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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 버린 당대의 예술가, 과연 용서해야 하나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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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은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고국을 박차고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얼빈으로 떠난 지 며칠 후, 이웃에 살던 제자 김현순이 슬그머니 집을 나가 하얼빈에서 그와 합류했다. 해외유랑 4년 내내 안기영의 곁에는 늘 김현순이 있었다. 도쿄에서는 사랑의 결실인 딸까지 얻었다. 해외유랑은 ‘사랑의 망명’이었던 셈이다.

여학교 교수가 가족을 버리고 제자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는 것은 사회 통념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안기영도 자신의 허물을 모르지 않았다. 음악회는 그가 ‘속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고토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4년이란 세월동안 고생을 하면서도 꾸준히 성악을 연구했습니다. 조선 음악계에 기여하여 속죄의 만분지일이나마 하려고 고토로 돌아왔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눈물과 정과 피로 떠나간 우리는 다시 눈물과 정과 끓는 피로써 조선 음악계에 기여하렵니다. 다만 이 한 가지 마음과 염원을 가지고 허물 많은 우리들의 앞길을 개척하렵니다. 오직 여러분의 뼈저린 채찍질과 지도를 기다릴 뿐입니다.” (‘안기영·김현기 탈출 방랑기’, ‘조광’ 1936년 4월호)

음악가가 음악으로 자신의 죄를 씻겠다는 것은 일면 타당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생각하는 속죄의 방법은 달랐다. 안기영이 김현순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던 4년 동안, 그의 아내와 세 자녀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릇된 일을 하여도 나의 남편은 남편이요, 그 애들의 아버지는 아버지이니 그에게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욕합니까. 다만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조선일보’ 1936년 4월13일자)



가족들은 그저 회개하고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데, 안기영은 대중 앞에서 ‘사랑의 찬가’를 불러 자신의 허물을 속죄하려 했다. 누구를 위한 ‘사랑의 찬가’인가. 가족에게 그것은 속죄가 아니라 또 한번 가슴에 못을 박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김 목사의 청원을 접수한 경찰은 아내 이성규를 불러 전후사정을 들었다.

“그가 돌아왔대도 아직 만나 이야기도 못해보았는데, 음악회를 연다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집안 사람들이 음악회에서 항의시위를 하리라는 말이 있어 말렸습니다. YMCA 사람들도 음악회에서 항의시위를 하겠다기에 그럴 것 없다고 말렸습니다. 음악회야 이후에도 할 수 있는 것이라, 공연히 지금 열어 망신당하는 것보다야 그만 두는 것이 나을 듯하나, 지금 나로서야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딸애들도 아버지가 음악회를 하다가 망신이나 당하면 어떡하나 애태우고 있어요.” (‘조선일보’ 1936년 4월12일자)

경찰은 ‘보안상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인륜상’ 공연을 허가할 수 없었다. 안기영과 김현순의 ‘사랑의 망명’ 4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안기영 귀국 독창회’는 가족과 YMCA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취소되고 말았다.

1928년 안기영은 미국 오리건주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에서 3년간 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그의 유학기간 아내 이성규는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하며 혼자 힘으로 근근이 두 딸을 키웠다. 귀국한 안기영은 아현리에 집을 장만하고,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부임했다. 남은 생애는 음악과 가족을 위해 헌신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안기영의 결심을 뒤흔들어놓았다.

사랑의 탈출

김현순은 아현리에 사는 이화여전 학생으로 안기영이 조직한 음악 연구단체 성우회(聲友會)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소프라노였다. 탁월한 음색을 지닌 데다 성실한 김현순을 안기영은 남달리 아꼈다. 이웃에 살아 아침마다 같이 등교했고, 가끔씩 산보도 하고 음악회도 다녔다.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순수한 사제의 만남이었고, 조선 음악계를 이끌고 갈 예술가 사이의 교제였다. 그러나 1932년 김현순이 이화여전을 졸업할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이 용납하기 어려운 관계’로 발전했다. 어려울 때 늘 함께 있어준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든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보았지만, ‘운명적 사랑’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외박이 잦아졌다. 김현순과 함께 정사(情死)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죽기에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았다.

사제 사이로 넘지 못할 장벽을 넘고 뚫지 못할 길을 뚫은 그네들은 한동안 큐피드의 화살을 기쁨으로 맞이했으나 마침내 최후의 날이 오게 되매 김현순은 금강산이나 사람 모르는 곳으로 가서 죽어버리자고 애원했다.

“난 살기 싫어요. 꼭 죽어요” 하고 김현순이 야단을 치면,

“죽긴 왜 죽어요. 그래도 살아야지요. 조선서 못살면 중국으로 가고 게서도 못살면 남양(南洋)이라도 가서 살아야지요” 하고 안기영이 위로했다. (‘안기영과 김현순의 悲戀悲曲’, ‘신인문학’ 193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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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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