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파괴와 해체, 중산층 붕괴, 지적 헤게모니 상실

  • 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hknsong@snu.ac.kr

    입력2004-01-28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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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이후 58년의 역사에서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이토록 치열한 이념투쟁이 벌어진 적이 있던가. 카리스마의 정치가 끝나는 시점에 탄생한 노무현 정권은 반공, 보수, 냉전 이념에 포박된 한국 사회에 신선한 돌파구가 됐다. 하지만 집권 설계도 없이 정권을 잡은 청와대와 386이 주도한 ‘시민혁명’은 번번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고, 그 사이 보수 주류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나마 노무현 정권을 지탱해주던 ‘도덕정치’가 대선자금의 덫에 걸려 유효성을 상실하면서 약체정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사소한 성공과 중대한 실패로 점철된 참여정부 1년. 빈곤의 심화와 불확실한 미래에 흔들리는 중산층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넘어 보수로의 회귀현상마저 보인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지난해 2월25일 열린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2004년의 새 날이 밝았다. 올해는 유난히 해돋이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섣달 그믐날 저녁, 새해 일출을 보려 가는 차량이 속속 도시를 빠져나갔다. 남부와 서부지방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해돋이로 이름난 해안지방은 타지에서 몰려온 인파로 북적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의식에는 휴대전화도 한몫을 했다. 해돋이를 보지 못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일출장면이 시시각각 전송되었다. 묵은 것 다 털어내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과 해돋이처럼 장엄한 미래를 염원하는 마음이 일출사진과 함께 전송되었다.

    2004년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어려운 시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신년사처럼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2003년과는 다르기를 바라는 기대만큼은 모든 국민의 공통된 심사일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2003년에 무엇을 그렇게 혹독하게 치렀는가? 서민 출신의 튀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예상한 ‘바람’보다는 훨씬 강력한 ‘회오리’가 일었다. 그 충격에 어떤 일관된 논리와 원칙이 내포되었더라면 이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돌개바람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사회 각 부문을 강타했는데, 그것이 촉발한 역풍(逆風) 또한 만만찮아 시민들은 미래전망과 설계가 불투명한 상태로 한 해를 보내야 했다. 사회 지도급 인사들과 여론지도자들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진단서를 발급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치열한 이념투쟁의 상처

    1년 동안 각 일간지의 머릿기사가 낙관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비난의 화살은 노무현 대통령과 386참모들 그리고 그들을 보좌하는 진보적 학자들에게 집중되었다. 지난 시대, 권위주의 정권의 선전 창구였던 방송사들은 태도를 바꾸어 비난의 화살을 무력화시키고 비관적 담론을 낙관적으로 역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론장은 두 갈래로 절단되었으며, 양 진영을 갈라놓은 전선에는 전쟁터와 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마치 적을 섬멸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비장함 마저 엿보였다. 각 진영은 사생결단의 싸움에 돌입한 것처럼 보였다.



    해방 이후 58년의 역사에서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이토록 치열한 이념투쟁이 벌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념투쟁은 이익투쟁을 동반한다. 관직, 공기업의 경영권, 군대와 경찰의 통제권, 공공기관의 통치권, 경제 운영권, 재정과 사회정책의 결정권, 검찰과 법무기관의 감독권 등등의 중대한 권한을 놓고 두 진영이 격돌했다.

    역대 가장 약한 정권으로 평가받는 노무현 정권은 승자독식(winner-takes-it-all)이라는 한국정치의 이점을 활용해 적어도 공공권력의 영향권 안에 있는 영역에서는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힘겨운 승리였지만, 대통령의 통치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한국 정치제도의 선물이었다. 관직에는 인사태풍이 불어 젊은층이 대거 진입했고, 검찰과 법무기관에는 서열파괴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공기업의 고위 경영직은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던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사회정책은 어쨌거나 서민층 중심으로 바뀌었다.

    정치적으로도 노무현 정권이 손해본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이야 진절머리 났겠지만 수개월의 진통 끝에 급기야 노무현 정당이 탄생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변방의 정치인이던 사람이 대통령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독자정당을 얻어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약체 정권이 획득할 수 있는 최대 전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토로한 대통령의 불만은 약간의 엄살이거나 힘겨움을 빗댄 탄원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인과 관료가 언론에 포위되어 꼼짝을 할 수 없다’는 상황판단은 이보다 더 얻어냈어야 한다는 일종의 정치적 엄살이다. 언론은 비아냥거림이 전문이고, 그것을 그쳤을 때 언론은 이미 사망신고를 낸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2003년 10월11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표 담화를 TV로 지켜보는 시민들.

    혼란과 투쟁으로 점철된 노무현 정권 1년은 시민들에게는 ‘눈물의 계곡’이었다. 대통령 자신도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 눈물은 시민들이 흘렸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시민들은 새 정권이 몰고 온 충격의 회오리와 그것이 촉발한 역풍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을 흘렸다.

    정치란 시민들에게 안정을 주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는다. 위급한 상황에서 행동규칙을 정해주고, 극심한 경제난에서 생계유지 수단을 제공하며, 세계시장과 국제 정세의 불안을 여과시켜 안정심리를 부여해주는 그런 역할 말이다.

    그런데, 결코 편치 못했다. 불편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세대교체에 걸었던 신선한 기대는 경력자들의 기반을 파괴했고, 분배로 돌아선 정치는 경제성장을 적대시했다. 실직자가 날로 쏟아졌다. 현 정권의 최대 지지층인 젊은층은 정치적 지지의 대가로 최고의 실업률을 돌려받았다. 기업인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서민출신 대통령하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눈물의 계곡’은 통과의례

    프로페셔널들이 부도덕한 집단으로 내몰리고 그 자리에 이상주의와 도덕주의로 무장한 아마추어들이 들어섰다. 덕치(德治)라는 동양적 이상주의는 제도로 작동하는 현대의 정치체제에서 단지 개인적 덕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추어 신세력은 철저히 무시했다. ‘썩은 정치’를 결딴내는 데에는 그것만큼 중대한 요소가 없겠지만, 현대의 제도정치에서는 단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기에 경험부족이었다. 집권경험의 부족이 과거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에서 어떤 자해요인이 되었는가를 목격하고도 도덕주의를 통치의 생명선으로 설정해야할 만큼 한국정치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눈물의 계곡’은 노무현 정권 탓만은 아니다. 철저하지 못했던 지난 시대의 민주화 이행 양식이 한국 국민에게 부과한 업보(業報)여서 노무현 정권도 국민들과 함께 감당해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눈물의 계곡’을 더 깊고 넓게 만들었다. 기왕에 닥친 시련이라면 더 철저하게 치러야 한다는 듯이. 그래야 더 넓은 평야와 비옥한 대지에 안착할 수 있다고 독려하려는 듯이. 국민들은 집권세력이 몰아치는 돌개바람과 그것에 촉발된 역풍 사이에서 극심한 혼란과 불안을 겪었다.

    한국사회는 몇 개의 이질적 집단으로 쪼개지는 듯했고, 우위를 선점하려는 집단간 쟁투가 연일 신문 머릿기사로 떠올랐다. 시민들은 무엇에 기댈 것인지, 어떤 기준과 가치관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가치관은 뒤집혔고, 기존의 행동 양식은 낡은 것으로 규정되었다. 경제가 어느 정도 돌아가 준다면 약간의 여유 속에 새로운 규정을 수용할 수 있으련만, 그럴 만한 여유도 선물해주지 못했다.

    집권세력은 새로운 규정을 수용하면 경제적 여유도, 변화와 개혁도 가능할 것임을 되풀이 강조했지만, 경제는 통치자의 확신을 무력화시킬 만큼 어려워졌고 현실은 더욱 각박해졌다. 성장률 2.9%(1980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이후 최저 성장률)에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지 못한 경제현실은 ‘눈물의 계곡’을 한없이 연장할 것처럼 보였다.

    시민들의 혼란한 마음을 수습해줄 안식처는 사라졌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집단 행동수칙을 발령하고 강제로 안식처를 만들었다. 민주정권은 그것을 걷어치우고 스스로 안식처를 만들라고 강제한다. 노무현 정권 1년은 시민들이, 사회집단들이 참여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허락한 대가로 극도의 사회적 불안감을 치르게 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면, 이제 우리가 힘겹게 건너고 있는 ‘눈물의 계곡’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필연적 여정처럼 보인다.

    노무현 정권 1년이 우리에게 반드시 고통만 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 고통이 우리가 치러야 할 권위주의적 고도성장의 대가라면, 그것을 걷어치우는 데 혼란이 없을 수 없다. 카리스마가 물러간 자리에 세련된 정치인이 들어선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선진국처럼 노련한 정책정당이 그럴듯한 인물을 배양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경험을 쌓을 만한 정치학교가 제도화되어 있는 것도 아닌 한국에서 카리스마 정치를 이을 카리스마적 인물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한국의 수준급 정치가들의 면면을 관찰해보면, 노무현만한 사람이 배출된 것도 다행스럽다는 판단이 설 정도다. 그나마 비관을 접고 낙관론을 펼 만한 빈약한 근거다.

    이중분해의 한 측면인 ‘정치적 양극화’는 중산층의 경제적 기반이 요동치면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분화현상이다. 이념 스펙트럼에 있어 중산층의 원래 위치는 중도좌에서 중도우에 걸치는 중간의 넓은 영역이다. 사민주의 국가의 경우 자유당과 농민당이 전형적인 중산층 정당인데, 이들은 대체로 중도우파에 위치해 서로간에 자주 정책연대를 결성한다. 중산층의 일부는 중도좌에 위치한 사민당에 가담해서 노동계급과 정치적 정체성을 같이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중간 영역을 점하여 우파 중앙당과 좌파 공산당(또는 사민당)간의 적절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사민주의적 지배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가 이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구조에 변화가 발생했다. 전통적인 보수-사민당의 대립구도에 후기물질주의(postmaterialism)라고 하는 신사회운동적 요인이 가세하여 또 하나의 축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환경·생태·평화·여성·반전반핵·군축 등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새로운 추세의 확산은 기존 정당구도에 일대 변혁을 촉구했다. 새로운 도전요인이 발생하자 사민당, 자유당, 중앙당은 빠른 변신을 감행했다. 지지기반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유권자들의 후기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정당은 변화하는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력을 키워나간다.

    정치개혁이 최우선 과제였나

    이런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은 유권자들의 성향변화보다는 정당 내부의 특수한 사정, 예를 들면 지역적 구도라든가 카리스마적 인물의 입김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유권자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정당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모습은 다행스럽다.

    여하튼 지역정당이 할거해온 한국의 정치에서 중산층도 대체로 지역연대감을 정당 지지의 절대적 기준으로 채택해 왔다. 거기에는 이념도, 정책메뉴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동향 인물인지, 그의 보스가 누구인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이런 후진적 행태에 점진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카리스마 시대가 막을 내리고 지역연대감이 상대적으로 약한 젊은 세대가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자 정당들도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역연대감이 약화된 공간에 후기물질주의와 같은 신생 가치관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생태주의와 여성운동의 기치들이 속속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미래지향적, 정책적 마인드를 가진 새로운 인물에 대한 욕구가 표출되었다.

    한국의 정당도 이러한 성향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했다. 노무현 정권은 민주당이라는 지역정당을 모태로 탄생한 후기물질주의적 성향의 세력이다. 노무현은 탈냉전, 탈전통, 탈권위를 향한 젊은 세대의 염원이 없었다면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젊은 세대의 이런 열망을 담아내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했다. 지난 1년 내내 민주당 분당문제로 소란스러웠던 것은 새 정당을 만들어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강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새로운 유권자의 후기물질주의적,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는 신당이 필요하다는 절박감도 작용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신당 창당과 정치개혁 논란으로 귀중한 1년을 보냈다는 것이 문제다. 정치개혁법안은 초안이 만들어진 채 국회에 계류 중이고, 여당과 야당을 초토화시키고 대통령의 도덕적 권위를 강타한 대선자금 문제는 특검으로 넘어갔다. 통치란 정치개혁만이 전부는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정치개혁을 모든 정책 중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실수다.

    이전의 두 김(金)정권에서 보았듯이 정치개혁은 정치인 스스로 양보하기 전에는 여간해서 가시적 성과를 얻기 힘들다. 그나마 역량이 부족한 노무현 정권이 정치개혁에 그토록 매달렸던 탓에 다른 문제들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배제되었다. 모든 정책 역량을 경주해도 소기의 성과를 얻어내기 어려운 과제가 경제회복일 터인데 노무현 정권은, 그의 브레인들은 특별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가뜩이나 경제가 곤두박질 치는 상황에서 그런 시늉도 하지 않았다. 대가는 쓰라렸다. 중산층의 이탈, 조금 과장한다면 중산층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분배보다 성장, 여가보다 일

    경제가 어려울수록 한국의 중산층은 경제적 안정을 염원한다. IMF사태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난 후 경제적 안정을 향한 중산층의 열망은 더욱 절실해졌다. 경쟁력을 상실한 중소기업들은 도산 위기가 가중될수록 정부의 정교한 경제정책을 더욱 고대한다. 경제적 안정은 행복, 심리적 여유, 자아실현, 문화소비 등의 후기물질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IMF사태는 한국 중산층의 가치관을 오히려 물질주의(materialism)로 한층 후퇴시켰다. 분배보다 성장을, 여가보다 일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는 말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이제 겨우 인생에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행복을 선사하는 정치를 원한다. 그러나 IMF사태는 물질적 풍요가 전제되어야 행복이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체감적 경제현실은 외환위기 때보다도 훨씬 어렵다.

    노무현 정권은 정권을 탄생시킨 그 구조에 안주해 중산층의 현실적 염원을 도외시했다. 중산층의 하향 분해가 진행되고 소득불안정이 가속화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했다. 필자는 이것의 결과를 ‘교양층의 붕괴 위기’로 진단하고 싶다.

    교양층의 붕괴조짐은 매우 폭넓게 나타난다. 어떤 사회와 조직에도 중간관리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새로 유입하는 노동력의 적응훈련을 담당하고 기업과 조직의 질서를 관리한다.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의 과장과 부장이 그런 집단일 터인데, 교양층의 전형적 구성원인 이들은 요즘들어 한없이 불안하다. 과거 같으면 직무헌신도를 높여 지위승진을 추구했을 연령대에 탈출(exit)을 꿈꿔야 한다. 그것도 강제적 탈출, 즉 퇴출이다.

    중간 리더급 인재들의 불안이 조직유연성을 높여줄지는 모르겠으나, 잔류와 퇴출 사이에서 방황해야 하는 이들의 심리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기업을 나서면 망망대해에 일엽편주 꼴이다. 혼자 ‘제3의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조기퇴직 바람에 퇴출된 경력자들이 넘친다. 그들도 어쨌거나 ‘제3의 인생’을 시작할 터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은 종종 무용지물이 된다. 유용한 인적 자본을 활용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청년들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고학력일수록 높은 실직위험에 직면한다.

    경제가 침체될 때 타격을 받는 것은 주로 중소기업이다.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라면 그럭저럭 돌파해 가겠지만, 중소기업은 작은 충격에도 도산위험에 직면한다. 중소기업의 고용주들은 어쨌거나 한국 중산층의 전형적 구성원이다. 중소기업의 환경을 개선해주지 않는 한 이들의 미래는 항상 불확실성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3D업종의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상황에서 외국인 노동자 강제출국 조치가 발효되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자택에 숨겨주는 기업주도 많이 생겨났다. 중소기업의 총체적 고용효과는 대기업보다 훨씬 큼에도 정부의 실업대책은 중소기업을 활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중소기업주들은 거미줄처럼 쳐진 정부의 규제망 속에서 어렵사리 산업을 일궈간다. 마치 700만에 달하는 전국의 자영업자들이 경기변동에 가족생계를 그대로 노출시키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에 육박했다.

    보수로의 회귀, 박정희 신드롬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교양층이 튼실해지기를 바란다면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한국의 중산층은 시니시즘 (cynicism)을 키웠다. 젊은 세대의 팡파르와 함께 탄생한 노무현 정권을, 노무현 정권과 보낸 1년의 세월을, 그리고 1만달러 근처에서 10년을 맴도는 한국의 현실을 냉소주의로 바라본다. 작년 한 해의 키워드를 ‘우와좌왕’으로 정했다지만, 중산층의 시선으로는 단연 냉소주의다. 정치는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 도덕주의로 무장한 ‘깨끗한 정권’도 결국 부패와 연루될 수밖에 없다는 체념, 새 정권의 의욕적 출범이 경제현실을 타개해 줄 수 없다는 낭패감이 중산층의 마음속에서 교차한다. 그리하여 ‘정치적 양극화’가 진행된다.

    정치에 대한 절망감과 혐오감이 커지면 중산층은 두 개의 극단적 방향으로 이탈한다. 하나는 보수주의로의 회귀이다. 민주주의가 초래하는 이해갈등의 혼란과 무질서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것을 일소해주기만 한다면 억압적 권력이라도 수용할 수 있다는 심성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형태의 권력도 거부하거나 전복하고 싶은 심성(무정부주의), 또는 대안없이 민주주의 체제를 거역하고 싶은 심성(반역, rebellion)이 그것인데, 이를 개인적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무규범, 즉 아노미적 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급진적 이념에 투항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보수주의로의 회귀는 박정희신드롬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래도 경제는 좋았다’거나 ‘여하튼 사회질서는 제대로 잡혔다’는 과거 찬양의 정서가 확산되어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적 가치가 짓밟힌다.

    작년 1년 동안 수없이 벌어졌던 각종 거리투쟁과 시위에서, 그리고 그것을 규탄하는 반대시위에서 보수주의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중산층의 정서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극우 성향의 사회단체들은 이런 정서를 동원하여 사회운동 내지 정치세력화의 길을 노린다. 히틀러의 국가사회노동당은 중산층의 이런 정서를 동원하여 집권당으로 부상한 대표적인 사례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것에 비하면 후자, 즉 무정부주의와 반역적 심성으로의 이탈이 끼치는 사회적 폐해는 상대적으로 작다. 그것은 대체로 개인적 차원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무기력해지거나, 생업 의욕을 상실하거나, 모든 원리와 규칙을 부정하는 형태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자살은 이런 심성의 전형적 신드롬이다. 어떤 것에도 기대할 수 없고, 거역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공동체적 질서와 규칙을 무시하는 무규범적 상태에서 자기파괴의 행위, 즉 자살이 매력적인 선택으로 다가온다.

    한국이 최근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설명된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하층민이 아니다. 중산층에서 하층으로 전락했거나, 규칙과 상식을 우회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한 사람, 갑자기 퇴출된 고학력자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수단이 자살이다. 자살만큼 극단적 행동도 없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2003년 8월15일 광복절에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보수단체들의 집회. 2003년은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급진적 선택인 이 두 개의 이탈방식은 모두 자유를 혐오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한다. 그것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지적하였듯이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란 자유를 향유하는 정치적·사회적 비용이 너무 커서 그것을 권력자에게 맡기는 대신 그로부터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것이 확산되면 권위주의로의 자연스런 복귀가 일어난다.

    중산층이 현실정치에 절망하여 정치적 양극화로 치달을 때, 그리하여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성이 중산층을 유혹할 때, 민주주의는 사회성원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거나 스스로 쇠퇴한다. 참여정부와 함께한 1년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만끽한 기간이었겠지만, 적지 않은 중산층에게는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세월이기도 했다.

    【‘중산층 정치’로의 선회】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비교적 명백하다. ‘중산층 정치(politics for the middle class)’로 선회하는 것이다. 1년 동안 정책적 초점이 없었으므로 ‘선회’라는 말이 부당하다면, 이제라도 시작하면 된다.

    중산층 정치란 ‘중산층을 위한 정치’이자 ‘중산층 관점의 정치’를 뜻한다. 참여정부의 국정원리인 균형, 자치, 원칙과 합리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 다수의 중간 지점에 착지하기에 ‘중산층 정치’는 참여정부의 국정원리에 부합한다.

    IMF 위기에도 김대중 정권은 중산층 육성정책이란 걸 내놨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지원정책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는 제쳐두고라도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실상 김대중 정권의 중산층 육성정책은 적자재정을 꾸려가면서까지 서민의 생활기반을 지탱해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책메뉴가 고도의 경제학적 지식을 요하는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중소기업주의 사업부담 감면, 조세혜택, 생계비 대부, 봉급생활자의 세부담 경감, 카드사용자 세제 혜택 등이었는데 중산층 가구소득의 64%가 근로소득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정책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가구소득 중 근로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상층이 53%, 하층이 42%다). 그 정책관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중산층 정치’로 선회하려면 참여정부 스스로가 정책기조를 바꾸고 이념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 참여정부는 ‘선(先)성장 후(後)분배’ 이데올로기를 뒤집어 ‘적정 분배가 성장을 가져온다’는 신념을 정책기조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균형발전과 지방자치도 그런 관점에서 정당화된다.

    그런데 그 신념이 국민소득 1만달러의 한국 경제현실에서 적합한 것인가, 그 신념으로 다시 한번 새로운 도약이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균형과 분배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와 구체적 실행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고용의 정치, 일자리의 정치

    성장없이 분배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분배정책이라도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묻고 싶다. 절대빈곤층이 15%에 달하도록 방치했다면 분배를 국정원리로 설정한 것이 무색하지 않은가.

    중하층민을 위한 분배정책은 소비를 위주로 하는 정책인 반면, 중산층 정책은 생산을 촉진하는 정책이다.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소비자원의 분배는 단기적 처방일 뿐만 아니라 성장에도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한다.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에서 분배 드라이브를 걸었던 나라가 2만달러 고지를 넘은 사례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이 정체되거나 사양길로 접어들 우려가 더 많다(그리스, 뉴질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아르헨티나를 보라).

    ‘중산층 정치’의 본질은 경제적이다. 일자리 창출과 소득안정을 두 축으로 하여 생산과 소비가 위축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분배와 형평의 실행수단이 일자리와 고용문제로 이전된다. 고용(employment)은 사민주의 국가가 ‘인민의 중산층화’를 위해 꾸준히 추구해온 최고의 목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따라서 ‘중산층 정치’는 일자리와 소득안정을 위한 ‘고용의 정치(politics for employment)’이자 ‘일자리의 정치(politics of job)’이다. 고용기회를 넓히는 것, 고임금·고숙련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구조적 경기 변동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소득안정 정책수단을 개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2003년 한 해 동안 4만개의 일자리가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면 그대신 고소득·고숙련의 일자리를 4만개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고용의 정치’이자 ‘일자리의 정치’다. 4만개를 상실했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다면 분배와 형평을 강조하는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지하다시피 일자리 창출에는 엄청난 재원이 소요된다. 전략산업지원, 중소기업지원, 벤처기업 및 창업지원 등등의 수많은 정책수단들이 가용된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어떤 방법으로 기업을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인력을 배양해서 새로운 창업을 독려할 것인가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다. 분배는 표적집단정책(target-group policy)으로 충분한 반면, 중산층 육성정책은 거시경제정책(macro economic policy)이자 재정정책(fiscal policy)이다. 거시경제정책에 손을 놓고 표적집단정책을 남발하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기억할 만한 거시경제정책이 있었는가. 한국의 경제는 아직 IMF사태의 후폭풍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임을 기억해야 한다.

    경제드라이브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권의 경제목표가 무엇인가를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묻고 싶다. 통화정책 외에 이렇다할 경제성장정책이 발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은 한국의 경제 현실을 그런대로 괜찮다고 보는가. 그냥 놔둬도 굴러갈 것이라고 보는가. 아니면, 비전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경제정책 마인드가 전혀 없는가.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경제목표를 확실히 설정해야 한다. 슬로건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목표, 실천가능한 프로그램, 그리고 실행방식을 선보여야 한다. 2만달러로 가자고 한다면, 좋다. 그것이 아니고 분배가 먼저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성장전략 없는 분배는 소모적이고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중산층 정치’라면 참여정부의 집권세력들은 무슨 보수주의적 발상이냐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분배와 형평을 이룩하는 효율적 방식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모든 국민이 바라마지 않는 ‘1만달러의 늪’을 탈출하기 위해 가용한 국가재정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국민소득 2만달러를 목표로 설정한다면 ‘성장을 통한 분배’로 정책이념을 전환하고, 인프라 구축→전략산업지원→기술혁신→일자리 창출→적극적 노동시장정책→소득지원 순으로 정책의 우선 순위를 매겨야 한다. 이른바 ‘경제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2만달러 고지를 넘었다면 정책적 우선순위는 조금 다를 수 있겠으나, 1만달러의 늪을 벗어나려 한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국가정책에서 다시 한번 경제에 비중을 실어야 한다. 그것은 약체정권의 지배력 강화에도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

    국민총생산(GDP)이 596조원(2002년도) 정도의 경제 규모에서 신수도건설과 같은 대형 국책사업은 유보되어도 좋다. 그것보다 더 시급한, 막대한 재정을 요하는 성장프로젝트가 널려 있는 상황에 신수도건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참여정부의 브레인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미래의 발전을 위해 지금 막힌 통로를 뚫어야 한다고. 물자·자원·인적 자본의 수도권 집중이 이렇게 극심한 상태로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힘들 것이라고. 수도와 지방의 균형발전이 당장에 어떤 가시적 성과를 내지는 못하겠지만 장기적 안목에서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경제드라이브가 아닌 분산정책만으로는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경제 침체를 각오해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는 주장은 증명되지 않은 ‘희망사고’임에 반해, 경제성장을 하위범주로 두는 분산정책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쉽사리 입증된다.

    2만달러가 목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 고지를 돌파한 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한국이 이 단계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흥미롭게도 현재의 선진국들이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에 도달한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이었다(삼성경제연구소 ‘국민소득 2만달러로 가는 길’ 2004).

    이들 국가에도 국민소득 1만달러는 버거운 과제였고, 또 이것을 넘어 성장을 지속하는 일은 더더욱 힘겨웠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는 데 기여한 산업구조와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체제 등을 총체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2만달러로 전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략 수정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리더십이 주효했다.

    ‘경제성장의 정치’를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던 국가는 정체하거나 퇴보했다. 여러 나라가 탈락했다. 정치가 혼란했던 오일달러 국가들이 먼저 탈락했고, 권위주의체제에서 막 벗어났던 남유럽 국가들이 정체와 서행을 반복했다. 스페인은 1989년 1만달러에 도달해 현재까지 1만5000달러에서 맴돌고 있으며, 그리스, 포르투갈, 뉴질랜드 등이 전략산업 부재와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정체를 겪어야 했다. 2만달러 고지에 안착한 나라들에선 몇 가지 흥미있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특화산업과 전략산업을 주축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고(신성장엔진), 둘째, 사회적 합의기제를 만들어 이익투쟁을 조정하거나 잠정적으로 유보하고(협의정치), 셋째 철저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부담을 줄이거나 제도환경을 개선하며(규제완화), 넷째 친기업적 조세개혁을 단행하여 각종 인센티브와 조세감면을 제공하고(기업인센티브 제공), 다섯째 외국자본의 투자유치를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점이다(투자유치).

    언뜻 신자유주의적 정책메뉴와 동일하게 보인다. 사실 198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추세로 확산되기 시작했던 시기여서 시장변화에 대한 선진국들의 대응전략은 유사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레이건), 영국(대처/메이어), 독일(콜), 일본(나카소네)에서 모두 보수당 집권기에 2만달러로 도약했다는 점이다. 스웨덴은 그 시기(1981~88)가 사민당 집권기였는데 1982년 통화 평가절하를 단행한 뒤 이른바 ‘스웨덴 모델’을 해체해가는 때였다. 보수당의 정책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을 수 없었던 ‘보수화된 사민당’이었다.

    이에 반하여 진보노선을 추구한 국가들은 2만달러 고지 안착이 상대적으로 지연됐다. 예를 들어 캐나다(1980~ 97)와 호주(1980~96)는 1980년대 초 1만달러에 도달해서 2만달러까지 가는 데 15~16년이 소요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노동당 집권, 노동조합의 약진 그리고 복지정책의 확대조치가 겹쳐진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처럼 불안한 연정과 호전적인 노사관계에도 빠르게 2만달러를 달성한 국가도 있고(1986~91), 프랑스처럼 고실업·저성장에도 단기간에 성취한 국가도 있다(1986~90).

    이념투쟁에서 실용주의로

    문제는 우리의 목표다. 분배와 형평이 목표라면 경제성장의 꿈을 접어야 하고, 성장이 목표라면 분배개선의 속도를 늦추고 경제드라이브를 발동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의 최대목표가 위기관리였다면, 노무현 정권의 목표는 무엇인가. 참여가 합의를 도출하는 기제라면 참여를 통해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하는가. 참여가 이해충돌의 조정 기제라면, 그것은 어떤 제도로 정착되었는가. 파괴와 해체 위에 무엇을 세우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세울 수 있는가. 그것을 보여달라.

    노동자 출신 대통령인 브라질의 룰라는 요즘 인기 상승가도를 달린다. 그는 노동자당(PT) 당수로 노동계급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노동조합의 제일의 적이 되었다. 노동조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브라질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변신해서 막대한 규모의 외자유치에 성공하고 경제활성화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미국의 유수한 연구소들은 브라질이 이대로만 간다면 2050년에는 미국과 일본의 경제력을 뛰어넘어 중국과 함께 세계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변신은 화려하다. 문화혁명을 겪은 나라의 지도부가 세계 최고의 CEO로 활약하고 있다. 외자유치 총액이 1050억달러로 한국의 65억달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중국, 사회주의 한국’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가 추격하고 선진국이 멀찌감치 달아나는 상황에서 한국의 정치지도부는 이념투쟁에 집착하고 있다. 진보주의와 정치권력을 결합시켜 한국을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건져내겠다는 매우 근사한 꿈이다. 나는 이 꿈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와 진보세력은 비판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현실적 대안을 만드는 데에는 미숙하다. 만들어낸다고 해도 실행능력이 있는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점은 보수진영도 별반 다를 바는 없다. 현실정치에서 이해갈등은 토론이나 설득으로 돌파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1년간 뼈저리게 인지했을 것이다.

    진보진영은 아군과 적군의 구별에 본능적 후각을 갖고 있다. 적군이라면 돌아보지도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리멤버1219’에서 구사한 용어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지를. 시민혁명은 ‘그들을’ 말없이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성공한다. 진보진영은 민주주의라면 모든 것이 용인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익집단들이 너도나도 거리시위에 나서는 것은 괜찮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결사와 표현의 자유도 아니다. 거리정치를 제도정치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데 공고화되지 않은 신생민주주의에서 그것이 어렵다.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촉진시키지만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민주화로 인한 시민들의 기대인플레, 분배투쟁, 이익집단의 압력, 주기적 선거와 정당간 경쟁 등이 경제개혁의 추진능력을 약화시킨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희생시킬 것인가는 결국 집권세력의 결단에 달렸다.

    노무현 정권은 집권과 동시에 바로 이런 선택의 딜레마에 봉착했다. 민주주의는 정책결정에 대한 시민참여와 권력행사에 대한 공적 통제를 골자로 하는 반면, 경제적 위기 해결은 권력집중과 정책관료들의 신속한 행동능력을 요구하는 이 엇갈리는 딜레마 사이에서 노무현 정권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올해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2등이나 3등을 해서 노무현 정권이 강력한 거부권에 갇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민중주의적 통치술로 돌파하려 하겠지만 사회적·경제적 성과가 없는 한 민중주의는 이미 죽은 선택지다. 도덕정치도 작년 말 이미 파산했다. 그런데도 이념투쟁을 계속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4년 남은 집권기간에 그나마 업적을 내겠다면 개혁정치의 기본명제를 기억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개혁은 두 가지 경우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개혁프로그램이 비교적 선명하고 개혁을 지지하는 강력한 사회집단이 존재할 때와, 역으로 반대집단이 허약해서 개혁에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할 경우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이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남은 길이라면 첫 번째 길, 즉 개혁비전과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회세력을 규합하는 방식, 설득을 통해 ‘협약정치’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려면 이념투쟁을 버리고 보다 스펙트럼이 넓고 유연성이 있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념투쟁은 적을 양산하지만, 실용주의는 적어도 등을 돌리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를 기회주의나 배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집권세력이 될 자격이 없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2003년 12월19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 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리멤버1219’ 행사.

    전장의 폐허에서도 꽃이 피어나듯, 혼란 속에서도 우리에게 득이 될 전과는 분명 있다. 우선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자연(然)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성과다.

    한국의 정치제도가 허용하는 한 대통령은 누구도 대적하기 힘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상을 벗어던졌다. 그렇지 않으면 검사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을 터이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전국에 방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검사가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고 대드는 풍경은 보기에도 아찔했지만, 과거의 민주투쟁은 그것을 얻기 위한 힘든 싸움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의 권력이 결국 국민의 동의와 사회집단의 합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물론 그것이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연출이었는가를 따질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카리스마적 정치는 이 땅에서 물러가야 함을 보여준 과감한 선택이었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훨씬 가벼워졌다. 말이 앞서고 행동이 경박해서 자주 대통령 자질시비를 불러왔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대통령의 권위는 갈수록 추락했다. 대통령의 말투가 코미디로 둔갑하고, 즉흥적 결단과 반복되는 저속한 언어에 정치인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표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힘들어 못해먹겠다’는 표현은 국무회의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일종의 유머였다고 하지만, 언론의 공식적 루트를 타면 대통령 직무가 갑자기 동네 반장 아니면 동문회 총무 정도로 급전직하한다.

    유력 일간지들의 호전적 태도를 두고 ‘언론은 비난하고 왜곡하고 그것이 모자라 뒷조사해서 또 조진다’고 했을 때, 대통령은 갑자기 동네 슈퍼마켓 주인 얼굴과 겹쳐졌다. 방식이 반드시 그런 것이어야 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제왕적 대통령상을 탈피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에 한 걸음 다가간 것임에는 틀림없다.

    둘째, 권력의 사령탑인 청와대가 직업관료나 기성정치인이 아니라 순수한 시민세력으로 채워졌다. 이른바 386세대의 혈기왕성한 전위부대가 집권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노사모가 주최한 당선 1주년 축하모임 ‘리멤버1219’에서 대통령이 힘차게 외친 ‘시민혁명’이란 개념은 그런 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사건을 접한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섬뜩하게 다가온 그 말이 집권세력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던 일상적 용어였다.

    사실 ‘시민혁명’은 노사모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 원했던 단어일 터이다. 여러 차례 체제변혁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분점해오던 구(舊)지배세력을 몰아내지 않고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은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런데 그가 누구든 ‘순수한 시민세력’이 청와대를 장악했는데 그보다 더 국민을 기쁘게 만들 일이 있겠는가.

    셋째, 진보적 이념의 정치세력화이다. 과거를 돌아보라. 멀게는 박정희 정권을, 가깝게는 노태우 정권을 돌아보면 진보이념에 목말라했던 국민 정서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못사는 사람, 서민, 노동자를 우선 배려하고, 독재적 관행을 제거하고, 자유를 결박하는 반민주적 정치행태를 일소하길 얼마나 원했는지, 균형·평등·성 해방·화해·평화공존 등의 이념에 유해하고 불온한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보수주의 논리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돌아보라.

    진보이념의 정치세력화는 반공·보수·냉전이념에 포박된 한국의 사회질서에 신선한 돌파구를 마련해줄 최선의 대안으로 추구하던 것이다. 그 오랜 대안이 노무현 정권과 함께 어느 날 단비처럼 찾아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카리스마 정치가 끝나는 시점에서 국민이 내린 중대한 결단이었다. 비록 57만표의 사소한 격차로 선택된 것일지라도.

    그러나 그 오랜 염원은 현실이 되자마자 낭패감을 몰고 왔다. 집권세력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데 익숙했던 반면,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386세대의 전위부대, 진보적 지식인들은 무엇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데 프로급 선수들이었지만, 새것을 창출하는 데에는 아마추어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집권세력은 통치에 관한 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집단이었다. 구지배블록이 쌓은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는 데 주력한 탓이거나 아니면,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혁명대안을 상실했던 386세대의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된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집권초기에 권력을 유지할 정밀 설계도가 없었다.

    대선 공약을 설계도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다. 이회창 진영도 뭐 다를 게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면 할말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급류를 탔던 대선기간에 황망히 만들어진 아이디어의 엉성한 집합에 불과해서 한국사회를 끌어갈 항해도는 아니라는 점만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정책초안을 작성하는 데 집권초기 6개월을 허비했다.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서 집권초기 6개월은 정권의 사활을 건 중대한 기간이다. 선거 패배로 인해 저항연합이 숨죽이고 있는 사이 집권세력은 전광석화처럼 개혁사안을 정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저항연합이 대항의 갈퀴를 세울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약체정권일수록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늑장을 부렸다. 무엇부터 해치워야 하는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노하우가 없었다. 청와대를 장악하고 개혁이념을 높이 외치고 도덕성으로 무장하면 시민사회가 스스로 들고 일어나 지원세력이 되어 줄 것으로 믿었다. 시민혁명의 열기는 대선 이후에도 시민사회 내부에서 이글이글 타오를 것으로 기대했다.

    지난 1년간 무엇을 했는가

    도덕성은 유권자를 오랫동안 만족시키지 못한다. 정권의 정당성은 구체적인 혜택과 가시적 성과로부터 쌓여지는 것이다. 집권세력이 그것을 제공하지 못할 때 유권자는 지지의 대가가 고작 경기침체와 실직위험으로 돌아온다는 것에 분노하게 된다. 권력집단으로 등극한 386세대 전위부대와 진보적 학자들은 이상(理想)의 정당성에 과도하게 기댔다. ‘이상에의 만족’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상쇄시키지 못할 때 유권자의 이탈이 시작된다. 진보진영 지식인들은 시민들에게 인내심을 가져달라고 자주 주문했지만, ‘현실의 반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참여의 문은 활짝 열렸으나 참여의 과정은 토론이었고, 토론의 결과는 이해갈등이었다. 어떤 민주정부에서도 참여는 이해갈등을 부추긴다. 정권이 할 일은 당사자들을 설득해서 이해갈등을 조정하고 특정 방향의 정책을 선택,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론으로 끝나버린 사안이 많아지면 잠재된 이해갈등까지도 표면화되어 사회는 곧 소란스런 공간으로 돌입한다.

    지난 1년은 그런 기간이었다. 언론의 평가도 한결같다. “2003년은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쟁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어떤 측면에서는 진보적 성향의 노무현 정권 출범과 함께 예견된 일이기는 했지만, 경제정책이 갈지(之)자 행보를 하게 된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였다”(문화일보, 2003년 12월24일자). “이러다가 세계 경제의 오름세에 이상이라도 생겨 수출마저 꺾이면 국민생활은 결정타를 맞을 수 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들은 국민들을 보살피라고 그 자리에 뽑혔거나 임명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난 1년간 무엇을 했는가” (조선일보, 2003년 12월20일자 사설).

    집권세력과 전쟁중에 있는 신문의 논조가 과도하게 편파적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1년간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은 국민의 공통된 관심사일 것이다.

    집권세력이 1년 동안 한 일은 대부분 ‘파괴’이거나 ‘해체’였다. 권위주의체제 청산에 해당하는 이 작업이 쉬울 리 없으므로 노무현 정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이것이다. 그 대가로 이해충돌, 혼란, 경기침체, 비전 상실, 불확실한 미래 등등을 돌려받았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파괴와 해체는 중대한 전과였으며 혼란 속에 핀 꽃이었다.

    【사소한 성공, 중대한 실패】

    노무현 정권의 정책기조는 ‘좌편향’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정책기조를 그대로 수용하되 대체적으로 좌편향을 시행하는 것, 이것이 노무현 정권의 정책골자다. 지난 1년을 허송세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무현 정권은 사안마다 정책 비중을 좌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이 만만찮았고 힘에 부쳤다. 결과적으로, 논란만 불러일으켰을 뿐, 성과는 없었다. 각계 전문가들이, 지식인들이, 교수들이 노무현 정권의 1년에 대해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김대중 정권은 IMF사태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정책공간을 훨씬 넓게 잡을 수 있었으며, 서민지향적 정책은 좌편향적, 경제와 노동시장정책은 우편향적 기조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좌파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을 ‘신자유주의’로 명명한 것은 그다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김대중 정권은 이중적인 정책기조를 활용하여 좌편향적 사회정책과 우편향적 경제·재정정책을 결합시켰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얼른 보기에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파악되지만,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정책메뉴를 사안별로 적절하게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권과 구별된다.

    애초 중도좌파의 위치에 포진했던 노무현 정권은 사안마다 예외없이 좌편향적 기조를 채택했으며 그럴 때마다 예외없이 보수집단의 반발을 불렀다. 불평등완화, 빈곤감소, 복지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좌파 정책은 막대한 재정수요를 필요로 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이 뒷받침돼야 한다. 성장없이는 좌파 정책은 불가능하다.

    1990년대 중후반 유럽에서 좌파정권이 권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우파정권의 경제안정 조치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이 천박한 우파정치에 질린 탓도 있다.

    김대중 정권 역시 IMF사태가 조기에 진화되지 않았더라면 사회안전망과 기초생활보장법 같은 재정소모적, 서민지향적 정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IMF가 양손 정책(two-handed approach)을 권장했던 것도 김대중 정권에는 큰 힘이 됐지만, 여소야대 정국에서 적자재정을 요하는 사회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김대중 정권과 달리, 노무현 정권에는 IMF사태도, 조금은 부드러운 야당도 그리고 야당을 끌어들이려는 협력정치적 노력도 없었다. 그저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 좌파 정책의 필요성, 도덕적 당위성으로 좌파 정책을 실행하고자 했으며, 야당의 저항에 직면하면 막후협상이나 협력 등의 정치적 기술을 활용하기보다 정면돌파를 택했다.

    그렇지 않아도 근소한 표 차이로 집권에 실패한 거대 야당이 그런 행보를 봐줄 리 없었다. 거대 야당은 모든 사안에서 거부권(veto power)을 행사했다. 거부권은 좌파 정책을 반대하려는 의도보다는 노무현 대통령을 거부하는 의미로 행사되었다. 갈수록 여야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타협과 대화를 최고의 정치적 기술로 내세웠던 노무현 정권은 정책사안 협의에서만은 스스로 그것을 버렸다.

    정책성향에서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좌편향적 적자(嫡子)이나, 정책실행의 관점에서는 타협과 대화를 모르는 ‘독단의 정치’를 행했다. 다만 시민들에게만은 대화와 토론의 창구를 열어놓았는데, 이것도 젊은 세대에 의해 장악되었기에 공평한 대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가? 노무현 정권의 의도대로 한국사회의 질서가 좌로 돌아섰는가, 또는 우측으로 이동했는가, 아니면 그대론가?

    성장 없이 분배도 없다



    은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거나 시행을 고려하고 있는 정책사안 리스트다. 모든 정책을 포괄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굵직굵직한 것들은 대체로 열거되었다. 더러는 성공했고, 더러는 실패했다. 두 가지 점이 흥미롭다.

    첫째, 성공한 정책들은 대부분 대통령의 권한으로 결정할 수 있는 단순 사안인 반면(!표 한 것), 추진중이거나 실패한 것, 또는 손도 대지 않은 사안들은 주로 이익단체들의 주장이 서로 얽혀 해결하기에 복잡한 사안들이라는 사실이다(!!표 한 것).

    둘째, 성공한 정책은 사회질서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작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준법서약제도폐지’와 ‘4·3사건 공식사과’가 한국의 사회질서를 어느 정도 우측으로 또는 좌측으로 이동시켰을까? 별로 영향은 없다. 그것은 인권과 국익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묵은 과제들이다.

    반면 상자 오른쪽에 있는 정책사안들은 나름대로 사회질서의 재편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것들이어서 사회정의 실현, 경제성장, 복지 등등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실패했거나(예를 들어 노사분규조정), 포기했거나(건강보험개선, 신용불량자문제), 야당의 거부 또는 이익단체의 저항에 부닥쳤다(국민연금개선).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은 사소한 것에서 성공하고 중대한 것에서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책적 관점에서 한국은 1년 전에 비해 좌편향도 우편향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자리에 꿈쩍없이 앉아 있다는 뜻이다.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어떤 정권이 들어섰더라도 이 정도는 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타는 이런 뜻에서 유효하다.

    한국사회를 좌로 이동시키는 것이 노무현 정권의 목표였다면, 적어도 지난 1년간은 실패였다. 앞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터인데, 이 질문에도 회의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좌편향적 정책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를 좌로 이동시키려는 과정에서 많은 소란과 갈등이 발생했는데, 노무현 정권은 ‘조정의 정치’를 가동시키지 못했다. 토론정치는 조정의 정치가 아니다. 그러는 동안 경제는 내팽개쳐졌다. 의 리스트에는 경제와 관련된 것이 극히 적다. 노무현 정권은 ‘수십년 동안 경제에 초점을 두었기에 1~2년 정도는 분배에만 관심을 둬도 된다’는 안이한 발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인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2003년 12월 16일 대선자금 관련 긴급기자회견을 한 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노무현 대통령.

    분배는 성장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정치경제학적 상식을 노무현 정권의 브레인들은 이념적으로 배척했다. 그 대가는 쓰라린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성향을 탈색시키고 급기야 우편향적 정책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거듭되는 정책실패로 인해 분배정책의 정당성까지 거부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경제배제적 정책을 추진했던 지난 1년 동안 그럴 위험성은 급격히 증대했다. 중산층의 점진적 붕괴 또는 하향분해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반격

    노무현 정권이 등장했을 때부터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정당 내부의 지지기반, 지지자의 연령별·지역별 분포, 지지하는 이익단체들의 사회적 영향력 등을 고려하면 노무현 정권은 역대 가장 취약한 정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전면 교체’를 원하는 정서를 가진 유권자는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말하자면 취약계층, 서민, 젊은 세대, 주변적 이익단체 등으로부터 산발적 지지를 끌어모아 당선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당에서는 내부의 견제세력, 국회에서는 거대 야당, 사회적으로는 막강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보수기득권층과 유력 언론사들에 포위된 채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를 가시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은 진보적 지식인 일부, 노사모, 네티즌, 노동단체, 시민단체들 뿐이었다. 따라서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그는 우선 두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는 파격인사를 통해 정부 관료를 장악하는 것, 다른 하나는 국가정보원, 검찰과 같은 막강한 권력기구를 탈정치화하는 것이다. 서열파괴와 능력위주의 공정한 인사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정부 관료 장악은 어느 정도 달성되는 듯했고, 철저한 공정인사와 무개입원칙을 고수함으로써 후자 역시 달성되는 듯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 모두 노무현 정권의 지배력 강화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두 개의 전략이 지배력 약화를 재촉했다면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했을 것이나 정치적으로는 자충수를 둔 꼴이 되었다. 정부 관료들은 인사정책의 공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청와대에 포진한 386세대 전위부대의 아마추어리즘을 비웃기 시작했으며, 정치적으로 독립한 검찰이 사정 칼날을 여권과 대통령 자신에게까지 들이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원칙과 합리’를 국정 기조로 삼은 참여정부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자신마저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각오는 역대 정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미덕이자 노무현 정권 최대 강점인 도덕성의 소치였다.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노무현 정권의 업적은 높이 평가될 이유가 충분하다. 권력의 최대자원인 국가기구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냄으로써 기능정상화에는 성공했으나 권력적 차원에서 본다면 제 팔을 스스로 자른 결과가 되었다.

    지방자치와 균형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중앙정부의 권한이양은 결국 중앙정부의 지배력 축소로 이어질 것임에도 그것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노무현 정부는 자발적 참여의 힘, 서민의 힘,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권은 ‘도덕정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설정했다. 중앙정부가 깨끗하고 집권세력이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한다면 관료, 법원, 검찰, 국가정보원 할 것없이 양심의 명령에 따라 개혁에 동참할 것임을 믿었다.

    여기서 노무현 정권은 ‘현실의 반격’을 예상치 못했다. 국민은 부도덕보다 현실적·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참지 못한다는 사실, 도덕정치보다는 약간 부패하더라도 유능한 정권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令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작년 내내 국민들을 괴롭히던 대선자금 문제가 겹쳤다. 도덕정부의 도덕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청와대에 포진한 386 전위부대가 검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돈의 규모를 떠나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노무현 대통령 주변인사들이 크고 작은 부정거래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마자 노무현 정권의 정당성 자원은 급격히 고갈되었다.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성과가 있었다면 그 충격은 어느 정도 상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 질서의 파괴와 해체에 집중했던 집권세력에게는 내세울 만한 업적이 거의 없었다. 당혹하기는 집권세력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사회로부터 날아드는 비난의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

    집권 6개월이 채 안 된 시기에 더 이상 영(令)이 서지 않았다. 지배구조가 급격히 약화되고 붕괴의 조짐마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시기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언론은 비판을 본업으로 삼는다. 보수언론이 지나치게 편파 보도를 일삼았을 수는 있겠지만 그 사유는 정권 내부로부터 제공되었다.

    대통령은 정권이 어렵게 성취한 성과와 업적을 축소하고 심지어는 왜곡하는 언론에 불만을 터뜨렸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놓여 있던 정권의 지배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언론을 거꾸러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오죽 속이 탔으면 언론을 상대로 법원에 고소까지 했겠는가. 그 결과 정언(正言)전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언론은 지적 헤게모니를 뜻하기에 집권세력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노무현 정권의 좌편향 이데올로기가 일그러진 균형을 바로잡는 시대소명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은 많은 지식인들이 인정하는 바지만, 인정이 곧 지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 규모가 과거에 비해 한층 커졌다고는 하지만, 노무현 정권을 내놓고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지식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비판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기를 선호한다. 비판기능에 숨어 자신의 정체성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파 이념이 현실권력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좌파 이념에 동조하는 행위는 엄청난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우파 정권이 들어설 경우 용도폐기될지도 모를 개연성을 사전에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동아·조선·중앙 등 영향력 있는 언론에 내로라 하는 지식인이 앞다퉈 모이는 이유도 이것이다. 비판기능에 몸을 싣고 선별적으로 좌파성향의 정권에 훈수를 두는 일, 이것이야말로 지식인들이 즐기는 게임이다.

    노무현 정권이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집권세력을 지지한 지식인들은 주로 학계의 변방에 위치했던 이른바 비주류 그룹이다. 비주류 그룹에게는 좌파성향의 정권에 몸을 실어도 잃을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주류 지식인들은 사정이 다르다. 약체정권이 실패할 개연성이 높고, 사회의 이념적 대세가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선, 진보적 성향에 호감을 갖는 주류 지식인일지라도 적극 가담을 꺼린다.

    노무현 정권의 지식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끌어들이기는 커녕, 이념의 선명성을 내세워 이들을 배척하고 훈계했다. 초기에는 호감을 가졌던 사람도 그들의 배타적 태도에 등을 돌려버렸다. 집권세력의 지식인들이 정책실행에 성공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패와 아마추어리즘, 배제적 태도, 주류에 대한 속 좁은 반감 등으로 그들은 점점 더 학계와 문화계로부터 격리됐다.

    2003년도 중반기를 지나면서 집권세력의 지식인들은 주류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후반기로 접어들자 아예 관심에서 사라졌다. 지적 헤게모니가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혹시,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를 보위하고 있는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격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4년의 통치기간이 예상보다 훨씬 힘들어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다.

    지배구조의 약화

    일간지들은 신년호 특집에 예외없이 노무현 정권의 지지도 변화를 보도했는데, 결과는 ‘파탄’ 그 자체로 나타났다. 작년 2월 취임 직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도는 84%로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했는데, 집권 6개월 만에 42%로 떨어지고, 집권 10개월인 12월 말에는 급기야 23.6%로 급락했다(‘동아일보’ 1월1일자). 분야별 국정평가에서도 역대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 대미외교정책은 53.4%가 ‘잘 못했다’고 응답했고,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66.2%가, 경제정책에서는 무려 83.5%가 ‘잘 못했다’고 답했을 정도다.

    노무현 정권은 손을 놓고 있었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거나, 정책실패를 거듭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응답자의 77%가 일년 전에 비하여 ‘살기가 나빠졌다’고 답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최대 후원자인 청년들이 10%에 달하는 고실업률에 시달리고 있는 데도 이렇다할 정책을 내놓지 않은 정권에 바랄 것이 없다는 뜻이다.

    김대중 정권은 최대 180만명까지 치솟았던 실직자들에게 졸속한 것이었지만 효율적인 처방을 마련해주었다. 실업대책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던 관료들로 하여금 청년실업을 해결하도록 독려하지 못했다면 그 정권의 지배구조는 이미 붕괴 일로에 들어선 것 아닌가 의구심을 자아낸다.

    아무튼 언론의 지지도 조사결과로만 보자면 노무현 정권은 지난 12월 말 이미 파산신고를 낸 것과 다름없다. 일단 30%를 지지도의 마지노선으로 설정한다면, 그보다 훨씬 낮은 23.6%의 지지도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한껏 독이 오른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거부권을 수없이 날릴 예정이고 보면, 노무현 정권에 남겨진 정책공간과 정치적 자율성의 공간은 현격히 좁아진 셈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2003년 1월 대통령당선자 시절, 한 방송에 출연해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 짓는 노무현 대통령 부부.

    노무현 정권은 지배구조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집권세력이 4월 총선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것인데, ‘업적 없는 무능한 도덕정부’를 유권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인가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지배구조의 약화는 ‘더 나은 민주주의’로 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건너야 할 건널목인가. 아니면 카리스마적 정치가 막을 내린 뒤에 찾아오는 후폭풍인가.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 이행 과정을 겪었던 국가들, 예를 들면, 스페인과 브라질 모두 지배구조의 약화라는 공통적 현상을 경험했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유럽식 정당정치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지배력 약화를 경험했고 그와 동시에 극심한 경제침체기를 거쳐야 했다. 스페인은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 브라질도 예외가 아니어서 1970년대 말 군부정치가 막을 내린 이후 거의 20년 동안 갈지(之)자 행보를 지속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이 당면한 문제는 민주화의 필연적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앞에서 지적한 ‘눈물의 계곡’을 가능한 한 빨리 통과하려면, 참여와 정당성이 정비례한다는 정치학의 고전적 명제로부터 빨리 탈피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지식인들은 참여와 개방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는 듯한데, 그 방정식이 성립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즉, 이해갈등을 조정하는 효율적인 조정 기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정치제도가 폭주하는 참여요구를 수용하지 못하면 사회는 혼란상태에 빠진다. 그러므로 ‘참여를 조정할 수 있는 제도의 창출’이야말로 정당성을 강화하는 필수 요건이다. 그것이 안 된다면 빨리 다른 전략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회적, 경제적 성과(performance)가 정치적 정당성을 높인다’는 새로운 방정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곧 ‘중산층 정치(politics for the middle-class)’로 이행해야함을 뜻한다. 좌편향적 정책기조를 버리고, 중산층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단단히 해주는 정치, 그리하여 중산층이 갖고 있는 ‘건강한 교양’에 기대를 거는 정치가 그것이다. 참여정부가 강조하는 도덕이 중산층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 때 급기야는 이상주의로 흐르고, 그 결과는 파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참여정부 1년 동안 도덕성의 현실적 기초인 중산층이 와해 일로에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 심각하다. 나는 참여정부의 최대 실수를 ‘중산층 와해’를 외면했다는 사실에서 찾고 싶다. 왜냐하면 사회발전의 자원, 개혁 열망, 그리고 건강한 도덕성이 그들로부터 분출되기 때문이다.

    【중산층 이중분해와 사회심리】

    한국의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 속도도 매우 빠르다.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도약하는 데 성공한 20여개 국가 중 중산층이 이렇게 빨리 약화된 사례가 없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양적 확대와 질적 역량 강화는 선진국 진입을 좌우하는 중대한 요건이자 지표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중산층은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 중산층의 약화가 세계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연구도 있지만, 세계화의 외압 속에서도 중산층의 경제적·정치적 역량을 꾸준히 증진시키고 있는 국가들이 발견되기에(예를 들면 호주와 캐나다) 한국의 중산층 약화추세를 일반적 범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1997년 말 IMF사태 이후 중산층의 하향 분해가 빠르게 진행되어 왔으며, 그 추세가 둔화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민주주의 기반 무너져

    이것을 전적으로 노무현 정권 탓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산층의 하향 분해를 정책 어젠더로 설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제어할 아무런 정책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직무유기다. 직무유기라기보다 좌편향을 통해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목표 자체를 무화시키는 중대한 실책이다.

    중산층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수원지다. 중산층이 튼튼하지 않고는 그것을 넘어서는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프로젝트도 불가능하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참여정부 1년’ 대해부

    대선 승리 1주년 기념행사에서 “시민혁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역설한 노무현 대통령.

    사민주의 국가들은 노동계급의 중산층화를 최대 목표로 설정했다. 노동자의 부르주아화(embourgeoiment)가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변질시켜 사민주의의 기반을 침식할지라도, 사민주의 국가들은 임금생활자의 경제적 풍요를 최고의 목표로 추구했다. 고용안정과 실업축소가 20세기 사민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던 이유는 고용안정→소득안정→생애설계의 안정성이라는 등식을 보장해주기 위함이었다.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사람들에게는 재적응을 위한 복지정책이 가동되었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상층에 위치한 숙련노동자들이 속속 중산층에 합류했다. 사민주의가 태동할 당시에 비해 이들의 계급이념은 초기 계급적 순수성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구현하자는 사민주의의 골자가 변색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안전망을 기반으로 보다 더 높은 수준의 프로젝트를 개발해나갔다. 산업 민주주의에서 경제적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도 중산층의 요구였으며, 복지국가의 정치적 결정요인이 노동계급에서 중산층으로 옮겨온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중산층은 한국과 같은 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지키는 보루다. 미국의 정치학자 리프셋(Lipset)이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진단했을 때, 민주주의에 대한 중산층의 기여도에 주목했다. 유산계급으로서 중산층은 자유민주주의의 계층적 기반이다.

    소비와 지식생산 주체 와해

    현재와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 중산층의 주류는 전문지식을 습득한 고학력 집단이다. 이들은 전문직업의 공공 윤리와 사회의 공동선을 존중한다. 이른바 교양계층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산층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공화주의(republicanism)의 균형적 결합을 추구하면서 좌파이념과 우파이념의 극단적 발화를 경계한다. 서유럽의 경우, 중산층은 노동계급에 비해 훨씬 보수적인 이념집단이지만, 자유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좌파이념이 극단으로 흘러가는 것을 견제했다. 이에 반해 동유럽 국가들은 노동계급의 이념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발화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 중산층의 존재가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은 생산과 소비의 주체다. 제조업이 산업의 주축이던 시대에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의 주요계층이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지식노동자(knowledge workers)와 서비스직종 노동자가 부가가치 생산의 주요집단이다. 경제의 주체가 중산층으로 이전된 것이다. 이들의 구매력은 국내소비를 좌우한다.

    세계시장의 불안정성이 날로 높아지는 오늘날 국내소비의 위축은 곧바로 기업경쟁력에 커다란 타격을 입힌다. 소비의 주력집단이자 지식생산의 담당계층으로서 중산층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졌다. 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된 것이다. 그렇게 중산층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의 순순환적 과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지금 그 중산층이 한국에서 빠르게 와해되고 있는 중이다.

    중산층의 와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경제적 하향 분해’와 ‘정치적 양극화’가 그것이다. ‘경제적 하향 분해’는 중하층민의 빈곤화와 중산층의 소득불안정으로 나타나고, ‘정치적 양극화’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의 확산’과 ‘급진적 이념에 대한 매혹의 증가’로 요약된다.

    양자는 서로 맞물린 동시적 현상으로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의 악순환적 고리를 형성한다. 경제를 내팽개친 대가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의 순순환적 과정을 지키는 한국의 파수꾼이 그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중산층을 추스르지 않고는 경제성장도 민주주의 프로젝트도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여기에서 나온다.

    경제적 측면에서 중산층의 하향 분해는 사실상 IMF사태로 촉발된 것이지만, 현재까지 지속되는 그 추세도 문제려니와 노무현 정권이 그것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중산층의 규모 축소를 겪고 있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한국은 축소의 속도가 빠르고, 주로 하층이동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점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경제적 하향 분해를 몇 가지 관점으로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참조).

    우선 IMF사태 직후 국내 연구기관들이 ‘주관적 계층 귀속감’의 변동추이를 추적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예외없이 급격한 규모 축소 또는 심리적 위축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0월 조사에 따르면, IMF사태 이전에는 응답자의 88.5%가 심리적으로 중산층 귀속감을 갖고 있었는데, IMF사태 이후에는 그 비율이 75.1%로 줄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1999년 4월 조사 역시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IMF사태 이전에는 61.1%였던 중산층 계층귀속감이 이후에는 45.1%로 현격히 줄었다는 것이다.

    둘째, 하향 이동은 주로 빈곤층의 확대로 나타난다. 중하층민에 속했던 임금생활자들이 속속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빈곤층(중위소득의 40% 미만)의 확대 속도는 놀라우리만큼 빨라서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 1996년 7.7%였던 것이 2000년에는 11.5%로 급증했다(유경준 ‘소득분배의 국제비교를 통한 복지정책의 방향’ KDI 정책연구, 2003).

    중위소득(median income)의 50% 미만을 절대빈곤층으로 규정하면, 같은 기간에 그 규모는 12.7%에서 17%로 늘어난다. 경제활동인구의 17%가 절대빈곤층이라면 OECD국가 중 최고다. 그것도 불과 5년 만에 1.5배가 증가했다.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상대빈곤층의 비율을 비교한 에서 보듯이, 한국의 빈곤율이 멕시코 다음으로 높다. 더욱이 멕시코는 14년 동안 1.3%포인트 늘어났음에 비하여, 한국은 5년 동안 약 4% 포인트 늘어났다. 프랑스·폴란드·미국과 같이 빈곤율이 낮아진 국가가 있고, 빈곤율이 높아진 국가들도 소폭에 그치고 있음에 비하면 한국의 사정은 실로 심각하다. 말하자면, 한국은 중하층민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속도가 가장 빠르다.

    셋째, 빈곤층의 확대는 소득불평등의 악화를 낳는다. 한국은 소득불평등 면에서 비교적 양호한 국가로 분류되었으나 그것은 이제 옛말이다. 1996년 0.298이었던 지니계수가 불과 5년 만에 0.358로 급증했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하층으로 분해되면서 상층의 소득점유율이 높아진 반면, 중산층의 소득 점유율은 낮아졌다. 중산층이 축소되면서 소득점유율도 하락한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 기술변화, 성장률 둔화, 실업률 증가 등등 고용안정을 해치는 요인들이 중하층에 집중되면서 이들을 하층으로 끌어내렸으며, 중산층 전체적으로는 소득불안정성(income volatility)을 초래했을 것이다. 소득불안정은 생애설계를 저해한다.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넷째, 중산층의 규모 변화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1992년 70.58%였던 비율이 1998년 3/4분기에 64.06%로 축소되었다(류상영·강석훈 ‘중산층의 변화실태와 정책방향’ 삼성경제연구소, 1999). 이 연구는 중위소득의 50~150%를 중산층으로, 50% 이하는 절대빈곤층으로, 150% 이상은 상층으로 구분했다. 문제는 IMF사태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가처분소득으로 판별한 중산층의 규모가 6.5% 포인트 줄었고, 이런 추세라면 2002년에는 56.82%까지 축소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아직 2002년과 2003년 조사자료가 가용하지 않아 중산층의 규모 축소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재기 어려우나, 위에서 지적한 빈곤인구의 증가, 소득점유율의 하락 등으로 미루어보건대 대체로 55~60%에 머물지 않을까 추론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중산층은 1990년대초 70% 정도였다가 2000년대 초반에는 55~60%로 줄어들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극심한 소득불안정까지 겹쳤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이태백

    하향 분해는 중하층만의 현상이 아니다. 중층과 중상층 역시 이런 충격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2~3년간 새로운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이태백-은 과장 부장급 이상의 고위·중간관리자, 숙련사무직, 고학력자들의 심리를 위축시켰으며 청년층과 30대 고학력자들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었다. 한국의 중산층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상시 퇴출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고용안정을 위해 연봉삭감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생존 심리를 받아들이게끔 되었다. 그러므로 중산층 내부에서 중상층은 중층으로, 중층은 중하층으로 연쇄적 하향이동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한국의 계층구조는 중간이 튼실한 ‘항아리형’에서 밑부분이 불룩해진 ‘종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1990년대 초 이후 불과 10년 만에 중산층의 10% 이상이 하층민에 합류한 것이다(상층으로의 이동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가정하면). 소득불안정과 고용불안정을 막아줄 아무런 정책기제가 작동하지 않았고 경제성장률이 20년 만에 최저로 떨어진 2003년에는 중산층의 하향 분해가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종형 계층구조는 빈곤인구가 많고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남미국가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형으로 그 내부에 민주주의발전을 지연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번성한다. 왜냐하면 중산층의 하향 분해를 촉진하는 외부 위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극단적 이념과 논리를 조율하는 기제로서 중산층의 역할은 점점 더 위축되고, 그 결과는 극한적 이해충돌과 사회의 총체적 불안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했던 혼란의 진원지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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