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項羽)가 왜 거기에
우리는 주로 역사의 탐구-서술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다뤘지만, 유지기는 역사서의 체재에서 나타나는 오류부터 지적했다. 이는 본기니, 열전이니 하는 구획이 있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가 나라별 역사의 편찬체재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천자의 행적을 본기라고 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였고, 이는 후세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사기’에 천자를 본기로, 제후를 세가로 한 것은 합당하지만, 실제 내용이 분명치 않아 의미를 알기 어렵게 된 경우도 있었다. 진(秦)나라 백예(伯·#53667;)부터 장양왕(莊襄王)까지를 본기에 둔 것은 오류다. 진나라가 시황제(始皇帝) 때 중국=천하를 통일하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황제 이전까지 본기로 넣게 되면, 잘 모르는 사람은 전에도 황제였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지기가 볼 때 군웅(群雄)의 하나였던 항우(項羽)에게 본기를 배정한 것도 대표적인 오류다. 항우는 천자였던 적이 없다. 유지기가 이 문제점을 지적한 뒤 항우를 본기에 배정한 점을 놓고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사마천이 항우에 대해 천자 이상의 역사성을 부여한 것이라는 둥, 자신을 궁형(宮刑)에 처한 한 무제에 대한 반발에서 은근히 초나라 항우를 높인 것이라는 둥. 반대 측에선 변명할 여지없는 비일관성이며 사마천의 잘못이라고 했다.
유지기는 제후를 낮추고 천자와 구별하려는 이유에서 세가(世家)라고 이름 붙였다고 보았다. 이 역시 사마천의 창안이다. 진승(陳勝)처럼 변방 군졸에서 봉기한 뒤 왕을 칭한 지 여섯 달 만에 죽어서 대를 잇지 못한 경우조차 세가에 편재한 것은 기준이 잘못된 것이다.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집안 역사를 기전체로 저술한다고 생각해보자.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아버지가 들어갈 자리에, 작은아버지나 당숙이 들어간 셈이다. 반고는 ‘한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사마천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다. 중간에 몇몇 오류를 답습한 역사서도 있지만, 대체로 이후론 사마천의 세가 분류는 사라졌고 반고의 체재가 전해졌다.
유지기가 못마땅해했던 부분은 표(表)다. 표는 족보와 세계(世系)의 연표(年表), 월표(月表)다. 여기서도 유지기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판한다. ‘사기’를 보면 본기, 세가, 열전, 직관(職官) 등이 각 편에 갖춰져 있어서 표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기’의 열국 연표 정도는 남겨둘 만하다.
반고의 ‘한서’나 ‘동관한기’에도 이런 문제점이 있다. 더 심한 것은 반고의 ‘고금인표(古今人表)’다. 사람 등급을 9품으로 나눠 구별했는데, 열전이든 세가에서든 이런 구별은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표로 만들어 제시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게다가 ‘한서’가 포괄하는 한(漢)나라를 넘어 옛날 옛적 복희, 신농까지 포함시키는 무리를 범했다.
유지기는 ‘서지’의 논의에서 천문지(天文志), 예문지(藝文志), 오행지(五行志)로 나눠 설명했다. 그런 만큼 내용도 긴 편이다. 천문지나 오행지는 자연사의 영역이고, 예문지는 문화사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지기가 의학(醫學), 양생(養生)의 관점에서 인형지(人形志)를 만들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시했던 점이다. 또 천하가 넓어 언어가 다른 데도 방언지(方言志)를 만들지 않은 데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 의학사, 언어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전반적으로 역사서의 서나 지가 최선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지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유지기는 도읍지(都邑志), 씨족지(氏族志), 방물지(方物志·특산물) 등을 꼽았다. 이들은 각각 여복지(輿服志·복식과 수레), 백관지(百官志), 식화지(食貨志·경제사)에 배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족보나 지리서들이 대대로 적지 않게 편찬됐으므로 이들을 모아 지를 만든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적이다.
직서(直書)란 무엇일까?
사실의 수집이나 서술보다 어려운 것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유지기가 말한 식(識)의 단계에 해당하는 식견과 덕성을 요구하는 역사학의 영역이다. 인간은 똑똑하고 못난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악업은 알려서 세상의 교훈으로 삼고 선행은 후세에 보여줘야 하는데, 그 책임이 사관에게 있음을 유지기는 ‘인물(人物)’ 편에서 강조했다. 그렇다고 군소 무리의 은밀한 사실까지 일일이 모아 기록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사관이 그들의 가계를 조사하고 고향이나 작위를 모아 허위사실까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조작해 열전을 만드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다.
이어 강조한 것이 직서(直書)다. 동호(董狐)와 조순(趙盾)처럼 피아 간에 유감이 없고 행동에도 의심이 없어야 역사의 진실과 직필을 기록하고 고금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직필을 지키려다가 형벌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세상사이기에, 사신(史臣)이 강직한 풍모로 권력에 빌붙지 않는 절개를 유지하는 것만도 어려울 것이다. 때로는 손성(孫盛)처럼 몰래 다른 판본을 만들어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비밀 일기라고나 할까? 이것도 재앙을 피하고 다행스럽게도 저술과 당사자가 온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곡필(曲筆)’ 편은 ‘직서’와 짝이 되는 편이다. 역사서 중엔 사실마다 거짓 증거이고 문장마다 터무니없는 것도 많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에 가탁해 자신의 은혜로 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악행을 꾸며내어 자기 원수를 갚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반고조차 다른 사람에게 금을 받고서야 비로소 기록을 남겼다.(‘사고전서총목’ 권45에서 유지기의 견해를 소개하는 한편 반고의 일은 사실이 아니라는 ‘문심조룡’ ‘사전(史傳)’의 말도 인용했다.)
경(經)도 예외는 아니다
‘삼국지’로 알려진 진수(陳壽)는 쌀을 빌려줘야만 열전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진서’의 ‘진수열전(陳壽列傳)’에 “정의(丁儀)와 정이(丁)는 위(魏)나라에서 명성이 있었다. 진수가 그의 아들에게, ‘천 곡(斛)의 쌀을 주면 그대 아버지를 위해 좋은 열전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 아들이 주지 않았더니 끝내 열전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했다.(그러나 하작(何 )의 ‘곤학기문(困學紀文)’에서 “문제(文帝)가 즉위하고 정의와 정이를 벌주어 남구(男口)를 묻어버렸는데, 어떻게 진나라 때까지 자식이 있겠는가. 쌀을 달라고 했던 일은 무함이다”라고 한 말을 소개했다.)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실은 내가 직서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어디까지 곧이곧대로 서술하는 것이 직필일까? 부모에 대한 일을 다 써도 되는가. 부모의 일이 아니라도 사람의 일이란 감출 일도 있고 드러내서 좋지 않은 일도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지나보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관은 20대 젊은 사람으로만 운영했을 것이다. 아예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편이 나을 것이므로. 그때는 그때고, 지금 나의 고민은 고민이지 않은가? 직서의 뿌연 경계를 아직 모르겠다. 이런 판단에 필요한 것을 두고 유지기가 식(識·식견)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