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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崔·朴의 그림자

“박근혜 정부가 사찰, 쥐도 새도 모르게 나도 당할 수 있다”

이영도 前 숭모회 회장

  • 이혜민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박근혜 정부가 사찰, 쥐도 새도 모르게 나도 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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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을 계기로 집중 조명받는 인물이 있다.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당시 박정희대통령육영수여사숭모회(崇慕會, 이하 숭모회) 회장을 지낸 이영도(64) 씨다. 국정농단의 배후로 최태민 일가가 지목되면서 그는 기자들에게 주요 취재원이 됐다. 그의 실명이 거론된 최근 언론 보도만 50건이 넘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1월 11일 이 전 회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최씨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 조사했다.

‘최태민의 바이블’이라고 자칭하는 이 전 회장을 지난해 11월부터 서너 차례 만났다. 이 인터뷰는 12월 6일 경기 양평 부근에서 9시간가량 진행됐다. 이 전 회장은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한숨도 내쉬었다. 그는 최태민 목사를 최태민, 박근혜 대통령을 박근혜,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을 박근령이라고 불렀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겠나”

▼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나.

“막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서 아쉽다.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는 국민들을 보면 눈물 날 정도로 감동스럽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민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 속죄해야 할 정치인들이 거리로 나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걸 보면 참 한심하다.”



▼ 여러 번 기회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비주의자다. 긴장된 모습, 절제된 언어, 알 듯 모를 듯한 표정…. 박근혜에게 이런 걸 연출시킨 사람이 바로 최태민이다. 그렇다 보니 박근혜의 능력을 검증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국민은 박근혜에게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면모를 모두 기대했을 거다. 그러니 지금 더 많이 혼란스럽겠지.”

▼ 국민이 기대할 만하지 않나. 외모만 봐도 육 여사와 박근혜 대통령이 너무 닮았다.

“화산이 폭발하듯이 최태민 일가의 악행이 드러날 것이다. 박근혜가 왜 아버지에게 맞섰을까. 부녀 갈등은 노태우 대통령 회고록, 김계원 비서실장 회고록에도 나온다. 갈등의 이유가 단지 최태민뿐일까. 아직은 공개하기 곤란하지만 다른 큰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춘상(박근혜 대통령 전 보좌관으로 2012년 사망)이 2012년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날 찾아왔더라. 난 ‘당신이 대통령 되는 걸 원치 않는다. 당신은 불행을 자초한다. 동생들에게 져줘도 괜찮다’는 말을 박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이춘상은 ‘박 대표가 어렵게 대권후보가 됐다’고 말하곤 가더라. 겸사겸사해서 왔겠지. 이후 난 박에 대한 비판을 멈췄다. 내가 뭐 안중근 의사도 아니고…. 난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겠나.”



“최태민 박 회장을 도와드리라”

이씨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을 지지했다. 특히 기자회견을 열고 “최 목사가 박 전 대표 일가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국정을 농단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은 최 목사의 행적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 이유가 뭐였나.

“박근혜가 대통령 예비후보 경선 청문회 방송에서 숭모회를 이상한 단체로 몰아갔다. 그래서 내가 기자회견을 열어 그 의견을 반박했다. 박근혜 쪽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더라. 나를 건드리면 일이 커진다고 여겼을 거다. 난 이기는 싸움만 한다.”

▼ 자택에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사진이 걸려 있던데,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하나.

“1967년경 부산 연합철강(연합철강공업주식회사 냉간압연강판 공장) 준공식이 열렸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한 박 대통령을 멀찍이서 뵈었다. 그 회사가 들어선 뒤 마을에 굶어죽는 사람이 준 걸 보곤 대통령을 존경하게 됐다. 1979년 10·26 때 전우신문(현 국방일보)에 박 대통령 추모글을 기고했을 정도다. 그전에 우리 마을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를 아나. 먹을 게 없어서 나무껍질을 먹으면 똥이 굵게 나와 실제로 그렇게 된다. 굶지 않은 사람은 이해 못할 거다.”

▼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제대(육군 중사)해 군 사격장 개발 사업을 벌였는데, 운영 7년 만에 부도났다. 부도 난 이듬해(1988년) 박정희전대통령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그때 박근혜 회장은 근화보(1989년 창간된 기념사업회 월간지)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다. 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글쓰기를 좋아해 글을 써서 보냈는데, 근화보에 그 글이 몇 번 실렸다. 그랬더니 1989년 박정희 대통령 10주기 추도식 자문위원 자격을 주더라. 추도식에서 박근혜를 처음 봤다. 그해 기념사업회에서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박근혜를 만날 줄 알았는데, 한정숙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최태민을 먼저 소개하더라. 당시 한 잡지에 자신에 대한 비판 기사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지 최태민은 4시간 동안 자기 인생만 얘기하며 억울해했다. 내게는 질문을 하나도 안 했다. 끝날 무렵 ‘박 회장을 자주 만나 도와드리세요’라고만 하더라.”

▼ 박근혜 회장과는 언제 만났나.

“그날 못 보고 보름 후 만나 1시간가량 대화했다. 해맑은 박근혜가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으며 ‘글을 잘 봤다. 정말 뵙고 싶었다’며 반기더라. 자리에는 최태민 사람 2명이 배석했다.”



‘비둘기를 위한 파티’

▼ 언제부터 최태민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졌나.

“고인이 된 한정숙 사무국장, 모 배화여전 교수가 강원도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와 ‘문제를 바로잡아달라’고 하더라. ‘모든 게 쇼였다’고 했다. 근화봉사단(1989년 박근혜 기념사업회 회장이 새마을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재조직) 단원도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으로 채운 것이라고 했다. 최태민의 뒷돈, 여자, 어린이회관 문제까지 말하더라.”

▼ 숭모회는 육영재단 분규 때 박근령 씨 편에 섰다. 박근령 씨는 언제 처음 만났나.

“1990년 9월 7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다. 박근령이 ‘우리와 함께 언니를 구출하고, 최태민을 몰아내자’고 했다. 일단 해보자 싶었다.”

▼ 본인 먹고살기도 바빴을 텐데 왜 남의 일에 관여했나.

“박정희 대통령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내가 해본다는 데 매력을 느꼈다. 관동신문(강원도 지역신문)에 ‘목련꽃 앞에서’ 시를 기고하는 것으로 선전포고를 대신했다. 동생들을 품으라는 취지였다. 그 신문을 기념사업회에 전달했다. 결국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박근령에게 넘겼고, 육영재단은 ‘최태민 아방궁’에서 벗어났다.”

▼ 작전이 성공한 건가.

“그렇다. 1990년 10월 28일 ‘비둘기(평화)를 위한 파티’(작전명)가 통했다. 어린이회관 앞에서 불법집회를 했고,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사전에 라디오방송에 ‘어린이회관에 오는 어린이들에게 상품을 주겠다’고 광고했는데 정말 어린이 500여 명이 왔더라. 아이들에게 ‘어린이회관은 어린이 품으로’라는 글자가 쓰인 티셔츠를 입혔다. 애들은 어린이회관으로 들어갔고 상품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갔다(웃음). 이날 숭모회(발기인 26명)를 만들었고, 내가 회장을 맡았다. 숭모회를 움직이는 사람은 사실상 나 하나였다. 어떤 언론도 이날의 궐기대회에 대해 쓰지 않았다. 최태민은 ‘근령이가 사회적으로 뭘 했다고 언니를 괴롭히나. 숭모회는 이상한 단체다’라고 언론플레이를 했다. 우리는 최태민 규탄에 동의한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 민정으로 보냈다. 이때 박근혜에게 만남을 제안하니까 오케이 하더라.”



박근령의 26분

박근혜 정부 홍보기획비서관 천영식 씨가 문화일보 기자 시절 쓴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북포스, 2005)에는 관련 일화가 나온다. 필자는 “박근혜가 혼자 외로이 이런 사업을 할 때 ‘흑기사’처럼 나타나 인력과 자금 문제 등 현안을 맡아서 해결해준 게 최태민”이라며 숭모회를 이렇게 평가했다.





 최태민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숭모회라는 단체가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을 주장할 때 최태민의 전횡이 문제로 떠올랐다. 최태민의 실체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가 가장 많이 드러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숭모회 측이 발행한 유인물에 따르면 최태민의 이름은 7개이고, 자유당 시절 경기도 경찰국 사찰주임을 지냈으며, 유가증권 위조로 경찰에 기소된 적이 있고, 몸에 흰 피가 흐르는 영험한 목사로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또 숭모회가 주장했던 최태민의 전횡이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최태민이 어린이회관 구내에 있는 근화교회 목사로 일하면서 실권을 휘둘러왔고, 눈에 거슬리면 직원들을 해고했다.’ ‘폐간된 어깨동무, 꿈나라 등의 편집에 자신의 딸이 관여하게 했고, 육영이 목적인 어린이회관을 수익사업체로 전환시키려 했다.’ ‘87년 어린이회관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하려고 했을 때 뒤에서 공작을 꾸며 이를 저지했다.’ ‘최씨의 OK 결재가 나야 박근혜 이사장에게 결재가 올라간다’ ‘근화봉사단을 발족시킬 때 조직에 깊숙이 개입,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 계획 등 각종 사업을 배후 조종해왔다.’ (…) 이 같은 비리 혐의는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고 부풀려져 유포됐다.
-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2005) 171쪽



▼ 숭모회를 만든 뒤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은 언제 만났나.

“궐기대회 3일 뒤인 11월 1일 만났다. ‘내가 기고한 시를 봤느냐, 시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으니 ‘모두 안다’더라.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근령이에게 재단 이사장 자리를 주겠다’고 하더라. 11월 3일 박근혜를 또 만났다. 내가 배석자들을 다 내보내고 독대를 했지만 어디에선가 녹음되고 있을지 몰라 박근혜에게 몰래 쪽지를 건넸다. 최종 목적은 박근혜 구출이었으니까. 우리는 쪽지에 쓰인 대로 구출을 시도했는데 박근혜가 응답하지 않았다. 이후 박근령 비판 기사가 나왔고, 11월 9일 우리는 그 내용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부터 언론의 흐름이 ‘최태민 비판’으로 가더라.”

▼ 당시 박근령, 박지만 남매는 어떤 역할을 했나.

“두 사람 모두 힘이 없었다. 물론, 숭모회도 허상이었다. 하지만 명분이 있었다. 박근혜는 언론에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밝혔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 작전은 어떻게 짰나.

“박근혜와 박근령이 같이 나오는 사진을 찍고 ‘육영재단 이사장 이취임식’이라고 언론에 내면 그만이었다. 14일 밤 박근령에게 ‘언니에게 스피커폰 통화를 하라’고 시켰다. 박근령이 ‘재단 이사장 이취임식 하자’고 하니까 박근혜가 앙칼지게 ‘알았어! 와!’ 하더라. 박근령이 ‘사람들이 나를 못 들어가게 할 거다’ 하자 ‘같이 들어가줄게! (오전) 9시 50분까지 정문으로 와!’ 하더라. 난 어린이회관 직원 26명과 밤을 새우며 작전모의를 했다.”



“가장 비련한 여인은 박근혜”

▼ 9시 50분에 두 영애가 만났나.

“아니다. 박근혜가 9시 20분 어린이회관으로 와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박근령은 9시 5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박근령이 지레 겁먹을까봐 작전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는데,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박근령이 몇 시에 왔는 줄 아나. 10시 16분에 왔다. 약속보다 자그마치 26분 늦게. 마침내 두 사람의 이취임식 사진을 찍었다. 박근령은 울면서 나갔고 난 그날 10시 30분에 떠났다. 사람들이 내가 사욕을 위해 일을 벌인 줄 아니까 이곳에 머무르면 창피해지겠더라. 이 일로 돈 한 푼 안 받았다. 그렇다고 손해를 본 건 아니다. 태어나서 내 머리를 온전히 다 써볼 기회가 흔한가.”

▼ 박근령 씨는 왜 늦게 왔나.

“미용실에서 머리 했단다, 머리.”

▼ 박근령 씨와는 언제 다시 만났나.

“1991년 11월 중순 내 생일쯤 만났다. 시계를 사가지고 왔더라. 이듬해 박근령 쪽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임기를 1년 채 안 남기고 취임한 박근령은 연임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사진(전체 8명) 대부분이 박근혜 편이었다. 내가 이사 6명의 사임서를 받아냄으로써 박근령 이사장이 장기 집권할 토양을 만들어줬다.”

▼ 박근령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은 건 없나.

“그때 난 신용불량자로 봉급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박근령이 몇 번 책 안에 100만~150만 원을 끼워서 줬다. 난 나중에 그걸 100배로 갚았다. 박근령과 함께 일한 기간은 2년이 채 안 된다. 1994년 6월 30일 육영재단을 떠났다. 육영재단 일을 도울 때 국토순례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국토순례는 어린이·청소년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육영재단을 나와서도 2005년까지 이 일은 계속했다.”

▼ 육영재단에서는 왜 나왔나.

“정치세력과 부딪치니까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육영재단의 노조 설립을 막으며 ‘재단을 개선하겠다’고 설득했지만 1년 뒤에도 나아지지 않으니까 면이 안 서더라. 그래서 떠났다. 그 뒤에도 최태민 일가가 재단을 점령하려고 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 전략으로 결국 박근령이 몰락의 길을 걷었다.”

▼ 당신을 ‘박근령의 최태민’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더라.



“최태민과 나는 극과 극이다. 난 의리가 있다.”

▼ 박근령과 스캔들도 났던데.

“사람들이 육영재단 일하며 돈을 빼돌린 게 아니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난 국세청 조사를 3번이나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나오지 않았다. 자고로 위기에는 기회가 숨어 있는 모양이다. 전세금을 날릴 상황이 생겨 빚을 내 그 건물을 통째로 샀는데 건물 값이 10배로 뛰었다. 그리고 난 박근령을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 당신도 최태민처럼 나이와 학력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 상대편에서 얕잡아볼까봐 내 나이가 당시 37세인데 42세라고 속였다.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때도 여러 곳에서 나를 조사했다. 난 재건학교(再建學校), 검정고시로 학력을 인정받았고 성균관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자칭 ‘최태민의 바이블’이던데, 최태민의 어떤 행동이 가장 나빴다고 생각하나.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당신은 사고무친(四顧無親) 팔자다, 곁에 어느 누구도 없어야 인생이 핀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왜 이 말에 빠졌을까. 온실 속의 공주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난 세상에서 가장 비련의 여인이 박근혜라고 본다. 최태민이 허락해야 누군가를 만났을 테니까. 최태민의 현몽으로 박근혜를 만났다? 그것도 거짓이다.”



“최태민이 두 남매 폐인으로 만들어”

▼ 최태민 꿈에 육 여사가 나타나 ‘박근혜를 도와주라’고 했고, 이 얘기를 최태민이 편지로 써서 박근혜에게 보내며 두 사람이 만나게 됐다고 알려졌다.

“그건 만들어진 이야기다. 최태민은 박근혜의 과외선생이었다. 누군가가 육영수 여사한테 ‘영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평을 듣는 최태민을 소개했다. 최태민은 자신이 ‘집중력을 키울 수 있게 뇌 훈련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육 여사는 최태민에게 ‘박근혜에게 집중력 과외 수업을 해달라’고 청했고, 최태민이 서너 번 수업을 했다. 하지만 그자에 대한 소문이 안 좋으니까 육 여사가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막았다. 숭모회에 청와대 경호원 출신 10여 명이 있었는데 그중 10년 이상 대통령 가족을 경호한 사람이 이 얘기를 해줬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청와대 경호원 출신 들도 동의하더라.”

2016년 11월 25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이를 증명할 자료가 제시됐다.  최순실과 이복남매인 최태민의 아들은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님 살아계실 때 아버님이 청와대를 들락거렸다. (육 여사와 아버님이) 알던 사이였다. 그러니까 자기 딸을 맡기지 그냥 딸을 맡기겠느냐고 말했다. 제작진은 ‘최면술 시범을 보고 호기심을 가진 육(영수) 여사가 직접 시범을 보기 위해 부른 사람이 최(최태민) 씨였다’는 기사(일요신문 1990년 11월 18일자)를 근거로 제시했다.

▼ 박근령 씨는 ‘최태민이 언니와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말하던데.

“그것뿐이겠나. 최태민은 박근혜의 두 동생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통상 마약 공급책이 검거됐는데 마약복용자인 박지만이 왜 걸렸을까. 최태민이 박지만의 장자권을 뺏으려고 한 게 아닐까. 박근령이 이혼한 배경에도 최태민이 있는 걸로 안다.”

▼ 최태민 일가를 비판한 여러 사람이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했다.

“나도 사찰을 당했다. 내 지인 A씨는 2013년에 하남경찰서 정보과 형사에게 불려가 나에 대해 조사받은 데 이어 지난해 11월 초에도 불려가 청와대 민정에서 나온 사람들 입회 아래 나에 대해 조사받았다고 하더라. 경찰이나 민정에서 나에 대해 알려고 누구를 더 조사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주변 인물들이 자꾸 죽어가니까 겁난다.”

▼ 그런데도 왜 이 일에 발 벗고 나서나.

“아직도 드러날 게 많다. 어릴 때 힘들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불쌍하고, 괴롭다. 그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도 엄청 노력한다. 기자들에게 취재 협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금고의 행방을 전두환(전 대통령)이 알 거라고 생각한다. 재산을 착복한 최씨 일가 재산을 탈탈 털어내야 한다. 내게 주어진 과제를 잘 해결하고 싶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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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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