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이 글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위원 자격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쓴 소회다. 따라서 이 글은 다른 편집위원들이나 필자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1979년 ‘광복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 첫 권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이 땅에 없었다. 바로 그 전해에 잠시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수습기자 딱지도 떼기 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에 있었다.
그 책을 접한 것은 귀국 후였다. 1987년 2월 귀국해 강단에 섰을 때, 군부독재의 가장 심한 단계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은 여전히 운동권 학생들에게 ‘성경’이라 불릴 정도의 필독서였다.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학생들의 정신세계를 알 필요가 있었고, 한동안 떨어져 있던 고국의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나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책들을 찾아 읽었다.
‘인식’의 공헌을 인정해야 함은 분명하다. 1970년대 말~80년대라는 어려운 시기에 민중과 민족을 주축으로 한 역사해석을 담은 책을 만든 분들은 참으로 용감했고, 그분들의 용기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 ‘인식’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때까지 훈련받은 역사학자로서의 기본자세로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료(史料)와 자료를 근거로 한 주장이 아닌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식’의 집필자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은 송건호 선생이 ‘인식’ 제1권 첫머리에 쓴 글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얼마나 일방적으로 요리되고 혹사당하고 수모 받았으며 이런 틈을 이용해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는가를 규명하려는 것이다…8ㆍ15가 도대체 어떻게 민족의 정도에서 일탈해갔고 그로 말미암아 민중이 어떤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냉철하게 규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인식’1권, 14쪽)
낡은 ‘광복전후사 인식’
그 책은 이른바 민족적 모순의 극복, 곧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소명이며, 그것은 민중의 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특히 친일파에 대한 추상적 단죄, 민족주의와 분단의 극복을 유일의 진리로 제시하고 그것을 강요하며 광복 후 남한에서 일어난 일체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사를 제대로 모르는 내게조차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인식’이 ‘시대적 요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치적 선언과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