 동안 ‘곤이지지’ 해서 깨친 뒤 스승과 토론하면서 얻어낸 것들이다.

    “감정의 포인트는 대개 한두 문장으로 끝나요. 그렇게 힘들게 얻은 내용들을 책 속에 다 넣어 알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연구자나 애호가에게 감추려는 것은 아니지만 위조자들이 알게 되면 그걸 역이용할 수 있죠. 그래서 많은 부분을 책갈피 안에 숨겨뒀어요. 곧 다른 책을 쓸 겁니다.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을 각기 한 권의 책으로 낼 거예요. 그땐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요.”

    김홍도 그림이 왜 가짜인지를 나는 구분할 수 없다. 혼자서는 운필의 정도나 농담의 강약을 가려낼 눈이 없다. 추사 글씨도 마찬가지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호고유시’나 간송미술관이 가지고 있다는 ‘화법유장강만리’ 같은 대련(對聯)을 위작이라고 판독하는 것에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호피선지도 아니고 소릉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연분이 칠해진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가짜라고 하는가.

    유홍준의 “완당의 글씨 중 글자 구성에 멋이 한껏 들어간 명품”이란 해설을 먼저 본 선입관 때문이라고? 이동천이 쓴 책에 나오는 “김정희의 필력, 필묵 성격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위조자의 무기력한 필치가 위작 곳곳에서 발견된다”라는 말을 석연하게 인정할 수 없다. 그걸 이동천 또한 콕 집어 설명하기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것이다. 축구선수가 공차는 것을 보면 그 선수의 실력을 한눈에 아는 사람도 있고, 그놈이 그놈같아 보이는 사람도 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니까.

    아는 만큼 사랑한다

    감정학습엔 자수성가가 없다고 한다. 즉 자의적 독학은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다. 독학에 의해 한번 각인된 의식은 남이 바로잡아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잘못 각인된 인식을 평생을 가지고 가기 일쑤다. 인간 두뇌는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거다.

    “독학은 혼자만 알고 깨우쳤다고 착각하게 되니 큰 깨우침의 세상을 보지 못해요. 깨우침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죠. 그래서 감정은 큰 스승 아래서 배워야 합니다.”

    위조작품의 제작과 유통은 철저하게 프로의 세계다. 미술품 유통의 큰 축인 위조작품의 유통은 위조와 사기라, 예술품을 수장할 때 순수한 열정과 재력만으로는 안 되고 이 세계를 공부하고 알아야만 더 사랑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여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예술과 인간 세상 전반에 통용되는 정석이다.

    전통적 감정학습은 마음으로만 깨달을 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은밀히 전수되는 도제식 교육의 장점은 스승이 학습의 방향을 정하고 제자의 학습단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제자에게 적당한 학습내용을 수행시키는 데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양 선생에게 왜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교육시키느냐고 힐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승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알아듣고 날 따라오는 놈을 가르치는 거야.”

    그렇지만 스승은 이동천이 중국 서화 감정에 평생을 보낼 것으로 기대했을 거란다. 그러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네가 공부한 건 중국 서화이니 한국엔 돌아오지 말라’고 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 머문다. 환영받지도 못하는 이곳에 왜 머물까.

    “1991년에 ‘미인도’ 진위논란이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딱 부러지게 규정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진위논란을 벌이지만 결론은 늘 오리무중이에요. 내가 했던 공부로 그걸 밝히고 싶었어요. 뻔히 보이니까. 한 10년 한국미술사에 매달려 정리가 되면 다시 중국으로 갈 겁니다.”

    고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 작품의 위조는 명성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예산의 김정희 종가가 지닌 ‘김정희의 칠언시-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호)를 비롯해 제주특별자치도가 소장한 ‘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2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제주시에 기증한 ‘김정희 편지 모음집’ ‘시의정’ ‘자화상’(선문대 박물관), ‘예서’(간송미술관) 등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추사의 위작들이 나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겸재의 ‘금강내산’(고려대박물관), ‘독서여가’(간송미술관), ‘설평기려’(간송미술관), ‘산수도’(서울대 박물관)도 가짜고, 심지어 풍속화의 최고 경지인 단원의 ‘단원풍속화첩’(보물 527호)이 전체 25점 중 19점이 위작이라는 사실을 무슨 수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동천은 또랑또랑하게 묻는다.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김서령의 가’‘여자전’


    “부은 것을 살쪘다고 인정할 순 없지 않습니까. 가짜 작품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경제적 손실을 보는 소장가라기보다 그림이나 글씨의 원작자죠. 자기 작품세계가 왜곡되고 훼손당하는 걸 지하의 그분들이 얼마나 통탄하겠습니까. 그걸 밝힐 때 고미술시장이 더 건강해져요.”

    그림 뒤에 감정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감정가실명제를 실시하자는 것도 그의 주장이다. 그래야 책임소재가 명확해져 신뢰할 수 있다는 거다. 명지대를 물러날 때 전주의 부친은 말씀하셨다. “얘야, 사람이 굶어죽는 법은 없느니라.”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아마 ‘진상’ 때문에 다음 학기 서울대에서 잘릴지도 모르죠. 그래도 상관없어요.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수만 있으면 만족해요. 쥐가 소금 먹듯 조금씩 먹어가며 살 거예요.”

    이동천에 의해 어느 날 한국미술사가 새롭게 쓰여지는 날이 올 것 같다. 우리 미술계는 지금 문제적 인물 하나를 맞이했다. 그 도전과 응전을 기꺼이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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