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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독립운동가 최능진) 이름 안 부끄럽게 살았다 박근혜 도운 건 비참하게 부친 잃은 동병상련”

최필립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 최초 고백

“아버지(독립운동가 최능진) 이름 안 부끄럽게 살았다 박근혜 도운 건 비참하게 부친 잃은 동병상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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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승만 계열의 방해공작으로 선거를 이틀 남겨두고 선거관리위원회가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 날인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후보 등록을 무효 처리한다. 만약 일석이 당시 선거에 출마했다면 한국현대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최능진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일석은 이승만 정권 출범 직후인 1948년 10월 1일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혐의는 이른바 ‘인민해방군 사건’이었다.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보태졌다. 이 사건은 나중에 김창룡 육군특무대장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일석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6·25가 터지고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면서 서대문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감옥을 나온 최능진은 피난을 가지 못한 민족주의 인사들과 함께 정전·평화운동을 벌였다.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이던 이승엽에게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유엔감시하의 평화통일’을 김일성에게 제안했다. 반공주의자였지만 동족 간 전쟁은 막자는 취지였다.

친일경찰 손에 利敵죄로 처형

김일성은 처음엔 좋다며 이를 촉구하는 대중집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갑자기 말을 바꿔 행사 명칭을 ‘이승만 타도! 김일성 만세!’로 하라고 요구했다. 일석은 이를 거부하고 잠적했다. 9월 28일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면서 조만식, 김규식, 조소앙 등 정치지도자 대부분이 북으로 끌려갔지만 미리 피신한 일석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이승만 정권에서 그를 공산당 부역자로 몰았다. 일석은 이승만, 이기붕, 조병옥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 최대한 돕겠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했지만 일축당했다.

일석은 내란혐의로 구속됐고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군사재판을 받았다. 정전(停戰)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된 사람은 일석 한 명뿐이었다. 당시 일석을 조사한 방첩대(CIC)는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군부 실세로 떠오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 일석은 친일경찰 청산을 주도했지만 그들의 공작정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친일 출신들의 용공조작에 희생된 것이다.

일석은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에서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총살된 지 9년 만인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그의 이름은 다시 햇빛을 보게 됐다.

◆ “내 아버지와 박근혜, 그리고 정수장학회”

“아버지(독립운동가 최능진) 이름 안 부끄럽게 살았다 박근혜 도운 건 비참하게 부친 잃은 동병상련”

광복 전후 최고의 주먹이었던 정복수 선수와 함께. 오른쪽 두 번째가 최능진.

최 전 이사장은 인터뷰를 하며 “나를 중심으로 한 기사는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과는 어떤 것도 연결 짓지 말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요구를 들어주기에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현대사의 주요 증언이었다.

“박 대통령 재임 기간 난 아무것도 안할 거야. 근처에도 안 갈 거야. 이 나이에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런데도 (언론과 야당은) 날 괴롭히더라고. 선거 끝난 후에도 전화하고 찾아오고, 모 방송국에선 아예 집 앞에 ENG카메라를 24시간 세워놓더라고. 내가 숨을 못 쉬겠어.”

▼ ‘신동아’를 통해 ‘이제 박근혜 대통령과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선언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 기사가 나가면 더 찾아와. 내가 박 대통령과 조금만 연결되면 걸고넘어지고….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하는 건 옳지 않아. 특히 한명숙이랑 박영숙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나는 거야.”

화제를 다시 일석에 대한 이야기로 돌렸다. 가족 앨범엔 최필립 형제가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선친이 사형당한 후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살림을 다 부수고 책이며 사진을 다 불태워버렸어. 그 바람에 사진이 거의 안 남아 있어.”

▼ 기억 속의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

“일제 때는 독립운동 하느라 중국에 계셨고, 독립 후에는 민족운동 하느라 바쁘셨지. 가끔 쉴 때면 우리를 유원지에 데리고 가셨던 기억이 나. 평소 일제 통치로 마비된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제대로 된 독립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런 분이셨기에 한민당을 친일세력 소굴로 봤고, 한민당을 이용한 이승만 박사를 마키아벨리스트로 규정해 반(反)한민당, 반(反)이승만 정치활동에 몸을 던지신 거지. 진정한 민족주의는 이념·사상·제도를 초월한다는 정치철학을 가지고 계셨어. 그래서 김구, 김규식 선생과 함께하셨던 거고.”

▼ 부친이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했을 때 회유도 많았을 텐데.

“당시 이승만 측이 문봉재(서북청년단장)를 통해 아버지를 많이 회유했어. 권총 찬 문봉재가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와 외무장관 시켜준다, 주미대사 시켜준다고 했지만 다 거절하셨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으신 거야.”

▼ 이승만 집권 후 정치탄압을 예상했을 텐데.

“미군정에서는 아버지에게 ‘화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우리도 계속 권유했지. 그때 여러 명이 미국으로 피했어. 하지만 아버지는 국민과 동지들을 두고 혼자만 피할 수 없다고 거절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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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열 기자 | honeypa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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