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눠준 시험지는 20개의 객관식 문제로 채워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문제는 책에 적힌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베낀 문항들과 글자 한두 자만 교묘하게 바꾼 문항들이었다.
수업에 대한 이해 여부를 확인하는 시험이라기보다는, 책에 적힌 내용과의 비교를 통한 ‘오·탈자 찾기’에 가까웠다. 시험을 끝내고 나온 김모(24) 씨는 “책에 정답이 적혀 있어 틀릴 수가 없다”며 “교재 구입비 6만5000원으로 A+ 학점을 사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이 구입해야 할 교재는 두 권이다. 모두 수업담당 교수의 저서다. 교양과목의 교재 구입비로는 작지 않은 금액이지만, 시험문제가 책에서 그대로 나오는 만큼 학생들로선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모(23) 씨는 “교수가 수업시간에 강의한 내용으로 공부해보려 했으나 시험 유형에 관한 정보를 듣고는 교재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험엔 수업시간엔 언급되지 않고 책에만 있는 내용이 다수 출제됐다. 교재를 사지 않은 채 강의자료 위주로 시험을 준비한 일부 학생은 당황했다고 한다.
최근 대학가에 교수의 저서를 학생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개설된 듯한 강의가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수업들은 오픈 북 시험이나 과제물에 책 구매 영수증을 부착하기 같은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교재 구입을 강권한다.
과제물에 ‘영수증’ 부착
‘학생들에게 (공부에 필요한) 책을 사도록 하는 게 뭐가 잘못됐는가?’라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수업 내용과 연관 없이 책에만 등장하는 내용을 시험에 출제하거나 책 구매 영수증을 부착하지 않은 과제물에 대해 점수를 낮게 주는 것은 문제 소지가 충분하다.D대학교 안보 관련 과목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오픈 북 방식으로 치러졌다. 수강생 이모(23) 씨는 “수업을 한 번도 안 듣고 책만 한 번 읽어보면 거의 다 맞힐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험공부 부담이 적어 좋지만 머리에 남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내 J대학에 개설된 한자 관련 과목은 인터넷으로 강의가 진행되며 400명에 달하는 학생이 수강한다. 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면서 배운 한자를 10번씩 반복해 쓰는 과제를 해야 한다. 납득하기 힘든 것은 이 과제를 수업 교재의 부록에 작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서모(26) 씨는 “한자를 반복해서 쓰는 건 다른 종이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혀를 찼다.
“안 사면 F” 으름장
서울시내 또 다른 K대학에 개설된 증권 관련 과목도 과제 제출을 빌미로 학생들에게 교수의 저서를 판매한다.수업을 진행하는 교수의 저서를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는 과제가 있는데, 이 과제는 성적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정모(25) 씨는 “수업 내용과 전혀 연관이 없는 책을 단체로 구매해 독후감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수업에서 판매되는 책인 ‘○○엔 △△△이 없다’는 젊은이의 성공담을 담은 일종의 자기계발서다. 과목담당 교수가 직접 썼다는 사실 말고는 증권 관련 과목과 접점을 찾기 어렵다.
교재가 판매되는 방식 또한 문제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독후감을 작성할 수도 있지만, 이 수업은 그런 가능성을 차단한다. 수업 초기에 학생 중 한 명이 대표로 뽑혀 학생들에게서 돈을 걷은 뒤 교재를 단체로 구매해 배포한다. 정씨는 “개인적으로 책을 구해 독후감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단체 구매를 하는 것은 책을 강매하려는 의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교수는 교재 구매를 강요하면서 성적으로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G대학 컴퓨터 관련 전공과목을 담당하는 모 교수는 학생들에게 교재를 구매하지 않으면 F학점을 부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고는 한 학생을 뽑아 수강생 전원에게서 돈을 걷고 책을 단체 구매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구매한 교재는 전공수업 교재라기에는 터무니없이 조잡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 교재를 수업에 가져오지 않으면 F를 준다고 했다. 학생들은 교재를 수업에 지참하지만, 정작 수업 내용은 주로 교수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해당 강의를 수강한 윤모(24) 씨는 “교재가 없으면 무조건 F를 준다는 말에 교재를 안 살 수가 없었다”며 “하지만 정작 수업 시간에는 교재를 펼쳐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이러한 수업 방식에 불만을 가진 한 학생이 교육청에 제보했지만, 돌아온 것은 민원을 넣은 학생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교수의 분노뿐이었다. 김모(24) 씨는 “교재와 수업 내용 사이에 연관이 없다. 학점을 무기로 교재를 강매한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 교수는 교재를 구매하지 않은 학생을 출석부에 체크하면서 교재를 자주 구매하라고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해당 교수가 담당하는 세 과목 모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몇몇 학생은 이러한 강의들을 오히려 선호한다. 취직을 위해 학점 따기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요즘, (교재만 사면) 편하게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이 있다는 건 다행이라는 얘기다. 이모(21) 씨는 미술사 관련 수업을 수강했다. 중간고사 때까지는 수업도 빠짐없이 참석해 열심히 필기했다.
그러나 중간고사 이후 이씨의 태도는 달라졌다. 오픈 북으로 치러진 중간고사는 수업 내용과는 별개로 교수의 책만 있으면 문제를 모두 풀 수 있었다. 이씨는 출석 체크도 따로 하지 않는 이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됐다. 이후 모든 수업에 불참했지만 역시 오픈 북으로 치러진 기말고사도 잘 볼 수 있었다. 이씨는 A+를 받았다. 그는 “편하게 학점을 딸 수 있어 좋았다. 교재를 팔려는 교수와 좋은 학점을 받으려는 학생들의 필요가 서로를 충족시켰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로 實利만 챙기면 OK?
요즘 우리 대학들은 학점과 스펙을 쌓는 취업 양성소 같은 형태로 변하고 있다. 이 와중에 몇몇 수업은 최소한의 학문 탐구 활동마저 내팽개치고 학생과 교수의 실리만을 위해 운영된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속한 대학교의 이름을 걸고 개설한 강의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올바른지 아닌지는 해당 교수들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수천만 원의 등록금과 4년이라는 시간을 바치는 대학생활 속에서 이런 수업들이 진정 자신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한 학생들이 곱씹어봐야 할 일이다.※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과목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