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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崔&朴 슈퍼게이트

어둠 속에서 진화한 3代 ‘권력 비즈니스’

최태민-최순실-장시호, 무일푼에서 ‘돈 천지’로

  • 소종섭 | 시사평론가 jongseop1@naver.com

어둠 속에서 진화한 3代 ‘권력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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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민 세금과 대기업 돈으로 蓄財
  • ● 4가지 닮은 점과 3가지 다른 점
  • ● 전두환 위로금 6억 원이 종잣돈?
  • ● 국회, 최태민·최순실 특별법 추진
최태민·최순실 부녀는 2대에 걸쳐 권력을 배경으로 재물을 축적했다. 최순실 씨의 조카 장시호(최순실의 언니인 최순득의 딸) 씨까지 치면 3대에 걸친 ‘권력 비즈니스’다. 이들은 국민 세금과 대기업 돈을 자신들의 부를 일구는 수단으로 써먹었다. ‘앉아서 헤엄치기’식 비즈니스 구조를 만들어 정권이 바뀌어도 돈을 챙길 수 있게끔 했다.

하늘 아래 비밀은 없다는 사실을, 권력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우리 역사상 이러한 가족형 권력 비즈니스는 없었다. ‘박근혜’라는 권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1974년까지만 해도 거의 무일푼 상태이던 최태민가(家)는 수천억 원대 부자가 됐다. 임선이 씨와 다섯 번째로 결혼한 최태민 목사는 임씨와의 사이에 최순영·최순득·최순실·최순천 등 4명의 딸을 뒀다. 이들 자매의 재산이 얼마인지, 어떻게 재산을 형성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추정만 무성하다.

최순실 씨는 밝혀진 것만 해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미승빌딩(지하 2층, 지상 7층)과 661㎡(200평) 규모의 대지, 강원도 평창 토지 등 수백억 원대 부동산을 갖고 있다. 독일에도 프랑크푸르트 인근 슈미텐 지역에 비덱 타우누스 호텔, 인근 지역의 주택 3채 등 30억 원대에 달하는 부동산을 보유했다. 이 중 5억 원대 주택 1채는 딸 정유라씨 소유다.





최순실 부동산만 수백억대

최씨의 언니 최순득 씨도 재산이 만만치 않다.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앞에 300억 원에 달하는 7층 빌딩, 강남구 도곡동에 50억 원대 고급 빌라 등을 소유했다. 동생 최순천 씨는 청담동, 반포동 등에 시가 1000억 원이 넘는 건물을 갖고 있다. 부동산 외에 주식, 예금, 현금이나 해외 재산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재산 축적 과정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 또한 실체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최씨는 “인테리어 가게,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다”라고 설명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최씨가 빌딩 등을 사들이기 시작한 1980년대 중후반에 그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최태민이 1970년대 대한구국선교단을 운영하면서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돈 가운데 빼돌린 돈이 오늘날 최씨 일가 재산의 바탕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최씨의 친인척들이 주로 이렇게 주장한다. 이복오빠 최재석 씨(최태민 넷째 부인의 아들)도 그중 한명이다. 그는 “아버지(최태민)의 생전 재산 목록을 파악하고 있으며, 지금 최씨 자매가 보유한 재산은 최순실 자매의 모친을 통해 상속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버지 수법 진화시킨 崔

최씨의 또 다른 이복오빠 조순제씨(최씨의 모친 임순이 씨가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2007년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 캠프 인사들에게 “(최태민 씨가 박근혜 영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재산도 없었다. (그런데 대한구국선교단 활동을 할 때는) 돈 천지였다. 돈이 많았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다 돈을 냈다. 내가 알기로는. 그때 들어온 돈은 최태민이 모두 관리했다”고 증언했다.

1977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백광현 중앙정보부 안전국장에게 지시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는 최태민이 박근혜 당시 영애를 만나기 직전인 1974년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74년 5월 동대문구 제기2동 박아무개 씨 집에 전세로 들어와 ‘태자마마’를 자칭했다. 1974년 8월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 선아무개 씨 소유 빌딩 2층(36평)으로 이전해 동일한 행위를 했다.’ 한마디로 1975년 3월 6일 박근혜 영애를 만나기 전에는 집도 없는 신세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영남대 땅을 판 돈이 종잣돈이 됐다고 주장한다. 1947년 영남대의 전신 대구대를 만든 ‘경주 최부자댁’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1980년부터 8년간 이사장과 이사직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교 운영에 필요한 돈을 만들고 그 돈의 대부분을 최태민에게 상납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넨 ‘위로금’ 6억 원이 종잣돈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박 대통령의 여동생 박근령 씨의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최순실을 비롯해 최태민 일가의 재산은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건넨 위로금 6억 원으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6억 원은 당시 돈으로 아파트 300채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일가의 재산 규모와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은 ‘권력 비즈니스’의 형태다. 최순실 씨는 아버지 최태민 목사의 수법을 배워 진화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조카 장시호 씨 또한 이모 최씨에게서 배운 듯 권력 비즈니스를 했다. 3대에 걸친 권력 비즈니스는 4가지가 닮았다.

우선 권력을 이용해 대기업들로부터 돈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그렇다. ‘최태민 보고서’는 ‘최태민은 기업인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이들로부터 1인당 2000만~5000만 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 원의 운영비를 내는 식으로 운영 자금을 마련했다. 운영위원은 6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

사이비종교 연구가로 유명하던 고(故)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은 월간 ‘현대종교’ 1988년 6월호에 이렇게 썼다.

“최태민은 ‘구국’은 구호뿐이고 사실은 축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일과였다.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서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근혜 양을 팔았다.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협조 부탁한다’고 하면 상대편에서 꼼짝 못했다. 최태민은 건설 관계 회사에도 전화를 걸거나 찾아갔다. 공사 계약을 따내는 일이나 납품 등을 알선하고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수법으로 축재를 했다.”

당시 인천에 최태민의 아들이 살았는데 아이들에게 과자나 사주라며 건넨 돈이 1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최순실은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을 내세워 돈을 끌어들였다. 삼성, 현대차 등 53개 기업으로부터 774억 원을 출연받았다. 명목은 ‘대기업들의 자발적 출연’이지만 내용은 ‘권력에 의한 강제 모금’에 가까웠다. 두 재단은 774억 원 중 154억 원만 기본재산으로 묶어두고 620억 원을 운영재산으로 분류해 언제든 돈을 빼 쓸 수 있게 했다. 기본 재산이 훨씬 많고 경비 목적의 운영 재산이 적은 것이 일반적인데 거꾸로 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최씨는 이 두 재단에서 벌일 각종 사업에 자신이 설립한 개인 회사나 측근들을 연결시켜 이권을 챙기려고 꾀했다. “더블루K(최씨 회사)에 연구 과제를 줘 성과물이 나오면 연구용역비를 지급하자”거나 “(승마 등) 비인기 종목 선수 육성프로그램을 만들어 독일로 연수를 보내자”는 식이었다. 최씨는 승마선수인 딸 정유라 씨에게 10억 원이 넘는 말 ‘비타나 V’를 사줬다. 최태민이 아들에게 과자값으로 100만 원을 줬던 것처럼.



막후에서 조종

스스로를 철저히 숨기는 것도 똑같다. 최태민 씨는 1970년대에는 언론에 기고도 하는 등 대중활동을 했으나 1980년대 들어서는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태민 보고서에는 ‘1978년 2월 22일 봉사단을 발족하여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 격인 최태민 씨가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돼 있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는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육영재단 시절 최태민 씨는 ‘어둠’ 속에 있었다.

최순실 씨도 아버지처럼 겉으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모금 과정에선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 등을 내세웠다. 설립 이후에는 이사장, 이사 등에 자신의 측근들을 포진시켰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막후에서 모든 것을 지휘했다. 이영도 박정희 숭모회 회장은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육영재단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최태민은) 재단 이사들을 전체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공식적인 직책도 없었는데 재단 일에 사사건건 개입했다. 정식 라인에 있지도 않으면서 인사 채용할 때 면접 비슷하게 입사자들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미르재단을 뒤에서 조종한 최순실과 같은 방법이다.”

최순실은 카드를 쓰지 않고 현금을 사용했으며 수시로 ‘최보정’ 등 가명을 써 자신을 은폐했다. 독일에서 주택을 구입할 때도 송금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신용보증장을 받아 현지에서 돈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정권이 역점을 두는 모토를 앞세워 이권을 취한 것도 부녀의 수법이 비슷하다. 최태민이 구국봉사단을 회원이 3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키우면서 내세운 것이 ‘승공(勝共)’이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반공이 제1의 국시’이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체제에 비판적이던 기독교계에 대항하기 위해 ‘승공’을 내세운 대한구국선교단을 정치적으로 용인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최태민은 기독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목회자들을 구국선교단에 가입시켜 십자군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까지 받게 했다. 사이비종교 연구가 탁명환 씨는 “권력의 언저리를 넘겨다보고 기생하려고 성직자들이 앞을 다투어 근혜 양에게 접근하기 위해 최씨 앞에서 설설 기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라고 썼다.

동아일보는 1975년 4월 23일자에 ‘구국선교단 선언문·반공으로 뭉쳐야’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대한구국선교단이 김일성의 중공 방문은 전쟁 도발을 위한 노골적인 행위이니 일부 정치인, 재야인사, 종교인, 학생들은 극한투쟁이나 정치 혼란만을 꾀할 것이 아니라 반공 기치 아래 뭉치자고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 선교단은 5월 10일 인천을 기점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궐기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는 내용이다. 최태민은 세력과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정권이 관심을 갖는 것을 모토로 내걸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카, 측근들도 돈 긁어모아

40년이 지나 승공(勝共)은 문화·체육으로 바뀌었다. 바뀐 시대 흐름을 반영해 문화를 전면에 내거는 쪽으로 진화했다. 한류 진흥, 비인기종목 스포츠 지원 등이다. 하지만 형태는 똑같았다. 최씨는 딸 정유라 씨의 승마 선수 활동을 돕기 위해 전방위로 움직였다. 삼성으로부터 35억 원을 지원받았다. 재단을 만들어 기업들로부터 돈을 끌어들인 것도 승마 등 비인기 스포츠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2014년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이 된 최순실의 측근 차은택 CF감독은 ‘문화계의 황태자’로 불리며 돈을 긁어모았다. 차씨가 소유한 아프리카픽처스와 차씨 측근 회사인 더플레이그라운드가 KT 광고 24건 중 11건을 제작했다. 63억 원 규모의 현대기아차 광고 물량도 쓸어담았다.

장시호 씨도 권력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6월 빙상 등의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동계스포츠영재센터를 설립했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2년 동안 6억 7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신생 법인이 권력의 힘을 업지 않고 이 정도 금액을 지원받을 수 있을까.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서 지원하는 영재로 선발하려고도 했다. 영재 선발에 이사 추천 인원이 있는데 아들을 이사 추천 인원으로 넣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재로 선정되면 선수 생활을 할 동안 기업에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요구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모 최순실 씨가 K스포츠재단 등을 통해 끌어들인 기업 돈으로 딸의 승마 선수 생활에 특혜를 주려 한 수법과 똑같다.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보통 사이비 종교는 2세가 성공하기 쉽지 않다. 돈은 있지만 권력이 없어서다. 그런데 최순실 씨 부녀는 돈과 권력을 모두 손에 쥐었다. 최씨는 아마 3세까지도 이런 구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개명을 자주 한 것도 닮았다. ‘최태민 보고서’는 최태민이 7개의 이름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선녀가 지었다는 아명 ‘최도원’부터 시작해 ‘최상훈’ ‘최봉수’, 1954년 받은 법명 ‘최퇴운’, 1971년 천주교 중림동 성당 영세 때 받은 ‘공해남’,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취임 때 개명한 최태민 등이다. 이 가운데 호적에 오른 이름은 최퇴운, 최태민 2개다. 최순실 씨도 최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딸 정유라 씨의 원래 이름은 정유연이다. 장시호는 지난해 2월 장유진에서 바뀐 이름이다.



‘親鞫’ 당하고도 살아남다

권력 비즈니스의 형태는 비슷했지만 다른 점도 있다. 최태민은 숱하게 감옥에 갈 뻔했지만 1994년 사망하기까지 실제로 가지는 않았다. 그는 경찰, 검찰, 중앙정보부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1977년 9월 12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는 이른바 ‘친국(親鞫)’을 당했다. 1980년에는 신군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다. 물론 그런 막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있었다. 반면 최순실 씨는 구속됐다. 딸 정유라, 조카 장시호 씨 등도 모두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최순실 일가의 권력 비즈니스가 온 국민의 공분을 사다 보니 정치권에서는 ‘최태민·최순실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있다.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 더불어민주당 민병두·안민석 의원,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 등이 추진하고 있다. 민간인이라도 국가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았다면 환수할 수 있게 하는 게 법안의 핵심이다. 축재 과정의 정당성을 조사하고, 환수할 게 있으면 환수하기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소급 적용토록 하고 공소시효도 없게 규정했다. 공직자나 공익재단, 교육재단, 종교 등 공적 기구를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면 조사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민병두 의원은 “과거 최씨 일가는 육영재단, 영남대 등 공익재단이나 교육재단에 부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해 막대한 규모의 축재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빨리 특별법을 만들어 부정한 축재가 있는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국회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다.

최태민은 22년 전인 1994년 사망했다. 그럼에도 딸 최순실을 통해 최근까지 국정에 위력을 발휘했다. 이제 끝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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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섭 | 시사평론가 jongseop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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