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출장이 잦은 P부장은 거래선 접대방식도 골프로 바꾸었다. 지난달 미국으로 출장을 갔던 P부장은 애틀랜타의 스톤헤드 골프코스에서 외국인 세 사람을 초청해 라운딩을 하게 되었다. 평소 비즈니스 대화를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영어실력이라고 자부하던 P부장이지만 웬일인지 라운딩 중에는 의사소통이 잘 안 돼 당혹해했다. 이유인즉 한국식 골프영어가 외국인에게는 영 낯설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 구체적인 사례들.
2번홀에서 티샷한 볼이 슬라이스 때문에 반대편 옆 홀을 걸어가는 골퍼에게 날아가자 P부장은 “볼”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옆에 같이 있던 미국인들은 “포어(fore)!”라고 하는 것이었다. P부장이 벙커에서 쳐낸 볼이 깃대를 맞고 그대로 컵인 하자 외국인들은 “그레이트(great)샷!”이라고 칭찬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P부장이 “잇스어 후로크(It`s a fluke)”라고 하자, 동반자들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요행수’라는 뜻을 가진 ‘fluke’를 한국 골프장에서 흔히 하던 일본식 발음으로 ‘후로크’라 했으니 못 알아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까지는 애교에 가깝다. 코스를 걸어가던 P부장이 골프 실력이 뛰어난 외국인 이사에게 “당신 싱글이지요?(Are you single?)”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니오, 나는 결혼해 자녀가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그 상황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아마도 ‘Are you a single-digit handicapper?’라고 물었어야 원하는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핸디’라는 말은 핸디캡(handicap)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핸디(handy)는 ‘편리한’ ‘손재주 있는’이라는 뜻으로 쓰임새가 전혀 다르다.
P부장이 그린 위에 올라가보니 미국거래선 매니저의 볼이 컵에 붙어 있어 우리식으로 “오케이!”라고 선심을 썼다. 물론 그들은 그가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식용어로는 김미(gimme) 또는 컨시드(concede)라고 했어야 한다.
아예 우리식으로 조어(造語)를 쓰는 경우도 있다. 공이 구르는 선은 퍼팅라인(putting line)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적잖은 한국 골퍼들은 ‘퍼팅라이’라고 한다. 홀컵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외국인들에게 그런 단어는 없다. 홀 또는 컵 중 하나만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말의 ‘역전 앞’이나 마찬가지다.
퍼팅시 공이 휘는 슬라이스라인, 훅라인은 ‘브레이크 투더 라이트’ ‘브레이크 투더 레프트’라고 해야 옳다. 공이 수리지에 들어갈 때 쓰는 ‘안더리’라는 표현은 에이리어 언더 리페어(area under repair)를 마음대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것이다.
18홀을 마치고 난 P부장은 지금까지 사용해온 골프용어의 상당수가 엉터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혹은 그 직후 골프를 배운 초창기 골퍼들이,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줄이고 바꾼 용어를 답습해 쓰다가 익숙해져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핸디, 쪼로, 덴쁘라, 버디찬스, 빵카, 빠따, 도라이바, 오케이, 가라브리, 니어핀, 도라곤, 퍼팅라이. 이쯤 되면 일본말인지 영어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골프의 발생지는 스코틀랜드다. 이웃인 동시에 숙적이었던 잉글랜드인들은 속으로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골프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해왔다. 스포츠 용어는 종주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도는 일본어로, 태권도는 한국어로, 축구는 영어로 된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편한 대로 쓰면 되지 굳이 따질 필요가 뭐 있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일견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발음도 이상한 일본식 조어를 마구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말들은 그대로 우리 후세들에게 전달된다. ‘골프용어를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다는 외국인들 앞에서 우리 자녀들이 ‘골프채는 수백만 원짜리를 쓰면서 용어는 일본식 조어를 사용하는 속물들, 식민지 잔재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로 비친다면 딱한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