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親鞫’이 崔-박근혜 관계 인정한 셈”(김재규)
- “朴, 자식들 싸고돌며 이기심, 집권욕 드러내”(김재규)
- “邪敎의 홀림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 ‘공개된 법정에서 밝힐 수 없는 이야기’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태 재판에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76) 변호사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접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안 변호사는 10·26 직후 김재규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 선고 때까지 줄곧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김재규는 안 변호사에게 10·26의 직접 동기는 유신 정권과 긴급조치 체제 종식, 자유민주주의 회복이고, 간접 동기는 대통령의 가족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무서운 업보
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한 최태민 씨와 박근혜 양의 문제, 박지만 군의 비행 문제가 심각했고, 그것을 수차례 보고했으나 묵살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항소이유 보충서에 ‘자녀들의 문제를 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강한 이기심과 집권욕을 읽었고, 박 대통령이 국민을 우매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썼다.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과 얽힌 자신의 문제가 하나의 계기가 돼 아버지를 잃었고, 그때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37년 뒤 최태민의 딸 최순실 씨로 인해 자신의 대통령직 하야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안동일 변호사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며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 외에도 KAL기 폭파범 김현희,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야생초편지’ 주인공 황대권 씨 등의 변호를 맡았으며,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는 국회 탄핵심판 수행대리인단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 요즘 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생각이 많이 났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반인도 사교(邪敎)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고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근혜 대통령이 40년에 걸쳐 최씨 일가에게 당한 것을 보면 정말 믿기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10·26 직후 김재규 부장이 제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이비 종교인으로 조사된 최태민과 큰 영애(박근혜)의 관계를 단절시키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대통령이 친국(親鞫)까지 해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해주는 결과가 초래됐다’고 개탄했습니다. 만약 그때 두 사람 관계가 끊어졌다면 지금의 최순실 사태는 없지 않았을까요. 업보란 게 이렇게도 무서운 것인지….”
邪敎에 빠진 게 아니라면…
▼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은 사교에 빠지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그 말을 믿고 싶고,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그러나 사교에 빠지지 않았다면 40년 악연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큰 영애는 열 살도 안 돼 청와대에 들어가 1979년 27세 때 나왔습니다. 그때껏 박정희 독재정권의 구중궁궐에서 공주처럼 살았지요.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여의었을 때가 22세, 최태민을 만난 1975년엔 23세에 불과했습니다.
최태민은 1912년생으로 큰 영애보다 40년 연상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을 뒤섞어 만든 영세교 교리인 영혼 합일법을 내세우고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습니다. 안수기도로 난치병 환자를 치유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75년 2월 말경 큰 영애에게 3차례 서신을 보냈고, 큰 영애가 3월 초에 청와대로 그를 불러 접견했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 최씨를 만났을 때는 어머니를 총탄에 잃고 외로운 처지에서 그의 위로와 격려가 큰 힘이 됐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형성됐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영애의 영(靈)이 최씨에게 함몰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후 최씨는 영애의 후견인 노릇을 했고, 영애는 김재규 부장이 최씨의 비리와 비행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도 최씨를 옹호하는 관계가 됐습니다.
최순실 씨는 구국봉사단 대학생 회장을 맡으면서 영애와 밀착했습니다. 영애가 청와대를 떠난 후에도 관계가 유지됐죠. 1980년대 후반 육영재단에서도 최태민과 최순실이 관여하며 물의를 일으킵니다. 박근혜 대선 후보 시절에 이것이 문제가 되자 박 후보는 음해이며 모략이라고 그들을 적극 감쌌습니다.
그 무렵 언론 인터뷰에서 박 후보가 “친구는 누구이고, 얼마나 있으며, 자주 만나느냐”는 물음에 “친구 없습니다”라고 답한 것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중·고교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친구가 없다면 누구를 만나고, 중요한 일을 누구와 상의할까요. 이런 사정을 종합해보면 박 대통령이 그동안 사교(邪敎)의 홀림에 빠져 있었다고 볼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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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도 조사하나”
“1978년 초 구국여성봉사단이 사단법인으로 발족하면서 박근혜 양이 총재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전횡을 했다고 해요. 박정희 대통령은 딸에게 영부인으로서 사회활동의 폭을 넓혀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머니를 잃고 외로운 처지인 큰 영애의 말에 어찌할 수 없었던 건지, 혹은 박 대통령도 최태민에게 홀렸던 건지…. 당시 상황을 짐작게 할 만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유신 말기에 장관을 지낸 분이 제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박 대통령이 ‘나는 근혜를 맘대로 못해, 임자들이 어떻게 해볼 수 없어?’라며 하소연하더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딸바보’였던 거지요.”
▼ 최태민 씨가 1974년 박근혜 당시 영애에게 보낸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뭔가요.
“편지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내용에 대해선 김재규 부장 등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최태민이 자신의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근혜를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근혜가 위대한 사람이 돼 이 나라를 이끌도록 도와주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 김재규 부장의 당시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백광현 전 내무부 장관은 1970년대 말 서울지검 검사 시절 중앙정보부에 파견돼 최태민 수사를 맡았는데, 2007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재규 씨가 항소이유서에서 최태민 씨를 언급했다는데, 김씨는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다. 최태민 문제는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김 부장 본인이 그게 간접적인 동기라며 연관성을 얘기했으니 서로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10·26 직전에는 아무리 중요한 정책 사안을 건의해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통령은 여성편력이 심해져 말하자면 황음(荒淫) 상태에 빠져 있고, 영부인 역할을 하는 이도 사이비 교주에게 빠져 있고…. 그런 감성적인 것들이 쌓여 하나의 동기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김 부장이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언급한 대통령 아들 박지만 씨의 ‘비행’은 어떤 내용입니까.
“육사 생도인 박군이 무단 외출해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있어 김 부장이 박군을 전학이나 유학을 보내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한 적도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대통령에게서 ‘중정에서는 이런 것도 조사하느냐’라는 질책을 받았다고 했어요.”
10·26과 최순실
“그가 1심 재판 도중 사선변호인단의 변호를 거부하는 바람에 갑자기 제가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됐습니다. 사실 처음엔 저도 그를 대통령을 시해한 패륜아요, 유신 정권의 앞잡이로 여겼기에 과연 변론할 가치가 있는 인물일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선임되던 날 그의 진술을 듣고 진정성과 진솔함을 느꼈습니다. 유신을 종식하고, 국민의 큰 희생을 막으며, 약화된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실추된 국격을 되살려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했다는 10·26의 동기를 설명할 때 겸손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 10·26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저의 책 제목이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인 것처럼 ‘아직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후퇴시키는 정권이나 세력은 10·26과 같은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절차와 시스템입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무너져 내린 작금의 위중하고 엄혹한 국면에서 제2의 4·19, 제2의 6월항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어요. 37년 전 국정을 농단한 차지철은 그래도 시스템 내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을 했지만, 최순실은 시스템 밖의 인물입니다. 저부터 광화문 시위 대열에 동참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 지금의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자유민주적, 법적 절차에 따라야 합니다. 현재와 같은 위중한 시기에 정치권이 차기 대선의 표 계산이나 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거국내각’이니, ‘책임총리’니, ‘2선 후퇴’니, ‘하야’ ‘정권 퇴진’이니 하는 말만 앞세울 게 아니라 법적 절차를 밟아가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헌법에 따르면 거국내각이나 책임총리도 대통령의 명(또는 위임)이 없는 한 행정 각부를 통할할 수 없고, 2선 후퇴나 하야 또는 정권 퇴진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 없는 한 불가능합니다. 정치적 타협이 이뤄진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어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대통령과 총리의 의견이 충돌하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겁니다.”
“개헌 논의 본격화해야”
▼ 가장 시급한 조치는 뭘까요.“무엇보다 검찰이든 특검이든 국정조사이든 간에 사실관계를 밝히는 과정이 우선돼야 합니다. 대통령이 스스로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시급하다고 봅니다. 대통령은 재임 중 형사소추를 받지 않지만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모든 것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국정농단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책임이 밝혀지면 탄핵 절차를 밟아 물러나게 하든지, 임기를 마저 채우게 하든지는 헌법재판소가 결정할 일입니다.
또한 검찰 수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관계-박 대통령이 스스로 자백한 부분을 포함해-를 이유로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발의해 의결되면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헌재 결정 시까지 정지됩니다.
아무리 대통령 지지율이 5%밖에 안 되고, 수십만 명의 퇴진 요구 시위가 벌어진다고 해도 국민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대통령에게 무작정 2선 후퇴나 하야를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합니다. 헌정사상 4·19 때처럼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한 경우도 있고, 10·26처럼 사고로 궐위된 경우도 있지만 이후 5·16 군사정변, 12·12 쿠데타 등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국정 혼란을 종식하기 위해 대통령이 책임총리 또는 거국내각-저는 ‘구국내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을 받아들이고, 외교와 안보를 제외한 국정의 대부분을 총리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개헌 논의를 본격화해 미래지향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끽긴(喫緊)한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꼼수로 개헌 논의를 제안했다손 치더라도 30년 묵은 1987년 헌법은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관련 기록과 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부분은 인터뷰이의 기억과 전문(傳聞)에 의존한 발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