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유행처럼 도입된 열린교육이 실패로 끝난 것은 미국의 공립학교식 모델을 따랐기 때문이다. 미국 공립학교들은 인성교육의 바탕 없이 IQ교육에 매달리다 이기주의만 확산시켰다. 그것을 고스란히 배워온 한국은 전통의 주입식 교육이 갖고 있던 장점까지도 내팽개쳤다. 그러나 미국 사립학교식 열린교육은 성공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미국에서 대학 진학률 1위로 유명한 밀턴 아카데미.
열린교육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이미 실패한 모델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이 이를 도입한 것은 미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거라고 보았기 때문일 게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주입식 교육보다 창의력을 키워주고 자발적으로 공부하게 하는 열린교육이 낫다. 그렇다면 미국의 열린교육은 모두 실패했는가. 아니다.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는 실패했지만 사립학교에서는 성공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열린교육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열린교육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식 교육과 한국식 교육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미국인과 한국인의 의식 차이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필자 가정의 자녀교육과 한국 이민자 가정의 사례를 들어본다. 그런 다음 열린교육의 장단점을 살펴보고 한국 공교육의 실패 원인을 찾아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시행한 열린교육은 미국교육이다. 기존의 한국교육은 주입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교육의 차이는 무엇인가. 초등학교 자연과목에서 ‘뱀’에 대해 가르친다고 가정하고 두 나라의 교육 방법의 차이를 살펴보자.
미국의 열린교육은 교사 중심의 주입식 강의가 아니고, 교사가 학생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며, 토론과 연구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도록 도와주는 교육 방법이다. 이는 존 듀이의 실험주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으로 사물을 보는 관찰능력, 분석력, 통합능력 및 IQ 증진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데 매우 좋은 방법이다.
미국식과 한국식의 차이
미국에서는 교사가 거의 매일 학생에게 숙제를 내준다. 그리고 숙제 평가점수와 중간고사 및 기말고사 점수를 합하여 학기말 종합성적을 매긴다. 교사는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불공정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모든 자료를 보관한다. 초등학교 때는 점수화하지 않고 합격(proficient), 불합격(not-proficient) 여부만 결정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A, B, C, D로 평가한다.
미국에서는 교사가 “다음주 자연 시간에는 뱀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조사(Research)해오세요”라고 과제를 내주면, 학생은 집에 돌아와 부모와 도서관으로 가서 뱀에 관한 책 4~5권을 고른다. 잘 모를 경우 사서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집에 와서 그 책들을 참고로 보고서(paper)를 작성한다. 보고서는 서론에 이어 뱀의 정의, 뱀의 종류, 뱀의 서식처, 뱀의 독성에 대해 요약하고 결론 으로 구성한다. 쓸 때는 그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논문 작성법에 따라 책이름, 필자, 연도, 페이지 등을 정확하게 기입한다(footnote). 그림도 그려 넣고 도표도 삽입한다.
미국 교사는 강의보다 평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학생의 잘못된 철자법이나 형식에 맞지 않는 부분을 성의껏 지적해주고 점수를 매긴다. 때로는 발표 후 잘된 숙제는 벽에 전시한다. 또 어려서부터 논문 쓰는 법을 철저히 가르친다. 논문 쓰는 법은 학문의 기본이다. 답을 빨리빨리 주기보다 많은 질문으로 답을 유도한다(Brainstorm). 그룹 토의나 그룹 프로젝트를 주어 팀이 협력하여 문제를 풀도록 한다. 이는 인간관계 계발과 리더십 향상, 토론 중의 시너지 효과, 학습의욕 동기 유발, 창의력 및 협동정신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미국 학교도 주마다 혹은 교사의 자질에 따라 차이가 있다.
반면 한국의 수업은 교사가 강의하고 학생은 듣는 식으로 진행된다. 성적도 대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잘 보면 된다. 시험은 객관식 OX문제, 괄호 채우기나 4지선다 문제로 출제된다. 설사 주관식 문제를 출제한다 해도 자신의 의견을 묻거나 창의력 혹은 적용에 해당하는 문제는 거의 없다. 어쨌든 모든 시험은 점수화한다. 미국 교사들이 숙제 평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반면, 한국 교사들은 행정 업무(상위 기관에 내는 보고서 작성 등)에 보내는 시간이 많다. 물론 한국도 수행평가제를 도입해 약간의 변화가 있다고 들었으나 여기서는 주입식 교육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교사는 자신이 준비한 교육내용인 뱀의 정의, 뱀의 종류, 뱀의 서식처 및 뱀의 독성 등을 칠판에 적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노트하도록 한다. 그리고 대충 설명한 후 광고한다. “다음주에는 뱀에 대해 시험을 봅니다. 공부해오세요.” 학생은 집에 가서 노트한 내용을 달달 외워 시험을 본다. 그러나 시험을 보고 나면 거의 잊어버린다. 반면 미국 학생들은 매일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바쁘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다음으로 미국의 열린교육과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장단점을 알아보자. 교육은 학문을 전제로 한다. 학문은 교수와 배움(Teaching and Learning)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네 가지로 요약하면, ①기존의 축적된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 ②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 주제의 답을 찾는 방법 ③습득한 지식을 삶과 현장에 적용하는 방법 ④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가설을 설정해 그 가설이 옳은지 그른지 테스트하여 진리를 찾는 연구가 있다. 유능한 교사는 학생이 이 네 가지를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방법은 이 네 가지 중 기존의 축적된 지식을 습득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교육의 내용전달방법에서 대부분 교사 중심의 강의에 의존해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지식을 집중적으로 전달한다. 학생은 배운 것을 암기해야 하기 때문에 암기능력이 발달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한국에서 암기교육의 효과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암기위주’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지 ‘암기’ 자체는 교육에 꼭 필요하다. 흔히 IQ 높고 수준 높은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분석능력(analysis), 통합능력(integration), 적용능력(application) 및 창의력(creativity)을 강조하지만, 사실 그러한 것들은 축적된 기본 지식이 없을 때는 별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암기를 해야 한다. 유태인도 암기를 강조한다. 다만 암기방법은 별개의 문제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에 반해 미국식 열린교육은 두뇌를 더 조직적이고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②③④번에 효과적이다. 열린교육 방법 자체가 교사가 학생 스스로 지식을 습득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주제를 연구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Self-Learning). 즉 교사중심이 아니고 학생중심 교육(a student oriented education)이다. 학생은 이런 교사 밑에서 학습과정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주제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철저히 훈련받음으로써 학문적 소양의 기본이 튼튼해질 뿐만 아니라 사물 관찰 능력이 높아지고, IQ가 계발되며, 분석적이고,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이 계발된다.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도 주입식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지만, 스스로 답을 찾았기 때문에 습득한 결과는 더 확고하고 오래 지속된다.
따라서 단기적인 성과 면에서는 한국의 교사중심 주입식 교육이 우수하지만, 장기적으론 미국의 열린교육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특히 미국식 교육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문을 연구하는 능력에 가속도가 붙는다. 물론 학생에 따라 학생 중심의 열린교육이 적합하기도 하고 부적합하기도 하며, 한국의 교사중심 주입식 교육이 효과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쌍둥이 엄마가 열받은 이유
필자는 4형제를 모두 미국에서 낳아 키웠다. 그 중 셋째와 넷째가 쌍둥이다. 두 아이를 백인 동네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쌍둥이 중 형은 책을 잘 읽는데, 동생은 ABCD도 구분하지 못했다. 의아한 아내는 동네 엄마들한테 해결방법을 구했다. 그 후 아내는 간호사로 밤일을 하고 낮에 시간을 내어 룸마더(Room Mother, 학교 교실에서 무료로 학생들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를 했다.
아내는 교실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쌍둥이들은 같은 학년이지만 반이 서로 달랐다. 알고 보니 같은 학년에도 여러 반이 있고, 같은 반이라도 똑똑한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큰아이는 최상위 그룹에서 이미 3학년 수준의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둘째아이는 최하위 그룹에 속하여 버싱(Busing)으로 온 학생들과 어울려 장난만 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LA교육구 공립학교에서는 흑인 지역과 남미계 지역 학생들이 백인 지역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낮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흑인 지역과 남미계 지역의 학생들을 버스로 백인 지역 학교로 통학하게 한다. 일종의 인종통합제도다.
어쨌든 이 상황에 놀란 아내는 쌍둥이 둘째를 직접 끼고 가르치다가 이듬해 교장에게 요청하여 첫째가 있는 반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9개월이 지난 후 둘째는 최상위 그룹으로 승급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쌍둥이들은 대학에 갈 때까지 상위그룹을 벗어난 적이 없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모교인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넷째, 자녀에게 어릴 때 어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는 철저히 부모의 몫이란 점이다. 만약 필자의 아내가 쌍둥이 둘째의 학업 진도를 관찰하지 않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년 제일 낮은 그룹에서 장난만 치다가 졸업했을 것이다. 실제로 한인 교포 자녀들이 탈선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무관심한 데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주 선생님을 찾아 상담하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다섯째, 할 수만 있다면 부모가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좋다. 남을 돕는 봉사 정신에도 좋거니와 초등학교에서 봉사하는 동안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동네 학부모들로부터 미국의 기본 수직문화를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수직문화란 인간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이루는 역사·철학·사상·전통·고전 및 종교에 의한 문화이고, 상대적으로 수평문화는 인간의 외면적 형이하학의 물질·권력·명예·유행 및 현대 학문과 현대 과학 등을 말한다. 수직문화가 변하지 않는 영혼을 위한 가치들로 형성된다면, 수평문화는 항상 변하는 육체를 위한 땅의 것들로 이루어진다. 수직문화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깊이 있는 문화라면, 수평문화는 인생의 재미를 찾는 표면 문화다.
여섯째, 미국교사들은 촌지를 받지 않는다. 대신 학부모들은 학기가 끝난 후 크리스마스 시즌에 담당교사에게 감사카드와 함께 5달러 내외(한화 5000~6000원)의 선물을 한다. 주로 선물용 초콜릿이나 캔디다. 한국에서는 학기 전 혹은 학기 중에 촌지를 주고 그 촌지의 액수가 많다. 즉 불순한 동기인 대가성 뇌물이다. 한국은 이 대가성 촌지 때문에 학생의 인성교육에 큰 도움이 되는 ‘스승의 날’까지도 그 의미를 상실했다.
그러나 우리집 쌍둥이 사건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2000년대 이후 캘리포니아에서는 초등학교의 수준별 반편성을 없애고 함께 섞어 공부하되 읽기나 수학 과목 등만 그룹으로 나누어 수준별로 지도하고 있다. 주입식 강의 분량도 30~40%정도 늘렸다.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물론 학교와 교사에 따라 다르다).
우선 이혼가정이 늘고 맞벌이 부부가 많아 자녀를 방치하는 경우가 늘었다. 따라서 부모가 숙제를 도와줄 수 없으므로 교사도 수준 높은 숙제를 내주기 힘들다. 자연히 교육의 질이 떨어졌다. 반면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은 이혼율이 훨씬 낮고, 자녀의 숙제를 잘 도와주며, 학교 발전에 적극적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참된 교육은 유태인처럼 가정이 중심이 되고 학교는 도와주는 입장에서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학부모들이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그룹을 만들 경우 하위그룹 학생들은 항상 처지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수준 높은 그룹과 섞도록 요구하여 그것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그래도 아직까지 우수한 학생들은 별도로 지도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수준 높은 반(Gift, Honor’s program or AP class 등)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창피한 아버지와 즐기는 아들
한국에서 온 S목사는 미국에서 낳은 아들이 열 살이 되자 동네 야구클럽에 가입시켰다.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운동신경이 둔한지 아무리 가르쳐도 늘 큰 시합에 출전할 선수 선발에서 탈락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출전하지 못하는 경기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들이 졸라 큰 시합(리그전)에 참석했다. 아들을 데리고 경기장에 가긴 했으나 경기 내내 유쾌할 리 없었다. ‘내 아들이 선수로 뛰어야 하는데…’ 아들이 빠진 경기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더구나 한국 아이들끼리 시합하는 것도 아니고 백인 아이들끼리의 경기였다. 그런데 같이 온 아들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자기 팀을 응원했다.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아버지 : “이놈아 창피한 줄을 알아라. 남은 나가서 선수로 뛰는데….”
아들 : “아버지 왜 그러세요? 나는 쟤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데요. 쟤들이 잘 뛰면 되잖아요.”
아버지 : “너는 아버지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아들 :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쟤들은 쟤고, 나는 나지요.”
아버지 :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애비한테?”
아들 : “내가 운동을 못하면 어때요. 대신 즐기면 되지요.”
다음은 축구와 관련한 우리집 이야기다. 둘째아들이 여섯 살 무렵의 일로, 학교 룸마더들에게 정보를 들은 아내가 아들을 동네 아이들을 위한 축구클럽에 가입시켰다. 그곳에서 일하는 코치나 스태프들은 모두 학부모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연습은 일주일에 한 번씩 했다. 연습중 쉬는 시간에 선수들이 먹을 간식은 순서를 정해 집에서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른 아이들이 열심히 공을 쫓아다니는 동안 필자의 아들은 운동장 한쪽에서 손가락을 물고 징징거리기만 했다. 공을 따라가기는커녕 공이 앞에 와도 찰 생각을 안 했다. 공이 아들 근처에 오면 필자 부부뿐만 아니라 함께 온 부모들이 아들 이름을 부르며 목이 터져라 “빨리 차라!”고 소리쳐도 아들은 꿈쩍도 않았다. 때문에 아들이 속한 팀은 상대팀보다 선수 한 명이 부족한 채 경기를 하는 셈이었다.
필자 부부는 민망하기도 하고 다른 선수들과 그 부모들에게 미안했다. 더구나 타민족 앞에서 한국인으로서 자존심도 상했다. 다음 시합 때는 뛰겠거니 생각하고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야단치면 더 안 뛸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시합 때도 필자의 아들은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다. 고집이 셌다. 그러기를 네 차례(한 달간) 했다. 간신히 달래서 내보내기는 하는데 운동장에 들어가면 도대체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도 그 많은 시선 속에서 경기 내내 움직이지 않는 뚝심 하나는 대단했다. 웬만하면 울면서 나올텐데….
예닐곱 살 자녀들이 뛸 때는 학부모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한다. 그리고 시종 폭소가 터진다. 공을 헛발질해 넘어지는 아이들, 급하면 아예 공을 껴안고 뛰는 아이들, 별별 아이들이 다 있기 때문이다. 어른 경기보다 더 재미있다. 다섯 번째 경기 때였다. 역시 아들은 경기장 가운데서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경기 중간쯤 되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다른 선수가 찬 공이 아들 앞으로 오니까 나가서 냅다 반대편 쪽으로 차버렸다. 학부모들과 선수들이 모두 일어나 서로 껴안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너무 흥분하여 경기가 중단될 정도였다. 끝나고는 아들 옆으로 가서 모두 한마디씩 격려해 주었다. “훌륭했어(You are great!)”.
성공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 이웃에 한국 내외가 삼형제를 낳아 키우며 살고 있다. 그 집 아버지는 한국 해군 출신으로 분위기부터 엄격하다.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데 권총강도가 들면 일단 돈을 내주어 위기를 넘긴 뒤 바로 차를 타고 뒤따라가 강도의 차를 들이받아 잡는 분이다. 성질도 불 같다.
그집 아들들은 공부를 잘하지만, 거의 매일같이 공부 안 한다고 야단을 맞는다. 그래서 부부 싸움도 잦았다. 그 집의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데 막내아들만큼은 아버지가 귀여워하기 때문인지 조금 달랐다. 하루는 막내아들이 아버지에게 큰 맘 먹고 물었다.
막내 : “아버지, 아버지는 만날 우리에게 성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성공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 “이놈아, 남들처럼 공부 잘 해 박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게 성공이지.”
막내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 “네 생각이 뭔데?”
막내 : “어렸을 때 하고 싶어 하던 것을 커서 성취하는 것이 성공입니다.”
아버지 : “이놈아, 무슨 얘긴지 예를 들어봐라!”
막내아들 : “잔디 깎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남도 도와준다고 생각해서 장래 희망이 잔디 깎는 일을 하는 것인데, 커서 픽업트럭 하나 사서 공구들을 챙겨 잔디 깎는 일을 하게 된다면 저는 성공한 사람이지요.”
아버지 : (버럭 화를 내며) “야 이놈아, 그래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
막내 : (얻어 맞을까봐 피한다)
위 사례들은 한국에서 교육받은 부모와 미국에서 교육받은 자녀들 사이의 의식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식 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아들이 선수로 뛰지 못해 속이 타는데 아들은 태연히 야구를 즐긴다. 야구를 못한다는 열등의식이 전혀 없다. 미국에서 자란 자녀들은 비교당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나’는 ‘나’인데 왜 남과 비교하느냐고 따진다. 그리고 한국에서처럼 샘이 많지 않다. 즉 쓸데없는 경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자기주장이 강하다.
필자 아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가 공은 차지 않고 그냥 운동장에 서 있기만 할 때, 어느 누구도 그 아이 때문에 팀이 불리하니까 그만 나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설사 팀이 져도 아들에게 눈치 주는 일이 없다. 만약 한국에서라면 온가족이 망신만 당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우리 내외가 미안해할까봐 격려해주었다. “다음번에는 잘할 테니 꼭 데리고 나오라”고. 코치는 우리에게 “어릴 때 경기하는 이유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경험하고 자라는 것이 목적(팀워크)”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탈락자가 없다. 느리고 좀 처져도 기다려주는 이웃들, 이것이 미국의 성숙한 EQ(감성 지수) 교육의 힘이다.
열린교육형 아이, 주입식교육형 아이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녀교육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아들이 운동에 둔하다고 일찍 포기했다면 피차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겠는가. 평생 축구를 피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두뇌발달의 네 가지 유형이 있다. ①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똑똑한 사람 ②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아둔한 사람 ③어릴 때는 똑똑하다가 나중에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 ④어릴 때는 무척 둔한 것 같으나 크면서 점점 똑똑해지는 사람이 있다.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은 네 번째 유형에 속한다. 따라서 교육은 인내를 갖고 용기를 주며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열린교육을 함에 있어 미국 공립학교는 실패했고 사립학교는 성공했다. 왜 그럴까. 또 한국에서 열린교육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열린교육도 학교에 따라 다르다. 미국의 사립학교는 대부분 종교교육을 바탕으로 인성교육을 시키는 기독교, 천주교, 유태교 학교들이다. 학교 설립목적이 종교적 가치관을 기본으로 한 인성교육이다. 종교 외에도 전통이나 역사·철학·사상·고전·효도 및 고난 등 수직문화의 가치관을 강조한다.
반면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의 근본 가치관을 이루는 종교교육을 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직문화도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미국의 공립학교는 인성교육, 즉 수직문화 교육 없이 IQ교육만 시켰기 때문에 설사 IQ교육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도로 가정이나 교회에서 인성교육을 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열린교육 자체가 남보다 자아를 중시하는 첨예한 IQ교육이기 때문에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극도로 팽배할 수 있다. 그리고 또래의 강한 세속적 수평문화가 계속 침투하면 이런 성향을 심화시킨다. 이럴 경우 인성과 IQ교육 모두 실패하기 십상이다.
물론 미국 사립학교가 모두 종교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열린교육에 성공한 이유는 역시 수직문화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비록 학교에서는 종교적 인성교육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학교의 이사들과 교사를 비롯한 구성원들은 수직문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자신이 받은 수직문화의 정신으로 교육을 한다.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가정에서 자녀에게 종교적 인성교육을 시킨다. 비종교인이라도 많은 가정에서 서구 전통의 인성교육 프로그램, 즉 수직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열린교육은 학생에 따라 잘 맞을 수도 있지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자율적인 학생이 있는가 하면 타율적인 학생도 있다. 자율적인 학생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능동적으로 해나간다. 반면 타율적인 학생은 누가 일일이 가르쳐주고 챙겨주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열린교육은 학업의 동기유발이 강한 자율적인 학생들에게 맞다. 책임감이 강하고, 지적 성취욕이 높으며 호기심이 많은 학생들에게는 열린교육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겐 자녀의 숙제를 도와줄 수 있는 부모가 유리하다. 설사 학교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도 가정의 인성교육이 뒷받침돼야 IQ와 EQ교육 모두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린교육이 맞지 않는 학생은 누구인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동기유발이 미약한 학생이다. 특히 책임감이 없고 게으르고 둔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열린교육은 ‘놀자판’이 되기 쉽다. 자녀를 돌봐줄 이가 없는 문제가정엔 더욱 불리하다. 왜냐하면 열린교육은 교사가 가르치는 대신 학생 스스로 참여하여 공부하게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해외유학 박람회에 몰려든 인파. 공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유학시장은 날로 커지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학습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식에 적응을 잘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미국식에 잘 적응하는 학생도 있다. 대개 외우기를 잘하는 학생은 한국식이 유리하고, 창조력이나 응용력이 강한 학생은 미국식이 유리하다. 따라서 한국에서 공부를 잘 하던 학생이 미국에 유학 와서 어려움을 겪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미국에 유학 와서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있다.
급진주의에 이용된 열린교육
같은 열린교육이라도 교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열린교육의 가장 큰 약점은 교사가 교육내용의 주제를 정하지만 학습진행은 교사 중심이 아니고 학생 중심이란 데 있다. 위에서 아래로 전수하는 수직적 교육방법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보고하는 역수직적 교육방법이다. 학생의 의견을 너무나 존중한 나머지 인간의 기본 윤리와 도덕에 맞지 않아도 그들의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명목하에 뭔가 새로운 것을 얘기하면 칭찬하고 지원한다. 언뜻 보기엔 열린 마음 같지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예를 들어 “왜 결혼은 남자와 여자만이 해야 하는가? 동성끼리 결혼하면 어떤가?” “왜 여자가 처녀성을 지켜야 하는가? 아예 처녀막을 제거하면 어떤가?” “왜 결혼 후 서로 순결을 지켜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제기하고 기존 질서에 반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묻고 싶다.
그뿐인가. 미국에서는 동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 나머지 인간보다 훨씬 더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1998년 델라웨어의 한 법정에서는 신생아를 죽인 여자에게 단지 30개월의 구속형을 내렸는데, 같은 해 위스콘신주 제네스빌의 한 법정에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5마리의 고양이를 죽인 사람에게 12년형을 선고했던 것.
선악의 구별을 분명히 가르치지 않은 열린교육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짐승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어찌 사람의 생명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는 전체를 대변하는 중심주제(central theme)와 일개 가지에 불과한 부주제(sub-theme)의 차이를 모르는 오류다. 현재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부주제를 강조한 나머지 주제를 상실하여 세상이 거꾸로 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열린교육이 정해진 윤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자연과학이나 수리 및 언어영역에서는 창의성을 키우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인성교육의 가치관을 더 많이 다루는 인문학에서는 정해진 윤리가 웬만큼 강하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하다. 특히 교사가 급진 자유주의에 빠져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관점으로 어떤 주제를 연구하게 하면 선악간의 분별력이 없는 학생의 인성은 삽시간에 망가진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처음에는 거부감을 갖지만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데 점점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고로 새것이 더 멋있어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교사가 중요하다. 잘못된 교사가 기존 질서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하면 학생은 매우 신선하게 느끼겠지만 결국 그것은 인성교육의 독이다. 그리고 이런 교사는 대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숙제를 해와야 창의력이 있다고 인정해 점수를 잘 준다. 성경의 가치에 강한 필자의 아들들도 이런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
한국은 이런 급진 자유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 중 하나다. 그 이유는 한국적 사상은 실종되고 머리 좋은 학생들이 미국 유학을 가서 이런 이론에 심취하여 학위를 딴 후 한국 대학 강단에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은 이것이 새로운 것인 양 여과 없이 소개했다.
열린교육에선 교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학문하는 기본 방법이 미숙한 교사는 열린교육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데 한국 교사들은 학문에 관한 기본 원리의 이해와 실제 훈련이 부족하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거나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린교육을 하려면 교사가 주제에 대한 자료 수집 및 연구 방법, 숙제(논문) 작성법, 숙제 평가(모든 교사가 글쓰기와 문법에 익숙해야 한다), 교실 운영(class management), 질문하는 방법, 그룹 토의 방법 등을 철저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미국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꼼꼼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원리 원칙에 충실하다. 특히 대학에서 숙제 중에 남의 글을 하나라도 인용하고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퇴학당한다(남의 글 도용죄).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 미국에 와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이유도 바로 연구 방법, 창의성 및 정직성 문제 등에 있다. 한국에서는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들도 미국에서는 중대한 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직성이나 준법정신이 그렇다.
학원을 많이 다닌 학생들의 경우는 더 힘들다. 이곳은 누가 일일이 가르쳐주는 환경이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책과 우수 저널을 통해 답을 얻어야 한다. 필자도 미국에 와서 30년간 직장 생활도 해보고, 공부도 하고, 교수 생활도 하여 이제는 웬만큼 적응했지만, 아직도 한국에서의 습관이 드러날 때가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는 한 반의 학생수가 많아서 열린교육이 힘들다. 미국에서는 거의 매일 숙제를 내주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평가시간이 많이 걸린다. 평가할 때도 논문 작성법에 의한 구조(structure)와 단어 선택 및 문법을 끊임없이 빼곡히 지적해주는 교사가 훌륭한 교사다. 대충대충이란 없다. 한국은 학습의 결과를 중시하지만, 미국은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이 미국의 힘이다.
끝으로 지적할 것은 한국에서는 학업 성취도에 따라 그룹을 편성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한국 실정에서 자녀가 제일 낮은 수준의 그룹에 편성된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부모가 있을까. 아마도 항의가 잇따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의 머리가 둔하고 게으른 것은 탓하지 않고 무조건 교사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는 부모가 많을 것이다.
미국 학부모나 학생은 교사의 결정을 인정하고 학교의 방침에 따르고 협조한다. 부모가 교사와 친하다고 해서 자녀의 그룹을 바꿀 수 없다. 오직 학업 성취도와 IQ검사 결과에 따라 정할 뿐이다. 즉 학부모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교사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한다. 또한 미국처럼 교사가 그룹 수준에 맞는 숙제만 내주고 스스로 그것을 풀게 하고, 대신 수업 시간에 숙제만 평가한다면 교사가 봉급만 축내고 놀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한국 학부모는 교사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입을 움직여야 잘 가르치는 줄 안다.
그래도 미국 공립학교가 나은 이유
미국의 공립학교가 엉망이라지만 한국 학교보다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인재를 키울 줄 알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재는 어떻게 키워지는가. 미국 학교는 어린이들이 입학하면 먼저 시험을 보고 성적에 맞게 그룹(track)을 정한다. 때로는 IQ테스트로 정하기도 한다. 낮은 반(lower track)에는 둔하고 산만하고 학습의욕이 없는 어린이들이 있고, 높은 반(higher track)에는 똑똑하고 집중력이 높고 학습의욕이 강하고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들이 있다.
따라서 같은 학년 같은 반이라 해도 그룹에 따라 학업 성취도나 교재(Resources)가 다르다. 낮은 그룹 학생들은 기초(basic level)만 배우고, 높은 그룹 학생들은 능력에 따라 상위학년 수준의 내용(advanced level)을 배운다.
공립학교라 해도 같은 교문으로 들어오지만 교실이나 그룹은 서로 다르다. 학생을 개인적으로, 학교 위주로, 그리고 주별로 같은 학년 학생끼리 비교하도록 평가(한국의 수능시험 같은 제도)를 자주해서 우수한 학생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을 보호해 최대한 키워준다. 그래서 우수한 학생은 고등학교 때 대학에서 가르치는 수준의 교과내용을 공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린 나이에 대학도 들어간다. 그 결과 미국은 국민 전체의 학력 평균 수준이 한국보다 낮다 해도, 소수의 엘리트들이 국가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능력별 평가제도는 우수한 학생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학습의욕이 있고 성실한 학생들에게는 학습동기를 부여하여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민 온 학생들은 대개 영어가 서툴러 처음에는 최하위 그룹에서 시작하지만 그중 성실한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상위그룹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정부는 처진 학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언제나 연구하고 노력한다.
미국에 살면서 필자가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미국은 어떻게 민족적 뿌리가 다양한 타민족 이민자를 수용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하며 세계 최강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미국에는 영어도 못 하고 문화도 완전히 다른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다. 사용되는 언어만도 200여종이 넘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인 이민자에 비해 학력과 노동력, 눈치 및 의지력이 낮은 편이다(실제로 한국 이민자의 70% 이상이 대졸자이나, 타민족의 이민자 중에는 문맹자가 많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 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치고 줄서기(질서의식)도 가르치고, 일자리도 알선해주며 잘살 수 있게 해주는가. 그뿐인가. 정부 보조금으로 먹고 사는 흑인촌 사람과 남미계 이민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소수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는 영재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능력과 자질 그리고 성실성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설사 그들이 소수민족 출신이라 할지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의 잠재력을 최대한 키워준다. 한국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시각장애인인 강영우 박사나 거지 출신 신호범 박사, 청계천 여공 출신 서진우 여사(하버드대 박사과정)가 그 예다.
교육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학생을 평가(evaluation)하는 일이다. 따라서 학생의 여러 가지 재능과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교사가 학생을 평가하지 않고 어떻게 우열을 가릴 수 있겠는가.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평가에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히 낮은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과 그 부모들 대부분은 평가받기를 싫어한다. 자신들의 권리는 주장하면서 앞서가는 학생들의 발목을 잡기 때문에 인재를 초기단계에서부터 키울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한국 교육에 대해 하향평준화란 말이 나온다.
인성평가 기본은 정직과 신뢰
미국에서는 학생의 인성평가가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이비리그 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우수한 대학들은 학생의 시험점수만으로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SAT(한국에서의 수능시험) 총점 1600점인 학생은 떨어지고 1100점인 학생은 합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대학 입학 전형에서 시험 점수 외에 학생의 인성과 과외활동 및 리더십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의대생이 되려면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하고, 법대에 진학하려면 인권단체나 법원 서기의 조수로 봉사한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한다. 특히 스포츠 선수나 예능 특기자들은 많은 혜택을 받는데, 그 이유는 학교 당국에서 운동을 하거나 예능을 키운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드는지 알기 때문이다. 운동이나 예능활동을 안 하고 점수만 많이 받은 학생보다 점수를 좀 덜 받았더라도 운동이나 예능활동을 한 학생을 더 귀하게 본다. 그리고 운동 선수 중에도 주장으로 활동했거나 과외활동 중 회장이나 임원으로 활동한 학생은 리더십을 인정해 점수를 많이 준다.
경찰서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의 사례다. 학생의 일은 술취한 사람을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이다. 밤 1~2시쯤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그는 곧 일어나 술집으로 가서 술취한 사람을 그의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온다. 이렇게 하면 경찰서에서는 매번 기록을 해놓았다가 그 학생이 진학할 때 원하는 학교에 기록을 보내준다. 매사가 정확하고 부정이 없다.
한국도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학교에서 병원 봉사 기록을 가져오라고 하자 엄마가 아들에게 “너는 학원 가서 공부만 해라. 내가 대신 봉사하고 증명서 갖고 올게!” 하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아예 봉사도 하지 않고 병원장한테 부탁해서 증빙 서류를 만들어오기도 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미국 같은 인성 평가제도가 어찌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학생들에게 정직을 삶의 생명처럼 가르쳐야 할 학교와 교사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도 신용불량적 행위를 서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각 대학에서 내신성적 반영률을 높이겠다고 발표하자(2000년),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는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해 교사들이 미리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주어 집에서 공부하게 한 후 그 문제로 시험을 치게 했다고 한다.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A학점 그룹이나 B학점 그룹에 속하여 대학 입시에서 유리하게 하려 함이다. 이를 학부모들이 찬성하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학교가 인성교육 평가에 실패한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근본적인 신용불량을 해결해야 한다. 그 방법은 어려서부터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바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이를 실천하게 하는 인성교육뿐이다.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한국 교유의 가치관을 강조하는 민족사관고.
유태인 교육에서 배우는 지혜
대안은 이미 위에서 다 제시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학생의 방종과 타락을 막기 위해 가정과 학교에서 인성교육(EQ)을 시켜 먼저 사람을 만든 후 현대식 IQ교육(열린교육, 이후 ‘IQ교육’으로 통일)을 해야 한다. 인성교육 없는 IQ교육은 독이다. 교육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부모와 교사의 권위를 되찾아주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IQ교육을 하되 능력별로 나누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다음에 인성교육의 내용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또 누가 교사가 될 것이냐에 따라 몇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첫째, 학교는 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의 내용으로 한국의 고유 가치관, 즉 수직문화를 가르치고 IQ교육을 시킨다. 쉽게 표현하면 한국의 1960년대 인성교육 방법에 미국의 열린교육을 첨가하는 것이다. 그 모델로 ‘민족사관학교’를 들 수 있다. 그곳에서는 한국의 전통과 예절 그리고 민족사랑을 강조하면서 IQ교육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학생들이 가정과 격리되는 것이다. 기숙학교는 어떤 방법으로든 학생이 가족과 교감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어야 한다.
둘째, 인성교육의 방편으로 종교교육과 IQ교육을 함께한다. 이 점에선 종교재단이 설립한 학교가 유리할 것이다. 한국의 문제점 중 하나가 종교교육을 무조건 싫어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종교교육을 철저히 배제한다. 이는 잘못된 정책이다. 인간의 가치관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근거한다. 앞에서 언급한 민족사관학교에서 인성교육의 내용으로 가르치는 수직문화도 그 뿌리를 캐보면 한국의 종교에서 나온 것임을 상기하자.
미국 뉴욕의 공공 라디오방송에서는 정기적으로 자녀에게 종교교육을 시키라고 권한다.
종교교육이 없으면 인성교육이 힘들고 인성교육이 안 되면 도덕 불감증에 걸린다. 한 예로 미국의 바나연구소 그룹이 최근 실시한 조사를 들 수 있다. 이 조사는 7개의 종교그룹 성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는데 7개 그룹이란 복음주의 기독교인, 비복음주의자이지만 거듭난 기독교인, 사유(思惟)적 기독교인(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정하는 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 및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개신교, 가톨릭이다.
조사 결과 복음주의자(구원을 확신하는 보수 기독교인) 그룹은 10가지 항목 중 간음이나 동성간 성관계, 포르노, 신성 모독, 음주, 낙태 등을 인정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반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 그룹은 위의 항목에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수용하였고, 10항목 중 9개 항목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약에 대해서만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크리스천저널, ‘미국인들 도덕수준 하락 지속’ 2003.11.23). 따라서 종교가 없다면 윤리나 도덕교육은 포기해야 한다.
인성교육이 우선이다
셋째,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인성교육과 IQ교육을 함께 시키는 홈스쿨링(가정학교) 모델이 있다. 미국에도 인성교육 없는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학부모가 많다. 사립학교는 수업료가 너무 비싸 보내지 못할 경우 차선책으로 집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인성교육과 IQ교육을 함께 시키는 홈스쿨링을 한다. 주로 성경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보수 기독교인들이다. 그 수가 무려 130만명이나 된다. 공립학교가 오죽 부실하면 그 힘든 홈스쿨링을 하겠는가?
넷째, 가장 좋은 모델은 수천 년에 걸쳐 검증받은 유태인 모델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의 인성교육과 IQ교육을 직접 맡고 자신들이 설립한 학교에서는 종교의 가치관과 함께 IQ교육을 한다. 즉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의 IQ와 EQ교육을 담당하고 학교는 가정 교육의 보조가 되는 패러다임이다. 현재 이스라엘 공교육에서는 구약성경이 필수 교과목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이에 적극 협조한다. 그들의 종교교육은 강인한 정신교육이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교육의 파워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공교육을 살릴 최선의 방안은 무엇인가. 원칙 없고 비효율적인 공교육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이 네 가지 모델을 골고루 도와주고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 안목에서 유태인 교육의 모델로 가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적 합의 아래 교육정책을 개혁해야 한다.
즉 IQ 위주의 교육에서 ‘인성교육 + IQ교육’ 위주로 전환하고 ▲평준화에서 능력별 교육으로 ▲학교 위주에서 가정교육 위주로 ▲비종교교육 위주에서 종교교육 위주로 전환해야 한다.
한 가지 첨가할 것은 한국 가정과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의 내용으로 종교교육을 시킬 경우 한국의 수직문화도 함께 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이 특정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한국인다운 한국인으로 키우기 위함이다. 한국이 유태인 교육모델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이 변하고 학교가 변하고 학부모와 사회가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