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설록의 상상력은 ‘반항’의 상상력이다.
- 이런 반항이 극단적 과장, 억지스러운 설정, 지나친 작위와 결합해 감상(感傷)이 넘쳐난다. 이것이 야설록 무협의 의의이자 야설록 인기몰이의 비결이며, 중국 무협소설의 틀을 벗어나는 활로가 됐다.
아마도 야설록의 영향을 받지 않은 후배 작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1980년대 후반 무협소설 작가들이 만화 스토리 작가로 변신할 때 이러한 변신의 최대 성공 사례가 됐던 것도 바로 그였다. 이현세의 ‘아마게돈’ ‘카론의 새벽’ ‘남벌’ 등이 모두 야설록이 스토리를 쓴 만화들이다.
무협소설이든 만화 스토리든 장르를 불문하고 야설록의 상상력은 언제나 ‘반항’의 상상력이다. 당겨 말하면 야설록의 반항은 고독, 허무, 퇴폐로 무장한 반항으로서, 어느 편이냐 하면 사춘기 청소년의 반항과 기본적으로 성격을 같이하는 반항이다. 이런 반항이 극단적 과장과 결합되고, 억지스러운 설정과 지나친 작위를 통해 구체적 모습을 얻게 되며, 감상(感傷)으로 충만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야설록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야설록은 어느 정도 부정적 평가를 면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런 점들로부터 야설록 무협소설의 중요한 의미가 생겨난다. 야설록이 인기 작가가 된 것도 바로 그런 점들 때문이었고, 한국 무협소설이 중국 무협소설, 특히 워룽성(臥龍生)의 대만 무협소설의 틀을 확실하게 벗어나는 경로도 야설록의 바로 그런 점들로부터 생겨났다. 더 넓게 보면 야설록의 사춘기적 반항은 198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적 분위기와도 상당한 조응 관계가 있는 것 같다.
邪派 주인공의 죽음
야설록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강호묵검혈풍영(江湖墨劍血風影)’은 1982년에 처음 출판됐고, 1995년에 ‘마객(魔客)’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됐다(이하 ‘마객’으로 칭하기로 함). 이 작품은 주인공을 사파(邪派) 인물로 설정했으며 그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삼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삼았으되 그 주인공이 정파(正派) 인물인 워룽성의 ‘옥차맹(번역 제목 ‘군협지’)’이나 상관딩(上官鼎)의 ‘침사곡’과도 다르고, 주인공이 사파 인물이되 그가 우여곡절 끝에 대협(大俠)으로 거듭나는 서효원의 ‘대설’과도 다르다. ‘마객’의 주인공 능조운(凌朝雲)은 사파 인물인 채로 죽는 것이다.
고아 출신인 주인공 능조운은 주루의 점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글자도 모르고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점원인데 다만 표정과 성격이 특이하다. 그의 표정은 무심하고 성격은 괴팍하다. 냉랭하고 도도하며 철저히 고독해지고자 하는 그가 경멸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그는 세상을 조소(嘲笑)한다. 그런 그를 어떤 사람은 싫어하고(그들의 학대를 그는 감수한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좋아한다(그들의 호의를 그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파 고수들인 무림칠환사(武林七環邪)가 그런 그를 택해 무공을 전수해 주고 그를 ‘마종지주(魔宗之主)’로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다. ‘억울하게 악인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들’, 즉 세칭 사파인들을 구하라는 것이 그들의 부탁이다.
마종지주가 된 능조운은 한 자루 묵검(墨劍)을 들고 ‘혈풍영(血風影)’이라는 이름으로 정파 무림과 싸우며 그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무림의 패자가 된 능조운은 사파가 지배하는 세상의 추악한 실상에 직면해 깊은 절망에 빠지고 그리하여 죽음을 자청한다. 자신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백연하의 무기에 스스로 가슴을 찔리는 것이다.
혜성처럼 무림에 나타나 정파의 썩은 심장에 사나운 검을 휘둘러댔던 풍운아, 그는 마침내 죽었다.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도, 최후엔 허무와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백연하는 그를 찔렀으나 그는 결코 백연하에게 찔리지 않았다. 그를 찌른 것은 바로 허무, 그 예리한 칼날이었다.(1994년판 제3권 248쪽)
전체적으로 보자면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은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기성 질서이다. 고아원 시절부터 점원 생활을 하기까지 겪었을 못 가진 자의 설움을 통해 주인공 능조운은 그 기성 질서의 부당성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를 학대하는 주루의 장방(帳房)이 그 부당성을 대표한다.
능조운이 사파 무림인이 된 뒤로 기성 질서의 부당성은 주로 정파 무림인들을 통해 나타난다. 서장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이 작품 속의 무림 사회는 바야흐로 사파가 쇠퇴하고 정파가 득세했으나 정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득세한 정파에게 의협과 선행은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자만심과 이기심만이 팽배해 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정파의 연합 세력인 무림맹이다.
능조운은 정파의 위선을 폭로하고 위선자들을 응징한다. 예를 들어 출운유객 악건은 의제(義弟)를 죽이고 그의 비급을 탈취했으며, 무적신권 조천명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여인을 강간 살해했다. 정파의 최고 신분으로 무림의 존경을 받는 소림파의 천외성승이 가장 극단적인 예다. 그는 출가 이전에 자신의 약혼녀였던 여인을 그 남편과 함께 살해했다. 능조운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때 천외성승을 존경하는 무림맹의 총사 백연하가 “인간에겐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에요. 아직도 저희들은 성승을 믿고 있어요”라고 위로하는데, 그러나 백연하야말로 천외성승을 필두로 한 정파 무림인들에게 보물을 빼앗기고 살해당한 백대 선생의 딸이며(이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참회의 눈물을 흘린 뒤에도 천외성승은 자신의 공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갈혜를 죽이고 그 피를 빨아먹는다. 그렇다면 그 참회의 눈물은 진실인가 허위인가.
능조운은 점원일 때나 마종지주일 때나 한결같이 기성 질서의 부당성에 대한 반항의 표상이다. “냉막과 고독으로 하여 마치 황야에 우뚝 선 한 마리 늑대와도 같았다”라는 묘사는 반항의 표상에 썩 어울린다. 그런데 그의 반항은 동기와 의도에서는 순수하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그 자신도 정당성을 훼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반항이다. 이것은 야설록식 ‘반항’이 갖는 숙명적 아포리아다.
능조운이 무림의 패자가 되고 사파가 무림을 지배하게 된 뒤 사파인들의 횡포가 도처에서 행해진다. 강간, 살인, 약탈 등의 추악한 행위가 만연하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위선의 지배를 택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될 만큼 세상은 추악한 행위로 가득 찬다. 바로 이 때문에 능조운이 절망에 빠지고 허무에 사로잡혀 죽음을 자청하게 되지만, 사실 능조운의 반항은 그 문제 설정 자체부터 이미 이러한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한계는 서사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연성이라는 기준에 입각해서 볼 때 가령 그토록 현명한 능조운이 무림을 제패한 뒤 그 적절한 관리를 위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능조운의 현명한 참모들도 마찬가지다. 백연하의 위험성을 잘 알면서 그녀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는 것 역시 개연성이 적다. 백연하 또한 그토록 지모가 깊으면서도 정작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는 거의 불감증 증세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백연하에게 진실을 밝히고 그녀와 함께 혼란에 빠진 무림을 개혁해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선택은 애당초 배제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의 서사는 개연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이다.
거듭남을 위한 희생양
그러나 각도를 바꿔 생각하면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야설록식 반항을 그리기 위한 작위의 소산이며, 그래서 오히려 필연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야설록식 반항은 ‘문제 설정의 단순성과 반항 이후에 대한 전망 없음’으로 특징지어지는 나이브한 반항,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춘기적 반항이다.
주목할 것은 천외성승이 백연하에게 느끼는 애정이라든지 능조운과 천외성승이 공감하는 고독자(孤獨者)의 고뇌,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진실인가 허위인가를 묻게 만드는 천외성승의 참회의 눈물 같은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진실/허위의 이분법적 틀에서는 모순적이라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아마도 진실은 이 모순 속에 있을 것이지만, 이 작품은 이 모순을 단편적으로 언급할 뿐 그것에 대한 성찰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그 성찰을 서사의 핵심에 놓았더라면 이 작품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은 사춘기적 반항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춘기적 반항은 그 모순을 배제한 채 감상으로 가득 찬 장렬한 비극적 최후를 향해 치달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능조운 역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야설록과 그의 주요 작품들.
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림 세계 자체의 일정한 성숙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그 성숙의 내용이 어떤 것일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앞에서 말한 모순으로서의 진실과 관계되는 성숙이리라 짐작할 수는 있겠다.
고독한 늑대
그렇다면 능조운의 반항과 비극적 죽음은 일종의 희생양인 것이 아닐까. 그것을 통해 외적으로는 세계 질서의 거듭남이 가능해지고 내적으로는 사춘기 청소년에서 성인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지는 그런 희생양 말이다. 바로 그런 희생양을 과장되게, 그리하여 강렬하게 그렸기 때문에 청소년층 독자들 사이에 야설록의 인기가 그토록 높은 게 아닐까.
작가는 흔히 첫 작품에서 자신의 여러 모습을 다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야설록의 경우도 그러하다.
우선 ‘마객’과 같은해에 나온 ‘강호벽송월인색(江湖碧松月人色)’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엔 대만 무협소설의 흔적이 뚜렷하다. 서장(티베트)에서 온 신비고수가 중원의 고수들을 꺾은 후 20년 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중원에서는 그 신비고수와 대결할 청년 고수를 선발한다는 이야기는 워룽성의 이름으로 번역 출판된 한 작품(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에 나온 것이고, 쌍둥이 형제가 어려서부터 각각 정파와 사파 인물들 손에서 자라나 훗날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구룽(古龍)의 ‘절대쌍교(絶代雙驕)’에 나온 것이다(그러고 보면 야설록이 특히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 작가는 구룽인 것 같다. 구룽에게도 ‘고독’은 주된 테마다).
구룽이 그랬던 것처럼 야설록도 사파 인물들 손에서 자라난 야유랑(夜遊狼)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여기서 야설록은 야유랑을 신비고수의 잃어버린 아들로 설정하여 살부(殺父)를 핵심 모티프로 삼음으로써 자기 나름의 서사를 구축했다. 야유랑이 어머니뻘인 화중성 설지를 두고 신비고수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마지막 비무(比武)에서 신비고수를 죽이는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이라고 할 만하며, 이 점에 주목하면 이 작품 역시 반항 주제의 한 변주이자 일종의 성인식(成人式)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1983년작 ‘영웅비파행(英雄琵琶行·1996년에 재출판하면서 ‘협객’으로 개제)’은 ‘마객’과 상반되는 설정이다. 주인공 무검혼(武劍魂)은 팔려온 노예로 등장하여 온갖 고초를 겪는 데다 무심한 표정에 괴팍한 성격이라는 점에서 ‘마객’의 능조운과 유사하지만, 정파의 고인 논검기재에게 배우고 다시 소림사의 공공대사에게 배워 고수가 되는 데서부터 능조운과 달라진다(무검혼의 본래 신분이 귀족이라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검혼은 무도를 추구하기 위해 비무행에 나서고 이로 인해 정·사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나는 늑대를 좋아하지. 그들은 고독하며 또한 그 고독에 가장 충실한 특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의 무검혼은 능조운과 흡사하다. 그러나 중원 제일화라는 상품을 거부하며 군중을 향해 “무림은 부패했소. 무인들의 마음은 썩었소. 협의는 사장(死藏)되고 이기(利己)와 배덕이 그 위를 판치고 있소”라고 질타할 때의 그는 이미 대협(大俠)이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정·사의 구별을 초월한 대협 무검혼의 탄생으로 종결되는바, 필자에게는 야설록의 ‘반항’이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의 유행 사조와 타협해가는 과정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질서, 그리고 파멸
‘북경야(北京夜·발표연도 미확인)’의 주인공 최세옥(崔世玉)은 남옥(藍玉) 대장군 휘하의 소년 장군이다. 역적으로 몰린 남옥을 끝까지 수행하다 체포당한 그는 감옥에서 5명의 동지를 만나고 함께 탈출, 중원겁화방을 세운다. 가문의 발원지를 찾아 무공을 완성한 최세옥은 “천하의 억울하고 불행한 자들은 모두 모여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구대문파에게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일반 문파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한다.
정치에서 무림으로 장소가 옮겨졌지만 최세옥이 하고자 하는 것은 기성 질서를 해체하고 ‘억울하고 불행한 자들’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창방 1년여 만에 중원겁화방은 중원을 제패하는 데 일단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 뒤에 오는 것은 새로운 질서 세우기가 아니라 급속한 파멸이다. 6명 동지 중 한 사람인 위무웅이 내분을 일으킨 데다 무림맹의 총사 백선하(그녀는 ‘마객’의 백연하를 연상시킨다)가 무섭게 공격을 해와 중원겁화방은 급속히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최세옥은 무림의 정·사 양파와 새외(塞外)의 변방 무림 세력, 그리고 명나라 군대 등 15만 연합군을 향해 연인인 검후 군의평과 함께 뛰어든다. ‘마객’의 사파가 여기서는 정치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중원겁화방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능조운의 죄책감으로 인한 절망이 최세옥에게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 대신 능조운이 피할 수도 있는 파멸을 스스로 선택한 데 비해 최세옥에게는 파멸을 피할 수 있을 만한 여유조차 없다.
말하자면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이 패배로 귀결되는 불가피성은 ‘북경야’ 쪽이 훨씬 크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북경야’의 반항은 ‘마객’의 반항보다 좀더 성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객’의 비극이 반항 자체의 성격에서 주로 비롯된다면 ‘북경야’의 비극은 현실의 엄혹성에서 주로 비롯된다.
자학적 반항 = 알리바이
1985년작인 ‘대협객(大俠客·1997년 재출판되면서 ‘사객’으로 개제)’은 반항의 주체에게 도덕적 정당성의 여지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래의 반항 서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작가 자신이 어디선가 밝힌 바 있듯이 1985∼86년은 “한국 무협으로는 최악의 시기”였고 작가 개인적으로는 “절망의 나락을 헤매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쓴 작품들은 “매우 어두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며 극도로 허무적이고 감성적인 문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작가 자신의 해명이거니와 ‘대협객’이라는 아이러니컬한 제목이 붙은 이 어두운 이야기는 그 해명과 일정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대협객’의 주인공 군천랑(君天狼)은 ‘마객’의 능조운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탁월한 자질을 바탕으로 절세의 무공을 갖추고 중양회(重陽會)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무림을 제패하는 데 성공하지만, 필경은 정파 무림의 역습에 당해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많은 부분에서 군천랑은 능조운과 다르다. 우선 군천랑은 정파 무림맹주의 제자로 등장한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가 아닌 것이다. 대신 그에게는 타고난 천성이라는 문제가 있다. 그는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며, 그에게 선악의 기준은 이 세상의 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함’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 속에만 있다.
무공 비급을 탈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형을 세 명이나 죽이면서도 그가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에 군천랑은 아무런 도덕적 정당성도 없는 사악한 존재일 뿐이다. 그가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파문당하는 장면에서부터 핍박받는 자라는 능조운적 이미지가 생겨나지만, 이 이미지는 끝내 주도적인 것이 되지 않고 사악한 자라는 처음의 이미지와 착종된 채로만 나타난다.
또 ‘마객’의 능조운에게는 무림 제패 이후의 추악한 현실에 직면할 때의 충격(죄책감과 허무감을 내용으로 하는)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직접적 계기가 되지만 ‘대협객’의 군천랑에게는 그런 충격이 없다. ‘대협객’에서 그 충격을 받는 인물은 군천랑의 첫 번째 부하 유자류이고, 유자류의 배신이 군천랑의 파멸을 불러온다.
그러나 군천랑을 최종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이다. 그는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마적떼에게 윤간을 당하고서 낳은 아이였으며, 폐병에 걸린 채 싸구려 창녀가 되어 있는 친모와 대면하여 자신의 기원이 밝혀지는 충격의 순간 그는 심장을 칼에 꿰뚫린다. 군천랑의 반항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정당성이 결핍되어 있다.
‘혼성 모방’과 자기 복제
반면에 ‘대협객’의 정파 무림은 ‘허례와 위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객’의 그것같이 근본적으로 부당한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기성 질서에 대한 나이브하지만 나름대로 정당한 반항이라는 의미가 ‘대협객’에서는 극히 엷어진 것이다. 군천랑이 반항의 표상이라면 그 반항은 자학적 반항이고, 오히려 기성 질서의 정당성 내지 불가피성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알리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협객’은 위험한 욕망의 위험하지 않은 분출을 통해 그 위험성을 제거하는, 기성 질서의 유지에 복무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야설록의 반항의 본래적 모습은 이것으로 종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야설록은 자신의 반항의 본래적 모습을 장르를 옮겨, 즉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계속 그려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설록의 기법에 관해 살펴본다. 우선 그는 혼성 모방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제재나 모티프, 장면 등을 다른 텍스트로부터 차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가장 많이 차용한 것은 대만 작가 구룽이다. ‘강호벽송월인색’은 ‘절대쌍교’를, ‘녹수옥풍향(綠樹玉風香)’과 ‘도수(盜帥)’는 ‘초류향(楚留香)’을 차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일본 사무라이 소설의 차용도 눈에 띈다. ‘강호벽송월인색’에서 호미질 하는 노인 이야기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한 삽화를 차용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북경야’에 등장하는 일본 무사들의 이름은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하시모토 쇼지(橋本昌二)인데, 이는 오늘날 일본 프로 기사들의 이름이다(야설록은 바둑을 꽤 두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야설록이 자기 자신의 복제를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것을 패턴의 반복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마객’에서 능조운이 무림사혈을 포섭하는 장면(1995년판 제2권 56∼72쪽)은 ‘북경야’에서 최세옥이 무림사독을 포섭하는 장면(1999년판 제2권 125∼142쪽)과 똑같다. 능조운과 최세옥은 약초 재배법과 요리법, 독약 복용, 음공(音功) 대결, 바둑 등을 통해 각각 무림사혈과 무림사독을 포섭한다. ‘마객’에서 아미파의 불영상인을 암살하는 장면(제2권 247∼250쪽)은 ‘대협객’에서 무당파의 도선 우고를 암살하는 장면(제3권 96~100쪽)과 똑같다. 불상을 상대로 도박을 하고 장삼풍 조사상을 상대로 술을 마시는데, 그 불상과 조사상이 사실은 변장한 살수(殺手)였다.
‘북경야’의 위무웅이 최후의 피신처를 찾아갔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독살당하는 장면(제3권 233∼237쪽)은 ‘대협객’의 군천랑이 최후의 피신처에서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에게 독살당하는 장면(제3권 232∼238쪽)과 유사하다. 그 중 일부만을 대조해보자.
위무웅은 술잔을 가볍게 들어보았다. / 말간 호박색 액체가 시선을 자극해왔다. / “음…좋군. 옥호춘이오?” / “독주(毒酒)예요.” / 위무웅의 손에서 술잔이 뚝 떨어져내렸다. / 그는 아내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 “지금…뭐라고…했소…?” / “독주라고 했어요.” / 순간 위무웅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북경야’ 제3권 235쪽)
군천랑은 술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 말간 호박색 액체. / 그는 술을 한 모금 입 안으로 넘기며 말했다. / “좋군. 옥호춘이오?” / 대군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 “독주예요.” / 군천랑의 술잔을 들던 손이 뚝 멈춰졌다. / 그는 대군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 “지금…뭐라고…했소…?” / “독주라고 했어요.” / 쨍그랑! /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대협객’ 제3권 235쪽)
이렇게 유형화된 장면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야설록의 기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문제은행식으로 유형화된 장면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그 데이터베이스로부터 필요한 장면들을 골라내 간략하게 짜여진 스토리라인 곳곳에 삽입하면 한 편의 소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산성을 제일 목표로 하는 ‘소설 공장’에서라면 이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패턴의 반복
그러나 이는 ‘제작 기법’ 내지 ‘조립 기법’이지, ‘창작 기법’은 아니다. 우리가 야설록에게 기대하는 것이 ‘창작’일 때 이러한 기법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기계를 조립하듯 준비된 부품(똑같은 장면)을 끼워넣는 것과, 패턴 자체의 변형에 초점을 맞추고 그 변형을 그 작품의 서사적 독자성과의 유기적인 관련하에서 수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패턴의 반복도 이렇게 변형을 근본 계기로 한다면 창조적 반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야설록의 한계와 약점이 어떻든 간에 그가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의 대표자이며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배 작가들의 새로운 성과는 야설록이 뿌린 자양분 없이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설록의 반항의 변주는 그것만으로도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충분히 주목되고 기억될 만한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