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 사는 로버트 허시는 남처럼 일찌감치 부동산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주위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로 불과 몇 년 사이 수십 년간 일해도 벌까 말까 할 돈을 챙기는 걸 직접 목격하면서 배도 아프고 막차라도 타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그래서 뒤늦게 부동산에 관심을 가졌다.
2006년 여름 허시는 드디어 뉴욕 퀸스에서 적당한 매물을 발견했다. 가진 돈은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구매자금 전액을 은행에서 빌려줄 테니까. 몇 년 지나면 자신이 산 건물 값은 크게 오를 것이고 그때 차액만 챙기면 된다.
그러나 허시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7년 4월 미국 2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회사 뉴센추리파이낸셜이 파산신청을 하면서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주택가격은 급락했고 원리금을 상환할 수 없게 된 허시는 개인파산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허시를 비롯해 수백만 명이 재산을 모두 잃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금융의 카지노化
미국에서 주택 대출을 받으려면 일반적으로 개인신용 점수, 정기적 수입, 보증금(Downpayment) 지불 등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1995년 저소득층을 위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대출제도가 만들어지면서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대출이 허용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주택자금을 빌려주는 대출상품이다. 대출을 받는 사람의 신용도가 낮기 때문에 당연히 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주택담보 대출비율(LTV)을 적용해 주택 가격의 60%까지만 대출이 가능한 데 반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100%까지 대출이 가능했다. 부동산 경기활황을 타고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07년엔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사람이 72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미국 금융기관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익을 늘리기 위해 각종 파생상품을 만들어냈다. 자산담보증권(ABS)을 만들고 악성 빚만 따로 모아 부채담보증권(CDO)을 만들어 판매하는 식으로 가상의 가치를 천문학적으로 부풀렸다. 금융공학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금융파생상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났다. 예컨대 실제 담보가치는 100원밖에 안 되는 주택금융상품을 바탕으로 도합 500원이 넘는 가치를 갖는 파생상품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 원리금 상환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채권보증회사와 신용디폴트스왑(CDS) 계약을 체결한다. 은행들이 채권보증회사와 CDS 계약을 체결하고 보험료를 내면 대출자가 돈을 갚지 않을 때 채권보증회사가 대신 원리금 지급을 보증하는 시스템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각종 파생상품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연쇄반응으로 금융기관의 줄도산이 불가피한 ‘고위험 고수익’ 구조가 형성된 것. 2004년 1분기 200억 달러에 불과하던 부채담보증권(CDO) 시장은 2007년 1분기 1800억 달러로 3년 사이 9배나 증가했다. 서브프라임 융자와 관련한 거래 액수는 1조 3000억 달러에 달했다.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전형이 만들어진 꼴이다. 모두들 눈이 벌게져 새로운 희생자를 불러모으는 데 급급했다. 이때만 해도 파생상품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했지 시한폭탄이 되리란 의심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거품이 너무 심하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가 2004년 저금리 정책을 종결하고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기존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은행 등 금융기관 역시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리먼브러더스가 2008년 9월 15일 파산보호신청을 하면서 무려 6139억 달러에 달하는 파산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골드먼삭스, JP 모건, 메릴린치 등 미국 5대 투자은행 가운데 3개가 파산하는 금융위기가 도래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대표적 모기지 은행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전직 최고경영자(CEO) 대니얼 머드와 리처드 사이런을 증권거래 사기혐의로 고발했다. 투자자에게 위험성을 알려주지 않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 판매에 주력했기 때문이었다. 위험이 폭발 일보 직전에 와 있었는데도 말이다.
총재와 총장의 만남
컨트리와이드파이낸셜의 안젤로 모질로 전 회장 역시 증권거래위원회가 지목한 금융위기 촉발 주범 중 한 명이다. 모질로 회장은 저신용 대출을 늘리는 것이 회사를 재앙으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사의 모기지 보험 능력을 과시하면서 투자자를 파산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위험성이 높은 금융상품을 우량상품으로 속인 셈이다. 부실 채권의 누적은 결국 회사의 종말을 불러왔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모질로가 개인적으로 선호한 이른바 ‘안젤로의 친구들(Friends of Angelo)’이란 프로그램에 주목했다. 이 프로그램은 모질로가 감독기관이나 의회에 있는 유력 인사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줘 친분관계를 넓히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물론 연간 4000억 달러 규모의 모기지 금융을 다루는 회사 처지에서 ‘안젤로의 친구들’ 대출은 소액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액수가 아니라 절차였다. 합법적 대출 절차를 무시하고 친분관계에 따라 돈을 빌려줬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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