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北으로 간 밀사

  • 글: 최세희

    입력2004-01-30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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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으로 간 밀사
    한반도는 북쪽에 수량이 풍부한 큰 하천이 흘러 대수계(大水系)가 형성돼 있고 협곡이 잘 발달돼 일찍이 부전강, 장진강, 압록강 등에 세계적 규모의 대수력 발전소가 개발됐다. 따라서 1930∼40년대 한반도 남북의 전원시설 비율은 15:85로 북한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이에 힘입어 북쪽에는 중공업이 발달했다. 남쪽에는 경인 지역을 중심으로 가정 및 산업용 전기 수요가 급증했고 이에 조선총독부가 송변전(送變電) 시설을 남쪽에도 확충하면서 전력수급이 원활히 이뤄지고 있었다.

    전력의 계통조류(系統潮流, 전력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송전되는 것)가 한반도의 남북을 종단하는 모습으로 형성됐고 한반도의 중심지점 수급시설인 수색(水色)변전소(광복 때까지는 경성변전소라 불렸음)는 크게 각광받았다. 특히 광복 후 남과 북이 갈리자 수색변전소는 이북의 전력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태평양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목적으로 모든 발송전회사를 국유화하는 동시에 조선전업(朝鮮電業)주식회사에 모두 흡수·통합했다. 이에 전력산업 구조는 하나의 발송전회사와 네 개의 배전회사(京電, 南電, 西電, 北電)로 단순화됐고 수색변전소는 조선전업의 산하 사업소가 됐다.

    1945년 5월 전기기술자 현인겸(玄麟謙)은 조선전업 경성전업부 수색변전소 산하 남천개폐소(변전소간의 거리가 멀 때 중간에 설치하는 송전사업소)의 변전기기 책임자였고 직위는 일본인 소장 스기모토(杉本) 다음이었다. 그는 불령선인(不逞鮮人) 학생독서사건에 연루돼 평양고보를 중퇴한 후 경성전기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전기검정 3급, 2급을 차례로 따냈으며 조선인 직원으로는 드물게 정사원 자격을 획득했고 평양변전소를 거쳐 1941년 남천개폐소에 배치됐다.

    수색변전소에서 파견근무 시작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다. 한반도 상공에 B29 전폭기가 비행운(飛行雲)의 긴 꼬리를 드리우며 자주 나타나 미국이 승세를 잡고 있음을 과시했다. 일본은 ‘귀축미영격멸(鬼畜米英擊滅)’의 구호 아래 최후 승리는 일본의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조선인에게는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비행운을 비룡(飛龍)의 출현이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일제의 압정은 더욱 가혹해져갔다. 애써 농사지은 것을 모두 공출로 바쳐야 했고 놋쇠 제품이면 숟가락, 밥그릇까지 걷어갔다. 탄알을 만든다는 이유였다. 농어촌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선 식량증산이라는 구호 아래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운동장을 전부 파헤쳐 고구마를 심어 가꾸게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일정량 이상의 관솔을 채집해 바치게 했고 그 실적을 학교 성적에 반영했다. 비행기에 쓸 기름을 짜낸다는 것이었다. 징용으로, 징병으로, 정신대로 젊은 남녀는 물론이고 중년까지 끌어갔다.

    1945년 5월, 현인겸은 상급 사업소인 수색변전소 소장 아라시마(荒島)의 부름을 받았다. 소장은 “앞으로 약 반년 동안 수색변전소에서 파견근무를 한다. 숙식은 변전소가 제공한다”고 말했다. 현인겸은 가족을 남천에 남겨둔 채 대충 일용품만 싸들고 수색변전소에 부임했다. 서울 바로 옆에 있는 수색변전소는 평소 동경하던 곳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라시마는 교양 있는 일본인으로 남천에 들르면 꼭 현인겸을 따로 불러 격려하곤 했다. 수색으로 출근한 첫날도 아라시마는 현인겸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구로다케군(玄武君·玄武는 현씨의 창씨성, 군은 부하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 자네는 호남아야. 앞으로 맡은 일도 잘해낼 거라고 믿네.”

    현인겸은 보통사람보다 키가 크고 잘생긴 헌헌장부였다. 인종적으로 땅딸막한 일본인들은 현인겸을 보면 부러움을 나타내며 호감을 가졌다.

    현인겸이 수색변전소에서 맡은 일은 ‘주변압기(Main Transformer) 소개 프로젝트’로 수색변전소 뒷산에 굴(터널)을 파서 주변압기를 그 안으로 옮기는 이동 시설을 만드는 공사였다. 일반적으로 큰 변전소에는 주변압기가 여러 대 설치돼 있는데, 만일 주변압기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이를 통해서 송출되는 전력이 끊어진다. 또 주변압기 등 중요 수급기기가 손상될 경우 다른 연관시설에도 즉시 파급될 뿐 아니라 계통조류를 무시한 역조류 현상을 일으켜 순식간에 광범위한 지역이 단전되는, 이른바 광범위 계통트립(Trip) 현상이 일어난다. 그만큼 주변압기 보호는 중요하다. 그래서 일제는 한반도의 중심 전력수급시설인 수색변전소 주변압기 보호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제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수색의 주변압기를 즉시 터널 안으로 옮기고 그 안에는 송전연결시설까지 해놓음으로써 전기공급이 끊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중한 무게의 주변압기 밑에 회전체를 달고 궤도 위에 올려놓아 끌거나 밀어서 터널 안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전황이 다급한 만큼 단시간 내에 완공해야 할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일본 본토가 거의 초토화되자 한반도를 결전장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중심지인 서울이 폭격당할 경우 지하 발전시설을 건설할 시간이 없으므로 차선책으로 수색변전소의 터널화를 서둘렀던 것이다.

    총감독 현인겸은 프로젝트의 목적을 알고 씁쓸했지만 일제의 녹을 먹고사는 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전기설비의 안전시설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일제는 공사투입 인원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원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된 많은 애국지사가 복역하고 있었다. 공사현장을 감시하는 사람들 역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원했는데, 이들은 장총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수인들 사이에서 수색변전소 공사장에 가는 날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공사 감독이 느슨해 수인 노무자들은 때때로 눈을 속이며 쉴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장총을 든 간수들도 한국인이었으므로 현인겸 총감독은 그들에게 담배 등을 권하며(당시 담배는 귀중품이었다) 적당히 구슬려 노무자들에게서 눈을 돌리게 했고 조감독들도 총감독의 이런 뜻을 알고 있었다. 아라시마 소장도 모든 걸 총감독에게 맡긴다며 공사현장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공사현장에 가면 배부르지는 않더라도 양에 찰 만한 현미쌀밥과 구수한 된장국(일본 된장국)을 점심으로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너나없이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수인들에게 제대로 식량을 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공사장에는 상당량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색변전소 프로젝트는 조선총독부가 가장 중요시하는 공사였으므로 지구헌병대장에게도(당시 지구헌병대장의 권한이 막강했다) 최대한 지원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워낙 많은 인원에게 줄 밥과 국을 끓이다보니 그 냄새가 근방에 퍼져 주변 주민들이 철조망 밖에서 기웃거리곤 했다.

    터널 굴착공사가 꽤 진척돼가던 8월6일 일본의 군사도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8일 소련군이 두만강을 건너 침공했다. 곧이어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다. 이제 일본이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공사는 여전히 강행됐다. 그러나 총감독과 조감독을 비롯해 수인 노무자들까지 모두 일본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천지개벽같이 찾아온 8·15

    1945년 8월15일 아침, 천황이 정오에 교쿠온(玉音, 임금의 육성) 방송을 한다는 예고가 있었다. 수인 노무자들은 일을 손에서 놓은 채 구석에 모여 웅성거렸다. 드디어 정오가 됐다. 현인겸은 아라시마 소장 방에 일본인 간부사원 몇몇과 함께 있었다.

    라디오에선 비장한 느낌을 주는 일왕의 성명이 흘러나왔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아라시마와 다른 간부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깥 공사현장에서는 어느새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외침은 소장 방의 창문을 뚫고 밀려들었다. 일본인들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아라시마는 간부사원들에게 각자 자기 위치에 돌아가 있으라고 명했다. 현인겸도 나가려 하는데 아라시마가 “잠깐 남아 있으라”고 했다.

    “구로다케상!”

    갑자기 군(君)이 상(樣)으로 격상돼 있었다.

    “언제 군인 소집령(아라시마는 젊은 퇴역군인이었다)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냈는데 이젠 되었소!”라고 그는 말했다. 신명을 바쳐 ‘덴노헤이카(日王)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외쳐대던 압제자의 모습도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까지 일본과 일본인이 한 짓은 모두 미몽 속에서 저질러졌어요! 그게 확실합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저지를 수가 없는 짓이에요.”

    이는 현인겸에게 하는 사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가 현인겸이나 다른 조선인 부하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태도에 비해 상당히 유화적이었다.

    아라시마 방에서 나오니 밖은 완전히 천지개벽이었다. 수인 노무자들은 만세를 부르며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간수들은 장총을 내린 채 서둘러 트럭에 올랐다. 현인겸은 같이 일하던 조선인 직원들을 불렀다. 누군가가 어느새 정종(正宗, 일본 술)과 명태포(당시는 명태가 흔했다)를 준비했다. 직원들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한동안 잊었던 평양고보 시절의 독서사건을 떠올리며 현인겸은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곧 좌중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이튿날 현인겸은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싣고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남천의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남천개폐소 스기모토 소장은 현인겸이 돌아오자 모든 업무를 그에게 인계했다. 현인겸은 일주일간 남천에 머물면서 평양변전소에서 송출된 전기가 남천개폐소를 중계지점으로 해 한반도 중심 수색변전소까지 원활하게 송전되고 있는지 관리했다.

    광복이 되자마자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準)가 결성되고 애국지사를 포함한 정치범은 모두 석방되었다. 서울 거리는 감격에 들떠 환호하는 군중들로 시끌벅적했다.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급거 귀국해 대환영을 받았다는 소식과 소련군의 원산(元山) 상륙 소식도 들려왔다. 이윽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세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 사이 아라시마는 현인겸에게 매일같이 수색으로 올라오라고 전화를 해댔다. 결국 현인겸은 서울행 열차를 탔고 아라시마는 그 날로 수색변전소 업무를 그에게 넘겼다. 때마침 남쪽에서는 조선전업(朝鮮電業), 경전(京電), 남전(南電) 등 전기3사가 조선인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인에게 전력수급 업무 일체를 넘겨받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조선전업은 윤일중(尹日重)을 자치위원장에 추대했다. 그는 일본 도후쿠(東北)대 전기과를 나와 조선인 최초로 전기주임기술자 자격을 획득한 전기기사였다. 1917년 윤일중은 민족기업가 김정호(金正浩)가 설립한 개성전기(開城電氣) 주식회사의 초대 주임기술자로 추대됐고 그후 경성전기를 거쳐 조선전업에 영입됐다. 윤일중은 미군정으로부터 조선전업을 넘겨받고 바로 수색변전소장에 현인겸을 발령했다. 남천에 있던 가족들도 데려왔다.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려 있었지만 경의선 열차는 예전대로 운행됐고, 장사꾼들은 여전히 남북을 넘나들었다. 전력융통 역시 일제 때의 관례에 따라 압록강, 장진강 등지에서 생산된 전력이 평양변전소, 남천개폐소, 수색변전소를 거쳐 차질 없이 송전됐다. 남한 지역은 이렇다 할 발전소가 없었지만 전기수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는 북에 있는 모든 수력발전시설과 송전시설을 관할하던 조선전업주식회사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38선 이북에 있는 지점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조선전업 직원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큰 영예로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당시의 ‘전력수급업무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즉 생산지점에서 수요지점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것을 당연한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다.

    38선이 있어도 처음에는 드나들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월급도 서울에서 이북의 지점으로 원활히 지급됐다. 수색변전소가 월급을 계산해 현금을 마련해 놓으면 남천개폐소에서 출장 나온 직원들이 이를 포대에 담아 남천까지 날랐고, 평양변전소 등 그밖의 송전루트 사업소는 남천에 와서 자기들 몫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38선을 넘나드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자 조선전업은 ‘송전루트 직원 봉급전달작전’이라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이북의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해야 했다.

    그때까지는 단속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갈라서 지켰는데,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좌익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유산계급과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을 색출한다는 명목하에 약탈행위가 자행됐고 소련군의 비행도 점점 늘어갔다. 반동분자로 낙인찍혔거나 찍힐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좌우익 싸움이 살육전으로 변해 좌익활동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월북을 감행했다. 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38선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

    이 무렵까지도 38선을 넘어 남천개폐소를 오가는 일, 38선 이북에 있는 경전(京電) 철원(鐵原)영업소 직원과 서울 본사 직원이 왕래하는 일, 전기 긴급 보수차량이 넘나드는 일 등은 ‘공무’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행해졌다. 이는 미소 경비장교 사이에 합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1946년 봄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이후 통제가 심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오가기도 버거워졌고 ‘송전루트 직원 급료전달작전’도 난관에 부닥쳤다. 작전 거리를 단축해야 했다. 현인겸은 변전소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직접 개성까지 가 남천에서 온 직원을 만났다. 남천 직원들은 남천에서 금천을 통해 개성으로 왔다. 현인겸은 그들이 난관을 뚫고 38선을 넘어 개성까지 온 노고를 치하하며 술자리를 마련하고 전화상으로 하지 못한 이야기도 나눴다. 이때 이미 북 임시인민위는 남천개폐소를 평양변전소 관하에 편입시켰지만 송전루트 직원들은 여전히 조선전업 직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남천개폐소가 평양변전소가 아닌 수색변전소 산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전루트 직원 봉급전달작전

    1946년 9월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永)의 체포령이 내려졌고 남북대립은 격화됐다. 그러자 1번 국도인 금천∼남천 길을 오가기가 어려워져 소로(小路)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 북쪽의 1번 국도 검문소는 삼엄하고 검문도 철저했다. 개인이 빈손으로 넘는 것도 엄두를 못 낼 일인데, 돈이 든 포대를 둘러메고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개성 동북쪽 약 3km지점의 용흥(龍興)으로 가는 소로를 택했다. 이 길은 용흥을 지나 천마산(天摩山 또는 華藏山, 762m)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험로다. 하지만 그만큼 안전은 보장됐다. 이처럼 개성, 용흥, 천마산을 지나 약 30km를 걸어서 금천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곤 했다. 하지만 금천에서 하룻밤 묵으며 남천에서 온 직원들과 나누는 한잔 술 맛은 그만이었다. 다음날 남천까지 20km 넘는 길을 걸어서 갔다. 만일에 대비해 경의선 열차는 이용하지 않았다. 월급을 전달하는 데 5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그들은 이를 사명이라 여겨 기꺼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현인겸은 그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었다. 1946년 초겨울 어느날 아침 남천개폐소 직원은 개성에서 월급포대를 인계해주러 온 현인겸 소장이 등산복 차림에 허리에는 물통을 꿰차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마산 고개의 험로를 직원들과 함께 넘어가겠다는 게 아닌가. 일행이 걷고 걸어 천마산 고개에 다다른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 멀리 예성강 물줄기와 남천까지 펼쳐진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北으로 간 밀사
    남천 직원들은 현인겸 소장에게 이제 돌아가라고 권유했다. 어차피 안전상 남천까지 가지 못할 바에야 금천에 갈 필요가 없고, 금천에서 개성까지 돌아가려면 하루 이상 걸리는데 도중에 묵을 만한 숙소가 없다는 이유였다. 현인겸은 천마산 고개에서 남천개폐소 직원들의 안전을 빌며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천개폐소 직원들은 현인겸 소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천까지 오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다. 반송전화망을 통해 즉시 감사의 뜻을 전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신중했다. 혹시 도청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남북왕래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 된 상황에서 봉급전달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남천개폐소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었다. 때문에 북인민위 산하 평양변전소와 수풍수력 직원들도 조선전업 직원이라는 긍지를 계속 간직할 수 있었다. 이런 정신력이 남한 송전업무에 큰 플러스 효과로 작용했다. 그 이면에는 조선전업 경영진의 깊은 통찰, 수색변전소장 현인겸의 고생을 함께하고자 하는 따뜻한 동료애와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대장적 리더십이 있었다.

    이처럼 송전루트 직원 봉급전달작전에 참여한 관련자들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명을 완수했다. 당시 일을 알고 있는 전력계 인사들은 대부분 타계해, 그냥 놔두면 영원히 여항에 묻혀 풍화돼버릴 이야기들이다.

    남북간 유일한 의사전달 통로였던 전력계통 반송전화망

    남북간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점점 깊어져 모든 일에서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로 변해갔다. 1945년 9월초 소련군은 미소 군정당국을 잇는 긴급연락선을 제외한 해주와 서울 체신국 간의 반송전화선을 절단했다. 편지 왕래는 이미 끊어진 상태라 일체의 의사전달 통로가 모두 봉쇄돼버렸다.

    하지만 압록강 수풍수력∼평양변전소∼남천개폐소∼수색변전소의 반송전화망은 살아 있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었지만 북쪽의 풍족한 전력을 남쪽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송전선 부속시설인 반송전화망을 봉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압정하에 북쪽의 대수계에 건설된 대규모 발전소들은 한민족 전체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민족의 공동재산이라는 생각에는 남북이 다름없었다. 그래서 북쪽 전력계 인사들은 남쪽 주민들이 북의 전력을 받아 쓸 권리가 있으므로 당연히 남쪽에 전기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복 후 한동안은 이런 인식이 당연시됐다. 그래서 남북대립이 심화되는 와중에서도 전력계가 관행에 따라 북쪽에서 남한 송전을 하는 것은 묵인되었다. 전력계통 반송전화망도 전력계 관례대로 운용하도록 놔둔 것이다.

    반송전화망 통한 이산가족의 첫 안부교환

    반송전화망의 이점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북의 임시 인민위원회 전기총국장 이문환(李文煥)이었다. 서울토박이인 이문환은 해방 전에 서선전기(西鮮電氣) 서울사무소장을 지낸 전력계의 실력가였다. 남몰래 좌익사상을 키워온 그는 서울에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해 전기총국장 자리에 올랐고 이북 전력계를 지휘하고 있었다. 광복 당시 이북 전기계는 서선전기와 북선전기로 나뉘어 있었고 발·송전을 총괄하는 회사는 서울에 위치한 조선전업이었다. 38선 이북에서 전기산업 부분만큼은 양과 질 모두 세계적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냥 ‘국(局)’이 아니라 ‘전기총국’이라 이름 붙여 다른 ‘국’보다 특별 대우했다. 이북에서 전기부문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는 그들의 국장(國章)에 전기철탑을 그려넣어 산업의 우수성을 과시하려 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문환은 이런 전기총국의 장이었던 것이다.

    광복 직후 이문환은 서선전기를 인수할 목적으로 월북했다(서선전기 본사는 평양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북전력계를 다스려보겠다는 야망을 키웠고 임시인민위도 그의 실력을 인정해 총국장으로 발탁했다고 한다. 남쪽에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한 이문환은 외로웠고 항상 가족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의 아내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조선전업으로부터 이문환이 전기총국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 조선전업은 그녀에게 현재 남북간 의사전달통로가 모두 막혀 있지만 송전계통 반송전화망이 유일하게 살아있으니 이것을 이용하면 남편과의 안부교환이 가능하다고 귀띔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정례적으로 수색변전소를 드나들게 됐다.

    1946년 이른 봄 어느 날 이문환이 평양변전소에 왔고 이 시간에 맞춰 서울에 있는 이문환의 부인도 수색변전소로 와 남북간 부부통화가 이루어졌다. 분단 이후 이산가족의 안부교환 1호였다.

    첫 통화에서 부인은 울음을 참지 못했지만 이문환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후 이문환은 평양변전소에 가끔 전화를 걸어 수색에서 반송전화 연락이 왔는지를 묻곤 했다고 한다. 이문환의 부인은 남편의 안부를 알기 위해 정례적으로 서울과 수색을 오갔다.

    송전계통 부설 반송전화망을 이용한 가족간의 의사소통은 북쪽의 이문환이 전기총국장이라는 직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부문의 인민위 고위 간부가 요청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송전화를 통한 이씨 부부의 연락은 7∼8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문환의 부인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전업 본사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집안 살림은 그대로 놔둔 채 아이들과 함께 사라진 이문환의 부인은 나중에 월북했음이 밝혀졌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보름쯤 후 평양변전소장을 통해 현인겸 소장에게로 반송전화가 걸려왔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이문환 총국장의 메시지였다.

    남북간 이데올로기 대립은 갈수록 격화됐다. 북으로부터 송전중단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협박이 자주 날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남쪽의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송전은 계속되었다.

    송전루트 직원들이 몰래 도와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면 실시간으로 변하는 남한 송전량 기록을 조작해 우선 낮은 수치로 ‘송전대장’에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에 자동적으로 기록이 저장되지만 1945∼48년 당시만 해도 기록원의 기록만이 송전량을 증명하는 유일한 자료였다. 이는 당무자들이 이북에서 근무하지만 ‘나는 조선전업 경성전업부 소속’이라는 소속감과 자긍심,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양해와 상급직원의 묵인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배신해 고발한다면 큰 의옥(疑獄) 사건으로 번질 게 뻔한 모험이었다. 송전루트 직원들의 이런 음성적 지원은 반송전화를 통한 업무협의 대화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1945∼48년 동안 이북으로부터의 수전전력량(受電電力量, 한해 동안 받은 전력량)은 1945년에는 432GWh(GWh는 100만kWh), 1946년 451GWh, 1947년 552GWh, 1948년 204GWh(1월1일부터 단전된 5월14일까지)로 해마다 조금씩 증가했다. 1945∼47년까지 수전의존율은 대략 남한 전체 전력소비량의 65%다. 이처럼 기초 에너지 부문에서 남한은 이북 인민위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수색변전소 직원과 송전루트 직원들이 반송전화로 업무협의를 하거나 전달사항을 주고받을 때면 “제발 줄이지 말고 송전…, 제발 끊지 말고 송전…”이라고 끝머리에 구호처럼 부탁의 메시지를 띄웠다. 북쪽에서는 “최선을 다하겠음”이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 대립은 점점 격화됐다. 그 종착점은 각각 미·소를 업고 자기 이데올로기에 맞는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양 진영을 통합하려 노력한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양 진영이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은 명확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기 직전인 1947년 3월19일 이북 주둔 소련군정장관이 미군정장관 앞으로 남측으로 송전한 그동안의 전력요금 400만달러를 청구해왔다. 물론 남측도 언젠가는 수전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불조건이 문제였다. 북측은 돈이 아닌 대상물자(代償物資)로 하라고 요구했다. 광복 후 물자 생산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돈보다 물자를 가지고 있던 자가 부자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물자를 구한단 말인가. 하지만 거의 20개월 동안 돈 한푼 안내고 전기를 받아왔으니 밀린 전기요금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미군정과 조선전업은 긴밀한 협의 끝에 협상대표를 평양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미 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吳楨洙, 미군정은 이미 1946년 9월 한국인 부처장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와 조선전업 부사장 김은석(金恩錫)을 평양에 보냈다. 1947년 6월13∼18일 이들은 소련군정과 북 인민위의 담당자와 마주앉아 협상을 한 끝에 ①전력료 계산은 kWh당 15전(0.15원) ②전량을 북이 요구하는 대상물자로 나눠서 지불 ③협의 이후 남한에 송전전력 2만kW 증가 ④1947년 6월 이후 남측 송전분부터 매월 전기요금 정산방식 채택 등에 합의했다.

    수전문제 둘러싸고 남북간 대립 격화

    북이 요구한 대상물자의 품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미군정과 조선전업은 1차 35%, 2차 40%, 3차 25%의 분할지불인도 계획을 세우고 물자를 구하려 노력했다. 결국 1차분 10억원어치 물자를 북한에 인도했다. 방대한 물량을 무리해서 마련하고 나니 남한의 물자 품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전업 김은석 부사장이 대표 물자 몇 품목을 3∼4대의 트럭에 나누어 싣고 자신은 지프를 타고 트럭행렬을 선도해 평양에 입성, 물자를 인계했다. 하지만 이 많은 물량을 모두 트럭으로 나를 수는 없어 끊어졌던 경의선이 임시 복구됐다. 얼마 후 열차로 수송한 물자가 평양에 도착해 북측에 인도됐다. 그런데 북 인민위가 수량이 모자라고 품질이 떨어진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전체 청구량의 35%가 아니라 20%밖에 받지 않았다’ ‘140만달러어치를 수송했는데 60만달러어치는 훼손, 분실됐다’는 등의 주장이었는데,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당시 남한은 2차분 물자를 확보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문제로 남한은 북한의 당국자들과 여러 번 테이블에 마주앉았지만, 그들은 남측의 공동조사 제의를 묵살한 채 미달분을 채워넣으라고만 주장했다. 결국 1947년 말 북측은 이 문제를 빌미로 남측에 3만kW를 줄여 송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감량송전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당시 전기 부족에 허덕이던 남한은 화력을 위주로 한 보유시설들을 복구하는 데 안간힘을 쓰면서 겨우겨우 위기를 극복하고 있었다.

    수색변전소와 송전루트 직원들은 감량송전이 현실로 나타난 것에 대해 경악했고 북측이 송전을 완전히 중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정치인들은 대립하더라도 남북전력계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협조하는 방법은 없을까. 송전루트 직원들은 물론 남한에 동정적인 북한 전력계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설득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장 좋은 방법은 남북한 전력계의 고위관계자가 회동하여 협의하는 것이지만, 고위층만 해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었으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무자들을 선별적으로 만나거나 송전루트 직원들을 직접 대면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협조를 부탁해야 하지 않을까.

    ‘남북관계가 더 악화되기 전에 누군가 평양에 가야 한다!’

    전력계 내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38선도 넘기 어려운데 평양에 잠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자칫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입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1947년 초 어느 날 수색변전소장 현인겸은 조선전업 김은석 부사장에게 안부인사를 하러 본사에 들렀다. 김은석은 미국 코넬대 출신으로 당시 신망이 두터운 경영인이었다. 현인겸과는 신분과 직위를 초월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날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수전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누군가가 평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부터 하고 있었다. 또 이북 전력계 인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가서 그들을 잘 설득하는 것만이 당시 수전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김은석은 평양에 갈 만한 사람으로 현인겸을 꼽고 있었다.

    “현 소장! 평양에 한번 다녀오지.”

    “예! 무슨 말씀인지….”

    현인겸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체했다.

    “지금 38선을 무사히 넘어서 평양에 갔다올 수 있는 사람은 현 소장밖에 없어. 벌써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고 있겠지? 평양에 가서 평양변전소 송수전 당무자는 물론 이문환 총국장 등 관련 직원들을 만나서 우리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하고 동정심을 갖도록 일종의 공작을 하고 오게.”

    현인겸은 김은석의 말뜻을 모두 알아들었다. 이런 마당에 무얼 주저하랴 싶었다. 평양 사나이의 화끈한 기질이 살아났다.

    “부사장님! 평양변전소에는 친분이 두터운 옛 동료들이 아직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반송전화로만 ‘잘 부탁한다’고 해왔지만 직접 만나서 부탁하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 김은석은 현인겸에게 ‘행동계획서’를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나흘 후 현인겸은 ①월북은 남천개폐소 직원들의 협조를 얻어 감행하고 ②남천에서 평양까지는 평양변전소와 남천개폐소의 합동지원을 받아 잠입하며 ③송전루트와 전기총국 직원들 중 안면이 있는 직원을 만나보며 ④이문환 전기총국장 집을 방문하고 ⑤귀환은 월북할 때의 역순으로 협조를 얻는다는 내용의 계획서를 들고 김은석을 찾았다.

    계획서를 훑어본 김은석은 OK사인을 보냈다. 이 계획은 윤일중 사장에게도 보고되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결행은 빠를수록 좋다’는 당부도 있었다. 사장 이상, 즉 미군정까지 보고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남천개폐소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수색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전화상으로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천에서 온 직원은 현인겸이 가장 믿고 아끼던 남천개폐소장 이상태(李相泰)였다. 이상태는 이미 평양변전소로 출장을 가 현인겸과 친한 김은용(金恩勇)에게 평양잡입작전에 대해 알려줬다. 그동안 조선전업에서 수행하던 송전루트 직원들에 대한 봉급전달 작전은 38선 경비가 더욱 삼엄해지고 직장 내 염탐의 눈길도 날카로워져 중단된 상태였다. 현인겸은 출발하기 전 본사에 들러 여비와 활동자금 그리고 송전루트 직원들에 대한 수 개월분의 월급을 고액권으로 마련했다.

    남천개폐소 직원이 개척한 越境 루트 이용

    1947년 4월 어느 날 수색변전소 박기환(朴己煥)과 남천개폐소의 이상태 그리고 현인겸은 개성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현인겸의 평양잠입계획은 허술한 데가 많고 상당수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우선 잠입목적이 특정업계의 지인들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동정심을 유발해 남한 송전을 지장 없게 한다는 순수한 것이었다. 또 비밀공작이 아닌 대화로 푸는 평화적인 활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달라 적대적 관계에 있는 곳에 들어가서도 큰 무리 없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성에 도착한 세 사람은 단골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들은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 두시쯤 여관을 살짝 빠져나왔다. 만월이 가까워진 새벽달은 그런 대로 밝았다. 별은 유난히 총총 빛났다. 남천개폐소 직원은 새로운 월경(越境) 루트를 개척해놓았다. 천마산(762m) 고갯마루에 오르니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거기서 일행은 빵으로 아침 요기를 했다. 고갯마루를 내려가니 남천개폐소 산하사업소 직원 박홍칠(朴洪七)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사업소는 송전선로의 감시업무를 하는 곳으로 직원들은 선로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산을 타고 들을 지나며 개울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그는 최근 소련군과 인민위 경비들이 어디어디를 지키고 그 경계 상황은 어떠한지를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일행은 외곽 길을 통해 금천을 통과한 후 계속 걸어 황해도 남천읍 보상리 소재 남천개폐소에 도착했다. 모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건각(健脚)들이어서 100리 길을 걷고도 지칠 줄을 몰랐다. 새벽에 출발한 덕에 월급전달작전 때보다 반나절이나 빨리 도착했다.

    현인겸은 남천에서 이틀 동안 묵었다. 남천개폐소 직원들은 오랜만에 현인겸을 만나자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이집 저집에서 식사 초대를 했다. 연일 잔치라도 벌이는 분위기였다. 그 사이 소련군이 남천개폐소를 돌아보고 간 일이 있었는데, 이상태가 나서서 평양에서 순시차 방문한 ‘카레이스키 까삐딴(조선인의 높은 직장 상사)’이라고 둘러대, 오히려 소련군이 거수경례를 붙이는 등 정중한 대접을 하는 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상태는 직원을 평양변전소에 보내 출장증을 구해왔다. 또 그가 직접 역에 나가 남천발 평양행 기차표를 구해왔다. 현인겸과 이상태, 그리고 개폐소 직원 한 명이 평양행 기차에 올랐다. 수색에서 같이 온 박기환은 남천에 남았다. 송전루트 직원의 봉급이 든 보따리는 남천에 놔두고 나중에 나눠 가지도록 했다.

    北으로 간 밀사
    수색변전소장으로 발탁되기 전 현인겸은 고향에 남아 있는 하나뿐인 혈육 누나를 만나기 위해 남천과 평양을 기차로 왕래한 일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실로 만 2년 만에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열차는 신막(新幕)을 그냥 지나치고 사리원(沙里院)에 정차했다. 서울에서는 개나리, 진달래가 한창 피어나고 있었지만 이곳은 아직 쌀쌀한 기온이 감돌고 있었다. 산간을 누비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진달래는 봉오리만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두메 산골의 경관은 옛 모습 그대로였고 공기 역시 더없이 맑았다.

    사리원역의 옛 정취를 느끼고 있으려니 열차는 어느덧 평야 지대에 접어들었고 이윽고 평북 땅에 들어섰다.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나물 캐는 아가씨들의 그림자도 보였다. 평북 중화(中和)를 지나 한참 달린 열차는 벌써 대동강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철교를 건너는 ‘덜커덩’소리도 귀에 익었다. 모두 2년 만에 느껴보는 고향의 정취요, 그리운 산하의 모습이었다.

    별다른 검문은 없었다. 일제시대에는 이 선로를 오갈 때마다 젊다는 이유로 늘 고등계 형사의 검문을 받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끌려가는 사람을 보면 또 어떤 애국지사가 여행을 하다가 들통이 난 게 아닌가 하고 마음 졸이곤 했다. 그러나 지금 조선은 독립국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나라 내 땅을 오갈 수 있어야 했다. 이상태가 미리 손을 써놨기 때문인지 무사했지만 ‘무슨 검문이라도 있어 상황이 잘못 되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불안해하며 몰래 고향 길을 가야 하는지 현인겸은 서글픈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평양에 도착하니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평양변전소의 김은용이 마중나와 있었다. 일행은 집찰구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평양은 2년 전의 평양이 아니었다. 건물이나 시설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거리의 풍경에서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모란봉, 을밀대, 평양성 등을 보니 무척 반가웠지만 왠지 그 유적들이 한(恨)을 품고 있는 듯이 보였다. 거리 전체가 난데없는 틈입자(闖入者)에게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는 듯 느껴졌다.

    현인겸은 불안해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지만 이내 ‘신경과민’이라고 자책했다. 함께 온 두 사람을 숙소로 보낸 후 그는 누님 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님은 아무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동생을 보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눈물을 흘렸다. 전에는 아무리 반가워도 눈물을 안 보이던 누님이었다. 38선이 막혀 서로 오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데,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단 하나의 혈육이 건장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니 충격과 의아심에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누님은 현인겸이 수색변전소장에 발탁됐고 북에 남아도는 전력을 차질 없이 남한 주민에게 융통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생을 장하게 여겼다. 오랜만에 혈육의 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나니 평양에 도착했을 때 느낀 불안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숙면을 취한 그는 누님이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동지들이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갔다.

    평양변전소 직원들과 흥겨운 소주 파티

    약속 장소에서 만난 세 사람은 평양변전소로 발길을 옮겼다. 평양변전소는 수풍수력이나 장진강의 수력 전기를 받아 남천개폐소를 거쳐 남쪽의 수색변전소까지 송전하는 곳이다. 평양변전소가 스위치를 닫아걸면 남쪽은 바로 전력부족 상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현인겸이 평양잠입과업 가운데 가장 중점을 두는 곳이기도 했다.

    일행은 설레는 가슴으로 평양변전소에 들렀다. 현인겸은 과거 조선전업 경성전업부 동료였던 직원들과 반가운 해후의 악수를 나눴다. 그들의 눈빛에서 현인겸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인겸이 가장 궁금해했던, ‘과연 그들이 옛날과 똑같은 친근한 마음으로 맞아줄 것인가’ 하는 기대가 충족되는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었다. 평양에 온 과업의 절반은 이미 이룬 것만 같았다. 그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며 간곡한 부탁의 말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날 저녁 평양변전소에 근무하는 신재흥(申在興)이 변전소 2층의 꽤 넓은 방에서 평양소주와 오징어 및 북어포 등을 안주로 파티를 열었다. 초청주빈은 당연히 남에서 온 현인겸. 30여명 직원이 모여 옛 동료를 환영했다. 감시의 눈이나 주머니 사정 등 어려운 형편에도 환영연을 열어주다니…. 현인겸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고대광실에서 진미의 주효(酒肴,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벌이는 환영연보다 몇 갑절 진심과 우정이 담긴 값진 자리였다. 나중에 전해진 이야기지만 이 자리에는 전기총국에 근무하는 직원도 여럿 끼여 있었다고 한다.

    얼근해진 술자리는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남북동포들이 함께 피땀 흘려 수풍수력을 건설하던 때의 이야기, 총독부 시절 확립된 전력융통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남한송전의 당위성에 대해 그들은 우회적으로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리랑을 선창하자 이내 합창으로 번졌다. 현인겸이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현인겸도 평양에 온 목적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조선전업 사장의 밀명을 띠고 왔음을 시인했다.

    “밀명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만나 남쪽 사회 전기 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면서도 양심의 명령과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전력융통의 상식에 입각해 숭고한 사명감으로 남한 송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윤일중 사장 이하 조선전업 직원들 모두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통일이 되는 날(당시만 해도 분단 상황은 오래가지 않고 곧 통일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여러분의 공로를 조선전업 사장이 보상할 것이며 저는 열심히 증언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견지해온 확고한 인식과 꿋꿋한 사명감을 마음에 다지시고 계속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에서 잠입해온 사람이 통일 운운하다니. 현인겸은 말을 내뱉은 후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일단 내뱉은 말이니 북쪽 사회의 반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날 모인 동료들은 현인겸의 돌출 발언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환영연은 거의 끝나갈 무렵이기도 했지만 현인겸의 발언 때문에 자연스럽게 파장을 맞게 됐다. 헤어질 때 평양변전소 직원들은 더욱 굳은 악수를 함으로써 그의 발언에 응답했다.

    이튿날 어제의 발언 때문에 주변 움직임에 신경이 쓰였으나 별다른 일 없이 저녁 때가 됐다. 현인겸은 예고해둔 대로 어제의 답례 초대연을 베풀었다. 직원 전원을 스키야키(전골요리) 음식점에 초대했다. 모임에 올 수 없었던 근무 직원에게는 다음날 신재흥과 김은용을 통해 선물로 답례했다. 전날 환영연 자리에 없었던 변전소장도 나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북한 사회가 옴짝달싹 못할 만큼 경색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이 간 곳은 위생복을 입은 여자들이 시중을 드는 고급 음식점이었다. 모두들 흡족해했다. 현인겸은 ‘아무리 믿는 동료들 앞이라고는 하지만 어제 너무 당돌한 발언을 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돼서 그 날은 말을 아꼈다. 스키야키집의 모임은 대만족으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현인겸은 “제발 줄이지 말고…, 제발 끊지도 말고…”를 외치며 확실히 메시지를 전했다. 헤어지면서 평양변전소 직원들은 현인겸에게 어제보다도 더 굳은 악수로 응답했다.

    유연한 태도 보여준 北 인민위 안전당국

    첫날 모임은 평양변전소 직원들이 주머니를 털어 연 데다가 남쪽 틈입자의 돌출발언이 나오는 등 어떻게 보면 문제투성이의 자리였다. 두 번째 모임 역시 평양에서 알 만한 음식점에서 40여명이 모여 연회를 베풀었으니 사회안전당국의 안테나에 안 걸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 대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인겸이 평양을 떠날 때까지 아무 일이 없었고, 귀환 후 반송전화로 주고받은 소식에서도 이 모임 때문에 평양변전소의 누군가가 인민 당국에 불려간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당국에서 전화로 문의하기에 오랜만에 만난 동료끼리 회포를 푼 모임이었다고 설명하자 그것으로 끝났다고 했다. 남에서 잠입한 자의 수상한 행보와 일치 단결하는 모임의 분위기 등 공안 측면에서 문제를 삼으려면 얼마든지 사건화할 수 있는 사안이었을 텐데, 북 인민위 당국은 유연하게 해석해 이 일을 덮어둔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전력산업계는 북한 경제의 장래를 짊어질 가장 유력한 경제주체로 간주됐다. 따라서 전력회사 직원이라면 권세가 대단했다. 그래서 사회안전당국도 순수한 동료끼리의 교환으로 인정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문환 총국장의 배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현인겸은 전기총국을 찾아갔다. 전기총국 직원들과는 반송전화를 이용한 교류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전혀 얼굴을 모르는 직원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색변전소장 현인겸이 평양변전소에 들렀고 연회를 베푸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음을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물론 안면이 있는 옛 동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전기총국엔 김용선(金用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자리를 피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직위가 높은 데다 꽤 친했던 친구였기에 저녁에 별도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현인겸의 바람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김용선은 송전전기료 대상물자를 검수하러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는 “영등포에 있다”며 현인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인겸이 “이북에 갔을 때 전기총국에 들른 적이 있었지만 자네가 자리에 없어 못 만났다”며 “꼭 만나서 대포나 한잔하자”고 간청했다. 하지만 김용선은 “맘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다. 서울까지 왔으니 그냥 전화한 것”이라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비정하게 변해 있었다.

    전기총국은 평양변전소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라서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전기총국은 행정상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곳이었다. 총력을 다해 공략했어야 했지만 당시 현인겸은 김용선 대면만을 목표로 했고, 그를 만나지 못하자 별다른 행동 없이 전기총국을 떠났다. 남한에 돌아온 후 현인겸은 김용선이 아니더라도 전기총국의 아는 직원들을 은밀히 초대해 술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다음날 현인겸은 이문환 인민위 전기총국장 자택을 방문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이문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서 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전기총국에 갔을 때 면회신청을 하려고 했지만 분위기상 거절당할 게 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자택을 방문해 그를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방문을 미리 통보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불시 방문하기로 했다. 현인겸의 이문환 총국장 자택 방문 계획은 남천개폐소나 평양변전소의 친한 동료 한두 사람을 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문환 인민위 전기총국장 자택 방문

    이문환의 집은 대동강 건너 남평양 능라도(綾羅島) 동쪽부리가 보이는 선교리(船橋里)에 있었다. 귀속재산 가옥인 듯한 일본식 집이었다. 말 그대로 불시 방문이었지만 그는 현인겸 일행이 찾아오리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하게 맞았다. 부인은 마치 친정동생을 맞이하듯 환한 미소를 띄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정숙한 교양미와 겸양과 상냥한 품격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현인겸은 마루에 올라서면서 남한에서 마련해간 선물꾸러미(개성인삼 등 물자가 귀하던 시대에 준비한 귀중품 몇 가지였다)를 얼른 마루 구석에 밀어놓았다(당시는 이런 방식이 예의였다). “어렵게 뭘 이런 걸 다 가져왔느냐”는 부인의 말을 뒤로 흘리며 안방에 들어가 이문환과 수인사를 했다. 반송전화로는 몇 번 대화를 나누어보았지만 직접 마주앉기는 처음이었다. 이문환은 중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신사였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들 부부는 서울과 평양으로 갈라져 있을 때 당시 유일한 남북 의사소통 수단이었던 송전선 부설 반송전화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는 현인겸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듯 현인겸과 이문환은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광복 직후 한반도의 복잡한 사회적 특성 때문에 서로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립해야 하는 특수한 관계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음료를 홀짝이며 과거 전력계에 몸담게 된 동기, 반송전화로 가족안부를 주고받던 때의 행복한 순간들, 그리고 현인겸이 부인에게 배려한 에피소드 등을 이야기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보려고 탐색화법을 쓰는 등의 이중성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우정의 대면이었다. 하지만 현인겸은 총국장을 어렵게 만났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물쭈물할 이유가 없었다. 현인겸은 대전원 시설이 북쪽에 편재돼 있지만 이는 남북 민족 모두가 피땀을 흘려 건설한 것이라는 역사성,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확립된 전력융통시스템과 송전루트 직원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남한송전의 당위성 등에 대해 역설했다.

    전력시설의 민족성, 남한송전의 당위성 역설

    이문환은 아무런 반응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고뇌하는 모습이 언뜻언뜻 비쳤다.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면 자연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정치논리를 언급해야 했다. 그는 남쪽에서 온 지난날의 은인과 논쟁을 벌여 언성이 높아지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또 자기 집 안방이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현인겸은 총국장과 대면해 할말을 했고 그가 경청해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이제 경색된 분위기를 돌려야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올 때 무단으로 직장을 이탈할 수 없으니 윤일중 사장님과 김은석 부사장님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총국장님께 드리는 윤일중 사장님의 공적인 편지를 가지고 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38선 월북 과정에 어떤 난관에 봉착할지도 모르거니와 편지가 적발될 경우 총국장님에게 폐가 될지 몰라 취소했습니다. 윤일중 사장님은 이문환 총국장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현인겸 소장께 수색변전소에서 진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은을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윤일중 사장님을 전력계의 대선배이자 원로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시면 고맙다는 저의 말씀을 꼭 전해주세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현인겸은 그의 속뜻을 읽은 것 같았지만 시원한 말을 못 들어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4∼5일 평양에서 더 머무를 텐데 총국장이 신분보장을 해줄 수 있는지 요청했다. 이문환은 신중했다. 명쾌한 승인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괜찮았으니 (평양변전소와 스키야키 음식점의 소동을 지칭하는 듯했다) 앞으로도 괜찮겠지요. 누님이 평양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마음껏 위해드리고 편안하게 볼 일을 보세요”라고 대답했다. 벌써 현인겸의 신분 보장에 대해서 손을 써 놓은 상태인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듯했다. “여보, 손님 가신대” 하는 이문환의 말에 부인이 금세 나타났다. 그녀는 변변한 인사도 못하고 월북한 것이 늘 마음이 걸렸던 듯 아침부터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남편의 만류로 자제하는 듯했다. 그 부인은 “현 소장님 같은 분이 고향(평양)에 오셔서 근무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 그 말은 평양이 고향인 사람은 평양에서, 자기들처럼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서울에서 근무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현인겸은 여러 번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말하며 이문환 총국장의 자택에서 나왔다. 이문환 총국장 부부는 못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현인겸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충격과 혼란, 5·14 단전조치

    현인겸은 그 후 며칠 더 평양에 머물면서 일을 보았다. 그는 평양변전소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평양까지 마중나온 남천개폐소 직원과 함께 남천으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위로연을 베풀고 송전루트 직원들의 월급 돈 포대를 빨리 풀어 분배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남천개폐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박기환과 함께 38선을 넘어 귀환했다.

    현인겸의 평양잠입 활동이 주효해서일까? 1947년의 남한 수전량은 1946년에 비해 약 22.4%나 증가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미소공동위가 결렬되면서 남북은 영구분단의 길로 치달았고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대립은 최고조에 달했다. 수전전력 대상물자 분쟁이 촉발되자 호재를 만난 듯 북 인민위는 이 문제에 정치적 색채를 씌워 단전의 구실을 마련했다. 5·10 총선거가 발표되자 남한 송전문제는 정치적 지렛대 구실을 했다. 북은 송전량을 줄였으며 총선거가 실시되는 5월10일 단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5월10일 총선거 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1948년 5월14일 정오, 송전이 완전중단됐다. 이것이 바로 전력사에 기록된 ‘5·14단전’이다. 길 가던 전차가 갑자기 섰고 생산 공장의 기계도 멈췄다. 남한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버렸다. 남한에 남아 있는 발전소의 성능복구, 지역별 제한송전, 3부제 배전 등 여러 종합대책을 동원해 근근히 버텼다. 결국 부산과 인천에 미국의 발전선(發電船)을 들여다놓는 등 긴급대책으로 돌파해보려 안간힘을 쓰던 중 6·25전쟁이 터져 그나마 있던 전력설비마저 잿더미가 됐다.

    그로부터 50여년, 한국 전력계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전기구삼사(경전, 남전, 조선전업)를 통합하고 장기전원개발계획을 착실히 추진해 세계 최상위에 이르는 전력사업의 오늘을 일궈냈다. 이 글을 격동기 국가산업의 대동맥인 전력을 지키려 헌신한 선배 전력인들께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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