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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조국 위해 목숨 바쳤으나 두 번이나 버림받다

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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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김병익 회장이 6·25전쟁 당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면서 그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재일교포 학생들 각자의 참전 사연은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였다. 독자인 규슈(九州)의 신효근(辛孝根)은 지원서를 덜컥 제출해놓고 이 사실을 차마 아버지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출발 전날 술을 마신 아버지가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자 의사를 불렀다. 신효근은 이 의사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다음 주사약에 수면제를 조금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딱 잘라 거절하던 의사도 결국 신효근의 조국애에 못 이겨 손을 들고 말았다. 부친이 잠든 사실을 확인한 그는 친지들에게 아버지가 깨어나면 사실대로 알리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 2명과 함께 집을 떠났다.

재일대한청년단 오사카 본부에서 일하다 지원한 조용갑(趙鏞甲)과 조만철(趙滿鐵)은 삼촌과 조카 사이. 조카인 조만철은 집안의 종손이라 참전해선 안 된다는 가족 전체의 반대에 부닥치자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는 단식투쟁을 벌인 끝에 한국행을 관철시켰다.

양옥룡(梁玉龍)은 당시 게이오대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일제 말기 중학 2학년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군 특별지원병으로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특이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지도교수를 찾아가 휴학 의사를 밝히자 일본인 교수들은 “일본 제국주의도 공학도들은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다”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 학문과 지식으로 조국 재건에 봉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했지만 양옥룡의 결심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와카야마(和歌山)시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던 조종규(曺宗奎)는 부산에 아내와 부모님을 남겨놓고 일본으로 건너온 상태였다. 재일 학도의용군 제2진에 포함돼 6·25전쟁에 참전한 후 1952년 10월 제대를 하고 나서야 가족을 찾아갔다. 당시 가족들은 외아들인 조종규가 일본에서 돈을 벌다 돌아온 줄 알았는데 전선을 누비고 왔다는 말에 모두 기겁을 했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 ‘신세계(新世界)’ 기자였던 김성욱(金聖郁)은 1950년 9월8일 도쿄 스루가다이 호텔에서 거행된 재일 학도의용군 제1진 출정식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때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기사를 송고한 후 한국행을 자원했다. 하숙집은커녕 도쿄 근교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도 연락하지 못한 상태였다.



주일 한국대표부는 이들의 참전 열기에 처음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무래도 일본과 국교를 맺기 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전선에 서다

그러나 들불처럼 일어나는 재일교포 학생들의 참전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주일 한국대표부는 당시 일본을 점령 중이던 미 극동군총사령부와 접촉했다. 이 접촉에서 어떤 내용이 합의됐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후 정황으로 미뤄 참전한 재일 학도의용군의 일본 재입국을 허용한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중 일부 재일 학도의용군이 미군의 주선으로 일본에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면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됐다. 미국과 일본이 1952년 4월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그것이다. 일본 정부는 조약 체결 이후 재일 학도의용군의 재입국을 거부했다. 혈서까지 써가면서 반공전선에 뛰어든 재일 학도의용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 극동군총사령부는 재일교포 청년 학생들을 지역별로 시차를 두고 적게는 40~50명에서 많게는 270명까지 나누어 한국 전선으로 보냈다. 가장 먼저 소집 명령이 떨어진 곳은 도쿄였다. 민단 주최로 1950년 9월7일 도쿄 스루가다이 호텔에서 개최된 환송식에는 주일 대표부 김용주(金龍周) 공사와 민단 간부들이 참석해 재일 학도의용군을 격려했다.

이 호텔에서 입영 전야를 보낸 이들 78명은 다음날 출정식 후 가족과 민단 간부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도쿄 인근 사이타마(埼玉)현 아사카(朝霞) 소재 미 제1기병사단 사령부의 캠프 드레이크 내 미8군 보충훈련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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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현 / 연합뉴스 국제부 기자 miguel23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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