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고등학교 2학년 생활기록부. 특기사항 란에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격하는 결점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사람의 성격은 안 바뀐다. 적어도 미국식 처세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성격은 절대 안 바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하면 양상은 아주 달라진다. 개체로서의 성격은 변하지 않지만, 사회적 컨텍스트, 즉 맥락에 따라 성격은 아주 쉽게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의 성격은 맥락과의 게슈탈트(Gestalt)이기 때문이다. 게슈탈트, 즉 사회적 맥락과의 통합된 전체란 이야기다. 그래서 사회적 맥락이 달라지면 성격은 바뀌게 되어 있다.
내 성격은 동일하지만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강의할 때의 나는 아주 ‘권위적’이고, 끊임없이 잘난 체한다. 나름 터득한 효과적인 강의기법이다. 그러나 아내 앞의 나는 아주 ‘비겁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아주 ‘자상한’ 아빠다. 나는 우리 아들들이 몹시 예쁘고 사랑스럽다. 우리 대학원생들에게 나는 아주 ‘엄격한’ 선생이지만 학부생들에게는 ‘재미있는’ 교수다. 나는 한 사람이다. 그러나 맥락이 어디냐에 따라 나는 권위적이고, 잘난 체 하고, 비겁하고, 자상하고, 엄격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된다.
이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인식이 부재할 경우 상황은 매우 심각해진다. 엄격해야 할 때 비겁해지고, 재미있어야 할 때 권위적이 되고, 자상해야 할 때 잘난 체하는 대책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식 성공처세서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맥락에 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자꾸 ‘너를 바꿔라’고 하니 맥락에 따라 의도하지 못한 황당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안 바뀐다. 피부살갗 안에 들어 있는 나는 절대 안 바뀐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을 둘러싼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즉 맥락적 사고는 ‘재미’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삶의 재미는 바로 이 맥락을 바꾸는 능력에서 나온다.
맥락을 바꾸면 재미가 생긴다
훌라후프 만드는 한국의 한 회사 사장이 미국에서 엄청난 양의 훌라후프를 주문받았다. 은행 빚을 내서 훌라후프를 잔뜩 만들고 선적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 쌓아놓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주문한 회사가 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 사장도 같이 망하게 생겼다. 사장은 이 훌라후프를 팔려고 한국의 운동용품점을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녔다. 그러나 모두들 한결같이 대답한다. “아니, 요즘 누가 훌라후프 해요? 필요 없어요.” 절망한 사장은 터벅터벅 걷다 들판에 가득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장의 아이디어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러곤 선적장에 가득한 훌라후프를 전부 반으로 잘라 반 토막 난 훌라후프를 비닐하우스 제작공장에 팔아버렸다. 계산해보니 돈은 갑절로 벌렸다.
반 토막 난 훌라후프는 모두 비닐하우스 뼈대로 쓰였다.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 때 대나무를 썼는데, 대나무는 잘 부러지고 자칫하면 비닐을 찢어지게 했다. 그런데 반 토막 난 훌라후프는 비닐하우스 뼈대로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휘어지지도 않고, 비닐을 찢지도 않고 완벽한 조합을 이뤘다. 맥락을 바꾼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훌라후프를 운동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빚을 갚을 수 없지만, 농사짓는 맥락에서 활용하니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훌라후프를 운동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라고 했을까? 바로 자신이다. 맥락은 바로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다.
지식기반사회의 맥락 바꾸기는 지난 달에 설명한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지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심리학자 루리아(Luria)의 실험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도끼, 망치, 나무, 톱.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를 빼라’면 당신은 무엇을 빼겠는가? 물론 나무다. 나무 패는 일과 관계없이 자란 이들은 한결같이 나무를 뺀다. 다른 것들은 도구이고, 나무만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구’와 ‘대상’이라는 ‘추상적 지식(abstract knowledge)’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동일한 질문을 러시아 벌목공들에게 던지면 이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망치’를 뺀다. 이들에게 나무 없는 도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다 사용해야겠지만, 구태여 하나를 빼라면 다른 것들에 비해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망치를 빼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무를 자른다고 하는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을 가지고 있다. 도끼, 망치, 나무, 톱이라는 동일한 정보들은 이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엮인다. 정보와 정보의 관계는 각 사람이 처한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분류된다. 추상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지식체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