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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보위’ 위해 피해 여성 두 번 짓밟았다

2008년 민주노총 간부의 전교조 여교사 성폭력 사건, 그 후

‘조직 보위’ 위해 피해 여성 두 번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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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보위’ 위해 피해 여성 두 번 짓밟았다

피해자 김 교사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사건 발생부터 5년 동안의 기록을 정리한 책을 펴냈다.

2008년 12월, 민주노총 간부의 전교조 여교사 성폭력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촛불시위 등 긴박한 시국 상황과 맞물려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던 이 사건은, 그러나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사건 당사자들이 입을 굳게 닫았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언론의 관심은 얼마 안 가 수그러들었고,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가 이 사건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최근 출간된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책에서는 ‘피해생존자’로 표현)인 김모 교사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사건의 전말을 정리한 백서다.

책의 일부 내용이 가해자나 민주노총, 전교조 측의 주장과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논란이 될 만한 곁가지들을 쳐내더라도 이 책은 진보진영이 ‘조직 보위’라는 명분 아래 피해 여성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파멸시키고, 성폭력 피해를 가중시켜 갔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김 교사는 전교조 동료인 손모 씨의 요청으로 당시 수배 중이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을 며칠 동안 자택에 숨겨주었다. 그러다 이 위원장이 검거되자 그의 도피를 도왔던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날 저녁 술자리가 파한 후 민주노총 간부 김모 씨가 귀가하는 김 교사의 뒤를 따라갔다. 함께 택시에 탄 김 씨는 차 안에서 김 교사의 몸을 더듬는가 하면, 돌아가라는 김 교사의 요구를 무시하고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와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려 했다.

김 교사가 강하게 반항하자 포기한 김 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의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김 교사는 손 씨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느지막하게 나타난 손 씨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고 가겠다는 김 씨를 거들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공포, 고통을 느꼈다.



조직의 타도 대상 된 피해자

김 씨는 이후 “(손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며 “(기억은 나지 않지만) 미안하네, 미안한 거지”라고 말했지만, 김 교사에겐 전혀 사과로 느껴지지 않았다. 김 교사는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능글맞게 웃었다’고 썼다. 손 씨 역시 김 교사와 김 씨의 화해를 주선하려고만 할 뿐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민주노총에서 사건 진상을 조사하자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책은 “발생 상황을 살펴보면, 피해생존자에게 가한 폭력이 단순히 김 씨의 ‘성욕’ 때문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며 “이는 조직의 보위를 위한 ‘대책’을 군말 없이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한 협박이었다”고 규정했다. 김 교사는 이 위원장 검거 후 대책회의에서 허위진술을 강요하는 요구에 반발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김 교사는 자신이 소속된 전교조의 정진화 당시 위원장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정 위원장의 첫마디는 “고소하지 말고 조직 내부에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전교조나 민주노총이 매우 어려운 시기인 만큼 정부나 보수언론, 보수단체들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싸우기도 어려운데 이 사실만큼은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김 교사는 “갑자기 진흙 구덩이에 나를 빠뜨려놓고 흙을 덮어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기록했다.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고 언론에 보도되자 전교조 지도부와 조직활동가들은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인 김 교사를 혹독하게 질타했다. 그들은 김 교사를 돕던 진보인권운동가 오창익 씨가 사실을 과도하게 왜곡하고 있으며, 피해생존자도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심지어 민주노총에서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사건을 조사하고 기자회견을 하자 전교조 수석부위원장과 사무처장 등 지도부가 나타나 강력하게 항의하며 위원들과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김 교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조직적인 2차, 3차 가해에 시달렸다. 그는 “그들에게 나는 피해생존자가 아니었다. 그저 조직의 명을 따르지 않는 타도 대상이었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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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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