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당신의 서가에 꽂힌 책과 교양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hicnunc@nate.com

    입력2004-01-29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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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사를 연구해 ‘근대의 책읽기’를 펴낸 바 있는 저자가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문화 속에 스며든 ‘앎’의 의미를 파헤친다. 새 연재 ‘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는 식민지 시대의 낯선 풍경과 유행처럼 스쳐 지나가는 오늘의 풍경 사이에 ‘의미의 다리’를 놓아줄 것이다(편집자).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조선시대 서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여대생 최득주양은 집안이 어려워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술집에서 접대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소 최양의 사정을 동정하던 학교 강사 원모(30)씨가 술집 ‘My Dear’로 찾아왔다. 원씨가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자 최양은 다음과 같이 발끈했다.

    “그까짓 교육 누가 받고 싶어는 한데요? 이젠 오라 해도 안 가요. 내겐 당치 않아요. 부잣집 딸년들 테니슨 시(詩)나 읽고, 캐베쓰 칼로리나 외구, 흥! 칼로리는 모르고 먹어도 난 맥주 맛이 좋더라.”

    최양은 가난과 학업중단에 마음을 다쳤기 때문인지, 테니슨(A. Tennyson, 19세기 영국 시인) 시를 읽고 양배추 칼로리를 외게 하는 대학 교양교육이 ‘부잣집 딸년’들에게나 가당한 것이지, 자신의 처지에서는 사치라 생각하고 있다.

    이태준이 1940년에 발표한 소설 ‘청춘무성’의 한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최득주는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전 문과(오늘날의 인문대)를 다니는 것으로 ‘설정’된 듯하다. 당시 이태준은 이화여전에 출강하고 있었고, 소설에서처럼 가르치던 여학생과 연분이 나 결혼까지 했다. 문과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최득주와 그녀의 친구들이 소설 속에서 영문학, 노문학, 한문학 지식을 주워섬기기 때문이다.

    생활고 때문에 유흥가에 뛰어든 여대생 최득주의 경우는 마땅히 동정받을 만한 것이지만, 1940년 당시의 평균을 고려할 때 최득주는 매우 예외적인, ‘한 줌도 안 되는’ 존재였다. 일제시기 내내 한국 여성의 문맹률은 90%를 넘었고, 1936년을 기준으로 여자아이의 보통학교 진학률은 13%, 여고보 진학률은 2% 이하였다.



    그래서 테니슨이나 칼로리라는 말을 알고, 나아가 그런 교양교육을 받는 것이 사치일 수도 있다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높은 교양이었다.

    근대에 들어서 미혼여성들이 최초로 직업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자 까소링(gasoline)껄, 까페껄, 빠스(bus)껄, 웨트레스(waitress)껄, 데파트(department) 껄들이 나타났다. 이들 중에서 가장 학벌이 좋아야 했던 ‘껄(girl)’은 데파트껄이었다. 1935년 11월, 서울 종로에 있던 ‘화신백화점’에는 여자판매원 14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중 여자상업학교를 빼면 이화여고 출신이 가장 많았고 동덕여고, 경성여고, 숙명여고, 배화여고 졸업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영어도 구사할 줄 알았다던 이들 젊은 여성이 가진 ‘교양’의 상대적 수준은, 지금의 대졸을 훨씬 능가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일제시대 여성의 절대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1937)를 보면 갓 여고를 졸업한 이들 백화점 판매직 여점원들이 서로의 ‘교양’에 대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저 계집앤 영화라면 왜 저렇게 죽구 못 살까?”

    “남 참견은! 이년아. 누가 너처럼 밤낮 고리타분하게 소설만 읽구 있더냐?”

    “흥! 소설 읽는 취미를 갖는 건 버젓한 교양이란다!”

    “헌데 좀 저급해! 읽는 소설이…… 그래두 추월색이나 유충렬전을 안 읽으니 그건 신통하다.”

    “아무리 근대적 감각을 향락하기 위해서 그런다구 하더래두 계집아이가 영활 너무 보러 다니면 뒤통수에 불(不)자가 붙는 법이다. 응? 알았어? 불량소녀….”

    요약하면 소설을 읽는 것은 좀 고리타분하지만 고상한 교양이고, 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세련됐지만 약간의 불량기를 감당해야 하는 취미라는 것이다. 저들 백화점 여점원들도 동시대 보통 여성들에 비하면 정말 많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끼리는 소설을 보느냐 영화를 보느냐, 그 중에서도 어떤 소설이나 영화를 보느냐 하는 문제로 고상함과 덜 고상함을 따진다. 과연 그러하다. 교양은 항상 상대적인 위치 감각, 곧 상-하, 고-저를 구분하여 값을 매기는 사회적 감각과 결부되어 있다. 교양은 각자 개인들이 개발하여 갖춰서(cultivating) 타인에게 내보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교양의 역사를 훑어보자.

    근래 ‘인문’ 분야에서 많이 읽히고 있는 책 가운데 ‘교양’(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들녘, 2001)이 있다. 이 책은 외모부터 사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하드커버에 싸여 있는 노란 책은 고시생들이 운반해 다니는 ‘민법총칙’에 절대 안 뒤질 만큼 뚱뚱하다.

    그런데 이 책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순간, 긴장은 경악으로 바뀐다. ‘교양’이라는 두 글자 아래에 붙은 책의 부제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Alles, Was Mann Wissen Muss)’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것들을 모르면 사람 축에 못 낀다는 말인가. 여기서 감히 독자 여러분께 묻노니, 1789년 7월14일 프랑스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것은 당신의 생과 가족의 복리에 중요한가? 물론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목 잘린 프랑스 임금 루이 16세가 포경(包莖)이었고, 이것이 봉건제를 끝장내고 근대 시민사회를 가져온 위대한 혁명과 뭔가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주 재미있다(‘교양’ 219쪽).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바스티유’를 듣고 그게 ‘두바이유(油)’의 일종인가 하는 사람보다 술자리의 대화를 한층 기름지게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더 잘나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정부가 2003년 10월29일에 발표한 ‘종합대책’의 디테일을 아는 것이나 연말 정산의 소득공제 항목을 줄줄이 꿰는 것보다 더 중요한가? 어떤 이득을 당신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가? 단연코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이라고 도발(挑發)한 ‘교양’의 독일인 저자나, 이 책의 ‘추천사’에서 ‘한 뼘도 안 되는 전문영역에만 갇혀 살며 길을 잃지 않으려면 교양을 많이 섭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어느 국회의원만이 아니다.

    일본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책 제목도 꽤나 선정적이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청어람미디어, 2002). ‘~되었는가?’라는 물음 속에는 ‘이미 바보가 되어 있다’는 답이 들어 있는데 저자는 그 근거로 ‘교양’의 부족을 든다. 즉 도쿄대생(특히 법학부 학생)들이 바보인 이유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 관료적인 교육행정에 질식한 엉터리 교육’으로 인해 한마디로 교양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목덜미가 후끈해질 정도다. 정말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의 요건에 대한 동서양의 논의가 많고도 복잡하지만, 논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첫째 ‘마땅히 갖춰야 할 여러 분야의 지식 자체’를 가리키고, 둘째 ‘그 지식을 활용하여 세상을 통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소양)’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셋째 ‘높은 인격(덕)과 성찰하는 자세’도 포함된다.

    서구적 교양의 일방주의

    독서인과 지배계층의 구성원에게 교양인이 될 것을 요청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고, 모든 시대에서 공통적으로 저 세 가지가 요구되었다. 교양의 추상적 일반항이라 할 세 가지 요건을 관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문주의다. 인문대학(문과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필수’와 ‘선택’과목 전체가 교양에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교양은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것이다. 교양에는 계급성과 국적, 성별, 지역성, 역사적 전통이 아로새겨져 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결코 보편적이지도 영원불변하지도 않으며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양’이라는 책이 독일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 잘 팔린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교양’의 목차를 들여다보라. 그것은 인문학적 보편인 문학(예술), 역사, 철학, 즉 ‘문사철(文史哲)’을 기본으로 한 듯하지만 그 문사철은 전적으로 백인과 유럽, 그 중에서도 영·불·독 세 나라와 미국의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가 말하는 백과사전적 ‘교양’에는 A부터 Z까지 체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태도가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 아도르노(T.W. Adorno)가 68혁명기에 했다는 ‘그릇된 삶 속에는 올바른 삶이 없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교양’ 577쪽)라 했다. 하지만 이 말을 오늘에야 처음 들은 내가 저주를 피할 방법도 모르겠고(사실 뭔 말인지 모르겠다), 아도르노가 동대문 패션타운에 있는 옷가게 이름이라 생각해도 혁명을 생각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점점 더 좁아지니, 궁극적으로, 뇌를 먹물로 적시지 않아도 인간으로서의 덕과 삶의 지혜를 얼마든지 갖출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교양이 “인간의 상호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교양’693쪽)이라 주장하지만, 그런 지혜와 덕이 있다면 서양미술사와 문학사를 몰라도 누구와도 인간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더 오기를 부려보면, 축구나 연예계 소식 같은 다른 이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무시하고(슈바니츠는 이런 소식은 교양인은 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셰익스피어나 베케트를 모른다고 ‘말이 안 통하네, 교양 없네’ 하며 잘난 척하는 그런 인간과는 소통할 필요조차 없다. 연을 확 끊어버려도 된다.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일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3층 배치도.

    그러나 다른 한편 ‘교양’이 잘 팔리는 것은 전혀 황당한 일도, 일방적인 문화 침탈의 결과만도 아니다. 우리 근대의 지식과 문화 체계는 이미 서유럽의 것을 수용하고 흡수·변형하여 디자인됐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유럽식 교양주의가 우리 교양의 기본 바탕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10년대와 20년대를 거치며 서구 교양주의에 의해 지식인의 요건이 다시 정해지고, 책 읽는 일반인의 자세가 가르쳐졌다. 독일식 교양주의도 우리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일본의 근대 대학제도가 특히 독일 대학을 모델로 고안되었다 한다. 우리 땅에 처음 세워진 대학과 학부가 그러한 일본에 의해 이식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대중적 책 읽기의 차원에서도 독일적 ‘교양’은 중요했다. ‘파우스트’는 어려워서 잘 읽히지 않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920년대 이래 연애하는 청춘들의 필독서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지와 사랑’ 등은 얼마나 오랫동안 한국 고등학생-대학생들의 책읽기를 지배했는가. 이들 책 자체가 속한 장르가 ‘교양소설(Bildungsroman)’이다.

    모든 변화는 1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먼저 ‘서구화’와는 전혀 무관한 16세기 조선 지식인의 소장 도서 목록을 살펴보자. 그런 다음 20세기초 식민지 시대의 독서인이 소장했던 책과 그 분류 목록을 살펴볼 것인데, 이를 독자 여러분의 책꽂이와 한번 비교해보시면 좋겠다. 그러면 교양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이하의 자료는 정창권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와 백승종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미암 유희춘(1513~77)은 조선 명종-선조 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장서가였다. 유희춘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책을 몹시 좋아하여 음악과 여색에 빠진 것처럼” 했다 한다. 장서가 3500여권에 달했다니 대단한 수준이다. 조선시대에는 책을 만들거나 사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교양 필수과목

    유희춘의 책은 경(經), 사(史), 자(子), 집(集)과 총서(叢書)로 분류되어 있다. 경, 사, 자, 집은 각각 갑(甲), 을(乙), 병(丙), 정(丁)부로 불리는 중국 고전 서적의 분류 기호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한학의 전통에서 지식인이 ‘읽어야 할 모든 것’이 경, 사, 자, 집에 들어 있는 것이다. 교과서에 해당하는 ‘사서오경’과 ‘소학’ ‘노자’ ‘순자’ 등은 경부, 즉 갑부이고, 을인 사부에는 역사, 지리, 관직 따위를 다룬 책이 속한다. 유희춘의 책에서는 ‘사기(史記)’ ‘자치통감’과 같은 중국 역사서와 ‘동국통감’ ‘문헌통고’가 여기에 속했다.

    유가, 병가, 법가, 도가, 석가, 기예, 술수 따위의 서적과 소설이 포함되는 자부에는 성리학의 비조 주희의 전집인 ‘주자대전’과 ‘향약집성방’ 같은 의서, ‘대학연의’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소설책인 ‘전등신화’도 있다. 문집과 시집인 집부에는 주로 한국의 사대부 문학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역옹패설’ ‘익재난고’ 같은 고려 선비의 문집에서부터 ‘패관잡기’ ‘금남집’ 등이 여기에 있다. 교양인이던 유희춘은 고전과 더불어 당대의 다른 교양인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제대로 된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기본 독서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5~7세 때 일단 천자문으로 한문을 떼고 난 뒤, 소학을 거쳐 논어·맹자·대학·중용 등의 사서와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등으로 나아간다. 이 사서오경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고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 성리대전 같은 좀더 본격적인 성리철학 서적과 자치통감·역대정사·동국제사 같은 역사서를 읽었다. 어느 하나도 빠지기 어려운 누백 년의 필수과목이었다(이런 필수과목 외에 과거합격을 위한 문학공부를 따로 했다).

    만약에 이런 커리큘럼만으로 줄곧 공부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저 책들 또한 누천 년에 축적된 우주의 진리에 대한 사유와 사람살이의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저것만 공부한다면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적어도 ‘행세’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왕따’가 되거나 ‘세상에 이런 일도’ 같은 TV 프로에 출연섭외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선 선비의 장서 목록이나 커리큘럼은 오늘날의 교양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조선의 교양과 오늘날의 교양이 연결돼야 하는 역사의 결정적 지점에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레테의 강’ 위에 걸린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버렸다. 그 다리를 급히 건너느라 조선의 교양이 가진 보편성마저 모조리 부정되고 잊혀졌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 유희춘과 오늘날의 독서가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지뢰와 중화기가 배치된 DMZ가 있다.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의 99%는 그 지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물론 ‘번역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기는 하지만).

    이찬갑(1904~74)이라는 지식인이 있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될 즈음에 태어나 사고가 형성되고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청춘기를 일제 때 보내고 분단과 전쟁과 4·19를 목격했다. 크게 출세한 적은 없으나 일생을 곧고 양심적으로 살았다. 평범했으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세울 만큼 신념에 불타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책을 사랑했다. 유희춘이 그랬던 것처럼 돈을 아끼지 않고 책을 사 모았다.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1958년 농촌운동을 위해 풀무학교를 세운 이찬갑과 그가 남긴 7권의 스크랩북.

    이찬갑이 소장했던 서적의 목록은 앞서 말한 단절이 어디서 왔는지, 100여 년 사이에 진행된 그 극적 전환의 한 국면을 알려준다. 이찬갑의 서적 중에 ‘동양고전’, 즉 유희춘과 그 후배들이 수백 년에 걸쳐 달달 외워온 교과서는 목판본 ‘사서삼경’ 달랑 1종밖에 없었다. 대신 이찬갑은 자신의 책꽂이 한켠을 영어로 된 Cambridge Bible Commentary 같은 책과 기독교사상가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등의 저작으로 채워놓고 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지식인들은 추상 수준이 가장 높은 형태의 교양, 즉 우주론이나 존재론에 관련된 형이상학도 필요로 한다. 이를 이데올로기적 교양이라 부를 만한데 세상을 통찰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사고와 인식의 틀이다. 이렇게 되면 교양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허전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다. 그게 없으면 전혀 지식인 행세도 못하게 되고, 도무지 피아(彼我)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각 세대마다 특유의 이데올로기적 교양을 갖고 있다. 예컨대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지식인 중의 상당수는 마르크스주의를, 1950~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실존주의를 공동의 교양으로 가지고 있다. 교양은 곧 세대감각(의식)과 연결되기도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이를 더 세밀하게 나누어 말해야겠지만, 일단 이렇게 뭉뚱그린다) 조선사회가 붕괴하면서 일군의 지식인들은 수백 년 이상 섬기고 ‘우려먹던’ 공자와 주자를 과감히 용도폐기하고 예수나 최제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런 변화를 컴퓨터의 메인보드를 갈아 끼우는 일이나, 아예 다른 운영체제(OS)를 적용하는 일에 비유할 수 있을까. 갈아 끼우고 새로 부팅하는 순간 이제 하드디스크의 성능은 전체적으로 단번에 업그레이드되고, 용량이 큰 어떤 소프트웨어도 자유롭게 로딩할 수 있다. 중세적 유일신을 부정한 서구 지식인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이제 뭐든 자유다. 그렇게 우리 근대는 열렸다.

    기억할 것은 이찬갑이 막무가내로 서구 지향적인 지식인이었거나 관념적인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이념형 교양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기독교의 수용 같은 엄청난 전회도 별로 놀라울 것도, 대단할 것도, 귀할 것도 없는 지식인의 ‘몸 가벼움’ 혐의를 조사받아야 한다. 지식인이라는 존재들은 지적 유행을 좇아 입장과 세계관을 차 바꾸듯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합체

    그러나 이찬갑은 우리 역사와 말글 문화 전통에 가장 예민했던, 중심 잡고 실천하는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또 다른 장서는 일제시기 문화민족주의의 탄생과 전개, 곧 ‘한국인’의 자기 발견으로서 국학의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장서 목록에는 ‘동양 고전’이 거의 사라진 대신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여유당전서’ 같은 ‘한국 고전’이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이들 고전은 한국사 연구의 ABC 같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한국인’으로서 ‘국사’를 보고자 할 때만 ‘고전’이다. 이들은 20세기 들어 고전이 된 책들이다. 조선이 중국문화권 전체에서 2등은 된다는 소중화(小中華)관을 갖고 있으면, 이런 책은 감히 고전은커녕 ‘교양 선택’도 안 된다. ‘자치통감’이나 ‘사기’ 같은 막강한 ‘교양 필수’며 고전인 책들이 수백 년 이상 버텼기 때문이다.

    또한 이찬갑의 서가에는 안확의 ‘조선문명사’(1923),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1929), 최남선의 ‘조선역사’(1931), 문일평의 ‘호암 전집’(1939) 같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 ‘주시경 선생 유고’(1933),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김윤경의 ‘조선문학 급 어학사’(1938), 김두봉의 ‘깁더 조선말본’(1925), 최현배의 ‘우리말본’ 등 국어학의 기초를 다진 책들도 있다.

    여기에 이광수의 소설과 김동인·박종화의 역사소설들, 그리고 최남선의 ‘심춘순례’, 안재홍의 ‘백두산 등척기’ 같은 국토 예찬기,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김재철의 ‘조선연극사’,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비롯한 당대 문학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다.

    열거한 이들 1920~30년대의 책을 통해 한국, 한국사, 한국어, 한국문학이 태어났다. ‘교양’의 지역적이며 주체적인 지반이 새롭게 닦인 셈이다. 이 책들은 상당히 대중적으로 읽힌 주류적인 교양이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역사적·민족적 전통을 디자인하는 데 소용되었다. 당신이 가진 한국인으로서의 기초 교양이 모두 거기에 들어 있다.

    이찬갑의 지향성을 단번에 이해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국사학자 이기백과 국어학자 이기문 형제가 그의 아들이며, 민족지도자 남강 이승훈이 그의 집안 어른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도 될 것이다. 민족주의적 교양을 분명한 한 축으로 하면서 동시에 기독교를 지향한 이찬갑의 사상은 뚜렷한 인적 계보에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서 집안 어른인 이승훈이 1907년에 설립한 ‘오산학교’를 다녔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경상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주자나 퇴계를 모시고 있어야 했던 데 비해, 평안도 사람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내다버렸다. 안창호, 이광수, 함석헌, 김억, 주요한이 ‘오산학교’를 나왔거나 ‘오산학교’에서 가르쳤다. 1898년 당시 한국 장로교 전체 교인 중 80%는 서북지방 사람이었다. ‘오산학교’에서 조금만 더 구역을 넓혀 장준하·백낙준·계훈제가 다닌 평북 선천 의 ‘신성학교’나 조만식·문익환이 다닌 평양의 ‘숭실학교’에까지 눈을 돌리면 해방 전후에 걸친 한국 기독교계 인명 을 모두 거론해야 할 정도다.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체, 양자를 매개한 것은 문화민족주의이며 근대화의 이념이다. 해방 이전 안창호·이광수의 근대화 사상, 한국전쟁 이후 함석헌과 ‘사상계’의 민족주의는 모두 같은 맥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는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서 묘사된 것처럼 ‘사탄의 침략(사회주의)’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사수해낸 이념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중 교양시대의 개막

    1920~30년대의 자료를 보면 ‘교양’은 두 가지 차원에서 당대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첫째는 지식인에 의해 운위된 지식인을 위한 교양론이다. 이는 교양의 일반적 조건과 특수한 실현을 따지는 교양론 그 자체였다. 1939년 11월 ‘인문평론’은 최재서, 이원조, 임화, 박치우, 유진오 같은 비평가들의 ‘교양론’ 특집을 마련했다. 여기서는 서구적 교양과 지성의 관계 문제, 이른바 혼란의 시대에 문학가의 태도 문제, 시민적 교양과 한국적 교양의 관계 등을 다루었는데 그 수준은 이미 오늘날의 것과 동일하다.

    논자로 나선 평론가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독일문학,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거나 경성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의 소양을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근대적 의미의 교양, 즉 근대 서유럽에서 계발된 시민적 교양을 어떻게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시민적 교양이란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개인주의로 ‘시민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개인의 자질과 훈련을 말한다. 시민적 교양을 어떻게 이 땅에 뿌리박도록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곧바로 1920~30년대 교양의 두 번째 차원과 관련된다.

    그러나 교양의 두 번째 차원은 오늘날과 단순 비교하기 어려운 사회 문화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말 자체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용례와 함의가 다소 다르다. 그것은 ‘가르친다’는 뜻의 동사 어간 자리에서, 그리고 ‘민중’이나 ‘무산자’, 때로는 ‘여성’ 같은 말을 목적어로 해서 주로 사용되었다.

    즉 ‘신흥청년도 무산자 교양에 힘을 쓰며 남북 조선 순회 강연 계획’(‘동아일보’ 1924.3.3), ‘구식 가정부인의 교양 기관을 설립하기로 목하 계획하는 중’(‘동아일보’ 1926.1.2), ‘민중을 교양하라’(‘동아일보’ 1926.12.3), ‘빈곤 자제 교양 하려던 천안 광명학원을 불허’(‘동아일보’ 1928.5.14) 등과 같이 쓰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양은 시민적 교양이나 이데올로기적 교양 이전의 교양, 교양을 갖기에 필요한 최소·최저의 요건에 관련된 기초 능력에 관한 것이다. 교양이 무진장 읽고 보는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일진댄, 최소한 까막눈은 면해야 할 것 아닌가.

    1930년의 조선총독부 공식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의 77.74%(남자 64%, 여자 92%)가 완전문맹, 즉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당달봉사였다. 1926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교양’이 일반 사회에서 새롭게 ‘뜨는’ 시사용어임을 지적하였다. 당시 활발하던 계급운동의 방향이 무산자 교육에 맞춰짐으로 인해 일반의 주의가 ‘교양’에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했다. 앎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요구가 엄청나게 커져서, 누구나 읽고 쓰고 학교에 다니기를 원하게 된 시기가 1920년대이다. 여러 가지 방법과 민간의 기구를 통해 문맹 타파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었던 것이다. 교양이 갖는 본연적 지배계급성(즉 시민성, 부르주아성)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교양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와 같이 앎과 배움이 상당히 평등하게,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분배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교양은 분화한다.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더 적게 가진 사람이 따로 있다. 무식자가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던 1920년대에도 서구적 학제와 교양의 개념이 들어와서 이미 제도 교육 속의 과목으로 안착했다. 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는 학생들은 문학개론, 영문학, 한문학, 동양사, 서양사, 철학개론, 철학사 등 문사철을 고루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부가 그러하듯 교양이 고루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양이란 독서인이나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임과 동시에 대중에게도 요청되는 덕목인 두 교양 사이에 소통의 길이 열림과 동시에 그 길을 한없이 복잡하게 갈라놓는 것이 근대적 앎의 형식이다.

    양배추 칼로리에서 마르크스까지

    1920년대 중반 이화학당의 수업 모습. 당시 여성의 문맹률은 90% 이상이었다.

    하프마라톤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것, 김치를 제대로 담글 수 있는 것, 탱고를 출 줄 아는 것, 손수 간단한 자동차 정비를 할 수 있는 것, 컴퓨터 사운드카드를 교체할 수 있는 것, 엑셀이나 포토숍의 간단한 툴을 사용하여 원하는 컴퓨터 문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이런 능력은 교양에 속하는가? 교양인이 일종의 전인(全人)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이 ‘~하는 일’도 교양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교양’의 저자에 의하면 이것은 교양이 아니다. 오로지 (책) 읽고 (그림) 보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문자문화적 ‘지성’이 근대적 교양의 본령이다. 여기에 ‘의사소통’ 문제가 결부되니 본 것을 바탕으로 입과 글로 ‘비평’할 수 있는 것이 교양이다.

    그런 점에서 다치바나의 사고가 훨씬 열려 있다. 다치바나는 전통적인 문학·역사·철학만이 아니라 뇌과학을 이해하는 것, 조직폭력이나 정치 같은 지저분한 암흑세계에 대해 아는 것, 영어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것, 경제기사를 이해할 줄 아는 것 등도 현대의 교양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에 더 눈길이 간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디트리히 슈바니츠, 둘 다 일종의 교양 근본주의자이며, 엘리트주의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두 사람은 1940년생 동갑이다. 그들은 각각 ‘후발 선진국’이었다가 파시즘에 이끌려 ‘추축국’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태어나, ‘선발 선진국’이자 ‘전승국’이 된 나라의 문학(불문학, 영문학)을 전공했다. 인간파괴의 국가적 가해 경험이 인문주의 옹호에 영향을 미쳤을까.

    교양은 특정 지역과 인간 동아리 안에서 길러진다. 교양은 보편적 인간 양식이자 지성의 꼴을 갖고 있으나, 특수한 것과의 모순적인 관계에서만 탁마된다. 그래서 교양은 괴로운 것이다. 교양을 한꺼풀 잘못 벗겨내면 계층의 아비투스와 이해관계가 있고, 한꺼풀 잘못 걸치면 ‘재수 없는’ 지적 허영과 사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양이 즐거운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말은 매우 역설적으로만 성립한다. 어쩌면 교양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지도 모른다. 교양 때문에 우리는 많이 가진 사람 적게 가진 사람,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일류대 출신 삼류대 출신으로 ‘구별 짓게’ 되고 위화감을 갖게 하거나 갖는다.

    그래서 뒤집어 생각할 필요를 느낀다. 누군가 그렇게 교양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교양이 전혀 ‘필요 없다’는 매우 사실적인 혐의를 받기 때문이리라. 진짜 필요한 것이라면, 그래서 말 안 해도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면, 그렇게 열심히 필요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교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런 외국인들의 책이 우리에게 준 충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도 교양(교육)은 이미 충분히 제도화되어 있다. 그들이 그렇게 심한 어투로 교양 없는 우리를 질타하지 않아도(우리를 질타한 적 없고 자국민을 대상으로 그렇게 한 것이나, 심히 질타당한 것만 같으니 피해의식일까?) 우리 모두는 교양인이 되는 교육을 받고 있고 받아왔다.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외는 수많은 국가적 교양 과목들과 대학에서 배우는 수많은 교양 ‘필수’와 교양 ‘선택’ 과목들이 그것이다. TV 퀴즈프로그램과 신문의 북섹션이 쏟아내는 것도 인문학적 교양이다. 우리는 이 모두를 열심히 이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마르다.

    그러니까 ‘교양’과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가 2000년대 초반의 한국사회에 쏙쏙 잘 ‘먹힌’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만들어놓은 ‘제도적 교양’의 한없는 허접스러움과 무식함 때문일 것이다. 정말 왜 배우고 가르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수없이 많은 교양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인문학적 교양의 필요성이 도저히 먹히지 않는 것은 삶의 강파름 때문일 것이다. 교양은커녕 생존이 불확실하기에 교양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술집에 나간 1940년의 여대생 최득주양이 주장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대학 안에서라면, 우리 대학생들을 ‘바보 이하’로 만드는 것은 취업난과 대학의 정신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는 소위 시장 원리와 신자유주의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또다시 뒤집어 생각해보자. 전인적 가치, 즉 교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우리가 그래도 양심을 가진 괜찮은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교양은 ‘필요 없음’, 즉 ‘돈 안 됨’에 의해 진정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교양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일지 모른다. 교양을 이미 가진 어른들은, 대학을 다니는 무식한 어린 바보들을 탓할 게 아니라 그 부모와 가르치는 선생과 자신을 탓할 일이다. 잘난 척하지 말고 나눠줘야 한다.



    한국의 어떤 돈 많은 사람들을 일컬어 가장 경멸하는 말 중 하나가 ‘졸부’이며,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함을 성찰하는 가장 자괴적인 언사는 ‘천민자본주의’이다. 천민이나 졸부는 교양과 상대되는 말들일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몇 달 전 자살한 어느 재벌가의 왕자와 변칙증여로 문제가 되고 있는 또 다른 재벌가의 황태자가 각각 전국적으로 ‘가장 돈 안 된다’는 국문과와 동양사학과를 나왔다는 사실이 새삼 괴이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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