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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1920년대 서울

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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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난 회 이야기
  • 병합이라는 이름의 망국은 하루아침의 변고로 찾아든 것이 아니라 최소한 사반세기의 시간을 경과하면서 진행된 복잡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그 연속선의 일각에 재일 망명객이 있었다. 청국과 일본과 러시아를 제각각 중시하고 제휴하는 정치그룹 간의 사활을 건 쟁투의 와중에 일본에 깃든 망명객들이었다. 그런데 망국 이후 또 다른 망명객들이 러시아와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기미년 3월과 9월 사이의 활발한 정국에 힘입어 일본통치 타도의 일념으로 망명정부를 세웠다.
(제11장)

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밤9시의 관철동(貫鐵洞) 거리는 낮의 활기가 채 꺼지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밤의 열기는 아직 정점에 이르려면 멀었다. 서울 북촌의 중심, 관철동의 야경은 낮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또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평일에는 나오지 않던 사람들까지 심심파적 삼아 종로에 나와 관철동 일대를 드나드는 것이 요즘 세태다. 한 해가 무섭게 새로운 구경거리가 늘어나고 도심을 찾는 나들이도 그만큼 잦아진다. 낮에는 집 주변을 벗어나지 않던 사람들도 해가 저물면 누적되는 시간의 무료함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길을 나서곤 한다. 갈 곳은 그리 많지 않다. 행선지는 대개 정해져 있다. 인왕산의 백운동천, 북한산의 삼청동천, 목멱산의 남산동천이 청계천으로 흘러들 듯 세 물길의 합수지점 사이에 자리 잡은 관철동으로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관철동에 옥이야 금이야 만든 관자(貫子)를 사러 나오는 이는 지금 거의 볼 수 없다. 수백 년 동안 이곳에 몰려 성황을 이루던 관자 파는 가게들도 여기가 관자동(貫子洞)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상투머리에 쓰는 망건(網巾)의 줄 꿰는 고리가 관자인데 상투를 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을 자를 수는 없다며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난 것이 25년 전의 일이다. 일본을 배후에 둔 정부 시책에 따를 수 없다며 그동안 쌓인 증오와 분노를 상투머리 끝까지 끌어올리며 무력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은 의병이라 불렸다. 머리카락을 수호하기 위해서 머리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반발에 단발령은 철회되었고 진압군도 철수되었다. 그리고 단발은 강요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맡겨졌다.

상투는 잘랐어도 망건과 갓은 그대로 쓰는 풍습이 노인들 중에 아직 남아 있지만 옥관자 금관자 몇 개 팔아보겠다고 이 땅값 비싼 관철동에 가게를 벌이고 있을 경성 상인은 없다. 20세기 하고도 1920년인 것이다. 장통교와 더불어 이 동네의 동쪽 두 귀퉁이를 이루던 철물교(鐵物橋) 주변의 철물전들도 거의 떠나고 없다. 파고다공원 옆 네거리에 있던 철물교 다리는 복개 도로가 개울을 덮으면서 사라졌다. 안국동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흘러내리던 원동천(院洞川)은 지하로 잠복했다. 사라진 관자와 철물다리를 추억이라도 하듯 관자동은 관철동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6년 전의 일이다. 단발령 소동이 있은 지 20년이 되던 그해 1914년에 상투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관자 찾는 이도 따라서 드물어졌다.



관자도 관자동도 철물도 철물교도 사라진 관철동의 가로와 가게에 전깃불은 날로 환해진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여름밤 나방처럼 맹렬히 몰려들었다. 도회지에서 사람들은 점점 밤낮을 가리지 않아가고 계절도 덜 가리게 된다. 남녀의 낯가림과 몸 가림도 그와 더불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오늘은 2월 1일. 새해의 첫 다섯 날을 혹한으로 시작해 스무 날가량 춥다가 요사이 차츰 기온이 오르면서 오랜만에 빙점을 벗어났다. 오늘은 아침부터 포근하다 싶더니 밤이 되어도 영상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올 들어 가장 따뜻한 날이다. 관철동에서 비스듬히 종로 큰길 너머로 바라보이는 파고다공원, 그 뒷동네 낙원동에 있는 경성측후소는 내일부터 기온이 다시 곤두박질할 것이라 예보했다. 이번 겨울은 무려 50일 넘게 눈이 내렸다. 경성측후소가 기상관측을 시작한 1907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 내린 눈은 거의 녹지 않고 쌓이기만 해 또 하나의 이변으로 기록되었다.

1920년이 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기미년이다. 섣달 하고 열이틀. 고종 임금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 지난해 이맘때다. 그 1주기 제사를 며칠 전에 순종 임금 이왕(李王)은 정성스레 모셨다고 한다. 밤을 지새웠던 아버지와 달리 아침 7시면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이왕은 오전에 관보(官報)의 활자를 쫓으며 지금은 조선 귀족이 된 옛 중신들의 동정을 챙겨보고, 오후는 신문 보는 것으로 소일한다고 한다. 한 달 뒤면 3·1만세운동 1주년이다.

보름을 향해 가고 있을 달은 어제부터 이틀 내리 하늘을 두껍게 가린 구름에 빛을 거두고 자취마저 묘연하다. 오늘은 살짝 빗방울까지 몇 점 뿌린 뒤라 마치 초봄의 그믐밤 같다. 봄은 머지않아 올 것이다. 사흘 뒤면 기미년의 마지막 보름달이 떠오를 것이다. 그 달이 경성을 환히 비춰줄지는 측후소도 아직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그날도 어김없이 관철동을 메울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달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는다. 먼 달보다는 가까운 전등에 의지해 생활하는 데 익숙해져간다. 도회지의 밤은 점점 낮처럼 돼간다. 동지에서 하지로 간 것보다 훨씬 더 짧아진 밤이 저기 샛길 안쪽으로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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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unomonoo@gmail.com
연재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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