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언론의 끈질긴 접촉을 계속 피해왔던 최필립 전 이사장을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설득한 끝에 동생 만립 씨의 오피스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고령의 최 전 이사장은 선친 이야기를 하다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는 옛날 사진을 들춰보면서 60년도 더 지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이 글에 실린 최능진의 일생은 아들이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인 만큼 다소 주관적인 내용이 포함됐을 수도 있다.
◆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1899년 태어난 일석(一石) 최능진은 형제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형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일석은 ‘아들 한 명은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7년 유학길에 올랐다. 고향 선배인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한 일석은 듀크 대학원을 졸업한 후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했다. 흥사단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그의 눈에는 인재양성을 주장한 안창호와 달리, 이승만은 사대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고 독립운동세력 내에서 파벌주의와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승만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계기다.
1929년에 귀국한 최능진은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32년에는 평양축구단을 창설, 경평축구를 정례화하는 등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엔 일제가 조작한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조만식, 조병옥 등과 함께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만식과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남지부를 만든 일석은 건준 치안부장을 맡아 해방정국의 치안유지와 일제 경찰의 무장해제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면서 건준이 해체되고 우익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서울로 내려온다.
서울에 온 일석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경찰 요직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해 이를 바로잡으려고 경찰에 입문한다. 미 군정청과 협력해 경찰관강습소를 창설해 초대 교장이 됐고, 이어 경무부 수사국장에 올랐다. 경무부에서 일석이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은 친일경찰 청산이었다.
하지만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등과 부딪쳤다. 조병옥은 “친일부역자가 모두 Pro-JAP(직업적 친일)은 아니었다. Pro-JOB(생계형 친일)도 있었다”는 논리로, 장택상은 “경찰은 기술직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친일경찰을 두둔했다. 일석은 조병옥과 함께 옥고를 치른 ‘절친’이었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조병옥에 의해 파면됐고, 이에 일석은 언론을 통해 조병옥 사퇴를 주장하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反이승만’ 선봉에 서다

사형당하기 직전인 1950년 무렵 최능진.
많은 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5·10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일석은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동대문갑구에 입후보하기로 한 것. 이승만을 떨어뜨려야 친일세력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민족세력이 중심이 된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북청년회와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지휘를 받는 경찰의 방해로 후보 추천서를 날치기당하는 등 후보 등록과정부터 시련을 겪었지만 일석은 극적으로 후보 등록을 했다. 당시 미군정이 일석을 도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선거가 시작되자 일석은 독립운동 경력, 친일경찰 처벌을 주장했던 사실 등이 부각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지지도는 이승만을 상회하거나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에서 작성한 ‘유권자 지지 성향 조사 결과 정보보고서’를 보면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기울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정적(政敵)’으로 부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