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성용이 웃통을 벗었다. 3월7일 K-리그 개막전에서다. 카메라 플래시를 받은 조각 몸매가 팬을 몸 달게 했다. 술, 담배는 절대 안 한다. 여자도 귀찮다. 한국 축구의 중원을 평정한 이 젊은 별은 당최 쉴 줄을 몰랐다.
그러던 2008년 가뭄 속 단비 같은 존재가 등장했다. 기성용과 이청용(이상 서울). 이들 스타의 등장으로 한국 축구는 다시 주목받았다. 특히 한국 축구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기성용은 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20세의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기술 축구를 뽐내는 기성용은 박지성과 비교될 만큼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다. 기성용을 빼놓고는 축구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다.
기성용은 2006년까지 평범한 선수였다. 또래들과 함께 소속팀 2군에서 생활하면서 1군으로 올라갈 날만을 기다리며 볼을 찼다. 2006년 서울에 입단한 그는 단 한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했다. 17세로 나이도 어렸지만 선배들의 높은 벽을 넘기가 버거웠다.
기성용, 귀네슈를 만나다
어린 시절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터라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몇 축구 관계자밖에 없었다. 185cm의 장신에 75kg의 호리호리한 선수였을 뿐이다.
2군에서 힘들게 생활하던 그에게 2007년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은 이장수 감독을 내보내고 2002년 월드컵에서 터키를 3위에 올려놓은 세계적 명장 세뇰 귀네슈 감독을 영입했다. 귀네슈 감독과의 만남은 기성용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귀네슈 감독은 예쁘게 볼을 차는 기성용에게 반했다. 그는 2007년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에서 기성용에게 1군에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귀네슈 감독을 보좌한 이영진 서울 코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귀네슈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모든 선수를 다시 테스트했습니다. 특히 기성용의 신체조건과 볼을 차는 기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단지 경험이 문제였는데요. 귀네슈 감독은 과감하게 성용이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18세의 어린 녀석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2007년 기성용은 꾸준하게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경험 부족 탓에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18세의 어린 선수에게 K리그 1군 무대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을용처럼 쟁쟁한 선배들과 경쟁하는 것도 힘겨웠다.
“2007년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K리그에 데뷔한 뒤 한 단계 도약했어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1년이 빠르게 지나갔어요. 1년을 1군에서 뛰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걸 배웠거든요. 2007년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기성용의 말처럼 그의 등장은 K리그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18세의 기성용은 화려한 기술 축구로 다른 구단의 베테랑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으면서 서서히 팬과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7년 여름 서울에서 열린 서울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는 기성용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친선경기에서 기성용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과 그라운드에서 맞서 기죽지 않고 좋은 플레이를 펼쳐 극찬을 받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세계적 명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기성용에게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기성용은 고무됐다. 박지성 이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가능성이 있는 선수가 K리그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내에서는 큰 뉴스가 됐다. 이 뉴스는 유럽에도 전해졌다. 아쉽게도 실제로 테스트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기성용의 이름이 유럽에도 알려지게 됐다.
큰 기대가 모아졌지만 기성용은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한 18세의 어린 선수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성공보다는 좌절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K리그에서는 팀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확실한 주전도 아니었다. 기성용은 체력적으로도 약점을 드러냈다. 2007년 캐나다에서 열린 20세 이하 FIFA 월드컵에 대표로 선발돼 참가했지만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쓴맛을 봐야 했다. 포지션도 미드필더가 아닌 수비수로 변신해 참가하면서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솔직히 2007년에는 팀에서도 확실한 주전이 아니었어요. 을용이 형 백업 멤버였죠. 세계대회에 나가서도 내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경험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재미난 사실 하나는 기성용이 2007년 K리그에서 22경기를 뛰었지만 단 하나의 골도, 어시스트도 기록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는 점이다. 그만큼 K리그는 18세의 어린 선수에게는 녹록지 않은 무대였다. 그러나 18세의 어린 선수가 K리그에서 빅4로 불리는 서울의 핵심 선수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축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용(龍)이 된 2008년
알에서 막 깨어난 후 1년간 힘든 시기를 보낸 기성용은 2008년을 최고의 해로 만든다. 소속팀에서는 확실한 주전으로 도약했고, 각급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뛰어난 그의 기술에 매료돼 연신 러브콜을 보냈다. 19세의 그는 성인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도 맛본다. 자신이 동경하던 선배 박지성과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솔직히 대표팀에 처음 뽑혔을 때는 출전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할 것 같았어요. 대표팀엔 좋은 선수들만 모이잖아요. 그래도 자신은 있었어요. 경쟁에서 한번 이겨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경기도 뛰고 골도 넣었으니까요. 선배들이 칭찬해준 것도 큰 힘이 됐어요.”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도 참가했으며 월드컵 예선 북한전에서 귀중한 동점골을 뽑아내며 말 그대로 ‘벼락 스타’가 됐다. 북한의 밀집 수비에 고전하며 0-1로 끌려가던 후반 23분 발리슛으로 동점골을 뽑아냈다. 몸 뒤에서 넘어오는 볼을 가슴으로 트래핑해 발리 슈팅으로 연결하는 플레이에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기성용은 A매치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보다 K리그에서 데뷔골을 넣은 것을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올림픽에서 좌절을 맛보고 돌아온 직후 K리그 경기를 뛰었어요. 지난해 8월23일로 기억하는데 대구와의 원정경기였습니다. 원래 을용이 형이 출전하기로 돼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제가 갑자기 뛰게 됐어요. 준비를 하나도 못했는데 K리그 데뷔골을 넣었습니다.”
이후 기성용은 8월30일 광주와의 홈경기에서도 골을 넣으며 2경기 연속골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10월11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가대표팀 평가전에서도 득점포를 쏘아 올리며 A매치에서도 ‘연속골’ 징크스를 이어갔다.
“좋은 징크스잖아요.(웃음) 크게 골 욕심을 낸다거나 그러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북한전 골은 상대 골키퍼가 조금 도와준 것 같기도 하고요. 팀에 보탬이 되는 좋은 골을 넣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워요.”
기성용은 대표팀에서 연거푸 골을 넣은 뒤 한국 최고의 미드필더로 떠올랐다. ‘한국의 제라드’(스티븐 제라드는 잉글랜드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그가 움직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많은 팬이 모여들었다. 훌륭한 신체조건에 곱상한 외모가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FC서울 구단이 인기를 통제하기 힘들 만큼 최고의 별로 떠오른 것이다. 서울을 K리그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려놓은 그는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는 등 상복까지 따랐다.
축구밖에 모르는 아이
“2008년의 시작은 안 좋았어요. 부상에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올림픽 때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면서 힘들었어요. 하지만 대표팀에 선발되고, K리그 경기와 A매치에서 골을 넣었고, 상도 받았어요.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마무리가 좋았던 한 해라서 뜻 깊었어요. 좋은 선생님, 동료들과 재미있게 보낸 한 해라서 더 기뻐요.”
기성용이 어린 나이에 성공한 비결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엄청난 몰입에 있다. 축구 감독을 했던 아버지 기영옥(전 광양제철고 감독)씨의 영향으로 그는 항상 축구와 함께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 다른 감독님들이 용돈도 주시고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자주 쫓아다니면서 축구도 하고, 경기도 보고 그랬어요. 그 덕분에 축구가 생활이 돼버렸어요.”
축구 감독을 한 아버지 덕분에 축구공과 함께 자란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기영옥씨는 미래를 내다보고 축구뿐 아니라 영어도 익힐 수 있는 호주로 아들을 유학 보냈다. 당시는 브라질이나 영국 등 축구 선진국으로 축구 유학을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기영옥씨는 다른 선택을 했다.
“호주에 가라고 하실 때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요. 호주에 가서 보니까 축구를 하는 시간이 한국에 비해 훨씬 짧았어요.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힘들었고, 적응하기도 힘들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죠. 그런데 되돌아보니 공을 차면서 영어도 배우고, 견문을 넓힌 게 지금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호주에서 축구를 배우면서 영국에 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등의 유소년 선수들과 경기를 치르는 경험도 했다. 호주는 영국과 축구 교류가 활발하고, 호주 출신 선수들은 잉글랜드 등 유럽 무대에 대거 진출해 있다. 그렇다 보니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잉글랜드에 가서 경기하는데 결과적으로 지긴 했지만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또래들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기술, 체력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도 하루빨리 유럽으로 나가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낀 기성용은 이후 유럽선수들과 대응하기 위해 개인연습에 몰두한다. 지금도 소속팀 훈련이 끝난 뒤 야간에도 그라운드에 나와 개인 훈련을 하며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그는 단기간에 2군 생활을 청산하고, K리그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서울의 최용수 코치는 노력 면에서는 기성용을 따라갈 선수가 없다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굳이 성용이와 (이)청용이를 비교하면 노력과 천재성에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청용이는 몸 밸런스나 볼을 차는 게 타고났어요. 반면 성용이는 꾸준한 노력으로 지금까지 성장한 선수예요. 하루는 밤늦게 훈련장 옆을 지나가는데 성용이가 개인 연습을 하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프로에 입단한 이후에도 개인 연습을 꾸준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런 선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성용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고, 어린 선수지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성용은 소문난 연습벌레다.
“성용이 보면 정말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배인 제가 봐도 진짜 축구에 거의 미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일부에서는 갑자기 스타덤에 오른 성용이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흔들릴 수 있다고 볼지 모르지만 저뿐 아니라 우리 팀 선수들의 생각은 전혀 달라요. 축구밖에 모르는 성용이는 절대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선수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서울 주장 김치곤)
K리그 평정하고 해외로
2009년 기성용의 목표는 유럽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번 시즌 빡빡한 스케줄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게 1차 목표다.
“잉글랜드를 비롯해 유럽 축구를 보면 1주일에 2경기는 기본이더군요. 이번 시즌 우리 팀 스케줄도 거의 일주일에 2경기씩 치르게 돼 있어요. 여기에 월드컵 최종예선전, 20세 이하 FIFA 월드컵까지 치러야 하잖아요. 1년을 알차게 보내려고 비시즌에 준비를 많이 했어요. 유럽 축구처럼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는 2009년 시즌 초부터 강행군을 펼치고 있다. 1월 중순 대표팀 훈련에 소집돼 6주간의 고된 훈련을 마쳤다. 이후 소속팀에 합류해 전지훈련을 소화했고, 3월 초부터 시작한 K리그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모두 소화하는 등 단 한순간도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밝고, 자신감이 넘친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해서 가속페달을 밟는다. 이제는 코칭스태프가 그를 만류할 정도다.
“성용이에게 개인훈련 자제를 요청하고 있어요. 축구는 훈련만큼이나 휴식도 중요하거든요. 귀네슈 감독님도 성용이에게는 충분히 쉬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죠. 훈련을 너무 많이 하면 체력이나 몸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서울 이영진 코치)
2009년 K리그 우승을 목표로 삼은 기성용은 이번 시즌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유럽에서도 통할 수 있는 체력과 몸을 만든 뒤 선배들처럼 더 큰 무대로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몇몇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기성용이 노리는 무대는 빅리그가 아닌 유럽 중상위 리그. 일단 그 무대에서 뛰면서 유럽 축구에 적응한 뒤 잉글랜드로 이적하겠다는 마스터플랜을 세워놓았다.
“네덜란드나 벨기에 상위팀들도 유럽 빅리그 팀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에서 더 배운 다음에 빅리그로 진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성이 형도, 기현이 형도 다 그런 과정을 거쳐 최고의 팀에서 뛰었잖아요. 곧바로 잉글랜드처럼 큰 무대로 가는 것도 좋지만 완벽을 기하려면 유럽 중상위 리그를 경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기성용에게는 9월 이집트에서 열리는 20세 이하 FIFA 월드컵이 매우 중요하다. 세계 유명 클럽의 스카우트가 집결하는 이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유럽 진출은 무난하게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유럽 클럽의 주목을 받아온 기성용이 또래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면 유럽 중상위 리그뿐 아니라 잉글랜드 등 빅 리그로 직행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호흡을 맞춘 홍명보 감독이 20세 이하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점도 기성용에게는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부상 없이 K리그와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잘 치러야 해요. 월드컵 최종예선도 중요하고요. 잘 준비해서 유럽리그에 도전하고 싶어요. 지금은 월드컵 최종예선이 먼저니까 본선 진출권을 따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죠.”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은 후배들 가운데 해외로 진출해 성공할 가능성이 큰 선수로 기성용, 이청용을 꼽는다. 유럽 무대에서 인정받는 박지성의 눈에도 어린 후배들의 기량이 유럽에서도 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기성용은 대표팀에서 박지성이 전담하던 프리 키커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서서히 선배들의 영역을 빼앗으며 없어선 안 될 존재로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2009년 기성용에게 모아지는 기대는 이전보다 더 크다. 20세의 어린 선수가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짐일 수도 있지만 그는 도전을 즐기며 부담을 이겨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