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북한은 왜 불가침조약에 집착하는가

체제 유지·美 공격 차단의 ‘다목적 카드’

  • 글: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joseon@riia.re.kr

    입력2004-01-28 12: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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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6자회담을 앞두고 ‘다자틀 속의 공동문서 보장’도 수용할 수 있다는 선으로 물러서는 듯했던 북한이 최근 부시 행정부의 강경 분위기에 맞서 다시 ‘불가침조약’ 요구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하워드 딘이 ‘불가침조약을 포함한 패키지 딜’을 주장하고 나섰다.
    • 부시 행정부는 수용 불가를 주장하는 반면 북한은 이에 집착하는 북미 불가침조약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일까. 또 불가침조약이 체결될 경우 한반도의 안보상황, 특히 유사시 미국의 군사개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북한은 왜 불가침조약에 집착하는가
    미국과 북한의 밀고 당기는 신경전 끝에 북핵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2차 6자회담의 개최가 해를 넘겼다. 1월에는 6~10일 닷새간 미국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지만 21일부터 설 연휴가 시작돼 2차 6자회담의 1월 중 개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2차 6자회담에서는 최소한의 합의문이라도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높지만, 현재까지는 북미 양국의 입장차가 그다지 좁혀지지 않은 상태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북한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를 밝혀야 대북 안전보장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북한도 2004년도 ‘신년사’를 통해 “우리식의 사상과 제도를 전면 부인하고 위협하는 미국의 강경정책에는 언제나 초강경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우선 북한과 미국은 체제보장 방식에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북한 외무성은 2002년 10월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핵 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우리도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며 줄곧 불가침조약을 통한 체제안전보장을 요구해왔다. 지난해 10월20일 부시 미 대통령이 ‘다자틀 내 공동문서 보장’ 을 제안한 이후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선으로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이를 북한의 기본입장이 바뀐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북 안전보장에 대한 미 행정부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져 있다. 먼저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은 어떤 형태로든 대북 불가침 보장은 안 된다는 입장이며, 나아가 김정일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지난해 3월 베이징 3자회담이 개최되기 직전에는 “중국과 함께 북한을 압박해 북한 지도부를 축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럼스펠드 메모’가 알려져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러한 강경기류는 미 국방부와 CIA(중앙정보국)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다음은 콜린 파월, 리처드 아미티지 등 국무부 내 협상파의 입장으로, 조약의 형태는 아니지만 문서형태로 체제안전보장을 해줄 수 있다는 방안이다. 이들 협상파는 다자틀 속에서 북한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현재 북핵 6자회담을 주도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년 미 대선과 관련한 미국 정치권의 논의이다. 통상 미 행정부는 의회의 입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대통령선거가 있는 올해의 경우는 어떻게든 정치권의 정책공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공화당에서는 리처드 루가 상원 국제관계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북미 직접대화를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공화당 내 협상파들은 대북 체제보장과 북핵 프로그램을 맞바꾸는 ‘우크라이나 방식’의 ‘일괄타결(package deal)’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주당의 움직임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하워드 딘은 지난해 12월12일 ‘워싱턴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 에너지 지원 등을 해주는 일괄타결 방식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대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또한 후보자의 정견이 당선 뒤에 그대로 정책화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불가침조약을 제시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미국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을 선제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밝혀왔다. 그럼에도 북한은 체제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불가침조약이 필요하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과연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이라크 전후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공격할 능력과 의사는 충분치 않아 보이지만,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해 일본에서는 미국이 소형 핵폭탄을 이용해 평양을 공격한다는 시나리오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은 2002년 1월9일 미 국방부가 발표한 ‘핵태세검토(NPR)’의 내용과 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 이 보고서는 이라크, 이란, 북한 세 나라를 ‘악의 축’ 국가로 지목해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부시독트린’을 담고 있다. 2003년 3월19일(현지시간) 후세인 대통령 축출을 위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현실화되면서 이 보고서의 신빙성은 크게 증가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공격 감행설이 처음 나온 것은 1994년 가을 무렵이었다. 미국은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이듬해 6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선언서를 제출하자, 본격적으로 대북 무력제재에 착수했다. 1994년 가을에 군사작전의 전개를 목표로 국방부 국방정보국(DIA) 국장이 한국에 와서 휴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과의 전투교범(North Korea Handbook)을 만들어 주한미군 및 관계부대에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당사국인 한국의 반발 가능성 및 전쟁 장기화에 따른 미국 내의 반대여론 우려, 전비 마련문제 등으로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검토는 백지화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계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 국방부는 3년이 지난 1998년 ‘작계 5027-98’ 수정계획을 수립하고, 그해 상반기에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질 때 핵 관련시설들을 파괴하기 위한 대북 핵 공격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2002년 여름에도 미 국방부의 최고위 관계자들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관련시설을 목표로 선제공격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대통령선거가 걸려 있고 이라크 전후처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연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북핵문제의 해결전망이 어둡다면 대북 선제공격론이 재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세계 유일패권국가인 미국이라지만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 국가라고 해서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논란이 될 수 있다.

    설령 북한이 핵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전쟁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국제법이나 국내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더구나 북한이 실제로 핵무기를 개발했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확증도 없이’ 이라크를 공격한 과오를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전쟁권한법’의 힘

    미국 대통령의 전쟁개시 결정권을 제약하는 핵심적인 ‘법적’ 요소는 대통령과 의회의 전쟁권한 및 전쟁개시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전쟁권한법(War Powers Act, P.L.93-148)’이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경우는 ▲선전포고 ▲성문화된 특별권한 부여 ▲미국의 영토나 자산 또는 미군이 공격받는 국가비상사태 등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켰을 때뿐이다.

    우선 선전포고(a declaration of war)에 따른 전쟁돌입을 살펴보자. 선전포고는 세계 어느 나라의 헌법에나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미국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었을 때 의회의 결의를 통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회가 언제 선전포고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된 것이 없다. 미국 의회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다음으로, 성문화된 특별권한(specific statutory authorization)에 따른 전쟁돌입은 ‘북대서양조약’의 경우와 같이 ‘어느 한 나라라도 공격을 받으면 참전한다’고 보장한 동맹국을 돕기 위한 경우를 말한다. ‘유엔헌장’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경우에도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 ‘북대서양조약’이나 ‘유엔헌장’이 미 의회의 비준을 거친 것이므로 대통령의 권한도 조약과 헌장의 각 규정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국가비상사태(a national emergency)에 따른 전쟁은 쉽게 말해 자위권 발동에 따른 전쟁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이 미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경우. 2002년 9·11 테러사태 직후 이 사건을 배후조종한 테러단체 알 카에다의 근거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침공도 자위권 발동으로 인정되었다. 북한의 남침을 억지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한강이북지역에 전진 배치시킨 이른바 ‘인계철선’ 역할도 바로 이 조항에 근거한 것이다.

    “대통령을 제어하라”

    그렇다면 행정부의 전쟁개시결정권을 제한하는 이 ‘전쟁권한법’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이를 살펴보려면 먼저 2차대전 이후 전쟁권한을 둘러싼 미 의회와 대통령 사이의 긴장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미국헌법’ 제1조 8항에 따르면 의회만이 선전포고와 나포면허장을 승인할 권리를 갖는다. 아울러 ‘미국헌법’ 제2조 2항은 “대통령은 육군과 해군의 군 통수권자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 조항만 살펴봐도 전쟁권한과 관련해 의회와 대통령이 마찰을 빚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트루먼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절차를 거치지 않고 참전을 결정한 이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헌법적 요건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된 도화선이었던 통킹만 공격을 의회의 선전포고는 물론 승인도 없이 감행했으며, 리처드 M. 닉슨 대통령도 베트남전쟁 중 의회와 상의도 하지 않고 캄보디아로 전쟁을 확대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전횡에 미 의회는 크게 반발했다. 여기에는 1960년대 말 미국 내에서 불길처럼 타오른 반전운동의 영향도 컸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대통령에 의한 독단적 전쟁개시에 제동을 걸려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 바로 앞서 설명한 ‘전쟁권한법’이다. 다시 말해 이 법은 미 의회가 대통령의 일방적인 전쟁돌입을 견제하는 장치인 것이다. ‘의회와 대통령의 전쟁권한에 관한 합동해결(Joint Resolution Concerning the war powers of Congress and President)’이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는 이 법은 전쟁을 둘러싼 미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소재 및 개시절차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때까지 전쟁권한은 대통령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 법안은 대통령 권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법안이 미 상하원 합동위원회에서 만들어져 백악관으로 올라오자 닉슨 당시 대통령은 “지난 200년간 헌법하에서 적절히 행사되어온 대통령의 권위를 간섭하려는 시도”라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법안은 미 의회에서 다시 3분의 2 이상 압도적 찬성을 얻어 1973년 11월7일 확정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적대지역에 군대를 투입하기 48시간 전에 상하원 원내총무에게 동시에 통보해야 한다. 이어 하원 외교위원회와 상원 국제관계위원회에 회부하여 승인을 얻어야 하며, 의회의 휴회 또는 3일 이상 정회로 승인을 받을 수 없을 때는 상하원 의장이 공동으로 대통령에게 의회소집을 요청해야 한다. 만약 의회가 군사행동을 승인하지 않거나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면 60일 이내에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 다만 조기철수가 미군의 안전에 위해가 된다고 인정될 때 추가로 30일간 연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73년 ‘전쟁권한법’이 제정된 이후 미국은 이 법에 따라 적절하게 전쟁에 개입해 왔는가. 이 법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미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정할 수 없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그동안 미 행정부는 종종 이 법의 맹점을 이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미국 대통령들은 군사행동 48시간 전에 의회에 통보하기만 하면, 의회가 군사행동 승인이나 선전포고를 하지 않아도 60일 안에는 자유롭게 군사행동을 감행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했다.

    2003년 3월에 개시된 이라크전쟁의 경우에는 부시 대통령이 사전에 의회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의회로부터 모든 전쟁권한을 위임받는 편법을 사용했다. 미 의회는 2002년 10월 이라크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통령에게 전쟁에 필요한 모든 승인을 해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전쟁권한법’을 무시한 행위다.

    미국이 유엔결의에 매달리는 까닭

    그렇다면 미국이 북한에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선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할까. 또한 어떤 조건에서 전쟁결정이 가능할 것인가.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요건 가운데 의회의 선전포고는 1945년 이후 한번도 발표된 적이 없으며, 북한이 미국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자위권 발동에 의한 대북 공격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은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성문화된 특별권한’을 부여받는 경우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북한이 나토 동맹국을 공격하거나 유엔안보리가 북한에 대한 무력제재를 결의하는 경우다.

    미국이 북핵문제 해결의 최후 카드로 ‘안보리 회부’를 준비하고 있는 데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숨어 있다. 단순히 북한 공격에 대한 명분이나 정당성을 얻는 차원이 아니라,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두려면 안보리의 결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2003년 1월10일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이후 미국은 줄곧 북핵문제의 안보리 회부를 검토해왔다. 2003년 4월9일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미국은 북한을 비난하는 의장성명 채택을 추진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됐으며, 6월 하와이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회의에서도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안을 제의했다가 한국과 일본의 반대에 부딪쳐 중단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6자회담이 실패로 끝날 경우 북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여전히 굽히지 않고 있다. 일단 국제원자력기구가 안보리에 회부한 이상 북한 핵문제의 실질적 해결이 이뤄지기 전에는 ‘계류중’으로 남아 있어 미국이 원할 경우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상태다.

    북한은 왜 불가침조약에 집착하는가

    2003년 11월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미국이 ‘전쟁권한법’에 따라 대북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면, 과연 북미 불가침조약이 체결된다고 해서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될 수 있을까. 불가침조약은 제3국에 대항하는 의미를 갖는 동맹조약이나 상호원조조약과 달리 체결 당사국간의 전쟁가능성을 배제하려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이다. ‘국제연맹 규약’(1919)이나 ‘부전조약’(不戰條約·1928)에 의해 침략전쟁이 위법으로 간주됐음에도 굳이 국가간에 불가침조약을 맺는 이유는 체결국의 특수한 정치·군사적인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불가침조약은 조약 위반시 효과적인 제재수단을 갖추지 못한 것이 보통이어서 정세변화에 따라선 조약 자체가 깨지기 쉽다.

    장고 끝의 ‘묘수’ 불가침조약

    그렇다면 6자회담에 나서는 북한은 왜 문서조각에 불과한 불가침조약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부시 대통령은 절대 서명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으므로 잘해봐야 미 의회의 비준이 최고 수위인 게 현실이고, 특히 슈퍼파워 미국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음만 먹으면 문서 정도는 언제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소련(1937), 독일·소련(1939), 일본·소련(1941)간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전례가 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은 독일에 의하여, 일·소조약은 소련에 의하여 각각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이처럼 불가침조약이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불가침조약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북한의 속내는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언뜻 어설프게 보이는 ‘불가침조약 요구’라는 수는 검토해볼수록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눈여겨볼 것은, 불가침조약이 미 의회의 비준을 받으면 현재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권한과 절차를 규정한 ‘전쟁권한법’은 사실상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해 미 의회가 별도로 북한과의 불가침조약을 비준한다면 ‘전쟁권한법’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 군사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은 먼저 군사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제한공격은 물론 북한의 남침에 따른 미국의 군사적 대응도 법적인 제약을 받게 된다.

    북한의 남침 등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의회와 대통령이 일심동체가 되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는 등의 방법을 강구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미국 대통령의 전쟁수행 결정은 사실상 의미를 잃는다. 특히 이라크전 이후 심화된 미국 내 갈등 분위기를 고려할 때 미 대통령이 의회의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북한을 사전공격하려 한다면 군사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위헌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고 심지어 탄핵까지 각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북한은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다 해도 그의 팔을 묶어둘 수 있는 불가침조약의 의회비준을 촉구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는 미국 정치관련 법안과 메커니즘에 정통한 북한 내 전문가들이 고심 끝에 던진 카드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 점은 북한이 왜 종전의 ‘북미 평화협정’ 대신 불가침조약을 주장하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잘 드러난다.

    강화조약이라고도 부르는 평화조약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전쟁 종결방식이다. 평화협정은 교전국 사이에 존재하는 전쟁상태를 끝내고, 평화관계를 회복하는 조건을 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협정은 북미 양국의 정상적인 관계회복을 규정할 뿐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해줄 장치가 들어 있지 않다.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이후

    이런 점에서 볼 때 불가침조약은 북한측이 주장하는 대로 북한체제에 대한 구속력 있는 체제 보장방안임에 틀림없다. 북한이 2002년 10월 불가침조약안을 들고 나왔을 때 미국 내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셀리그 해리슨 같은 진보성향의 학자는 물론, 미 상·하원 비확산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대북 강경노선을 주도했던 민주당 에드워드 마키 의원도 관련 주변국간 불가침조약을 촉구했으며, 공화당의 커트 웰든 의원도 2단계 불가침조약 방안을 지지했다.

    최근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하워드 딘도 이 방안에 가세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처럼 불가침조약은 이미 북핵문제 해결의 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불가침조약이 체결될 경우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어떻게 될 것이며, 유사시 미국의 군사개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첫 번째로 예상되는 상황은 핵무기가 없더라도 여전히 다른 대량살상무기, 가령 생화학무기나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이 한국과 일본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사태다. 이 경우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드러났는 데도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무력사용을 못하는 상황, 다시 말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나 ‘미일 안보조약’과 ‘북미 불가침조약’이 충돌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실제로 ‘미일 안보조약’이나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미국은 안전을 보장(guarantee)하지 않고 단지 공약(公約·assurance)했을 뿐이다. 그러나 불가침조약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충돌이 일어날 때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더 이상 미일동맹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고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결국 북한의 핵개발 욕구를 자극하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다음으로 예상되는 상황은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가능성이다. 이보다 먼저 유엔사령부의 해체를 요구할 수도 있다. 북미 양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약속한 이상 유엔군이든 미군이든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국내 여론도 이 같은 북한의 요구를 지지하는 쪽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이 미국의 역할 없이 민족통일을 이루자고 호소할 경우 국내 여론은 ‘민족 대단결’론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이전에 유엔사령부가 해체된다면 유사시 유엔 다국적군의 참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며, 당장 주한미군의 철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전쟁에 대비해 수립해놓은 작전계획 시행 및 전시증원계획이 중단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남북한의 군사균형이 깨지고 오히려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것이다.

    동북아 뒤흔들 폭발력

    좀더 멀리까지 예상해보면,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 오키나와 주민을 포함한 일부 일본인들도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축소나 폐쇄운동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 쇠퇴가 그대로 한민족의 자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단견이다. 미국이 떠난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중국과 일본이 군비경쟁을 벌일 것이고 한반도는 주변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 불안정한 안보상황이 지속될 위험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불가침조약은 현 부시 행정부하에서는 물론,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공화당이 다수파인 미 의회에서 비준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만약 불가침조약이 체결된다면 이는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체제보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카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불가침조약은 단순히 북미 두 나라의 문제로 치부해도 좋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부가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의 안정을 뒤흔들 수 있는 불가침조약의 엄청난 폭발력을 직시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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