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 탁월한 한국 음악가 많지만, 오케스트라는 세계 수준에 한참 미달
- 아이들이 자신에 맞는 재능 찾아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라
- 클래식에서 팝으로 넘어가는 건 부정적… 팝에서 클래식으로 오는 게 좋다
- 음악과 요리 모두 즐기는 나는 행복한 사람
- 소리 내야 음악가이지 막대기 하나 휘두른다고 음악가인가
- 하나부터 아홉까지는 가족, 음악은 열 번째
정명훈은 스승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특기였던 브람스 교향곡 1번을 10년 넘게 연구하며 자신의 브람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브람스가 21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1번은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명훈도 2004년을 맞은 조국의 동포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명훈은 서울에 오면 북한산 자락에 있는 구기동 빌라에 머문다. 같은 층에 누나 정명화(첼리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와 처형이 산다. 원래 신년음악회 다음날 빌라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했으나 정명훈의 가족 행사 때문에 장소가 바뀌었다. 인테리어에 조예가 깊은 부인이 꾸며놓은 집 구경을 하고 인터뷰가 끝난 뒤 이른바 ‘정명훈 요리’를 감상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으나 어그러져 아쉬웠다.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명훈은 프랑스 프로방스에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갖고 있다. 집 앞으로는 올리브 농장이 펼쳐지고 뜰에는 요리 재료를 재배하는 텃밭이 있다.
인터뷰는 구기동 집 근처 가나아트센터에서 진행됐다. 같은 장소에서 한 시간 앞서 YTN 백지연씨가 정명훈을 인터뷰했다. 중복되는 질문을 피해 보려는 생각에서 “방청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백씨는 “방송국 스태프 외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긴장한다”며 완곡하게 사절했다.
정씨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바로 옆 레스토랑에서는 부인 구순열씨가 재즈 기타리스트인 둘째아들 선(21), 이모인 박용길 장로(고 문익환 목사 부인) 등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기다리자 정명훈이 백지연 인터뷰를 끝내고 우리 자리로 왔다.
“세계 수준 되려면 20년 걸린다”
-어제 예술의전당에서 신년음악회 지휘하는 걸 봤는데요. 감동적이었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클래식 음악은 기막히게 좋은 곡이 너무 많아 고르기 힘들어요.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곡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작년에도 지휘를 해봤습니다. 브람스의 곡을 리허설하면서 단원들과 깊이있는 음악적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틀간 리허설 했는데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연습기간이 짧고 자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데도 연주가 아주 잘됐습니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세계 수준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세계 수준과는 아직 비교할 수 없지요. 한국에는 개인적 재능이 탁월한 음악가가 많지만 오케스트라는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해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옆자리에 있던 형 명근씨가 “너 그 이야기 할 때는 조심해야 돼”라고 영어로 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명근씨는 서울에서 음악공연 비즈니스를 하는데 명훈의 한국·일본 지역 매니지먼트를 겸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하나를 제대로 키운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지휘자도 탁월해야 하고 서포트하는 매니지먼트도 중요합니다. 정부나 대기업에서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키우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매년 올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어요.”
-세계 수준에 비해 한참 미달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죠.”
-한국 오케스트라 발전을 위해 일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책임지는 자리는 힘듭니다. 88올림픽을 2년 앞둔 1986년에 정부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줄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절대 불가능하다고 답했죠.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더라도 세계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만들려면 20년이 걸린다고 말했죠. 일본 수준까지 가려면 10년이 걸리고요. 지금 다시 그 질문을 받더라도 똑같이 말할 겁니다.”
-올 여름에 정트리오 공연이 열린다지요. 10년 만의 공연이라 국내 팬들의 기대가 큽니다. 작년에 어머니 85세 생신을 기념해 세 남매가 함께 무대에 서려고 했다가 스케줄 조정이 안돼 올해로 미뤄졌다면서요.
“셋이 함께 모이기가 어려워요. 나는 유럽에 살고 경화 누나(바이올리니스트)는 뉴욕, 명화 누나는 한국과 뉴욕을 오갑니다. 내가 피아노를 안하고 지휘만 해서 트리오 공연이 어려워진 점도 있고 10년 동안 각자 다른 나라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정트리오가 공연을 하면 정명훈은 피아노를 친다. 그는 지휘를 하기 전에 본래 피아노를 했다. 만 7세 때 서울시향과 협연한 피아노 신동(神童)이었다. 1974년엔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피아노 부문 준우승을 했다. 그러나 다음해부터 전공을 지휘로 바꿨다.
-지금 정 선생의 피아노 수준은 아마추어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요. 오히려 그래서 피아노 하기가 편해요. 아마추어처럼 하고 싶을 때 신경 안쓰고 하기 때문에. 한국에 트리오 가정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형 명근씨가 “한국에 ‘정트리오’만 세 그룹이 있다”고 거들었다.
-한국 어머니들의 자녀 교육열은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지요. 음악뿐만 아니라 예체능 분야가 모두 그래요. 한국 부모들이 제2의 정경화, 제2의 정명훈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 데는 정트리오를 길러낸 이원숙(86) 여사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모두 성공해 정경화가 되고 타이거 우즈가 될 수는 없잖아요. 죽어라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삶이 힘들어지죠. 자녀교육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밀어붙이기만 하면 아이가 압박감을 갖거든요. 특별히 재주있는 경우라야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부모 말을 잘 듣고 열심히 하는 게 몸에 배어 있습니다. 한국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면 또래의 외국 아이들보다 훨씬 발전이 빨라요. 외국인들은 한국 아이들의 성취도에 놀랍니다. 그러다 16세, 17~25세, 26세 사이에 놓인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려서 죽어라고 하면 빨리 발전하지만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려면 또 다른 게 필요합니다.
나는 미국에 갔던 8세 때부터 14세 때까지 6년 동안 식당 부엌에서 일하고 학교 다니며 스포츠도 열심히 했습니다. 은행에 돈 저축하는 것처럼 피아노만 계속했다면 피아노를 더 잘 칠 수 있었을 거예요. 시애틀에 살 때 제이콥스 선생님이 피아노만 하지 말고 다른 것도 알아두라고 가르쳤습니다.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재주는 부족한데 성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는 특별하지요. 나보다 좋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많지만 나는 다행히 밸런스와 타이밍이 맞았고 행운도 따랐던 거지요.”
“자녀교육은 균형 맞추는 게 중요”
정씨의 어머니 이원숙씨는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고 동덕여고에서 한때 교편을 잡았다. 자녀들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길러주기 위해 명동에서 고려정이란 음식점을 운영했다. 자녀들의 실력이 향상되면서 한국에 머물러서는 더 발전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남편과 함께 7남매를 데리고 미국 시애틀로 건너가 한국식당을 꾸려가며 뒷바라지를 했다.
1980년 12월 남편이 간경화로 세상을 뜬 뒤 이씨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찾아나선다. 벨리폰지 신학대학 뉴욕 분교에 입학해 20∼30대 학생들 틈에 끼여 수업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큰아들 명근이 사는 뉴욕주 미들타운에 한인교회를 세우고 목사가 됐다. 1990년 세화음악장학재단을 세워 음악인재 육성도 시작했다. 명근씨는 “뉴욕에 사는 어머니는 아직 정정하시다”고 전했다.
-정트리오를 길러낸 어머니의 자녀교육 방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 형제 7명이 처음엔 모두 피아노를 했어요. 그런데 나 빼고 모두 피아노를 싫어했어요. 그러면 대개는 아이들이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그만두죠. 아니면 억지로 시키든가…. 어머니는 우리들이 음악이 싫어서가 아니라 악기가 안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다른 악기를 가져다 붙이는 거죠. 하루는 명화 누나를 첼로 연주회에 데리고 갔어요. 누나가 첼로 연주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집에 오는 길에 첼로를 샀어요.
경화 누나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한살 때 못하는 말이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피아노를 싫어했대요. 피아노를 2년쯤 하다 바이올린을 찾아냈습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2주일 만에 피아노 2년 한 것만큼 기량이 향상됐습니다. 내가 아이를 길러보니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은 피아노를 시켜보니까 싫다고 해요. 둘째는 바이올린을 시켜봤는데 그것도 싫다는 거예요. 그때 지금 하는 기타를 찾아냈다면 달라질 수 있었겠죠.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하고 있는 정명훈. 피아노는 취미, 지휘는 프로페셔널의 영역이다.
어머니의 교육방법엔 세 가지 키포인트가 있어요. 먼저 아이들한테 맞는 것을 찾아주는 겁니다. 그 다음 아이가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이가 결심을 하면 세 번째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 지원해줍니다. 이 세 가지 포인트의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어요. 그냥 억지로 시키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는 것도 좋다고 할 수 없고….”
트리오 남매를 길러낸 이원숙 여사의 자서전 ‘너의 꿈을 펼쳐라’가 출판된 지 10년이 넘어 자녀들이 재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결국 억지로 시킬 게 아니라 자녀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돈 더 벌고 조금 더 유명해지는 게 성공일까요. 보통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살고 성공하기를 바라겠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해요.”
-정 선생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놔뒀어요. 둘째, 셋째가 네댓 살 때 피아노 레슨을 시켜봤지만 아이들이 안하겠다고 해서 더 이상 시키지 않았는데 열세 살 무렵 둘째 선(21)과 막내 민(19)이 음악을 하겠다는 거예요. 열세 살이면 한국 영재들이 전세계를 돌아다닐 나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시켰으면 훨씬 도움이 됐을 텐데 그 애들이 하고 싶다고 할 때까지 그냥 두었죠. 큰아이 진(24)은 피아노를 몇 년 가르쳤는데 지금 큰 아이만 음악을 안 해요.”
진은 미국 아이비리그인 브라운대를 나와 산업디자인 일을 한다.
-둘째아들이 재즈 기타리스트라지요. 재즈 기타리스트는 일류가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 걱정이라는데 왜 클래식을 안 시켰습니까.
“아까 말했지만 애들이 어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시켜봤는데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재즈를 발견하고 하겠다고 해서 시작한 거지요.”
“한국엔 할 일이 별로 없다”
-클래식 하는 사람들이 대중음악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crossover) 뮤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죠. 클래식 음악을 하다 다른 것을 가끔 재미삼아 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순전히 돈을 더 벌기 위해서라든가, 더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클래식 음악을 가볍게 만들려고 모차르트를 재즈 같이 변형하는 것은 금지된 영역입니다. 한 소절이라도 바꾸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팝 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하는 것은 좋아요. 안드레아 보첼리는 오페라를 하고 싶어하지요. 파바로티처럼 체계적으로 성악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하는 편이지요. 하지만 클래식 음악가가 상업적으로 하는 것은 위험해요.”
-클래식에서 팝으로 넘어가는 건 부정적이고 팝에서 클래식으로 오는 건 좋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다 오십시오.”
-1년에 한국에는 몇 번이나 옵니까.
“한두 번씩 왔습니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주면 다른 거 덜 하더라도 자주 오고 싶어요. KBS 교향악단을 맡았다가 계약조건을 지키지 않아 그만두었죠. 지휘자는 지휘만 하고 행정 같은 것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해요. 내가 일본에서 일을 많이 하는 이유가 편안하게 음악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프랑스 프로방스 집에는 어느 정도 머무세요.
“될 수 있으면 자주 가려고 하지만 1년에 두 달 정도 삽니다.”
-서울 구기동 집보다는 자주 이용하는군요.
“그럼요. 한국에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할 일이 많습니다. 20년 동안 유럽에서 활동했으니까요.”
몇 달 전 CNN에서 로레인 한(Lorrain Hahn)이 정명훈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로레인 한은 ‘뮤즈의 부름을 받은 이 시대의 거장’ ‘지휘봉 하나로 전세계인에게 음악의 마법을 펼치는 한국인 지휘자’라고 정명훈을 소개했다. 로레인 한의 찬사를 더 들어보자.
“정명훈은 세계 일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했다. 그런데 그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그가 세계 정상인 이유는 작품에 담긴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인터뷰에서 음악가가 음악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음악이 음악가를 선택한다는 말을 했더군요.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음악가로서 특별히 이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 일이 많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이 그런 방향으로 밀어서 그 쪽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것을 데스티니(운명)라고 할 수 있겠죠.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것 같은 기분 말이죠. 처음부터 지휘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뉴욕 음악학교에 갔을 때 장학금 줄테니까 피아노만 하지 말고 지휘 공부를 하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거죠.”
“음악가 안 됐으면 요리사 됐을 것”
-그 인터뷰에서 음악가가 안 됐으면 요리사가 됐을 거라고 했더군요.
“나는 어려서 요리사였어요. 10대 때 부모님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습니다.”
-음악가와 요리사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행복했을 것 같아요.
“물론 음악이죠. 요리는 아무리 해도 음악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잖아요. 나는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건데 그게 직업이 되고 결국 음악으로 먹고 살게 되니까 그 이상 좋을 게 없지요. 거기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게 요리인데 항상 집에서 요리를 해먹으니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에요.”
-피아노를 접고 지휘봉을 잡을 때가 고뇌에 찬 결단의 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계속했더라면 지금처럼 명성을 얻지 못하고 2류 음악가로 그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계속 그 방향으로 나갔다면 훨씬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가족하고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을 테고. 지휘자는 연주자들과 어울려 신명을 돋워줘야 합니다. 피아노 칠 때는 연주 끝나면 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 정도였어요.”
-지휘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이군요.
“여러 면에서 지휘를 한 게 도움이 됐어요. 그것도 데스티니라 볼 수 있죠.”
정명훈은 곧잘 연주자와 지휘자는 창조자가 아니라 리크리에이터(재창조자)이자 메신저라는 말을 한다. 음식도 요리사에 따라 손맛이 달라지듯 음악도 지휘자가 작품을 해석해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음악을 지휘할 때 ‘손맛’을 내기 위해 가장 신경 쓰는 대목은 무엇입니까.
“일단 프로그램을 잘 공부해 연습을 열심히 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 연습할 때도 기분을 내거나 멋을 부리려 하지 않고 기초적인 것을 먼저 하게 하죠. 같이 연습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충분히 연습해와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정을 청중한테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브람스 교향곡 1번만 듣고 싶다면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보다도 더 잘하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레코드가 많지요. 시판중인 레코드만 해도 50개는 될 거예요. 그런 거 따라갈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라이브 공연을 하는 이유는 그 자리에서 100명의 연주자가 마음속에 있는 뜨거운 음악적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죠. 음악을 그날 그 자리에서 살려야 하는 거예요. 그게 제일 힘든 포인트예요.
연습할 때는 잘했는 데도 연주할 때는 뭔가 막히고 100% 안 될 때가 있지요. 연습을 덜 했다 하더라도 특별히 영감 같은 것이 생겨 연주가 잘 되는 날이 있지요. 중요한 포인트는 음악을 통해 청중과 감동을 서로 주고받는 거죠. 그래서 연주자는 청중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레코드만 들어도 되는 거죠.”
바스티유오페라 개관 공연이 인상적
-일생의 연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끝나고 며칠 후면 그 연주가 어땠는지 모를 정도로 완전히 잊어버려요. 음악적으로 특별히 잘됐다기보다 의미가 깊었던 연주가 있긴 있죠. 파리 바스티유오페라 개관기념으로 공연한 베를리오즈의 ‘트로이의 사람들’ 연주입니다. 리허설 때부터 힘들었어요. 새로 지은 건물이라 문제가 여기저기서 발생했죠.
연주를 하면서 보니까 집채만한 무대 세트가 천장에서 내려오다 뭔가 잘못돼 깨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밑에 사람이 드러누워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모두 얼어붙었지요. 완전히 떨어지면 사람들이 크게 다치고 공연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 감고 지휘하면서 기도를 했어요. 3∼4분 후 눈을 떠보니까 괜찮더라고요. 무대 장치를 다루는 사람이 일단 세트 내리기를 멈추고 다시 조작하니까 제대로 되더라는 거죠. 오프닝은 딱 한 번만 있는 것이고 워낙 힘들게 해 평생 기억에 남을 거예요.”
-지휘자들이 대개 장수한다지요.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니 스트레스가 적고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며 운동을 하니 별도의 운동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10개를 계속 움직이는 것도 건강에 좋대요. 나는 지휘하고 피아노도 하니까 최고로 좋은 거죠. 지휘만 한다면 음악가로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음악가는 악기를 만져야 합니다. 소리를 내야 음악가이지 막대기 하나 휘두른다고 어떻게 음악가입니까. 이런 생각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두고 지휘 쪽으로 가기 전에 고심했습니다. 이제 피아노는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거고 지휘는 프로페셔널이 됐지요.”
한국 국적 재취득, 큰아들 거창고 보내
정명훈은 수년 전에 한국 국적을 재취득했다. 큰아들을 한동안 거창고등학교에 보내고 둘째, 셋째도 한국에 1년씩 데리고 있었다.
-정 선생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어떤 면에서는 자기 나라만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으니까요. 세계 시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항상 첫째 인간, 둘째 음악가, 셋째 한국인이라고 말합니다. 넘버 스리도 중요한 겁니다. 자기 나라는 가족하고 똑같은 거죠. 나는 한국을 너무 어린 나이에 떠나 말도 서투르고 제대로 읽지도 못합니다. 제일 편한 게 영어, 그 다음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순입니다. 한국말 구사는 독일어와 비슷한 수준이에요. 인터뷰할 때도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로 하는 게 편해요. 아이들이라도 덜 힘들게 하려는 생각에 한국에서 1년 동안 공부하게 한 거죠. 더 성장하면 한국 생각이 날지도 모르지만 그때 시작하면 너무 늦다는 생각에 한국에 데려왔던 거죠.”
-큰아들을 어쩌다 시골 고등학교에 다니게 했습니까. 서울에도 좋은 학교가 많은데….
“아내가 한국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잡지를 보다 거창고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요. 큰아들이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환경을 바꿔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한국말 배울 기회를 주고 싶기도 했구요.
거창고 교장과 선생님 몇 분을 만나보니 마음에 들어 결정했습니다. 큰아이는 처음에 가지 않으려 했지요. 한국말을 제대로 못했으니까. 그 학교 기숙사에서 고생 무지무지하게 했어요. 기숙사의 열악한 환경을 몰랐기 때문에 보냈지, 알았더라면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몇 달 동안 한번도 불평하지 않아 우리 부부는 몰랐어요. 파리에서 그 아이 혼자 쓰던 방보다 조금 작은 방에 학생 10명이 잤대나요. 물론 침대도 없구요. 눈병이 두 번이나 생겼다고 해요.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잤대요. 아이들이 불 켜놓고 늦게까지 공부하니까. 얼마나 아이들이 불쌍해 보이던지…. 그렇게 죽어라 공부해야 하니….
거창고를 떠난 후 다시 그 학교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안했어요. 너무 고생한 것 같아요. 기숙사 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교장선생님부터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지금은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별 마음이 없더라도 나중에는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외국생활 하다가 한국에 들어오면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답답하고 너무 좁아 자유롭지도 못하겠지만 나이 들면 생각이 변할 거예요. 그때 후회하지 않게 한국을 공부시킨 거지요. 좋은 경험을 한 거예요.”
일과 취미의 합치가 보람
정명훈은 놀랄 만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보통 연주회에 가보면 지휘자들이 악보를 넘기며 지휘한다. 정명훈은 웬만한 오페라는 악보 없이 곡을 모두 외워 암보(暗譜)로 지휘한다. 100명 단원이 연주하는 모든 악기의 악보가 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의전당 신년음악회에서도 그의 앞에 악보가 보이지 않았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겁니까.
“그럼요. 연주자들은 악기 연습하느라 힘든데 나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니 악보라도 외워야지요. 지휘하면서 박자 세는 거는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음악 모르는 사람도 지휘할 수 있어요. 하나 둘 셋 넷만 한다면 오케스트라도 지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지휘하려면 어려워요. 훌륭한 지휘자가 되려면 경험도 풍부하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아직도 나는 헤매고 있습니다. 10년쯤 지나 60세가 되면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나이 들면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나요.
“나도 옛날에 비해 연습할 때 덜 움직이는 편이에요.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육체적 에너지를 많이 써요. 완전히 속으로 들어가 다른 에너지가 돼야 하는데 아직 육체적 에너지가 많기 때문에 막 흔들어대는 거죠.”
-음악인으로서 보람이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일과 좋아서 하는 취미활동이 다르지요. 나는 일과 취미가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에 더욱 보람을 느낍니다.”
-골프 선수도 일과 취미가 합쳐져 있지요.
“그렇지만 음악이 더 아름답지요. 지휘는 나이가 들어 경험이 축적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60세쯤 돼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골프는 나이 들면 아무래도 기량이 떨어지지요. 악기 다루는 사람도 나이 들면 손가락 돌아가는 것이 더뎌집니다. 그런데 지휘는 나이 먹을수록 더 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악 이외에 관심 있는 예술 분야가 있습니까.
“나는 지나칠 정도로 원 트랙 마인드(One track mind)예요. 한국말로 뭐라고 하나요?”
한국말로는 ‘외곬’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일도 한 가지밖에 모르고, 여자도 아내밖에 모르고,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밖에 모릅니다. 다른 걸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음악 공부도 쉽게 하지 못하고 쩔쩔 매며 하는 스타일입니다. 항상 한 거 또 하고 또 하는 데도 쩔쩔 매죠. 엄청 노력해야 돼요.
파리에서 15년 살았는 데도 파리에 이틀, 사흘 구경하러 온 사람보다 파리를 몰라요. 바스티유오페라에 있던 5년 동안 집에서 오페라만 갔다왔다 하다보니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에 한 번씩만 가봤을 뿐이에요. 늙으면 국악도 한번 하게 될는지…. 다른 것도 할 기회가 오겠죠. 여태까지는 음악과 가족 외에 다른 거는 몰라요.”
원 트랙 마인드
-존경하는 음악인이 있다면….
“LA 필하모니 지휘자로 스승이었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존경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도 존경합니다. 프랑스 작곡가로는 제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올리비에 메시앙(1908~92)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신화적인 현대 작곡가다. 바스티유오페라에서 정명훈이 메시앙의 오페라 ‘튀랑 갈릴라’를 공연한 뒤 메시앙은 “정명훈은 천재”라고 극찬했다.
-이번에 귀국해 프레스센터에서 인터뷰할 때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을 세계 무대에 세우는 일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던데요.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악가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모이면 항상 끝에 가서 노래를 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놀라워하지요. 외국에 비친 한국인의 이미지는 긍정·부정의 것이 둘 다 있습니다. 한국인은 재주가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데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네만 발전하려 한다는 이미지도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먹고 살기 바빠 그랬겠지만 한국인이 예술적이고 노래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민족이란 이미지가 형성돼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 중엔 노래를 잘하고 노래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가르치는 음악학교에 한국인이 아주 많습니다. 로마 산타시칠리아 음악원에 갔더니 로마인지 서울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밀라노에 있는 베르디음악원엔 더 많대요.
정부도 ‘한국인은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세계에 알렸으면 좋겠어요. 정부가 오페라도 더 많이 지원해주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 노래방에 가봤습니까.
“나는 노래를 못해요. 명근이형이 노래를 잘하지요. 빙 크로스비 노래도 곧잘 불러요. 노래방이라는 게 가라오케 같은 건가요.”
-일본식 가라오케하고는 조금 달라요. 한 업소에 노래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춘 방이 10여개 있죠.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한국인이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임을 보여주는 현상이겠지요.”
정명훈은 스스로 ‘안티소셜(antisocial·비사교적)’이라고 할 만큼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한다. 아내 구순열씨는 그보다 다섯 살 위다. 구씨는 명화 누나의 시누이다. 그러니까 겹사돈이다. 매형은 AP통신 기자 생활을 한 구삼열씨. 구씨는 AP통신에서 19년간 일했는데 로마지국장을 오래 지냈다. 지금은 영어 방송인 아리랑TV 사장으로 있다.
명훈이 사돈과 연애를 하자 집안에선 반대했다. 이유는 우선 나이 차가 크고 아직 결혼할 때가 안 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구씨와 열아홉살 때 만나 6년 동안 연애하다 25세 때 결혼했다. 부모는 명훈의 연애와 결혼에 반대하다가 그가 워낙 외곬이기 때문에 곧 포기하고 사돈을 며느리로 받아들였다.
-결혼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라는 말을 자주 하던데 부인이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결혼해 한 사람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행복입니다. 베토벤은 일평생 와이프를 찾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못 이뤘습니다.
나는 원 트랙 마인드라서 한 사람하고 살고, 한 가지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걸 좋아해요. 어떤 사람은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하지만 나는 보면 볼수록 더 사랑스럽고 하루 지나면 더 사랑스러워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도 볼수록 좋아요. 어제 보고 오늘 보니까 더 예뻐요. 결혼 전에는 음악이 넘버 원이었는데 결혼 후에는 넘버 투가 됐습니다.”
-가족이 넘버 원이겠군요.
“넘버 원 정도가 아니라 하나부터 아홉까지 가족이고 음악은 열 번째라고 할까요.”
-아들만 셋이라 집안이 쿵쾅쿵쾅 시끄러울 것 같아요. 우리 집도 아들만 둘이거든요.
“항상 시끄러웠죠. 그런데 이제 다 커서 조용해요. 이제는 우리 부부가 다시 허니문을 시작했다고 농담해요. 우리 부부는 에브리데이 허니문(Everyday honeymoon)이에요.”(웃음)
요리는 그의 또다른 재능이다. 그는 얼마전 59가지 요리를 선보인 ‘디너 포 에잇’이란 책을 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불쌍하죠. 운명이라면 모르지만 서로 맞지 않는데 억지로 같이 살 수는 없겠지요. 일본과 한국에선 부부가 따로따로 생활하잖아요. 회사 일 하는 남자들은 일 끝나고 나서도 남자들끼리 술 마시며 어울리고 여자는 집에서 지내거나 친구 만나 노는 문화입니다. 우리 부부는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유럽에 살면서 긴 여행할 때는 스테이션 왜건에 아이들 셋을 태우고 다녔어요. 차에서 자고 먹고…. 그러니까 될수록 같이 지내는 시간을 늘리고 떨어져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이 지내야만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요.
한국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더 참을성이 많고 강합니다. 여권(女權)이 더 신장해야 나라가 더 발전합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의 90%가 여자예요. 바이올린도 악장 한 사람 빼고는 다 여자예요. 우리 어머니부터 시작해 누나들, 아내 모두 강한 여자입니다. 나라 차원에서 그걸 더 살려줘야 하는 거예요. 아직까지 동양 여러나라에서는 집에서 눌려 사는 여자들이 많지요.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야 부패도 줄어듭니다.”
-부부가 해로하며 행복하게 사니까 주례 서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도 있겠네요.
“저는 그런 의식을 싫어해요. 콩쿠르 심사해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절대 안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뽑을 때 오디션은 하지요. 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자꾸 심사해달라고 졸랐어요. 음악을 듣고 1, 2, 3등 가리는 것이 힘들어요. 음악은 그렇게 안했으면 좋겠는데 콩쿠르는 그렇게 해야 되니까.”
음악과 음식은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실제론 아주 가깝다. 바로크시대에는 왕이나 영주가 식사하면서 즐기는 식탁(Tafel) 뮤직이 발달했다. 모차르트와 바흐도 타펠 뮤직을 여럿 작곡했다.
음악가들은 대체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베토벤은 와인을 좋아했다. 파바로티는 한자리에서 닭을 6마리나 먹는다고 한다. 그는 호텔에 부엌이 딸린 방을 예약하고 요리사를 데리고 다닌다.
-파바로티(69)가 작년에 35세 연하의 여비서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요. 손녀보다 나이 어린 딸이 생겼어요.
“파바로티가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어요. 본처가 남편을 위해 정말 모든 걸 희생하다시피 했거든요. 커플을 알게 되면 저는 와이프 쪽을 좋아하는 때가 훨씬 더 많아요. 그런데 이혼을 하면 만나기가 어색하죠.”
-정 선생은 남들한테 그런 불편을 줄 일은 없겠네요.
“그런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봐요.”
-가능성 제로가 아니고 적은 겁니까.
“제로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니까요. 아무튼 그럴 가능성이 아주 적어요.”
-많이 먹으면 아무래도 체중 조절이 힘들잖아요.
“젊을 때는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고기도 수북이 쌓아놓고 다 먹었으니까. 어머니가 몸에 좋다고 고기를 많이 먹이려 했어요. 집사람은 고기를 안 먹는 편이에요. 주로 생선과 야채를 먹지요. 나도 옛날에 비해 훨씬 덜 먹죠. 아내 덕택에.”
요리와 음악은 집안내림
정명훈은 ‘디너 포 에잇(Dinner for 8)’이란 책을 동아일보사에서 펴냈다. 8명은 정명훈과 아내, 사랑하는 세 아들과 미래의 반려자들을 말한다. 이 책에서 정명훈은 59가지 요리를 선보였다. 이탈리아 요리와 한국 요리가 대종이다. 정명훈이 연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독특하다. 부엌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며 이것저것 요리해 식구들과 맛있게 먹노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는 것이다.
-‘Dinner for 8’을 출간한 후 반응이 어때요. 지휘자가 요리책을 낸 것은 음악사에 처음 아닙니까.
“명근이 형이 하라고 해서 한 겁니다.”
정명훈은 이 책에서 요리와 지휘의 공통점을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재료라도 언제 얼마만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음악도 조화와 균형이 맞아야 아름다운 리듬이 만들어진다. 요리사가 각기 다른 맛을 내는 재료를 갖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듯 지휘자는 각기 성격이 다른 연주자들을 조화시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한국 요리 중에서는 어떤 요리를 좋아하나요.
“시애틀에서 식당할 때 기본적인 건 다했어요. 불고기, 갈비, 닭찜…. 가장 비싼 요리로는 신선로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리는 찌개예요. 나는 매운 걸 안 먹으면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에요. 매운 고추가 항상 있어야 돼요. 비행기 안에서 매운 고추가 정 없으면 타바스코 소스라도 치지요. 그런데 타바스코를 치면 음식 맛이 달라집니다. 맛없는 비행기 음식은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데 좋은 음식에는 절대 넣으면 안 돼요. 김치찌개 만들면서 김치를 볶을 때도 매운 고추를 넣어요.”
-한국 남자들은 요리하는 걸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럼요. 아버지도 한국에서 살 때는 평생 부엌에 들어가본 일이 없는데 시애틀에서 식당을 하면서 주방에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배워서 요리를 했어요.
한국 남자들도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가족하고 지내는 시간이 늘면 음식을 같이 해먹는 걸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내가 부엌에서 모든 걸 다 하기 때문에 아이들한테 요리를 가르치지 않았는 데도 아이들은 어깨 너머로 다 배웠어요. 일본에서 큰아이하고 지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리를 잘하더래요.”
-요리하고 음악이 집안내림인 것 같군요. 아까 둘째아들을 보니 비만은 아니더군요.
“둘째만 그래요. 첫째하고 셋째는 좀 살이 쪘어요. 첫째와 셋째는 많이 먹는 편이고 둘째는 적당히 먹은 다음에 안 먹어요.”
-첫째, 셋째의 비만에 아버지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럼요. 저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엄청 차려 먹어요. 집에 있을 때는 아이들에게 ‘한국 아침’ ‘아메리칸 아침’ 중에서 어느 걸 먹겠냐고 묻지요. 오늘은 아내와 둘째가 ‘아메리칸’이라고 해서 치즈오믈렛을 크게 만들고 파슬리를 넣어 향긋한 맛을 냈지요. 거기에 비엔나소시지를 굽고 빵도 많이 먹었어요.”
-일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면 언제입니까.
“악보 공부하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더 잘하고 어떻게 해야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는 측면에서는 매일 힘들지요. 새 곡 배울 때마다 앞이 깜깜해요. 평생 같은 공부를 하는 데도 쉬워지지 않아요. 그렇지만 나의 일생을 뒤돌아보면 좋은 때가 대부분이었고 나쁜 부분은 거의 생각나지 않아요.”
“새 곡 배울 때마다 항상 앞이 깜깜”
-엉뚱한 질문 같지만 혹시 한국 정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부패가 큰 문제입니다. 뇌물이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어요. 지금 조금씩 나아지는 거 같기는 해요. 내가 아는 것만 하더라도 창피할 정도예요. 외국인 중에도 한국에선 돈 주면 모든 일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여기서 형에게 영어로 그 ‘올림픽 거이’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서울올림픽에 관여한 외국인을 지칭하는 것 같다. 형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말했다. 아마 그 ‘올림픽 거이’로부터 한국의 뇌물관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뉴욕 줄리어드 선생들한테 롤렉스 시계를 준 한국인 부모도 있어요.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한국인 젊은이하고 협연했더니 그 부모가 1만달러짜리 피아제 시계를 선물로 주더래요. 말이나 돼요? 얼마나 창피한 일이에요. 도로 돌려줬대요.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는 부모들이 학교 선생들한테 봉투를 주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드문 거 같아요. 옛날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외국에 살면서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임기 끝나고 감옥으로 가는 걸 보노라니 창피하더라구요.”
정명훈은 그런데 잡혀가는 공무원들 가운데는 억울한 사람도 있더라며 얼마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심재덕 전 수원시장을 예로 들었다. 심 시장은 건설업자로부터 2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받았으나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내가 수원에서 연주를 몇 번 하면서 여러 차례 심 시장을 만났습니다. 심 시장이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화장실 청결문화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잡혀들어가 시장도 못하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외국 같으면 유죄판결을 받은 후 수감되는 것이 정상인데 일단 구속해놓고 무죄판결이 내리면 석방하는 것은 잘못된 제도입니다.”
아내의 ‘지휘’에 순응하는 남자
정명훈은 개념이 어려운 어휘는 영어를 사용한다.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30세 이후엔 유럽에서 생활해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한국어 구문에 영어단어를 섞어 말하는 방식인데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다. 예를 들면 “한국 정치의 문제는 커럽션(corruption·부패)이 심하다는 거지요”라는 식이다.
-그렇게 많이 먹는데 별로 살이 안 쪘네요.
“지휘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오늘 저녁에 얼마나 먹어댈 건지는 모르겠어요.”
신장 170cm에 체중 72kg. 약간 과체중이라 할 수 있지만 먹는 음식의 양에 비해 심한 과체중은 아니다. 체중은 70~74㎏ 사이를 오간단다.
-오페라 단원들이 실수할 때마다 ‘와이프 말을 안 들어 그런다’는 말을 한다지요. 집에서 부인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농담이기도 하지만 사실이에요. 젊을 때는 아내의 말을 잘 안들었지만 나이들수록 아내 말에 따르게 됐어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집 사람이 틀린 적 없었어요.”
그는 10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막대기 하나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아내의 지휘에 순응하고 사는 남자다. 한국의 아내들이 이 인터뷰를 읽고나면 불만지수가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명훈 같은 남편을 만나는 것도 그가 잘 쓰는 표현대로 데스티니(운명)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불행과 슬픔 속에서 탄생한 음악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명훈처럼 음악 속에 자신의 행복을 듬뿍 담아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음악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