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한국인 트렌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글: 김경준 딜로이트 상무이사 kyekim@deloitte.com

    입력2004-01-30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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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트렌드’

    한국인 트렌드 김경훈·김정홍·이우형 지음 책바치/352쪽/1만8000원

    다가올 미래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자 두려움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궁금해하고, 나름대로 예측한다. 그러나 미래는 쉽사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눈 밝은 사람만이 현재의 세상에서 다가올 세상의 징조들을 찾아내고 읽어내는 특권을 가진다.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눈 밝은 사람이 읽어내는 미래를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그려본다.

    앨빈 토플러로 상징되는 미래학 서적들은 대개 선진국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세계사의 흐름을 예측하는 거대 담론이다. 세계사적 흐름을 읽고, 문명사적 변화를 짚어내는 힘이 있다. 이들의 시각은 크고 넓지만 피부에 와닿는 느낌은 덜하다. 미래학에서 말하는, 세계사적 흐름과 문명사적 변곡점이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내가 먹고 사는 것과 어떤 연관을 지을 것인지, 다가올 미래를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선 막연하다. 트렌드 분석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미래학이라는 거대 담론과 구체적인 개인의 삶 사이에 놓여있는 커다란 강을, 트렌드 분석이라는 다리가 이어준다. 다가올 미래의 광대한 모습은 트렌드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개인의 삶과 연결되고, 개인의 미래를 보여준다.

    한국의 페이스 팝콘

    트렌드는 대략 10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사회를 관통하는 흐름을 말한다. 이것은 잠깐씩 명멸하는 일시적 유행과는 다르다. 깊은 산속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흐르다가 나중에는 큰 흐름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트렌드도 미약한 모습으로 출현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10년 이상 모습을 바꾸어가며 큰 흐름을 만들어낸다.

    트렌드의 성립요건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 현상과 현상의 주체인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실하고 강력한 심리적 동기가 내재되어 있는가. 둘째, 트렌드로서 기능을 발휘할 만큼 충분한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가. 즉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구조적 토대로부터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10년 이상 유지되는 트렌드가 되는 것이다. 미래학과 달리 트렌드 분석은 개인이 현재를 돌아보며, 미래의 구체적 삶을 준비하는 것에, 현실적 메시지를 던지는 힘이 있다.



    트렌드 분석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페이스 팝콘이다. 10년 전 ‘팝콘리포트’라는 제목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당신의 삶에 대한 미래예측 보고서’라는 문구에 이끌리듯 손이 갔다. 한 장 한 장 읽어보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미래를 그릴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무언지 허전했던 것은, 빵에 치즈 먹고 사는 사람이 그리는 미래는, 된장찌개에 김치 먹는 사람의 미래와는 감각이 같을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때 만난 책이 당시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국인 트렌드’다. 저자는 생소한 ‘트렌드 분석가’란 명함을 내걸고 자신있게 한국사회의 미래를 말했다. 당시 저자가 주목했던 사회문화적 흐름은 ‘신세대’와 ‘PC통신 혁명’이었다. 지금 와서 지난 10년을 돌이켜볼 때 이 두 가지 흐름은 정말 우리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신세대’가 부상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마케팅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기성세대는 뜻도 모를 기호와 코드에 열광하는 10대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코드에 맞는 광고들이 신문과 방송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제 옷 광고에 옷이 없고, 휴대전화 광고에 휴대전화가 없다. 그저 기호와 상징 속에 이미지만 떠다닌다. ‘PC통신 혁명’은 인터넷으로 발전하면서 말 그대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통신이 아니라 새로운 사이버 세상이 출현했다. 포털 사이트는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도시의 네거리가 되었다. 인터넷 쇼핑, 홈쇼핑은 할인점과 함께 우리나라 유통구조의 근본을 바꾸고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시 쓴다

    ‘한국인 트렌드’가 출간되고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때의 저자는 다시 앞으로의 10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큰 의미가 있다. 트렌드 주기가 최소한 10년이라는 점과, 지난 10년간 계속 우리 사회의 트렌드를 추적하고 생각해온 저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긴 호흡이 아쉬운 우리의 지적 풍토에서 10년을 주기로 같은 관점의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2004년 판 ‘한국인 트렌드’는 한국인의 변화 추세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부에서 다루는 ‘우리 사회의 지형도를 바꿀 새로운 흐름들’은 한국인의 도전적인 미래상을 구현할 트렌드다. 2부의 ‘성공의 꿈과 욕망이 빚은 자본주의적 트렌드’는 성숙해가는 한국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발생한 새로운 흐름들이며, 3부 ‘오래된 과거를 깨고 나오는 한국인’은 절반은 과거의 전통에 발목 잡혀 있으면서, 나머지 절반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이행 과정의 트렌드 들이다.

    이 책의 1부는 ‘우리 사회의 지형도를 바꿀 새로운 흐름들’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시 쓰게 만들 큰 흐름들이다. 그 흐름은 소비-생산의 이분법적 구도를 전복하여 능동적 소비 문화를 지향하는 ‘두 손 문화 트렌드’나 세상과의 관계 맺기에서 전통적 인연이 아닌 임의성이 강조되는 ‘임의접속 트렌드’, 동물들이 페로몬(냄새 호르몬)으로 의사를 교환하듯 감성의 페로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화 소비자 ‘페로몬 공동체 트렌드’ 등이다.

    2부는 ‘성공의 꿈과 욕망이 빚은 자본주의적 트렌드’이다. 여기엔 장수가 아닌 젊음을 꿈꾸며 피터팬의 고향 네버랜드로 달리는 네버랜드 러시, 컴퓨터에서 여러 화면을 동시에 띄워놓는 멀티태스킹처럼 두뇌 속에 여러 영역을 동시에 진행하는 새로운 인재상 멀티태스커, 시간을 팔아서 시간을 사는 역설적인 흐름의 교차 등 자본주의적 트렌드들이 위치해 있다.

    3부는 ‘오래된 과거를 깨고 나오는 한국인’이다. 할리우드식 일등주의, 충동조절장애 증후군과 불신사회, 금기를 깨고 쾌락하기, 향기로운 남자로 거듭나기 등을 다룬 글들은 이미 존재하는 흐름들이 시대 변화를 맞아 재해석되고 진화해가는 현상을 다룬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일상에 매몰되어, 발 밑을 보며 산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고 말하지만, 나무만 제대로 보기도 벅차다. 트렌드 분석은 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치를 꼼꼼히 탐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탐색은 단순한 지적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내 직업은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돈을 벌려면 어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등 구체적 삶과 연결시키고, 성공을 위한 메시지를 찾기 위함이다.

    ‘네버랜드 러시’는 영원히 젊게 살려는 한국인의 트렌드를 말하고 있다. 사람마다 이 부분을 읽는 느낌이 같을 수 없다. ‘맞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젊어 보여야지’하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젊게 보이도록 하는 사업이 될 것 같다. 과연 어떤 게 있을까’라고 반문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팔아서 시간을 산다’에서는 시간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갈수록 시간이 없다. 그러니 이제 돈을 주고 시간절약 상품과 서비스를 산다고 하는 역설이다. 이것을 읽고 단순히 시간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 아껴주기 사업’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차이는 이 트렌드가 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진지함에 있다. 단순한 흥밋거리나 화젯거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직 우리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변화 속에 기회가 있는 법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성공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트렌드 분석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성공의 코드이다. 새로운 변화를 남보다 먼저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과 성공은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나, 10년 후의 나

    10년 전 ‘신세대’와 ‘PC통신 혁명’이라는 흐름은 읽어내고 활용하는 사람에 따라 성공의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2004년 초에 다시 앞으로의 10년을 이야기하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앞으로 10년의 기본적 흐름을 ‘개인화’와 ‘실용주의’라고 읽어냈다. 과거에 ‘세계 1등’ ‘아시아 1등’ 같은 목표들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실제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스스로 그 성과를 즐길 수 있는지 자기 규정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향기로운 남자들이 나타나고, 금기를 깨고 즐거우면 그만이고, 성은 르네상스를 맞는다.

    책값이 만만찮지만, 꼼꼼히 읽는다면 책 산 돈이 아깝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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