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의 돈일까. 안기부 계좌에서 빠져나온 돈의 정체를 두고 공방이 뜨겁다. 1992년 대선잔금설에서
- 안기부 횡령예산이라는 주장까지.
- 논란의 주인공들이 보인 최근 며칠간의 부산한 움직임들.
정인봉 변호사의 문제제기로 ‘안풍자금’ 논란이 새롭게 시작됐다.
지난 1월14일 김 전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다만 측근 박종웅 의원을 통해 ‘재판이 시작된 3년 전부터 떠돌던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정치권도 논쟁에 가세했다. 한나라당은 홍준표 의원 등 강 의원 변호인단에서 활약했던 의원들을 중심으로 강 의원과 김 전 대통령을 상대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서명작업을 벌였다. 반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안기부 예산 전용 혐의로 궁지에 몰린 강 의원과 한나라당의 군색한 주장일 뿐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사실 정인봉 변호사의 돌연한 폭로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안풍사건은 오래 전부터 정치권에 빅뱅을 불러올 뇌관이었다.
초호화 ‘안풍’ 변호인단
2001년 봄, 강삼재 의원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세칭 안풍정국이 전개됐다. 그러자 당시 한나라당은 초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강 의원과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등 두 피고인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야 했던 것.
우선 내로라하는 당내 율사를 총동원해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한나라당의 율사 출신 국회의원 모두가 사안에 따라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재판에 참여했는데, 박희태 안상수 홍준표 이주영 엄호성 의원 등이 재판정에 자주 모습을 보였던 변호사 출신 의원들.
현역 의원 외에도 장기욱 정인봉 이정락 서정우 변호사 등이 1심 끝까지 법정을 지켰다. 특히 이정락 변호사와 서정우 변호사는 각각 이회창후원회 회장과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이 전 총재의 최측근들. 서정우 변호사는 얼마 전 지난 대선직전 불법 선거자금 모금에 나선 것이 드러나 구속되는 불행을 맞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회창 전 총재와 한나라당은 가용인력을 총동원해 안풍 재판에 맞섰는데, 이것만으로도 한나라당이 이 사건이 미칠 정치적 파장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최근 강삼재 의원의 변호인들은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안기부 계좌에서 빠져나가 신한국당으로 들어 갔다는 940억원이 결코 안기부 예산이 아니며, 돈의 출처는 강삼재 의원의 ‘주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융실명제 덫에 걸린 YS
장기욱 변호사는 “어느 정당조직을 봐도 우두머리는 당 총재다. 당연히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핵심에는 총재가 있게 마련이다. 사무총장은 단지 조달된 돈을 집행하고 조직을 관리하는 역할만 맡아왔다. 안기부 자금이 선거에 쓰였던 1996년 신한국당의 총재는 김 전 대통령이었고 강 의원은 그의 명령에 따라 당을 관리하는 사무총장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장 변호사는 또 “강 의원과 김 전 실장의 ‘공모’여부를 판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전 안기부 운영차장실 여직원의 진술이 재판 과정에서 바뀌었는 데도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 변호사의 전언.
장기욱 변호사는 “검찰측 증인의 법정 진술이 바뀌었는 데도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측이 강 의원의 무죄를 주장하는 세 번째 근거는 정치자금법이 요즘처럼 엄격하지 않던 1995~96년 당시 상황에서는 아무리 정치자금이 궁했어도 안기부 예산 전용과 같은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절대 없었다는 것.
장 변호사는 “1997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법정한도를 초과해 모금한 정치자금은 불법자금으로 보고 처벌한다. 하지만 개정 전에는 한도를 초과해 모금한 정치자금은 ‘비공개 자금’일 뿐 불법자금은 아니었다. 거액의 비공개 자금을 조성할 경우 비난의 대상은 되지만 사법처리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안기부 예산 전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엄연히 범법행위다. 국가 예산을 빼돌려 정당의 선거를 치른다는 건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하기 힘든 범죄행위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엄하게 처벌받도록 돼 있다”고 주장했다.
장 변호사는 “940억원은 명백히 김 전 대통령의 통치자금, 혹은 대선잔금”이며 “김 전 대통령이 임기 초반 개혁 정책으로 밀어붙인 금융실명제를 피하려고 안기부 계좌를 통해 돈 세탁을 하면서 일이 꼬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변호인단의 주장일 뿐, 지난해 9월 1심 재판부는 특가법상 국고 등 손실죄와 국정원법 위반을 인정, 강 의원에게 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을, 김 전 실장에겐 징역 5년에 추징금 125억원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검찰수사나 1심 재판부가 앞서 말한 쟁점에 대한 진실규명을 철저히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정인봉 변호사 등의 전격 문제제기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안풍 사건의 전면에 등장했지만 재판이 시작된 2001년 봄부터 이 사건 변호인단을 중심으로 김 전 대통령이 나서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이 꾸준히 흘러나왔다.
2001년 봄 김 전 대통령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서도전(書圖展)을 연 적이 있다. 여기서는 서도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것은 물론 ‘대도무문(大道無門)’ 등 김 전 대통령이 즐겨쓰는 휘호를 현장에서 써주고 돈을 받는 이벤트도 이루어졌다.
입장 엇갈린 변호사들
바로 그 자리에 강 의원의 변호인 장기욱 변호사가 찾아갔다. 당시 장 변호사의 손에는 안풍사건 검찰수사기록 복사본 서류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장 변호사는 서류 보따리를 건네며 “이제는 대통령께서 나서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묵묵부답, 장 변호사의 말을 외면했다고 한다.
안풍 사건 변호사들 사이에도 미묘한 입장차이는 있었다. 한나라당 당원인 정인봉 변호사가 주로 한나라당 입장에서 변론을 한 반면 당원이 아닌 변호사들은 재판 초기부터 김 전 대통령 책임론을 강하게 거론했다. 1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YS를 끌어들이지 않던 정 변호사가 지난 1월13일 기자들을 만나 김 전 대통령 책임론을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서자 정가에서는 한나라당 차원에서 안풍 사건에 강하게 대응하기로 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정 변호사가 언론을 상대했다면 장 변호사는 상도동으로 전화를 걸어 김 전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지난 연말 김 전 대통령이 일본을 다녀온 뒤 면담을 주선해주겠다던 비서실장도 연락이 끊어졌다. 최근에는 변호인들이 전화를 걸면 비서실장이 자리에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라고 한다.
YS가 침묵하는 진짜 이유
과연 김 전 대통령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 1월14일 공개석상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할말 없다’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평소 알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그 동안 “YS 하면 곧 의리 아니었나. 하지만 최악의 사태에 내몰려 의원직까지 내던지며 몸부림치는 강삼재 의원을 외면하는 모습은 평소 알던 YS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강 의원 변호인단의 한 관계자는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라고 전제한 뒤 “정인봉 변호사의 YS책임론이 공개된 직후인 1월14일자 신문 기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게 무엇일까. 다시 뒤져본 14일자 조간신문 정치면 한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15일 경남 거제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7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임을 선언할 예정이다. 현철씨의 한 측근은 13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이 공천신청을 하면 현철씨는 경선을 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다며 김 의원과 정면 대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동안 현철씨는 한나라당 공천 문제를 놓고 김 의원과 신경전을 벌여왔다.’
이번 사건 변호인단은 김 전 대통령이 안기부 자금에 대해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이면에는 아들 현철씨가 있다고 믿고 있다. 앞서의 인사의 전언.
“안풍 자금이 김 전 대통령의 통치자금, 혹은 대선잔금이라고 가정할 때 누군가는 그 돈의 모금에 관여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자신이 했을 수도 있고 측근 누군가가 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측근이 현철씨라면 어떻게 될까.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고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불행했던 과거를 걷어내고 이제 정치인으로 새 출발하려는 현철씨가 또다시 대선자금 모금과 관련해 구설에 말려든다면 아버지로서 YS는 무척 괴로울 것이다. 만약 안풍 자금의 원주인이 김 전 대통령이라면, 그것말고는 그가 침묵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상도동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한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전망이다.
한편 이번 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인 강삼재 의원은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안풍 사건이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된 지난 1월14일, 강 의원측은 도와준 변호인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2심 첫 공판이 있는 1월16일 조찬모임을 갖자는 것이었다. 1심 재판이 진행되는 지난 2년8개월 동안 강 의원은 대부분 오후에 열린 재판을 앞두고 변호인들과 점심식사를 같이하며 전략을 숙의해왔다. 16일 재판도 오후 2시로 잡혀 있다. 그런데 이날만은 변호인들과 아침을 함께 먹었다. 새벽같이 만나자는 강 의원의 전갈에 한 변호사는 이제 그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냐고 말했다.
실제 정 변호사 등의 폭로가 있기 전 강 의원은 사석에서 변호사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는데, 그의 말에는 ‘주군’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이 적잖이 묻어났다고 한다. 다음은 강의원이 측근 변호사에게 털어놓은 속내.
본격적인 진실게임은 시작되고
“솔직히 지역구에 가면 지지자들이 ‘왜 당하고만 있나. 이제는 밝히라’고들 한다. 하지만 막상 내 입으로 진실을 말하면 그간 나를 동정해왔던 당원들은 속으로 나를 ‘의리 없는 사람’이라고 욕하지 않겠나. 솔직히 그게 부담스럽다.”
항소심을 시작하며 변호인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불러냈다. 본격적으로 안풍 자금의 성격을 가려보자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강 의원도 의리를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조용히 있으려 해도 그가 속한 한나라당의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
YS로서도 자칫 말년에 큰 망신을 당할지 모르는 난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모두가 다급한 처지가 된 것. 좌로 우로 쓸려 다니다 보면 누군가 다치는 사단이 날 게 분명하다. 한편에선 YS가 입을 열어야만 모두가 산다고도 한다. 과연 안풍의 진실은 드러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