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제2의 십자군 전쟁으로 비화하는 ‘테러와의 전쟁’ A to Z

미국과 이스라엘의 과욕이 참극의 씨앗

  • 글: 임종태 다큐멘터리스트 echorhim@hanmail.net

    입력2004-01-28 19: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미국이 이라크전을 벌인 이유는 석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 유대인들의 입김이 막강한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써 구약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중동의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
    제2의 십자군 전쟁으로 비화하는 ‘테러와의 전쟁’ A to Z
    전 세계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던 2003년 12월13일, 이란 관영 IRNA통신발 뉴스가 지구촌을 흥분시켰다. 조지 W. 부시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사담 후세인이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의 작은 마을 지하 땅굴에서 미군에 의해 전격적으로 생포된 것이다. 이로써 2003년 3월20일, 후세인 축출을 목표로 감행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전쟁 개시 9개월 만에 일단 그 목표를 달성한 셈이 됐다. 특히 종전(2003년 5월1일) 후, 이라크 저항세력의 연쇄 자살 폭탄 테러로 미군 희생자가 늘면서 하루가 다르게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던 부시에게 이보다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004년 대선을 준비하는 부시에게 배달된 크리스마스 선물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담 후세인이 생포된 지 불과 1주일 뒤인 12월20일, 이번엔 리비아의 카다피 국가원수가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지하에서 생포된 후세인의 초라한 모습에서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발견했는지 아니면 지난 9개월간의 끈질긴 유혹에 굴복했는지 카다피는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WMD의 완전한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 이로써 그간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테러와의 전쟁’으로 상징되는 부시 정권의 외교 정책은 화창한 봄날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카다피의 WMD 포기 선언 이후 전세계 언론의 포커스는 부시 정권이 후세인과 더불어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한 북한 김정일에게 향하고 있다. 제2차 6자회담을 앞두고 있는 북한의 김정일이 ‘제2의 카다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2의 후세인’이 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북한의 형제국이자 공동 운명체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닌 한반도의 명운이 걸려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테러와의 전쟁’은 후세인 생포에 성공함으로써 중동 지역에서 확실히 승기를 잡은 것인가. 더불어 부시 정권은 중동 지역에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지난 50여년간 끌어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 지역에 평화를 가져올 것인가.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여세를 몰아 북한의 핵무장을 해제시키고 개혁·개방의 길로 유도함으로써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기묘한 수사학을 등장하게 만든 9·11테러 당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1000만달러 기부금 반려 사건



    지난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45분(현지시간),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보잉 767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미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 충격도 잠시. 그로부터 18분 뒤인 9시3분, 이번엔 보잉 767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로 돌진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다. 앞의 것과 차이가 있다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 비행기 날개를 대각선 방향으로 회전하며서 돌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0분이 지난 9시43분, 이번엔 세계의 철옹성이라 불리는 펜타곤이 불타올랐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전세계 대다수 국가 지도자들은 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문명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 같은 태도는 심지어 이슬람 국가들로 이루어진 중동 지역에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와 이슬람 국가 사이에는 9·11테러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엄존한다. 9·11테러가 발생한 지 한 달 후 뉴욕의 테러 현장을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가 기부한 1000만달러를 줄리아니 뉴욕시장이 반려한 사건은 그것을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2001년 10월12일 세계 10대 부호로 꼽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는 뉴욕의 테러 현장을 방문했다. 200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이 자리에서 9·11테러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한 뒤 줄리아니 당시 뉴욕시장에게 테러 복구 비용으로 1000만달러라는 거금을 전달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줄리아니는 알 왈리드의 수표를 반려하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1000만달러 수표를 전달한 뒤 알 왈리드 왕자가 발표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 때문이었다.

    “이 같은 테러가 왜 발생했는지,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 이제 미국의 중동 정책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좀더 균형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9·11테러가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요지의 이 성명서는 9·11테러를 바라보는 중동 지역의 반이스라엘 정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줄리아니 뉴욕시장이 즉각적으로 알 왈리드 왕자가 기부한 1000만달러 수표를 반려했다. 그가 보기에 알 왈리드 왕자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9·11테러 현장에서 1000만달러라는 값싼 비용으로(그의 메시지가 전파되는 데 사용되는 선전비용을 역으로 환산해보면)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이 초래한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선전한 것이다.

    9·11테러에 의해 붕괴된 뉴욕 세계무역센터는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미국 금융계를 장악한 유대계 자본의 총 본산에 더 가깝다. 게다가 알 왈리드 왕자가 1000만달러를 건넨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다름아닌 유대인이다. 빈 라덴을 대신해 그가 ‘타임스’ 2001년 인물로 선정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시의 유대인 인구 비율은 700만 시민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250만∼300만이다. 이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557만 유대인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뉴욕시에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오늘날 모든 길은 뉴욕으로 통한다. 실제로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이지만 오늘날 세계의 수도는 누가 뭐래도 뉴욕이다. 그런데 뉴욕의 최초 이름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이곳에 최초로 이주한 사람들이 네덜란드인이었기 때문. 1626년 식민지 초대 총독인 미누이트가 인디언으로부터 맨해튼 섬을 사들여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1664년 영국 함대가 이곳을 점령한 뒤 당시 영국 국왕의 동생인 요크공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런데 뉴욕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던 1654년 유대인 23명이 뉴욕으로 이주해왔다. 당시만 해도 보잘것없는 작은 집단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온 최초의 유대인 이민자였다. 유대인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40년대 후반. 당시 유럽 전역에서 반유대주의의 부활 조짐이 보이자 이를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 및 북이탈리아 등지에 사는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각지로 흩어져 떠돌이 행상을 했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의 선조다.

    다음으로 미국을 찾아온 유대인 이민 자는 1870년대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당시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의 게토에서 격리된 채 처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던 유대인 수백만명이 미국으로 몰려든 것. 그리고 1881년에도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세탁물을 거둬들여 세탁하고 헌 옷가지 등을 팔면서 성공 신화를 꿈꿨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뉴욕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는 명감독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지막 작품으로 1984년 세계 영화평론가로부터 베스트 필름으로 선정됐다. 이 영화는 흔히 이탈리안 갱스터 무비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실제 그리고 있는 것은 1900년대 초기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유대계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맡은 누들스 역은 유대인으로서, 단순한 깡패에 불과했던 갱 조직에 경영 기법을 도입해 오늘날의 마피아로 만든 메이어 랜스키(Meyer Lansky)의 삶에 바탕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실제로 로버트 드니로는 자신의 배역을 연구하려고 랜스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미국으로 몰려들었던 것일까?

    유대인, 월가 중심으로 미국 잠식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처절할 정도로 핍박받았다. 4세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정착했다. 스페인은 BC 10세기경부터 유대인들이 페니키아의 항해술을 이용해 교역했던 곳이자 BC 6세기경 바빌로니아 포로 시기와 AD 70년경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 시기에 로마의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상인으로 왕래하며 정착했던 곳(오늘날 유대인은 크게 애시케나지(Ashkenazic) 유대인과 세파드(Sephardic) 유대인으로 구분되는데, 세파드는 히브리어로 ‘스페인’이란 뜻이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회교도나 기독교인과 더불어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갔다. 실제로 12세기에는 전세계 유대인의 90%가 세파드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14세기말 스페인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가 점차 반유대주의로 변질되면서 1380년과 1390년에 유대인 회당이 불타고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당황한 스페인 정부는 유대인에게 스페인을 떠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하는데,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은 이웃 나라인 포르투갈로 이주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해 스페인에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제2의 십자군 전쟁으로 비화하는 ‘테러와의 전쟁’ A to Z

    9·11테러 직후 현장을 방문한 줄리아니 딩거 뉴욕시장.

    1469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와 카스티유 왕국의 이사벨라 공주가 결혼해 스페인이 통일되면서 반유대주의는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1478년 콜럼버스를 신대륙에 파견한 것으로 알려진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의 재화를 왕실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 종교재판이란 이름으로 유대인 박해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을 제외한 비가톨릭 교도를 추방하는 스패니쉬 인퀴지션(Spanish Inquisition)이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했다(물론 남은 이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오늘날 스페인에서 마라노(Marrano)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반유대주의 성향을 띠던 로마 가톨릭의 종교재판은 독일 사제인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1517년 이후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루터의 외침은 점차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바야흐로 종교개혁 운동이 폭풍처럼 유럽 전역을 강타하기에 이른 것. 그 결과 1550년경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과 핀란드 왕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에 로마 가톨릭은 분노했다. 유대인을 탄압하던 가톨릭의 종교재판이 프로테스탄트 탄압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압제에 시달리는 프로테스탄트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해놓은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개척한 미국의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에 대한 동병상련의 관계라 할수 있는 유대인을 뒤늦게 이주해왔다 하여 핍박하기는커녕 오히려 관대하게 대했다. 그런 까닭에 유대계 이주민들은 유럽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안도감을 맛보며 오랜 박해 속에 본능적으로 익혀온 자본 증식의 노하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마침내 구약시대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처럼 뉴욕 월가를 중심으로 금융과 언론을 장악하며 서서히 미국을 잠식해갔다.

    ‘자살’은 ‘순교’

    9·11테러 이후 전세계에 테러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는 알 카에다의 의미는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알 카에다의 다른 이름은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성전(聖戰 : 지하드)을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The World Islamic Front for Jihad against Jews and Crusaders)’이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한다’와 ‘지하드(성전)를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한다’는 의미는 알 왈리드 왕자의 성명을 통해 드러났듯이, 미국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알 카에다 조직으로 상징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란 나라에서 또 다른 유대인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9·11테러가 발생하기 전, 미국 ABC방송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과 가진 현지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빈 라덴의 답변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나는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 국무부·국방부와 CIA의 중요 각료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유대교도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계, 특히 이슬람 세계를 향한 그들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을 이용한다. 걸프만에서 미국의 존재는 유대인을 지원하고 그들의 후방을 보호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미국인들이 집 없이 거리를 떠돌고 빈곤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안, 그들의 정부는 우리 땅(중동)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식민지 건설을 지원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빈 라덴은 중동 지역에 대한 미국의 화두가 석유와 이스라엘이라고 말한다. 중동의 석유는 미국이 차지하고 중동의 지배권은 이스라엘에 넘기는 게 중동 지역에서 미국에 주어진 지상명령이라는 것. 유대인들은 소련 붕괴 후 전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떠오른 미국을 이용해 이라크, 이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붕괴시켜 이스라엘이 중동의 패권 국가가 되도록 물밑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하드(성전)를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이라는 말도 쉽게 이해된다. 이처럼 이슬람 영토를 유린하는 유대인과 십자군(미군)에 대항해 전세계 모든 이슬람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성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9·11테러 이후 전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자살 폭탄 테러’는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교도로부터 이슬람을 사수하기 위해 성전을 치르는 이들에게 ‘자살’은 ‘순교’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전세계 미군의 재배치 움직임과 ‘테러와의 전쟁’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91년 1월16일 이라크 공습을 감행한 조지 부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곧 구소련 연방이 붕괴된 이후 세계 유일의 파워 국가로 떠오른 미국의 신세계 패권 전략 구상에 들어갔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폴 월포위츠 독트린’이다. 조지 W. 부시 정권 들어 흔히 ‘부시 독트린’으로 불리는 이 정책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의 부친인 조지 부시의 요구로 현 국방부 부장관인 폴 월포위츠가 작성한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다.

    당시 월포위츠는 소련연방이 해체된 상황에서 향후 미국 중심의 세계 패권구도와 관련해 두 가지 잠재적 위협에 대해 언급했다. 하나는 러시아나 중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역사적으로나 혹은 멀지 않은 미래에 미국과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경쟁 국가였다. 다른 하나는 향후 5∼10년 안에 핵이나 기타 WMD를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패권 전략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 예컨대 이란, 이라크, 북한, 리비아 등 소위 ‘불량국가(rogue state)’들이었다.

    먼저 잠재적 경쟁국가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월포위츠가 내세운 것은 ‘안도(reassurance)’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전세계 분쟁 지역에 배치된 미군의 항구적 주둔을 통해 세계 경찰국가를 자처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안전 보장을 미끼로 잠재적 경쟁 국가들을 점차 무장해제시켜나감으로써 미국의 확고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것. 과거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나 조지 W. 부시 정권 들어 새롭게 등장한 미사일방어체제(MD)는 이 같은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과 영국이 그 전형적인 수혜자였다.

    둘째, 미국의 일방주의에 저항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새롭게 ‘예방 전쟁(preventive war)’ 전략을 수립했다. ‘예방 전쟁’이란 향후 5∼10년 내에 미국의 패권 전략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을 미리 ‘불량국가’로 지목하고 예방 차원에서 선제 공격(pre-emptive war)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1981년 6월7일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오시라크 핵발전소를 공습한 사건을 모델로 삼은 선제공격 정책은 미국의 대외 정책이 얼마나 이스라엘화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지 W. 부시 정권 들어 WMD를 보유할 가능성이 높은 이란, 이라크, 북한, 리비아 등을 불량국가로 지목하고 아프간에 이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그 전형적인 행태라 하겠다.

    석유 장악 통한 세계 패권전략

    9·11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상징이 되어버린 ‘테러와의 전쟁’은 이런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기존의 국가간 전쟁은 UN의 룰에 따라야 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닌 국가 대 테러국가로 변질시킴으로써 UN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묘한 근거’를 만들었다. 바로 이 점이 UN의 승인을 거쳐 이라크를 침공해야만 했던 아버지 부시와 UN의 승인 없이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었던 아들 부시의 차이다.

    그렇다면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부시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단서를 2003년 2월5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영국의 ‘채널4’ 방송과 인터뷰한 사담 후세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석유를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로 시작한 후세인은 부시가 중동 지역의 석유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면 중국에 대해 경제성장 속도를 지시하고 교육 체계에 간섭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동일한 방법으로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 개입하려 들 것이고 종국에는 영국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미국은 전세계 에너지 소비량의 25%를 차지하는 세계 1위의 에너지 소비국이다. 그 가운데 40% 정도가 석유고 25% 정도가 천연가스다.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일본의 2배에 달한다. 에너지 소비국 2위는 얼마 전까지 세계 소비량의 17%를 차지한 구소련연방이었다. 국토가 끝도 없이 광활한 데다 추운 지역이라 기본적으로 난방용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다.

    그런데 문제는 10억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중국이다. 세계 3위의 에너지 소비국이던 중국은 장쩌민(江澤民)의 개혁·개방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대규모 공장과 댐, 주택 등을 건설하면서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2위의 에너지 소비국으로 올라섰다. 게다가 향후 20년 동안 중국은 연평균 10%에 달하는 초고속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에너지 소비국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중국으로서는 에너지 확보 및 개발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중국이 주룽지(朱鎔基) 후임으로 지질학과 출신인 원자바오(溫家寶)를 총리로 임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제2의 십자군 전쟁으로 비화하는 ‘테러와의 전쟁’ A to Z

    반유대주의가 빚은 조작극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렌 군사법정에서 독일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는 드레퓌스 대위 (가운데 선 사람).

    이처럼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은 국운을 걸고 에너지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석유 전문가들에 따르면 전세계 석유 매장량은 2조3000억배럴 정도다. 매년 200억배럴을 소비하는 추세를 감안할 때 대략 100년 후면 지구는 석유 한 방울 없는 곳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동북아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경제 개발이 본격화될 경우 에너지 소비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고, 결국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지구는 심각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폴 월포위츠가 구상한 ‘부시 독트린’의 최종 지향점은 이처럼 석유 장악을 통한 세계 패권 전략이다. 실제로 불량 국가들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과 잠재적 경쟁국에 대한 ‘안도’ 정책의 일환인 MD를 통해 주변국들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부시 정권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것은 석유와 천연가스 확보를 통한 주변국의 통제다. 한마디로 석유 공급을 통해 자국의 필요에 따라 주변국들의 경제 규모와 발전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주변국들을 미국의 위성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유와 더불어 미국의 또 다른 화두인 이스라엘 정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시오니즘의 계기가 된 드레퓌스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유대인 출신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Dreyfus Alfred : 1859∼1935)가 독일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비공개로 진행된 군법회의에서 그는 별다른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음에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유럽 사회에 팽배한 반유대주의라는 사회적 편견이 드레퓌스를 스파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간 것.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군 수뇌부는 그후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음에도 진상을 밝히길 거부했고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고 재심을 요구하던 가족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1897년 11월 진범으로 알려진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한다.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함으로써 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프랑스군은 사건이 발생한 지 100년이 지나 1995년 9월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공식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공개된 직후인 1898년 1월13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프랑스 군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오롤’지에 게재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 사건은 개인의 석방 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한 것. 그 결과 프랑스는 정의, 진실, 인권옹호를 주장하는 드레퓌스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드레퓌스파로 분열돼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재심파가 승리했다. 이렇듯 이 사건은 좌파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국가의 필요성 알려준 드레퓌스 사건

    하지만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재산 몰수와 추방, 학살 등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달랐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겪어야만 하는 사회적 차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면 반드시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결과 1896년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유대인 국가’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독립국가를 세우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바야흐로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라는 시오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

    실제로 드레퓌스 사건 이후 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중동 지역의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매입해 수십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국가 권력을 비판하던 1898년, 정치적 시오니즘의 아버지로 불리던 헤르츨은 “앞으로 50년 후 이스라엘은 독립할 것이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말이 실현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1948년 놀랍게도 헤르츨의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라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아랍 민족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던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비 처리 문제로 고민하던 영국 정부가 벌인 ‘야바위’ 게임 이후 ‘세계의 화약고’로 돌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0월 터키의 참전으로 곤경에 빠진 영국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집트 주재 외교관 맥마흔을 통해 당시 아랍의 지도자인 후세인에게 게릴라 전문가인 로렌스를 도와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아랍을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때 유명해진 인물이 바로 아라비안 로렌스다.

    하지만 1차대전의 후유증으로 당시 영국 경제는 독일에 항복할 것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내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 까닭에 영국의 전시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합’ 대표인 바론 리오넬 로스차일드(Rothschild)와 비밀리에 회동해,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하는 런던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에 로스차일드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은 영국 정부의 런던조약 이행 여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12월4일 다급해진 영국 정부가 시오니스트로 유명한 로이드 조지를 총리로 임명한다. 총리로 취임한 로이드 조지는 바로 다음날 영국에서 존경받는 조시아 웨지우드 의원을 미국에 파견한다. 12월23일 웨지우드가 미국에 도착하자 당시 윌슨 대통령의 고문인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은 유대계 지도자 51명을 사보이호텔로 초청해 웨지우드가 런던조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때까지 친독(親獨) 노선을 지향하던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은 이날의 회합을 계기로 친영(親英) 노선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하려는 유대 시오니스트들은 영국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이 필요했고 그런 연유로 영국을 돕기로 결정한 것. 그 결과 1917년 4월2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연설했고 4월6일 미국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7년 11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밸푸어선언은 이 같은 이면합의의 일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영국은 약속대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도왔다. 그 결과 1936년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는 전체의 28%를 차지하게 된다. 1880년대 팔레스타인의 총인구 50만명 가운데 유대인이 겨우 5%인 2만50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이주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영국 정부의 비호 아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우수한 기술과 자본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 시설을 갖추어나갔다.

    마침내 1948년 5월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시오니즘 운동을 이끈 다비드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꿈에 그리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달성된 것이다.

    1차 대전이 종료되면서 오스만투르크에서 해방된 중동 지역엔 아랍 국가들이 하나 둘 독립한다. 먼저 이집트가 독립(1922)한 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1926), 이라크(1932), 레바논(1943), 시리아(1944), 요르단(1946)이 독립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을 지켜본 아랍국들은 영국과 미국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유대 시오니스트들의 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예멘이 아랍 연맹을 결성해 이스라엘에 대항하기로 합의한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아랍 세계를 리드한 것은 이집트였다(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 분쟁의 중심 인물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도 이집트 군인 출신이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수에즈 운하 때문이었다. 그 동안 수에즈 운하를 독점해온 영국이 이스라엘을 통해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는 친영국 성향의 유대인들이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2차 중동전쟁을 통해 명백히 입증됐다.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행 특정 물자를 운송하는 외국 선박의 운하 통과를 거부했다. 그 사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이집트인의 요구가 격렬해지면서 운하에서는 이집트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그런 가운데 1952년 혁명에 성공한 나세르는 1954년 10월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고 1956년 6월 영국군이 철수하자 7월26일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한다. 그러자 10월31일 영국의 사주를 받은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공격해 가자지구와 아카바만에 접근할 수 있는 시나이반도 끝의 샴 엘 셰이크를 확보한다.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완패를 당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정규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 방법으로 ‘테러’ 조직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1964년 전직 이집트 군인 출신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창설한다. 테러라는 폭력 수단을 동원해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것이 PLO의 목표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사살한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쟁(1967) 역시 수에즈 운하의 아카바만 봉쇄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시리아,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맺은 이집트는 소련의 지원하에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지만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해 골란고원과 예루살렘 구시가지,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웨스트뱅크를 빼앗긴다.

    흔히 ‘욤키푸르(속죄일)’ 전쟁으로 불리는 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속죄일 기간에 이스라엘을 공습한 것으로, 이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이집트는 1979년 3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캠프데이비드협정에 서명한다. 시나이반도를 돌려받는 데 대한 대가였다. 4차 중동전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석유의 국유화 꿈꾼 후세인

    이집트가 무대에서 사라지자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을 상대할 또 다른 정치 지도자를 갈구했다. 이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 문제로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했다면 후세인은 중동 석유의 국유화 문제로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했다. 후세인에게 석유의 국유화 가능성을 깨우쳐준 인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생포된 지 1주일 만에 WMD의 완전 포기를 선언한 리비아의 카다피였다.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73년에 발생한 1차 오일쇼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70년까지 원유는 배럴당 1달러대인 반면 소비자들은 휘발유를 리터당 1달러에 구입했다. 산유국의 정부 지분율은 메이저 석유회사에 비해 턱없이 낮았는데, 이는 제값을 받으려는 산유국의 시도가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강대국에 의해 번번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붕괴되고 호메이니가 등장하자 미국이 후세인을 지원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미국은 이란의 종교 혁명이 아랍권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실상은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메이저 석유회사의 통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물은 카다피다. 그는 1969년 장교로 영국사관학교에 유학중이었다. 영국에서 리비아 왕이 비굴한 자세로 영국에 석유 이권을 바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카다피는 그해 9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카다피는 메이저가 아닌 인디펜던스, 다시 말해 당시 리비아에서만 원유를 전량 매입하던 옥시덴탈사와 협상, 정부 지분율을 대폭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다른 중동 산유국의 협상 모델로 부각되어 1973년 여름 원유 가격은 배럴당 1달러대에서 3달러로 상승한다. 이에 대해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와의 협상입지를 강화하려 시추율을 올리려는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석유 생산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하지만 10월에 터진 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11월엔 선진국 유가가 4배나 상승하고 세계적으로 석유 파동이 일었다. 게다가 생산량마저 감축되면서 당시 중동 원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유가 고시 가격은 배럴당 11.69달러까지 치솟았다.

    제2의 십자군 전쟁으로 비화하는 ‘테러와의 전쟁’ A to Z

    꺼지지 않는 분노의 불길. 복면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불태우고 있다.

    1차 걸프전의 계기가 된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1990년 8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이라크가 주도한 OPEC의 쿼터(생산량 할당)를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무시하고 초과 생산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배럴당 3달러 정도의 인상 요인이 있음에도 오히려 유가가 하락했다. 이는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미국의 배후 조종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후세인에게 있어, 특히 이란-이라크전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이 같은 행동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차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2000년 8월 후세인은 이라크를 방문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게 OPEC 석유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지급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후세인의 제안에 공감한 차베스는 이후 한 달간 중동 지역을 순방하며 각국을 설득한 끝에 9월 OPEC 회의에서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뉴욕 증시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2000년 대선을 준비하던 조지 W. 부시는 그 다음날 지지자들에게 “여러분, 제가 후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지요?”라는 말로 후세인 축출 의지를 드러낸다.

    2001년 4월 미국 주도로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2003년 3월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두 사건 모두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찬양과 저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가복음 11 : 9)와 “그 새끼를 당장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누가복음 23 : 21).

    한 사람에 대한 이처럼 극단적인 찬양과 저주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나사렛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두 목소리다. 한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유대 군중의 입에서 동일 인물인 예수를 향해 터져 나온 이 묵시록적 찬양과 저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당시 로마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려내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 그를 구약에서 언급한 묵시록적 예언을 성취할 메시아로 믿었다(‘예수’란 이름은 ‘구원자’란 뜻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보고 그들이 열광적으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연호한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당사자인 나사렛 청년은 그들이 기대하는 묵시록적 ‘빅쇼’ 대신 제자들과 조용한 곳에서 만찬을 함께 나누며 차분하게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다.

    “호산나!”를 연호하던 유대인들이 흥분한 폭도로 돌변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다. 그들은 유대 총독인 빌라도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를 당장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예수에게 묵시록적 ‘빅쇼’를 보여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군중들은 인위적으로라도 예수를 묵시록적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던 것. 이것이 “호산나!” 하고 찬양하던 입에서 “그 새끼를 당장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라는 저주가 터져나온 이유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에게 쏟아진 찬양과 저주는 이처럼 묵시록적 환상을 기대한 유대인들의 빗나간 욕망이 빚어낸 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날 기독교의 모태가 된 예수의 죽음은 이처럼 구약의 예언 성취에 혈안이 된 유대인들의 묵시록적 환상이 만들어낸 광기 어린 카니발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묵시록적 환상이 빚어낸 인류의 광기 어린 폭력성은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1년 9월11일 TV를 시청하고 있던 전세계인을 경악에 빠뜨린 9·11테러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9·11테러는 메나헴 베긴-이츠하크 샤미르-벤야민 네탄야후-아리엘 샤론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리쿠드당 출신 시오니스트 총리들이 그 동안 미국의 묵인하에 중동에서 저질러온 횡포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적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리쿠드당은 오슬로평화협정에 반대했으며 벤야민 네탄야후는 오슬로평화협정을 파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아리엘 샤론은 오슬로협정을 폐기하고 미국의 승인하에 PLO 군부 지도자들과 온건파 지도자들을 암살하거나 체포했으며, 부시를 설득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모든 접촉을 끊도록 만들었다.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구약에서 야훼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구약’의 창세기 15장을 보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들의 신 야훼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이집트)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이라크)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세기 15 : 18)가 그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약속된 영역이 오늘날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시리아와 이라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소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바로 이것이 석유와 더불어 조지 W. 부시 정권이 이라크를 침공한 또 다른 이유다.

    실제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는 이라크로부터 매일 5만9000배럴의 석유를 수입하던 요르단이다. 요르단은 석유 수입량의 절반을 이라크로부터 무상 제공받아왔고 나머지 대금도 이라크에 대한 자국의 수출품으로 지급해왔다. 그런 까닭에 이라크가 점령당한 상황에서 요르단은 미국과 그 배후인 이스라엘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이런 구도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에서 요르단으로 추방하려는 샤론 총리의 구상과 맞물려 있다. 그렇게 요르단이 붕괴되면 이스라엘은 구약에 예언된 것처럼 이미 점령된 이라크와 몰락해가는 시리아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중동 지역의 패권자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 이후 2000년간 세계를 떠돌며 나라 없는 설움을 달래야 했던 유대인들이 불과 반세기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무단 침입해 그곳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내쫓고 불법적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 것도 이 같은 믿음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자살 폭탄 테러를 불러일으키면서 아리엘 샤론이 템플 마운트를 방문(2000년 9월)한 것도 예루살렘의 옛 솔로몬 성전 터에 자리잡은 알 악사 이슬람 사원을 붕괴시키고 그곳에 제3의 성전을 건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는지 샤론 총리는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지 유대인에게 이스라엘로 귀환할 것을 노골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들은 묵시록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예수의 한탄을 기억하라

    하지만 우리는 불과 반세기 전 아리안 혈통을 내세운 독일의 나치정권이 저지른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굳이 라캉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대부분이 갖고 있는 상상의 나르시스 이면엔 언제나 무두(無頭)의 카오스가 그 끔찍한 폭력성을 은폐한 채 입벌리고 있다는 것을. 더불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믿음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배타적 특권이 아닌,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돌보는 사회적 소명이라는 사실을.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받아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예수가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한탄하며 한 말은 깊이 음미해볼 만하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누가복음 13 : 34)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