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번째 희생자인 중국 동포 김OO(37)씨의 시신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 화성시 L골프장.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조사가 길어지면서 집중력이 떨어졌다. 어딘지 모를 어색한 표정과 몸짓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흔들렸다.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형사들은 사건 당일 아침부터의 행적에 대해 하나하나 짚었다. 하루 24시간 중 범행 전후 10여 시간을 완전히 해부했다. 예를 들면 ‘신발은 뭘 신었나’ ‘아침은 먹고 출근했나’ ‘뭘 먹었나’ ‘누구와 통화했나’ ‘넥타이를 매고 갔나’부터 시작해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었다. 그 결과 오전 11시 출근할 때의 복장과 범행 시간대인 3시22분경의 복장이 달랐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결국 무너졌다. 오전 5시경이었다. 강씨는 CCTV와 관련된 집중 추궁에 결국 고개를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했습니다.”
강씨가 털어놓은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범행 당일인 지난해 12월19일. 여자친구와 싸운 후 에쿠스 차량을 타고 귀가하던 강씨는 오후 3시10분경 군포시 보건소 인근 버스정류장에 홀로 서 있는 안씨를 발견했다. 그리고 “어디까지 가세요? 집에 태워다 드릴게요”라며 안씨를 차에 태웠다. 이후 강씨는 보건소에서 800m 가량 떨어진 47번 국도변에 차를 세우고 “연애 한번 하자. 나 그거(섹스) 잘한다”고 성관계를 제의했다. 안씨는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강씨는 주먹과 발로 폭력을 행사하며 안씨를 제압했고 2km 정도 차를 이동시켜 한적한 논두렁으로 끌고 간 뒤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안씨를 논두렁에 암매장한 강씨는 약 4시간 후인 오후 7시26분 안씨의 신용카드로 70만원을 인출했다. 경찰은 강씨의 자백을 토대로 안산 도금단지 부근의 논두렁에서 40~50cm 깊이로 묻혀 있는 안씨의 알몸 사체를 찾아냈다.
“제가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강씨로부터 안씨 살해 사실을 자백받은 수사팀은 그간 이 지역에서 발생한 부녀자 연쇄 실종사건들과의 연관성을 찾는 데 주력했다. 먼저 납치에서 살해, 암매장과 현금인출까지 불과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은 그가 절대 초범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안씨의 신용카드로 돈을 인출할 당시 더벅머리 가발을 쓰고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가락에 콘돔을 낀 치밀함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많은 저녁시간대에 현금 인출을 시도한 점, 신용카드를 ATM기에 넣다 뺐다 하는 특이한 손동작을 반복한 여유도 마찬가지. 안씨가 반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살점과 모근 등 DNA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이 남았을 것을 우려, 안씨의 열 손가락 손톱 부분을 전지가위를 이용해 모두 도려낸 것은 연쇄살인사건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이와 관련, 2007년 초 ‘부녀자 실종사건 수사를 위한 분석자료’를 발표했던 경찰청 김원배 수사연구관은 강씨가 검거되기 전부터 범인을 ‘쾌락 및 쾌락성 살인’을 즐기는 자로 예측, ‘위험인물’로 지목한 바 있다. 김 연구관은 “쾌락살인은 행위 자체시 느끼는 쾌감을 얻기 위해 범행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연쇄살인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붙잡힌 강씨는 단순히 돈이나 성욕 해소가 아닌, 살인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씨는 지난해 1월 맞선을 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입건되는 등 강한 성적 탐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강씨는 여죄에 대해서도 ‘증거를 내놓으라’며 완강히 부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해 수사팀을 애먹였다. 하지만 강씨의 점퍼에서 발견된 혈흔에서 2008년 11월9일 수원시 권선구 당수동에서 실종된 주부 김00씨의 DNA가 발견됐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분석 결과에 그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강씨가 살해한 여성은 무려 7명(노래방 도우미 3명, 대학생 2명, 주부 1명 회사원 1명)이었다. 이와 같은 강씨의 자백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형사들은 말을 잃었다.
강씨의 자백에 의한 수사 결과, 강씨는 2006년 12월 노래방에서 만난 배00(45)씨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1월까지 20여 일 동안 5명의 부녀자를 살해했고 1년 10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두 명을 더 살해했다. 강씨는 피해 여성 7명 중 3명은 노래방에 손님으로 찾아가서, 4명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강씨는 노래방에 갈 때는 모자를 써서 얼굴을 최대한 가렸으며 버스정류장에서는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에게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