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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崔·朴의 그림자

“지금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차 자료, 진짜는 따로 있을 것”

Interview |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1호 이윤택

  • 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지금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차 자료, 진짜는 따로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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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의 아니게 블랙리스트 존재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린 사이렌이 됐다.

“저는 제가 이 정부의 검열 대상이라는 말을 2015년 말까지도 믿지 않았어요. 다들 기억 못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문화재청이 주관한 (2013년 5월) 숭례문 재개관 축하 공연 연출을 제가 맡았거든요. 그때 요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소문 난 그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만났는데 ‘내가 문재인 지지연설을 한 사람인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잠깐 생각하곤 ‘괜찮지 않겠어요’라며 넘어가더라고요. 모철민 교육문화수석을 만났을 때도 비슷했어요. 그때도 ‘문화융성’이란 표현을 넣어달라는 주문이 있긴 했는데 ‘촌스럽다’고 내가 고사하고 대신 ‘비나리 상생’을 내세웠어요. 당시 유진룡 장관이 ‘반대파까지 포용하자’고 한 말을 박 대통령이 수용해서였는지 별문제 없이 성대하게 공연을 치렀죠.”

▼ 언제 이상 신호를 감지했나.

“유진룡 장관에서 김종덕 장관으로 교체된 (2014년 8월) 이후부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느꼈어요. 김종덕 장관이 부임했을 때 저는 문체부 서울사무소와 같은 건물을 쓰는 국립극단의 작품을 연습 중이었는데 찾아와 인사 한 번 없이 쌩하니 지나치더라고요. 유 장관 시절엔 제가 연출한 국립극단의 ‘길 떠나는 가족’을 명동극장까지 와서 보고 ‘선배님’ 소리까지 해가며 격려하던 분위기가 싹 바뀐 거죠. 그 몇 개월 전부터 국립극단의 손진책 예술감독이 박근형의 ‘개구리’로 찍혀서 쫓겨나듯 물러나고 후임으로 거론되던 연출가 최용훈, 김광보가 줄줄이 낙마하는 걸 보면서 살짝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김종덕 장관이 온 뒤 국공립 단체장 인사가 줄줄이 적체돼 공석이 되거나 자꾸 엉뚱한 사람들을 앉히는 것을 보면서 ‘아하 문화 마인드를 가진 사령탑이 무너졌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어요. 그리고 (2013년에 국립극단 기획공연으로 선보여 반응이 뜨거웠던) ‘혜경궁 홍씨’를 2015년 말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국립극장 쪽에서 ‘안 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예요. 문체부에 알아보니 문화예술과에선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면서도 ‘문화정책과에서 청와대와 조율하는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국공립 공연 일체를 포기한 거죠. 2016년엔 명동극장 기획공연으로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초청받은 ‘길 떠나는 가족’이 여비 지원도 못 받아 가는 데만 48시간 걸리는 저가항공을, 그것도 뿔뿔이 나눠 타고 가야 하는 촌극까지 벌어졌고요.”

▼ 2016년 지원금 심사에서 최종 탈락한 게 결정타가 된 건가.



“그때까지도 ‘설마’했어요. 당시 심사위원 중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번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들을 다 뺐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그다음해(2016년) 다시 다른 지원금 신청을 넣었는데 바로 떨어뜨더라고요. 그걸 보고 비로소 ‘아하 내가 제대로 걸렸구나’ 했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은 늙은이들뿐 아니라 박근형, 이성렬, 김재엽, 윤한솔까지 그나마 연극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떨어뜨렸더라고요. 그렇게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은 다 줄여놓고선 난데없이 콘텐츠니 융합이니 하는 분야 지원금만 늘리는 것을 보고 ‘개판에는 깽판으로 맞서겠다’고 나선 게 예언 비슷한 게 된 겁니다. 10월 중순경엔 CBS 노컷뉴스와 갑작스럽게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누군가가 문화를 통제하려 하고 검열하려 한다. 이런 행위는 반드시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그 직후 바로 최순실 사태가 터지더군요.”



광장의 촛불은 대변혁의 물결

“지금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차 자료, 진짜는 따로 있을 것”

창덕궁과 담벼락을 맞댄 막다른 골목에 세워진 ‘30스튜디오’ 앞의 이윤택 씨. [조영철 기자]

▼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검열 주체가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천박한 사람들이란 점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저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검열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70~80년대부터 연극을 한 사람이에요. 그때의 검에는 물리적 폭력이 수반됐어요. 당시 검열관은 계엄사 보도처 소령, 중령이었는데 항변이라도 할라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무자비한 폭력을 퍼부었어요. 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확실히 무장된 소신 있는 우파였으니까요. 반면 이 정권에서 검열한답시고 농간 부린 사람들은 우파적 신념 체계조차 없는 천박한 세속주의자에 불과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군인들이 탱크 몰고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그거였는데 광장의 촛불이 수백만 개씩 켜지는 걸 지켜보면서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본질적 대변혁의 물결이 밀어닥쳤음을 깨달았습니다.”

▼ 본질적 대변혁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촛불의 광장은 (1960년 4·19 직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광장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최인훈의 광장은 지식인들의 수직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광장이었습니다. 반면 촛불의 광장은 정치가 일상이 되고 혁명이 축제가 된 수평적 광장을 열어젖혔습니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인 이명준이 회색인으로서 결국 제3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이건 남이건 그 일상이 스며든 광장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4·19의 민주화 논리가 됐건 5·16의 성장 논리가 됐건 둘 다 일상의 힘과 기반을 갖추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화 논리가 ‘배운 자’들의 제한된 이념이라면 성장 논리는 ‘가진 자’들을 위한 논리였습니다. 촛불의 광장은 그 둘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상인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엄청난 변화가 이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거예요.”

▼ 1987년 이후가 아니라 1960년 이후가 맞는가.

“1987년의 민주화는 실패한 민주화입니다. 권위주의 시대를 종식시키긴 했지만 결국 ‘3당 합당’이란 야합으로 귀결됐기 때문입니다. 여야의 구별이 무너진 통합의 시대라 포장하지만 집권세력은 권위를 상실했고 재야세력은 신념이 무너졌습니다. 권위는 박정희를 부를 때 따라붙은 ‘각하’란 호칭과 결부돼 있었고 신념은 김대중을 부를 때 따라붙은 ‘선생’이란 호칭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각하와 선생이란 호칭이 사라진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중심과 가치체계가 사라진 ‘야합의 시대’란 게 제 소신입니다. 촛불의 광장을 채운 소시민들은 스스로의 가치와 신념을 내면화해낸 행동하는 주체로서 민주화와 산업화의 논리에 갇히길 거부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화는 30년짜리가 아니라 50년짜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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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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