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성매매 여성들의 절규 “우리는 이렇게 당했다”

촛불쇼, 바나나쇼, ‘인간 다트’… 생리 때는 솜 틀어막고 관계 강요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7-01-08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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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매매특별법 시행 후 성매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자활의 길을 걷는 여성들이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는 용기를 발휘했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0년 넘게 성매매를 한 이들이 누구에게도 말 못한 치욕스러운 경험을 털어놓은 건 성구매자들의 추악한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고백은 성매매는 ‘필요악’이라는 고전적 시선과 최근 일부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던진다.
    성매매 여성들의 절규 “우리는 이렇게 당했다”
    사단법인 인천여성의전화(대표 배임숙일) 부설 여성자활지원센터 ‘강강술래’엔 18명의 탈(脫)성매매 여성이 생활하고 있다. 서울과 인천, 경기도 등지에서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성매매업에 종사했던 이들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후 ‘강강술래’의 도움을 받아 새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외상후증후군을 겪고 있으나 홈패션, 퀼트, 도자기 굽기와 더불어 심리치료 등 잘 짜인 프로그램에 맞춰 다시 설 기반을 다지고 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다면 깨끗이 지워버리고, 앞만 보고 살고 싶다는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이들은 2006년 12월4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인천여성의전화 주최 ‘성구매자 중심의 성매매 근절운동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해 성매매 당시 겪은 갖가지 인권침해 사례를 고발했다. 인천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우리 사회가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인식하고는 있으나 대개 업주나 포주에 의한 피해가 부각될 뿐 성구매자가 자행하는 인권유린은 주목하지 않았다”며 “성매매 근절을 위해선 성구매자의 심리와 행태를 알아야 하기에 자활센터 여성들이 용기를 냈다”고 설명했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후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고는 하나 성구매 혐의로 적발된 사람들 대부분이 여전히 ‘죄를 지었다’고 뉘우치기보다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생각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대부분의 남성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식엔 성매매 여성이 쉽게 큰돈을 번다는 편견, 성매매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노동임을 강조하는 일부 성매매 여성들의 주장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강강술래’의 탈성매매 여성들은 그게 다는 아니라고 증언한다.

    다음은 인천여성의전화로부터 입수한 탈성매매 여성의 생활수기모음 중 3편을 골라 간추린 것이다. 제목과 가명은 탈성매매 여성이 직접 지은 것이다.

    ‘낮과 밤의 얼굴이 다른 야누스들’



    ‘데이지’란 가명을 쓴 이 여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화목하지 못한 가정이 싫어 집에서 나와 친구와 함께 살았다. 마땅한 직업 없이 지내다 2년 만에 150만원의 신용카드 빚이 생겼고, 그것을 갚기 위해 ‘선불금’을 주는 다방에 취직했다. 성매매의 길로 빠져든 많은 여성이 ‘선불금’의 덫에 걸린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차 배달을 하면서 큰돈을 벌 줄 알았는데, 업주는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2차’를 강요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려면 ‘2차’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2차’는 육체적으로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처음 다방 일을 시작한 곳은 김포의 ‘정다방’이다. 선불금으로 160만원을 받아 카드빚을 갚았다. 그저 차를 배달하면 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업주는 “돈 벌러 왔으면 공주처럼 굴지 말고 손님 하나 더 잡아서 네 손님 만들라”며 ‘티켓’을 강요했다. 1시간에 2만원 하는 티켓비를 받기 위해 원치 않은 손님을 만나야 하고, 업주에게 시달림을 덜 받기 위해 손님이 없으면 혼자 거리를 방황했다.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손님이 보자고 하면 그날의 벌금을 물기 위해 손님을 만나 돈을 받았고, 추운 겨울에 차보따리를 대여섯 개씩 들고 30분씩 걸어서 배달을 다녔다.

    “네가 무슨 요조숙녀냐?”

    2차를 나가지 않고 돈을 벌겠다고 하면 “네가 무슨 요조숙녀냐? 무슨 양귀비 뒷다리냐? 너보다 더 예쁘고 잘난 년들도 제 손님 만들겠다고 2차 뛰고 난리인데 넌 뭘 믿고 버티는 거냐”며 모욕을 줬다. 돈이 필요해서 내 발로 들어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곳이 그런 곳인 줄 정말 몰랐고, 내가 받아 쓴 선불 외에 나도 모르게 빚이 자꾸 불어나 아무리 일을 해도 빚이 결코 줄지 않았다. 몸이 아파 하루 쉬면 업주에게 15만원을 바쳐야 하니 몸이 아파도 마음놓고 쉬지 못했다.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집으로 전화하겠다” “당장 돈 만들어 와라” 하고 협박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업주의 소개로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났다. 평소엔 멀쩡해 보이는 어느 가게의 사장이라는 사람도 둘만 있으면 별의별 변태 짓을 서슴지 않았다. 20만원을 벌기 위해, 그래서 빚을 갚기 위해 짐승보다 못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참고 견뎌야 했다. 낮에는 멀쩡하게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하느님, 예수님 찾으면서 밤이면 나를 찾아와 스트레스를 풀었다. 낮과는 너무도 다른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화장실에 가두어놓고 계속 신음소리를 내라고 시키고, 자신은 밖에서 그 신음소리를 들으며 자위를 했다. 때론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는 내 모습을 즐겼다.

    모텔이나 여관으로 차 배달을 가면 티켓을 끊어준다고 1시간만 있다 가라고 하면서 커피에 가래침을 뱉어달라고 한 남자도 있었다. 옷을 벗어라, 다리를 벌려라, 춤을 추라고 하기도 했다. 허리띠를 풀어 겁을 주고 겁탈하듯 관계를 갖는 남자도 있었고, 칼을 머리맡에 두고 겁에 질린 나에게 욕하고 협박하면서 관계를 갖는 남자도 있었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가 나를 보고 흥분된다면서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져달라고 하는가 하면 자신이 사정을 할 때까지 입으로 해달라고 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인간 다트’ ‘인테리어’

    커튼 뒤에 숨어서 ‘까꿍’ 하면 돈을 주겠다고, 관계는 맺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고 해놓고 커튼 뒤에 있으면 귤이나 사과, 그밖에 별의별 이상한 것들을 던지면서 얼굴을 맞히면 5만원, 팔이나 다리를 맞히면 3만원, 배나 가슴을 맞히면 2만원, 이런 식으로 ‘인간 다트’ 놀이를 즐기는 남자도 있었다.

    자신의 성기에 ‘인테리어’(구슬 등으로 성기가 커 보이도록 장식하는 것)를 하고는 내 치마를 강제로 내리고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억센 힘으로 누르면서 관계를 갖는 남자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사장과 친하다면서 자신이 그랬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얼굴을 멀쩡히 들고 다니지는 못할 거라고 협박했다.

    그런 협박이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부모님이 아시게 될까봐, 친구들이 알까봐 입을 다물었다. 강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웠고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집에 계시는 부모님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내가 멀쩡한 직장을 잘 다니는 줄 아는 친구들한테도 떳떳치 못하고, 가족을 속이면서 이런 일을 하는 내 자신이 밉고 수치스러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

    그나마 2차를 나가서 돈을 제대로 주는 손님은 매너가 좋은 거였다. 2차 나가서 할 짓 안 할 짓 다 해놓고 자기 기분이 상했다면서 돈을 줄 수 없다고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고, 돈을 덜 주고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순순히 2차를 가지 않으면 내게 치욕스러운 욕을 해대며 손님들 앞에서 모욕을 줬다. 그런 손님 중에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멀쩡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사람들은 전부 낮에는 가면을 써 시커먼 얼굴을 가리고, 밤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야누스였다.

    ‘나의 유일한 재산은 몸뚱어리’

    ‘레인보우’라는 가명의 이 여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취업해 경리·비서 등으로 일했다. 평범한 사회인으로 지내던 어느 날 집에 불이 나 모든 재산이 일순간 잿더미가 됐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친척집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중 직장 후배로부터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았다. 25세 때다.


    “그냥 손님 옆에 앉아서 술만 따라주면 되는 거야. 그럼 테이블당 7만원씩 챙겨준대, 그것도 선불로.”

    너무나 간단했다. 손님에게 술만 따라주면 돈을 벌 수 있다니 솔깃했다. 먼발치에서만 보던 화려한 네온사인의 룸살롱, 그 시커먼 속내를 알지 못한 채 그 세계로 첫발을 내디뎠다. 낮에는 직장에, 밤에는 업소에 나가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을 무렵, 업주는 내게 선불금(500만원)을 핑계로 성매매를 강요했고, 나는 선불금을 갚기 위해 업주의 말을 따라야 했다. 얼마 못 가 이중생활의 고초를 이겨내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뒀다. 갖가지 수모를 겪으며 내 몸은 점점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3∼4개월 지내다 너무 힘들어서 선불금을 갚고 일을 쉬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친척집에서 사는 게 눈치가 보였다. 집을 마련할 돈을 구하기 위해 아는 사람 소개로 ‘보도’에 갔다. 차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룸살롱에서 전화가 오면 들어가 손님을 상대하는 것이다. 룸에 들어가면, 거기에 소속된 아가씨가 ‘술 작업’(술을 몰래 버리는 것)을 하다 걸려도 모든 화살이 내게로 꽂혔다. 내가 그 룸살롱 소속이었다면 마담이 와서 상황을 모면하게 해줬을 텐데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고, 나는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 반발하면 손님이 술값을 낼 수 없다고 소동을 피우고, 그러면 마담은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매매 여성들의 절규 “우리는 이렇게 당했다”

    ‘존 스쿨’이라 불리는 재범방지교육을 받고 있는 성구매 사범들. 인천여성의전화 측은 성매매를 근절하기 위해선 성구매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술에 취한 손님 옆에 앉아 있으면, 이유 없이 맞는 일도 많다. 이런 일을 마담에게 이야기하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룸 안의 화장실에서 관계를 요구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마담에게 하소연해도 “그냥 한번 찔렀다 빼면 되지” 하면서 “그런 손님들은 아주 큰 물주니까 네가 잘하면 다음에 또 너를 찾을 거야”라며 오히려 관계 맺기를 종용했다.

    청천동 ‘쇼타임’

    선불금을 빨리 갚기 위해선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그러려면 몸뚱이를 화려하게 치장해야 했고, 그럴수록 빚은 더 늘어갔다. 큰돈이 필요했던 나는 결국 스물여섯 살에 청천동의 ‘방석집’으로 향했다. 청천동에서는 당시 최고 2000만∼3000만원까지 선불금을 줬다. 내 몸뚱이가 담보였다. 그리고 보증인 한 명이 필요했는데, 알고 지내던 동생과 내가 서로 맞보증을 섰다.

    청천동은 무조건 ‘쇼타임’을 해야 했다. 손님이 오면 30∼40분 안에 테이블을 끝내야 하는데, 비키니를 입고 서 있으면 손님들이 ‘초이스’를 해갔다. 인사를 하면서 옷을 홀딱 벗고, 술 먹고 야한 춤을 추면 손님도 함께 벗었다. 그 자체가 변태였던 것 같다. 손님들끼리 서로 관계 맺는 걸 쳐다보며 즐겼고, 삼촌과 조카, 매형과 처남이 함께 오거나 다음날 결혼식을 하는 예비 신랑이 오는 때도 많았다. 어떤 손님은 처제랑 관계를 맺고 싶었다면서 나더러 처제 (역할을) 좀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쇼를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쇼의 종류는 다양했다. ‘야쿠르트쇼’(여성의 질 안에 젤을 묻힌 다음, 입구가 밖을 향하도록 야쿠르트 병을 질 안에 넣는다. 야쿠르트 병 입구에 빨대를 꽂아 남자 손님이 그것을 빨아먹는다.) ‘바나나쇼’(물티슈로 감은 칼 손잡이를 여성의 질 안에 넣는다. 테이블에 누운 손님의 배 위에 도마를 깔고 바나나를 올려놓은 다음 여성이 그 칼로 바나나를 썬다.) ‘촛불쇼’(맥주로 온몸을 샤워하고 난 다음 불을 끄고 촛불을 휘두르며 촛농을 몸 위에 뿌린다.) ‘병따개쇼’(병따개를 여성의 질 안에 넣고 맥주 병마개를 따는 것) ‘달걀쇼’(여성의 질 안에 달걀 넣었다 빼기)….

    그뿐 아니라 하루 수차례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충격적인 건 생리 중에도 솜으로 틀어막고 관계를 맺도록 강요당한 것이다. 너무나도 아팠고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로 내 삶이 싫어졌다. 하지만 선불금에 발이 묶여,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2003년 겨울, 내 나이 스물여덟.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아는 동생과 함께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삼촌’(직업소개소 직원)으로부터 ‘해외 원정’ 얘기를 들었다. 도피 중이라 ‘해외’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출국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함께 있던 동생의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의 누나가 일본에서 바를 운영하고 있는데 급하게 한국 아가씨가 필요하다면서. 성매매 행위가 전혀 없고,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게 학교도 보내준다고 했다. 우린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간사이공항에 도착한 우린 기대 반 근심 반으로 마중 나온 ‘언니’와 함께 차를 타고 고베란 도시로 향했다. 도시가 아기자기하고 깨끗했다. 제2의 삶을 꿈꾸며 가슴이 벅찼다.

    일본 ‘해외원정’의 함정

    첫 출근한 곳은 작고 아담한 가게였다. 그런데 노래방 기계가 있었다. 알고 보니 가라오케 형식의 술집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가게를 ‘스나크’라 부른다고 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쳤다.

    하루, 이틀, 1주일, 2주일, 3주가 지나도록 학교 얘기는 차일피일 미루고, 날로 억압과 횡포가 심해졌다. 처음엔 언니도 그랬다. 부담 없이 손님 옆에 앉아 편하게 접대하면 된다고. 하지만 ‘도항’이라는 것을 들먹이며 손님과 낮에 약속을 잡아 데이트하라고 하고, 저녁에 가게에 함께 출근할 것을 종용했다. 이 먼 곳까지 도망쳐 와서 다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니 너무 억울하고 치욕스러웠다. 결국 한 달이 되어갈 무렵 짐을 쌌다. 언니는 숙식비에 브로커 수수료, 항공료, 여권 발급 비, 병원비 등을 세세히 따지며 500만원을 내놓고 가라고 했다. 돈이 없어 차용증을 써주고 어렵게 비행기를 탔다.

    일본에 돈을 부치기 위해 다시 ‘선불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안산의 한 유흥업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성매매특별법이 발효됐고, 경찰의 단속이 시작되자 2차를 갈 땐 손님과 따로 나가 모처에서 만났다. 일본 원정에 소요된 경비를 다 갚고 난 다음 성매매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사랑’이라는 가명의 이 여성은 방송국 분장사를 꿈꾸며 분장학원에 다녔지만 ‘고졸’ 학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친한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장안동 카페도 접고 쉬다가 우연찮게 상계동의 룸살롱 마담으로 취업해 지난 10년을 유흥업소에서 보냈다.


    1996∼98년에는 심야영업 제한시간으로 인해 자정까지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을 닫은 채 불법으로 장사를 계속했고, 아가씨들 중엔 미성년자도 꽤 있었다. 업주들은 미성년자를 선호했다. 나이 먹은 아가씨보다 ‘영계’가 더 좋다고 했다.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미성년자를 특별대우하기까지 했다. 고등학생도 있었는데, 밤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서 재운 뒤 아침에 학교에 보냈다. 처음엔 몇 번 집에 돌려보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와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사장에게 받는 월급 외에 아가씨들로부터 수입의 10%를 받았다. 20대 중반이 무엇을 해서도 갖기 어려운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월 평균 800만∼900만원. 물론 그중 절반은 아가씨 관리비로 나갔다.

    그러다 업주를 잘못 만나 문제가 생겼다. 아가씨들에게 2차비와 티켓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내가 사장 대신 돈을 줬는데, 그러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난 ‘돈 떼어먹는 마담’이 되어버렸다. 급기야 사장이 내 3개월치 월급마저 떼어먹고 도주해버렸다. 20명이 넘는 아가씨를 두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다.

    법 아닌 법, ‘성구매자 사인증’

    2000년, 계속 놀고 있을 수가 없어 다시 마담 일을 하기 위해 안산으로 갔다. 안산은 정말 ‘성매매의 천국’이었다. 2차 행각이 서울과 비교도 안 되게 유별났다. 안산도 ‘지방’이라는 인식 때문에 빚이 많은 아가씨들이 몰려 있었다. 아가씨들의 선불금은 보통 2000만∼3000만원이었다. 선불금이 많다는 이유로 아파도 쉬지 못하고, 매일 2차를 2∼3번은 나가야 했다. 그런데 술 마시고 노래하고 2차까지 다녀오려면 적어도 3∼4시간이 걸렸다. 한 손님방에서 일이 끝나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손님 테이블에 가서 술 마시고 2차 나가고, 끝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