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 통합을 이룬 EU(유럽연합)는 이제 군사·외교 분야에서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엔 결정적 걸림돌이 있다. 바로 미국의 영향력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것이다.
EU 지도자들이 2003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정부간 회담’ 중 편한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번스 대사는 “유럽연합이 나토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려는 움직임은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며 나토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에 대해 나토 주재 베느와 다보빌 프랑스대사는 “나토는 논의중인 EU 내부 문제에 대해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맞받아쳤다(나토 회원국 가운데 EU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 터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뿐이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는 올해 EU의 정식회원국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나토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과시하며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한 영국의 경우 프랑스와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영국의 한 외교관은 “EU가 나토와 협력관계를 구축하며 나토가 관여하지 않는 분쟁지역에 파견할 군사력을 갖추는 것은 미국이 요구하는 비용분담에도 도움이 된다”며 미국의 경고를 이해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지난해 3월말 미국과 영국 주도로 이라크 침략전쟁이 개시되기 전까지 EU는 친미와 반미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상을 드러냈다. 영국과 스페인, 이탈리아는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을 지지했고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라크전쟁으로 드러난 초강대국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나토로부터 독립된 유럽연합의 국방정책을 강화하려는 논의를 시작했다. 미국은 EU의 이런 논의를 불신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과연 EU는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갖춘 유럽연합군을 창설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왜 언뜻 보기에 비용분담이라는 실리에 적합한 EU의 독자적인 군사력화 움직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일까? 왜 EU는 미국 앞에만 서면, 특히 국방에 관한 한 왜소해지는가? EU는 언제까지나 ‘경제 거인, 정치 난쟁이, 군사적 무지렁이’라는 국제사회의 행위자로 만족할 것인가?
유럽 통합과정을 보면 그동안 유럽공동체(EC) 또는 유럽연합(1993년 11월1일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효력이 발생한 후 유럽연합으로 바뀜. 이 기사에서는 1993년 11월 이전은 유럽공동체로 표기함)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협력을 강화해왔다. 처음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서유럽동맹(WEU)이 EU 안보정책 실행기구로 역할을 확대해왔다. 또 EU도 평화유지와 전투수행, 인도주의적 원조 등의 임무를 조약에 명기, 군사 분야에서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EU가 안보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역할을 키워왔음에도 나토로부터 독립된 유럽연합군을 창설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다. 미국의 견제 외에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EU 주요 회원국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국방비를 늘리려면 사회복지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도 EU의 군사분야 통합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유럽 통합과정과 외교·안보 분야에서 회원국간 협력 움직임을 살펴보기로 하자.
‘유럽의 초국가기구’
우선 EU가 경제적으로 거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U 집행위원회의 최근 자료를 보면 현재 EU 15개 회원국은 3억7000만의 인구에 전세계 수출의 19%를 차지하고 있다(회원국간 내부 교역을 제외한 비율임). 미국의 16%를 능가하며 일본의 9%보다 월등히 앞서 있다. 올해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동구권 10개 국가가 회원으로 가입하면 인구는 4억5000만으로 늘게 되며 경제규모는 더 커진다.
또 2002년 1월1일부터 영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제외한 12개 회원국에서 단일화폐 유로가 통용되고 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에 가입한 12개 회원국(유로랜드)의 단일 이자율을 정해 통화량을 조절한다. EU 제일의 경제대국 독일의 마르크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독립성과 물가안정에 미치는 영향으로 명성이 높았던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도 그 역할이 많이 축소되었다.
EU 회원국 국민은 회원국 어느 나라에도 거주할 수 있으며 직업을 구할 수 있다. 비자도 필요 없다. 상품뿐만 아니라 서비스, 노동력, 자본도 회원국간에 자유롭게 이동된다. 15개 회원국이 단일시장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경제분야에서의 통합은 크게 진전됐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 왜 경제통합을 먼저 이루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처럼 통합에 적극적인 나라의 경우 ‘유럽합중국’이 통합의 종착역이며, 경제통합을 먼저 달성하게 된 것은 연방국가라는 정치통합의 목표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그러나 영국이나 덴마크 등 통합에 소극적인 회원국의 입장은 다르다. 특히 영국의 경우 유럽통합이 가속화될수록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자국의 자랑스런 역사가 끝나고 유럽합중국의 한 주(州)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나 EU 법원이 영국의 주권에 시시콜콜 간섭한다는 것이다. 영국 언론은 브뤼셀에 있는 EU기구가 영국이라는 국가기구 위에 군림한다고 해서 이를 ‘유럽의 초국가기구(European Supe rstate)’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영국에 유럽연합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주요 회원국이 유럽연합을 보는 시각 차는 크다. ‘유럽합중국’을 종착역으로 여기는 회원국에게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보유한 유럽연합군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유럽연합군도 없으면서 어떻게 연방국가가 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EU를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기구로 보는 회원국에게 유럽연합군은 불필요한 존재다. 국방이라는 핵심주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며, 민족국가의 기능이 거의 없어지고 유럽연합이라는 연방국가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군의 필요성에 관한 이런 입장 차이는 통합과정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1950년대 형성된 냉전체제는 1990년에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붕괴됐다. 이후 전개된 유럽공동체 또는 유럽연합의 안보·군사 분야 협력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서유럽동맹
1948년부터 1년여간 계속된 소련의 베를린 봉쇄, 그리고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서유럽에 소련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의 재무장 없이 나토가 소련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비록 전쟁으로 주요 시설이 파괴되고 동·서독으로 국토가 분단되었지만 서독의 경제적 잠재력은 컸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독 재무장에 대한 프랑스의 끈질긴 반대였다. 1870년의 보불전쟁과 1914년의 1차대전, 1939년의 2차대전을 겪으며 독일과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프랑스에게 독일의 재무장은 소련의 위협보다 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서독의 재무장을 계속 추진하자 프랑스는 두 개의 카드를 꺼냈다. 하나는 전쟁수행에 절대적인 전략물자 석탄과 철을 공동관리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수용되어 1951년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설립했다. 독일 루르 공업지대와 자르 지역의 풍부한 석탄과 철, 그리고 다른 회원국의 전략자원을 고위기관이라는 기구에서 공동관리하게 되었다. 즉 서독이 다시 강성해져 전쟁을 일으킬 여지를 아예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유럽방위공동체(EDC)였다. 서독의 재무장을 허용하는 대신, 서독군 전체를 유럽군(European Army)에 소속시키고, 대신 프랑스나 베네룩스 3국, 이탈리아의 경우 군의 일부만을 이 유럽군에 배속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54년 8월 프랑스 의회는 EDC 비준을 거부했다. 미국은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계속해서 거부한다면 유럽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미국의 정책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고 직설적으로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 영국이었다.
당시 앤터니 이든 영국 외무장관은 독일 재무장에 관한 프랑스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영국의 육군과 공군을 서독에 주둔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전까지 유럽대륙에 군대를 주둔시킨 적이 없는 영국으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전환이었다. 이 약속은 실현되어 영국은 독일 통일 전까지 육군 5만명과 공군 1만명을 서독에 배치했다. 이어 1948년 영국과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주로 독일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맺은 브뤼셀 조약이 개정되어 서유럽동맹(Weste rn European Union: WEU)이 결성됐다. 서독과 이탈리아는 WEU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듬해인 1955년 서독과 이탈리아가 나토에 가입했다. 서독은 나토의 회원국이 되면서 핵무기, 생화학무기의 제조를 포기했고 서독군 전체가 나토의 통합사령부에 통합되었다. 즉 서독군은 나토의 동맹군으로서만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결국 서독과 이탈리아를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설립되었던 WEU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었다. 유럽방위공동체의 좌절과 당시의 긴박한 순간을 기억하는 유럽 정치인들에게 WEU는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미국과 캐나다가 나토의 회원국으로 서유럽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고 있는데 구태여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이 공동안보나 국방문제를 논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급변했다.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1년 폴란드의 계엄령 선포로 신냉전이 시작되었다. 1981년에 집권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힘의 우위를 내세워 군비를 대폭 증강하고 전략방어계획(SDI)을 추진했다. SDI는 소련의 전략핵무기(사정거리가 6000km 이상인 핵무기)가 미 본토에 도달하기 전에 대기권에서 요격할 수 있는 방어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유럽의 여러 나라는 이 계획이 안보에 더 큰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이 계획이 미소의 군비경쟁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와 그 경우 서유럽도 군비를 증강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무엇보다도 왜 기존의 핵억지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SDI를 추진하는가, 미국이 진정 서유럽에 핵우산을 제공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소련에서 핵무기를 발사하면 몇 분 이내에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 도달한다. 이 경우 미국의 SDI 계획이 성사되어 방어망이 구축되더라도 소련의 핵무기를 요격하기 어렵다. 설사 요격할 수 있더라도 과연 미국이 소련의 핵보복 위험을 무릅쓰고 유럽을 방어해줄 것이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미국의 SDI 추진에 가장 다급해진 것은 프랑스였다. 1966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나토에서 탈퇴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럽이 아니라 프랑스가 이끄는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 미국이 과연 프랑스나 서유럽 나토 회원국에 핵우산을 제공할지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드골은 소련, 동구권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미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유럽통합의 지도자 역할을 자처하고 이를 위해 서독의 경제력을 적극 이용했다.
이런 드골주의는 프랑스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사회당의 미테랑 전 대통령이나 우파의 자크 시라크 현 대통령도 드골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그런데 나토에서 탈퇴한 프랑스의 경우, 미국의 SDI에 대해 논의할 창구는 서유럽동맹밖에 없었다. 안보문제를 유럽공동체(EC) 차원에서 논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WEU만이 안보 포럼의 장이 되었다. 30년간 ‘잠자고 있던 숲속의 미녀’는 그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1984년 WEU는 거의 30년 만에 첫 외무·국방장관 모임을 개최, SDI에 관한 서유럽의 입장을 논의했다. 이어 외무·국방장관 모임이 정례화됐다. 프랑스는 WEU를 깨우는 한편 독일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1988년 독일과 함께 불독(佛獨)여단을 창단한다고 발표했다. 1991년 4200명의 프랑스·독일군으로 편성된 이 여단은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만 지녔을 뿐 실제 역할은 거의 없었다. 서독군 전체가 나토의 통합사령부에 소속돼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나토에 속해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불독 여단이 무슨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프랑스와 독일이 경제통합뿐만 아니라 군사분야에서도 통합을 촉진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한번 잠에서 깨어난 WEU는 더 큰 역할을 수행했다. 1987년에는 이란·이라크전쟁 와중에 걸프해역에 설치된 기뢰 제거 작업에 회원국이 참가했다. 참가국들은 해군 함정과 장비, 담당구역 등의 제반 문제를 WEU를 통해 논의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WEU의 역할은 한층 커졌다.
부시의 경고
나토는 냉전의 산물이었고 40년이 넘도록 서유럽의 평화를 지켰다.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했다. 그렇다면 냉전의 산물인 나토가 냉전이 끝난 상황에도 존재할 명분이 있을까? 독일 통일 이후 새로운 안보환경을 맞게 된 유럽 각국에서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일부 국가에서 나토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대두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변화된 안보환경에 맞춰 나토를 개혁, 유지하자는 의견도 두드러졌다. 결국 나토는 개혁됐고 냉전 붕괴 후에도 안보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의지와 영국, 독일 등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991년 11월 로마에서 나토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은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에 발맞춰 새로운 유럽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조약개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 논란이 된 것이 나토의 역할, 그리고 EC의 외교·군사 분야에서의 역할 확대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EC가 유럽군단(Eurocorps)을 세워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영국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은 이런 움직임이 나토를 약하게 한다며 나토의 핵심 역할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EC의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역할을 키우자는 논리를 폈다.
EC 회원국간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던 미국은 EC 회원국에게 나토의 주도적 역할을 약화시키는 어떤 기도도 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로마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EC 지도자들과 담판을 지었다. “여러분이 미군 없이 국토를 방어하고 싶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말하시오”라고 아주 직설적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독일은 물론 프랑스조차 미군이 계속 유럽에 주둔해야 한다고 답변하기에 이르렀다. 부시 대통령은 과감한 선제공격성 발언으로 일부에서 제기된 나토 폐지론, 그리고 EC의 나토, 즉 미국의 주도권 도전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EC 회원국들은 12월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공동체에서 유럽연합으로 바뀌어 유럽연합조약이라고도 불림)에서 외교·군사분야의 협력강화에 대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기존의 유럽공동체(경제공동체, 석탄철강공동체, 원자력공동체)는 경제분야 협력이 주를 이루었다. 세계무역기구의 통상협상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EC/EU 집행위원회가 각국과 통상협정을 벌인다. 즉 이 분야에서 회원국이 주권을 집행위원회에 넘겼다. 단일화폐 유로 발행과 이자율 조정도 유럽중앙은행이 맡고 있다.
EU의 막강한 경제 파워
한편 경제공동체와 별도로 1970년부터 회원국끼리 외교분야에서 사전 협력과 의견조율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유럽정치협력(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EPC)이라고 하는데, 주요 국제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공동입장을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군사나 안보문제는 나토에서 논의되었지만 1984년부터는 WEU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군사력 사용이 아닌 국제문제에 관한 EC 회원국의 공동 입장은 자주 표출됐다. 1983년 9월 대한항공기가 소련상공에서 격추되었을 때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선포 당시에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이를 확대, 공동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회원국은 국제문제에 대해 공동입장과 공동행동을 취하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특정 회원국이 자국의 중요한 이익 때문에 합의에 동참하지 못할 때는 기권할 수 있게 했다. 절차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EC가 좀더 강력한 행위자로서 한목소리를 내고 공동 행동을 할 수 있게 제도화했다. 물론 각국의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인정하면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게 노력한다는 것이다. 회원국 수반이 만나는 EU 정상회담에서 안보나 국방문제도 논의할 수 있게 됐다.
인종차별정책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무역제재를 받아오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0년 차별정책을 철폐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EU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해 공동행동을 취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가 남아공 지원에 따른 가이드라인과 지원규모, 분야를 제시하고 EU 예산으로 지원한다. 각 회원국도 집행위원회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남아공을 개별 지원한다. 이처럼 15개 회원국이 경제력을 모아 공동목표 달성을 위해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개별 지원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EU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안보정책은 나토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면서 WEU에 일부 역할을 넘겨주었다. WEU가 EU와 별도의 기구지만, EU 안보의 한 틀로서 공동안보와 국방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어 1996년에 이르기까지 WEU의 구체적인 역할이 확정됐다. 나토는 방어동맹으로 한 회원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다른 회원국들이 지원할 수 있다. 즉 원칙적으로 회원국 국토만이 나토의 작전구역이다.
WEU는 나토의 작전구역 밖(out of area)에 군을 파견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할 수 없는 경우 미국의 동의하에 WEU 회원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3국 등이 군을 보낸다. 이 경우 나토의 자산, 즉 대부분 미국의 자산인 정찰기와 전략 수송기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즉 나토, 그리고 그 안에서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하면서 EU가 군사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미국도 EU의 역할을 이 정도는 인정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또 1992년부터 3년 넘게 계속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을 겪으면서 독자적인 군사력 사용에 한계에 부닥친 프랑스도 나토에 부분적으로 복귀했다. 작전구역 밖에 군을 파견할 경우 회원국으로부터 차출할 수 있는 군의 규모와 장비, 작전, 통제센터 등에 관한 기본계획도 세웠다.
1997년 6월에 체결된 암스테르담 조약은 안보 분야에서 WEU와 EU의 역할을 새롭게 조정했다. WEU가 EU로 점차 통합된다고 규정했던 것. WEU와 EU 회원국이 6개월씩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 순회 의장국도 같은 회원국이 맡기로 해 업무의 효율성을 높였다. 또 암스테르담 조약은 WEU가 맡고 있던 인도주의적 지원, 평화유지, 전투수행을 EU가 수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외교분야에서도 하비에르 솔라나 전 나토 사무총장이 EU 각료이사회(각료이사회는 회원국 장관들이 모여 정책결정을 하는 기구로 외무장관이나 재무장관, 농업장관 등의 모임이 잦다) 사무총장이자 공동외교안보정책담당관(Mr. Europe)이 되어 국제문제에 대해 한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했다. 솔라나는 WEU의 사무총장도 겸임하고 있다. 또 솔라나 밑에 외교문제 기획·분석센터를 설치, 독자적인 분석능력도 키우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3년 6월 미-유럽연합 정상회담 뒤 EU 지도자들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제한적인 군사작전 계획센터 설립
EU는 이런 절차에 따라 지난해 7월 마케도니아에서 나토로부터 평화유지 임무를 인계받아 수행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소수 알바니아인과 정부군간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협력강화와 실전 임무수행에도 EU의 독자적인 군사력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
군사분야 협력강화는 점진적으로 이뤄졌지만 핵심문제, 즉 EU가 독자적으로 군을 파견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과 합의해야 하고 미국이 보유한 정찰기와 전략수송기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나토로부터 독립된 군사력을 갖추려는 논의는 기존의 이런 틀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동구권 10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각 회원국 대표들은 시민들에게 친근한 EU를 만들기 위해 헌법의 기능을 하는 헌법조약 초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 과정에 EU의 독자적인 군사력 사용에 관한 논의가 미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지난해 11월28일부터 3일간 EU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장시간 난상토론 끝에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어 12월 중순에 열린 EU 정상회담에서 이 합의가 수용됐다.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나토로부터 독립된 EU의 군사작전 계획센터를 설립한다. 이 기구엔 군사 분야 협력에 이바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회원국만 참여할 수 있다. 즉 회원국에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영국은 EU 헌법조약에 나토조약과 유사한 상호방어규정을 삽입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제한적인 작전센터 설립을 양보했다. 11월 중순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영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토니 블레어 총리와 EU의 국방협력에 관해 입장을 사전 조율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은 EU회원국의 독자적인 국방협력 강화 움직임을 나토, 즉 미국의 주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미국의 입장을 반영하려고 했다.
다 합쳐도 미국 국방비만 못해
어쨌든 EU 회원국들은 독자적인 작전계획센터를 세운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센터를 설립하더라도 독자적인 운용능력을 갖추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정찰기와 전략수송기 등을 독자적으로 구입, 운용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정찰기를 구입, 운영하는 비용은 우리나라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 주한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운영하는 정찰기 운영비용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막대한 국방비 증액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베네룩스 3국이나 프랑스, 독일, 덴마크 등 EU 회원국들은 미국보다 높은 복지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복지비 지출과 국방비 지출은 보통 반비례한다. 정부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국방비 지출이 늘어나면 복지예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가 제일 심각한 곳이 독일이다.
EU 제일의 경제대국 독일은 경제침체로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0%에 가깝다. 그런 데다 60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고령화사회다. 사회복지비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어 연금 수령액의 축소와 연금불입액의 증액을 골자로 하는 ‘어젠더 2010’을 추진하고 있지만 워낙 국민의 반발이 심해 슈뢰더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은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사회에서 카우보이처럼 설치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자는 명분은 좋을지 몰라도 국방비 증액에 따른 복지비용 삭감으로 불만에 가득 찬 국민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영국은 여전히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내세우며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영국은 20만명이 넘는 정예의 지원병을 거느리며 지구촌 곳곳에 군을 파견할 수 있는 EU 내 군사강국이다. 영국이 프랑스와 독일 주도의 독자적인 유럽연합군 결성에 참여한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유럽통합을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현실적인 시각으로 보는 영국으로서는 EU가 군사분야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영국은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과시하며 국제사회에서 경제력에 어울리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EU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면 상대적으로 자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1999년 상반기에 전개된 나토의 코소보 공습을 계기로 영국은 EU가 군사력 분야에서 미국과 비교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EU가 군사분야에서 역할을 키우는 것이 영국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영국은 유럽안보, 국방 아이덴티티 형성에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화를 지지하려고 한다.
나토 주재 미국대사의 경고에 프랑스대사가 맞받아쳤듯 프랑스의 드골주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지도자 구실을 하며 독일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말고도 원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미국이 별로 주저하지 않고 세계 곳곳에 군대를 파견하고 국제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과 달리, EU는 ‘시빌리언 파워 (Civilian Power)’로 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즉 국제분쟁이 발생하면 경제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외교로 해결해야 하며 군사력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2차대전 발발의 책임 때문에 상당수 국민의 가슴속에 반전주의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독일에서 이런 의견이 많다.
친미 동구권 국가들의 회원 가입
EU는 아직 연방국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경제통합뿐만 아니라 국가의 핵심 주권사항인 외교·군사 분야에서도 점진적으로 협력을 강화해왔다. 이 정도로 통합이 진전된 지역은 서유럽 외에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구체적인 평화정착방안을 담고 있는 로드맵에 EU가 당당히 한 당사자로 참가하고 있는 것도 국제사회가 EU의 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EU와 각 회원국은 세계 최대의 개발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EU 예산과 15개 회원국 원조액을 합해 318억달러가 넘는 돈을 개도국 지원에 사용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93억달러, 미국은 68억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 월급이나 주택 또는 빌딩도 EU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이라크 복구에도 EU의 경제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다. 미국과 영국이 지난해 10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독일, 프랑스 등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이라크에 빠른 시일 내에 주권을 이양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거인 EU는 경제력을 정치력으로 전환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바꾸는 데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의 수준에 이르는 데에도 50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 2∼3년 안에 각 회원국이 외교와 군사 분야의 주권을 포기하고 이를 EU 기구에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좀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 분야에서의 통합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정치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통합을 앞당겨 달성, EU 회원국에 단일화폐가 통용되고 있다. 경제통합의 효과는 정치와 군사분야로도 아주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또 미국의 대이라크 침략전쟁을 반대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미국과 함께 침략전쟁에 동참한 영국에서도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지난해 11월 중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런던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거센 반대시위를 보면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드러난 미국의 일방주의가 역설적으로 EU의 군사분야 역할 확대에 기여한 셈이다.
그러나 군사분야 협력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올해엔 동구권 10개 국가가 회원으로 가입한다. 이라크 침략전쟁을 두고 ‘구유럽(프랑스와 독일)’이 반미의 선봉에 섰을 때 동구권 10개 회원국은 친미진영에 섰다. 이처럼 회원국이 늘어남에 따라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는 더 커질 수 있고 합의를 이루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