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버 샷이 페어웨이 가운데를 향해 쭉 뻗어나가다 갑자기 슬라이스가 나면서 OB(아웃 오브 바운드)가 될 때, 공이 겨우 그린에 안착했는가 싶었는데 서너 차례 퍼팅으로 트리플 보기를 기록할 때 당신은 캐디나 동반 플레이어를 원망하는가, 아니면 자책하는가. 그 상황에서 남을 원망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의 얕은 골프 철학을 의심할 것이다. 자신을 원망해서 그날 남은 플레이를 즐기지 못한다면? 그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어디 골프뿐이랴. 삶에서도 위기에 빠지면 자신보다는 남과 사회를 향해 불만을 표출하기 십상이다. 우기정한국골프장경영협회 회장(67)은 골프뿐 아니라 인생에서 위기를 맞이했을 때 꼭 기억해야 할말이 바로 “남을 원망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견실한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우 회장은 1998년 IMF 경제위기 때 거래하던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부도를 맞았다. 그 은행에서 발행한 어음을 사들였던 시중 은행들이 그의 회사에 한꺼번에 지급 요청을 하는 바람에 갑자기 부도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원망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 회장은 자신이 소유한 대구칸트리클럽(CC)의 백병석 전 운영위원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혹시 재정적 도움이라도 주려나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백 씨는 그 자리에서 “달리 도와줄 여력은 없지만 경험상 한 가지 말을 들려주고 싶다”며 “남을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백 씨 역시 회사의 부도를 겪고 마음고생을 했지만 원망하기를 멈추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 회장은 그 말에 마음을 열고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사업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원망하는 것을 그치니 우선 제 마음이 편해졌어요. 위기에서 벗어날 때 골프 정신도 큰 도움이 됐지요. 골프는 어느 홀에서 트리플 보기를 해도 다음 홀에선 버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래서 스포츠에는 늘 꿈과 희망이 있어요.”
▲우기정 회장은 골프 구력이 47년째이지만 골프 약속이 잡히면 지금도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詩와 가곡이 흐르는 골프장
9월 8일 경북 경산시 진량읍 대구CC에서 우 회장과 골프 라운드를 같이 했다. 티오프 시각은 오전 11시 28분. 새벽까지 내리던 폭우가 그친 뒤여서일까. 공기가 상쾌할 정도로 깨끗했고, 새소리도 요란했다. 푸르디푸른 잔디가 양탄자처럼 푹신하게 깔린 홀을 소나무 대나무 히말라야시다 백일홍 등 다양한 나무가 에워싸고 있었다.
동코스 1번홀(파4)은 유난히 페어웨이가 넓어 편안한 기분을 갖게 한다. 알고 보니 이틀 전인 9월 6일 이곳에서 시민을 위한 ‘가곡의 밤’이 열렸다. 1번홀의 카트 도로 쪽에 무대를 설치하고 페어웨이와 OB 말뚝이 있는 언덕 쪽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이날 박범철 가곡교실 회원 300여 명과 대구 시민, 지역 주민 등 1500여 명이 참석해 시와 음악이 흐르는 아름다운 가을 저녁을 만끽했다. 대구CC 측은 이들을 위해 호텔식 뷔페 저녁을 준비했다. 매년 수천만 원의 자비를 들여 9년째 이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는 우 회장은 공연 막바지에 무대에 올라 소프라노 강혜정과 함께 직접 ‘천년의 그리움’을 불러 박수를 받기도 했다.
“제가 워낙 가곡 부르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골프장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들어 지역 주민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가곡의 밤’을 준비하느라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힘들었고, 한동안 골프 라운드도 하지 못했지만 정말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우 회장은 1968년 제2회 아마추어골프대회 우승 경력의 고수다. 부친이 뉴코리아CC를 건설할 때 그는 대학생이었는데 골프 코스에 같이 세운 연습장에서 재미삼아 친 게 골프와의 인연이 됐다.
▲우기정 회장은 골프 라운드 내내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다.
최고 기록은 66타. 홀인원을 2회 기록했고 지금도 70 후반을 친다. 국내에서 골프 구력 47년에 골프장 경영 40년이란 기록은 우 회장밖에 없다고 한다.
“요즘 전 스코어에 별로 집착하지 않아요. 행복이라는 게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요? 좋은 기록이 나오면 기분이 좋긴 하지만 성적에 연연하지 않으면 그만큼 여유가 생깁니다. 스코어보다는 내가 생각한 대로 공이 잘 맞았을 때 드는 쾌감을 즐기려고 합니다.”
5번홀 파3, 130m. 바람이 일정하지 않다. 앞바람인 줄 알았는데 잔디를 날려보니 뒤바람이다. 우 회장은 9번 아이언을 들고 스윙을 했다. 백스윙 때 우 회장의 습관이 독특했다. 왼쪽 팔이 꺾이지만 적절한 속도의 백스윙으로 모든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내뿜는 자세였다. 공은 아쉽게도 그린 에지에 떨어졌다. 그러나 칩샷이 일품이었다. ‘나이스 파.’ 퍼팅할 때 그는 왼발을 오픈시켰다. 설렁설렁 치는 골프 같지만 탄탄한 기본기가 느껴진다.
“그런 퍼팅 자세는 가족력인 것 같아요(웃음). 아버지(송암 우제봉 명예회장·작고)도 저와 같은 자세로 퍼팅을 했어요. 제 아들들도 자세가 비슷합니다. 우리 가족의 신체적 심리적 특성상 그 자세가 편안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그는 가끔 세 아들과도 라운드를 한다. 그가 아들에게 강조하는 골프 금언은 ‘네버 업, 네버 인(never up, never in)’이다. 볼이 홀컵을 지나갈 정도로 퍼팅하지 않으면 홀컵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무모한 시도는 트리플 퍼팅으로 이어진다는 충고와 함께.
1972년 개장한 대구CC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정규홀 골프장이다. 동(東)·중(中)·서(西) 3개 코스 27홀로 이뤄져 있고, 경부고속도로 경산IC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페어웨이의 높낮이가 다채롭고 코스가 긴 편이다. 특히 동코스는 우 회장이 직접 설계한 곳이다. 중국 다롄CC도 그가 설계했다. 골퍼가 라운드에서 갖고 있는 모든 클럽을 다 사용할 수 있도록 홀들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대구CC에서는 1994년부터 송암배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다.
▲“나이가 드니 힘을 주면 힘을 못 빼고, 힘을 빼면 (임팩트를 가하지 못해) 힘이 없어요. 골프 감각이 생기다가도 다른 일에 전념하면 금세 사라져요, 하하.”
“스페셜 올림픽 봉사, 내 인생 최고의 선택”
대구가 고향인 우 회장은 서울 동성중고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30대 초부터 골프장 경영에 나섰고, 한국라이온스연합회 회장,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골프장경영협회 회장, 송암골프장학재단 이사장, 대구CC 회장 등을 맡고 있다. 2007년 골프 발전과 지적발달장애인에 대한 차별 해소 등의 공로로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우 회장과 스페셜올림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순 없다. 스페셜올림픽은 지적장애인을 위한 올림픽인데 나가노 스페셜올림픽 때 감명을 받고 그가 매진하는 일의 하나가 됐다. 그는 내년 1월 29일부터 강원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 스페셜올림픽을 유치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골프 대회도 조직해 자신의 골프장에서 3년째 무료로 개최하고 있다. 우 회장은 “장애는 있지만 마음이 너무나 순수한 이들을 위한 일이다. 스페셜올림픽과 관련한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 회장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2004년부터 아내와 함께 가곡을 배우기 시작했고, 2010년 65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골프장경영협회 회장으로서 그는 요즘 논의되는 골프장 개별소비세 감면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요즘 중국 사람들이 한국 상품뿐 아니라 한국 골프장도 높이 칩니다. 개별소비세가 감면되면 그만큼 그린피가 싸지고 중국 관광객도 많이 올 겁니다. 그러면 골프장도 직원을 늘려야 하고, 수익도 늘어날 겁니다. 여러 가지 이득이 생기는 거지요. 왜 그런 전향적 생각을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백스윙 때 왼쪽 팔이 꺾이지만 적절한 속도의 회전으로 모든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내뿜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