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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 버린 당대의 예술가, 과연 용서해야 하나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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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연애’가 낭만과 신(新)사고의 상징이던 1930년대에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대의 작곡가이자 성악가로 명성을 날리던 테너 안기영 교수. 병중의 조강지처와 세 아이를 버려두고 여제자와 상하이로 도피했던 그가 4년 만에 귀국하자, 경성은 한바탕 소동에 휩싸인다. ‘예술가적 기질’이라는 말로 그를 용서하자는 주장이 ‘연애담’이 되어 퍼져나가니, 버림받은 아내는 남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잡지에 기고해 무너진 사랑을 탄식하는데….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안기영(작은 사진)과 김현순의 연애사건을 다룬 당시 잡지기사들.

1932년 4월11일 저녁, 이화여전 후원회장 윤치호는 교수단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새 학기를 맞아 교수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학교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날 아침, 음악과의 안기영 교수는 조강지처 이성규에게 학교 행사 때문에 늦겠다는 말을 남기고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섰다. 행사는 그다지 늦지 않게 끝났다. 그러나 그날 밤 안기영은 귀가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소식이 없었다. 하얼빈에서 편지가 온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나는 러시아로 갈 것이오. 피아노와 집을 팔고 살림도 줄이시오. 러시아로 간 다음엔 주소도 알리지 않겠으니 기다리지 마시오.’

서른세 살의 젊은 교수 안기영은 작곡가이자 조선 제일의 테너로 이름 높았다. 이화여대 교가를 작곡한 사람이 바로 안기영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안기영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직장과 임신한 아내, 두 딸이 기다리는 가정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돌연 해외로 떠났다. 그로부터 몇 년간 안기영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베이징에 산다더라, 상하이에서 고생한다더라, 도쿄에 건너 갔다더라 하는 풍문만이 간혹 들릴 따름이었다.

안기영은 4년이 지난 1936년 3월12일에야 경성역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서울에 돌아온 안기영은 무슨 연유인지 아내와 세 아이가 기다리는 아현정(町) 자택 대신 관동정 부친의 집에서 묵었다.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칩거하면서 귀국 음악회를 준비했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팔순의 장모가 사위 얼굴 한 번 보면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겠다며 사람을 놓아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동안 태어난 네 살배기 아들조차 보러 가지 않았다.

‘안기영 귀국 독창회’는 1936년 4월11일 밤,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날은 그가 집을 나간 지 4주년이 되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을 이틀 앞둔 4월9일, 관할 본정경찰서는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돌연 공연허가를 취소했다. 귀국 독창회의 주제는 ‘사랑의 찬가’였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본 경찰이지만, 정치적 목적의 집회도 아니고 순수한 음악회를 강제로 금지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사랑의 찬가’도 때로는 심각한 ‘치안상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리지 못한 ‘귀국 독창회’

음악회 일주일 전, 관동정 안기영의 처소에 평소 친분이 있던 김 목사가 찾아왔다. 김 목사는 안기영의 경솔함을 꾸짖었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뉘우치는 바가 있다면 좀더 근신할 것이지, 세상의 눈도 있거늘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음악회는 무엇이냐?”

안기영이라고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느냐? 음악회를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김 목사는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분을 삭이며 돌아갔다. 음악회 소식에 더 분개한 것은 안기영의 처가 식구들이었다. 처가 젊은이들이 음악회에 떼지어 몰려가 풍파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 목사는 본정경찰서를 찾아가 안기영의 음악회를 허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기독교계와 교육계의 뜻을 전했다.

“안기영은 한때 이화여전 교수로 있으면서 교회에서도 신임을 받았소. 그러나 어느 날 자기 제자 김현순을 데리고 해외로 달아나 이화여전은 물론 일반교육계와 교회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소. 이제 돌아와서 자기의 과거를 청산하려는 성의 있는 빛도 없이 장한 일이나 한 듯이 음악회를 여는 것은 교육계나 일반 사회에 영향이 좋지 못할 것이오.” (‘조선일보’ 1936년 4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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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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