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회장은 드라이버로 GTAC를 쓴다. 아이언은 Beres, 하이브리드는 Kasco 3.5. 이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클럽은 Beres 아이언 7번. 퍼터 끝에는 공을 쉽게 집을 수 있도록 만든 ‘컬렉팅 툴’이 달려 있어 퍼트한 다음 공을 멋지게 집어올리곤 했다.
‘영어학원 하루 세 번 다니며 공부’
그의 삶은 곧 노력의 삶이었다. 충북 옥천에서 7남매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4형제 중 3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그는 서울대 법대(65학번)를 졸업했지만 사법고시에 연거푸 낙방한 뒤 방황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서울대 법대 65학번은 대법관 5명,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KDB회장,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 고 조영래 인권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생들을 배출했다. 그는 고시를 포기하고 1972년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반 행원으로 몇 년을 보내던 어느 날 한 신문광고를 보고 한국종합금융에 원서를 냈다. 영국 라자드브라더스그룹이 설립한 투자은행이었다.
“법학, 경제학 등 필기시험은 잘 쳤는데도 영어면접 점수가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저를 좋게 본 한 면접관이 1년 뒤 영어 실력을 일정 수준으로 쌓을 수 있다면 뽑겠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지요.”
입사 뒤 그는 출근 전, 점심시간, 저녁 시간 등 하루 세 번 영어학원을 다녔다. 그런 노력 끝에 1년 만에 말문이 트이고, 영어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게 IB 경력을 쌓아가던 중 1993년 영국계 투자은행인 베어링증권에 스카우트된 것이다.
윤 회장은 IB에서 일하면서 고객 관리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하게 됐다. 구력이 30년이 넘는다. 그러나 일의 연장선으로 여길 뿐 골프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다 골프의 참맛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근래에 와서다.
“2008년 ABN암로증권에서 일하다 맥쿼리로 옮기기 전 3개월간 ‘재취업 유보 휴가(Gardening Leave)’를 받았어요. 월급을 받으며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골프 교습을 다시 받았고, 열심히 노력하자 나름대로 안정적인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파5, 10번홀. 윤 회장의 세컨드 샷이 약간 빗맞으면서 공이 많이 굴러가 그린 110야드 앞에 멈췄다. 10번 아이언을 든 그가 깃대를 바라보다 리드미컬하게 스윙하자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갔다. 순간 공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서 보니 공이 깃대 10cm 가까이에 바싹 붙었다. 이글이나 다름없는 버디였다.
“공을 칠 때 기분이 굉장히 가볍고 좋았어요.”
‘명사와 골핑’란에 나와 달라는 요청에 그는 자신이 “홀인원도, 이글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며 망설였다. 그러나 막상 라운드를 같이하면서 보니 그는 언제든 ‘사고’를 칠 수 있는 골퍼였다.

윤 회장의 스윙은 힘의 낭비가 없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깔끔하다.
성공한 윤 회장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삶 외엔 별 관심사가 없던 2003년의 일이다.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엄청난 연봉액수를 제시하며 영입을 제의해온 날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내는 수화기 저편에서 울고 있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국내 병원에선 희망이 없다더군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1년 만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부인과 사별한 뒤 그는 엄청난 고립감에 시달렸다. 그해 그는 어머니를 여의고, 큰딸을 시집보냈으며, 둘째와 셋째를 외국에 유학 보냈다.
“그때 혼자 사는 공허감을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말도 못하게 울었지요, 하하. 그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진 인간은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한두 가지씩 어려움을 갖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현명한 인간 아닌가 생각해요.”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도 ‘전투적으로’ 썼다. 몇 번의 낙선 끝에 그는 황금찬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 아내를 잃은 뒤 그 절망감을 승화시킨 ‘어둠 속에 눈을 뜬들 무엇이 보이랴’제하의 시집도 출간했다. 지금은 모 여대 음대 교수와 재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날 차가운 날씨에도 선전해 81타 싱글을 기록한 윤 회장은 오랜만에 성적이 좋다며 매우 즐거워했다.

IB업계에선 거래를 성사시킬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기념 조각을 만드는데, 그것을 ‘툼스톤’(tombstone·묘비명)이라 한다. 그의 사무실에는 이 툼스톤이 150여 개나 진열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