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 대령(L 전 준장은 당시 대령)이 부대활동, 개인 용도에 필요한 현금을 조성하라고 지시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직접 투서하거나 감찰 부서에 제보할 의향도 좀 있었다. 육군 특성상 대령이고 지휘관인데 직접 제보할 자신은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이 제보해 바로잡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한 행위다. 하지만 이런 부정한 일은 도저히 가만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빼돌릴 금액, 수법도 일러줘”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결과(2011년 6월)에 따르면 L 전 준장은 부하들에게 증식비(빵), 사무기기 유지비, 주방용품비, 방탄 헬멧 도색비 등을 빼돌리라고 지시했다. 구체적인 금액과 수법도 일러줬다. 2007~2008년 횡령한 것으로 확인된 금액이 4700여만 원에 달한다. 실제 횡령액은 더 많을 수도 있다. 군 검찰은 “영수증, 부책 등의 관련 자료 폐기,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들의 비협조적 태도 등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L 전 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해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나랏돈을 횡령할 때 사용한 방법은 비용을 부풀려 지급한 후 되돌려 받기, 리베이트 받기, 장병 격려금 가로채기, 헌병 수사관 여비를 비롯한 활동비 빼돌리기 등이다.
병사 부식용 빵을 구매할 때 원래는 공급업체가 배달해줬는데, L 전 준장은 군 차량을 이용해 가져오게 했다. 이후 업체로부터 배송 비용을 현금으로 받았다. 빵을 시가보다 비싸게 구입한 후 더 준 돈을 현금으로 되돌려 받는 수법도 썼다. 게다가 수방사 헌병단에 빵을 공급한 업체는 L 전 준장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L 전 준장은 “명절·연말 때 경호경비 행사에 동원된 병사들을 위해 사용하라”면서 상급부대가 마련해준 격려금 1200만 원도 가로챘다.
L 전 준장은 헌병 수사관이 출장비 등으로 사용해야 할 ‘사건처리비’도 횡령했다. 개인 계좌로 돈을 보낸 후 되돌려 받거나 현금으로 지급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빼돌렸다. 2년간 사건처리비 1300만 원이 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P 소령을 비롯해 A, K 장교가 L 전 준장의 지시를 받고 예산 관련 문서를 허위로 작성하는 방식으로 현금을 확보해 L 전 준장에게 건넸다.
P 소령은 군 조사에서 횡령액의 50% 가량은 L 전 준장이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회식비를 비롯한 비공식 부대 운영비로 사용한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헌병 선두주자의 낙마
H 중령(육사 45기)은 잘나가는 헌병 장교였다. 1989년 소위로 임관한 후 위관급 장교 시절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을 전 병과 통틀어 수석으로 마쳤다. 장교들이 소령 때 등록하는 육군대학은 전체 차석으로 졸업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헌병 병과의 선두주자였다.
H 중령은 청와대를 경호하는 33헌병대 제대장, 육군참모총장경호대장, 국방부 조사본부 범죄정보1과장, 3군사령부 헌병대 수사과장 등 요직을 거쳤으며 5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가 결혼할 때 김관진 현 국방부 장관이 주례를 섰다.
H 중령은 L 전 준장의 횡령 사실을 제보한 내부고발자(whistle-blower)다. 횡령 행위에 가담한 P 소령은 2008년 말 평소 친하게 지내던 H 중령을 만나 L 전 준장의 지시로 범죄를 저지르면서 겪어온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L 대령(L 전 준장)이 나를 비롯한 부하 장교들에게 지시해 월·분기·반기 단위로 꾸준히 공금을 횡령·유용하고 있다. 지휘관의 명을 거스를 수 없는 군인의 의무와 도덕적인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H 중령은 P 소령이 털어놓은 내용을 항목별로 받아 적은 후 추가로 P 소령과 통화를 해 비위 내용을 정리한 문건을 만들었다. P 소령에겐 “너는 절대 노출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알아서 한다. 나를 믿고 얘기하라. 그냥 둘 수 없다”고 말했다. P 소령에게 전말을 전해 들은 후 L 전 준장의 파렴치한 행위에 분노했으나 오랜 고민 끝에 일단은 덮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2010년 L 전 준장이 헌병 병과장(육군 중앙수사단장)으로 유력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헌병 병과는 장성급 직위가 육군 중앙수사단장(준장)과 국방부 조사본부장(소장) 둘이다. 중앙수사단장을 병과장이라고 부른다]. H 중령은 L 전 준장이 병과장에 오르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병과의 명예가 걸린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L 전 준장의 비위 사실을 적은 익명의 제보편지를 2010년 11월 당시 병과장이던 S 중앙수사단장(그는 나중에 소장으로 진급해 국방부 조사본부장을 지낸 후 예편했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