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7일, 홍진주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에 잠식당한 골프계와 스폰서 기업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미녀골퍼’의 돌출 발언이라 파문이 작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 후 홍진주는 페이스북을 폐쇄하고 이와 관련한 언급 자체를 피했다.
사실 홍진주 자신도 ‘외모 지상주의’의 최대 수혜자 중 한 사람이다. KLPGA와 미국 LPGA 투어에서 각각 1승씩 2승을 올린 2006년 말, SK(주)와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계약조건은 ‘3년간 연 3억 원’이었는데, 당시 ‘시장가’의 2배에 달했다. 미모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게 중론이었다. 23세이던 그때부터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까지 5년 사이,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홍진주는 미국 LPGA에서 활동하다 국내에 복귀한 2010년 결혼했다. 꾸준하던 성적이 2011년 들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28세. 국내 선수 중에선 고참급 나이가 돼버렸다. 그의 감정이 폭발한 것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어느 기업과 2년 계약기간이 끝나고 재계약할 시점이었어요. 처음에는 재계약하는 걸로 이야기가 다 됐어요. 그런데 막판에 가서 좀 어린 선수와 계약하겠다고 통보가 온 거예요. 제가 나이도 있고, 결혼도 했다는 이유였죠. 말이 안 되잖아요. 다른 곳에 프로필을 넣어도 반응이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확 터진 거죠. 제가 좀 욱하는 성격이 있거든요.”
스폰서는 ‘자존심’
▼ 지금도 스폰서들의 행태는 비슷하지 않나요.
“그렇죠. 어린 선수들만 지원하려 하고…. 우리 선수들이 나이 좀 들면 쉽게 그만두는 게 이 때문이에요. 액수가 크지 않아도 스폰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많아요. 선수의 자존심 같은 거죠. 대회에 나가서 다른 선수들 모자엔 스폰서 로고가 붙어 있는데, 자기 모자엔 아무것도 없으면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괜히 작아지는 것 같고….”
▼ 그때 파문이 컸는데.
“기업들이 후원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 홍보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같은 값이면 나이 어린 선수들이 좋겠죠. 나이 들면서 이해가 좀 되더라고요.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인데 제가 못 참았던 거죠.”
지난해 1월 아이를 낳고 올해 KLPGA 투어에 복귀한 그는 이제 만 32세다. 국내 투어 현역 선수 중 ‘넘버 2’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두 살 위인 김수아가 유일하다. 프로 데뷔 13년차의 연륜에다 지금은 소속사(대방건설)도 있고, 스폰서도 있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시작 때부터 여유가 느껴졌다.
▼ 출산하고 투어 복귀하니 어때요.
“쉴 때는 뒤처지는 느낌이어서 걱정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러다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니 골프가 예전보다 훨씬 좋고 재밌어요. 과거엔 경기하고 이동하고 매일 똑같은 패턴으로 사는 게 정말 싫었는데 지금은 이것도 즐거워요. 공백기가 1년 반쯤 있었는데, 골프를 시작한 뒤로 이렇게 오래 쉬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새로운 마음가짐도 생기고, 성적이 잘 안 나와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아요.”
▼ 20대 시절보다 여유가 많이 생긴 것 같네요.
“아이 덕분 아닐까요. 여자가 엄마가 되면 성격이 좀 바뀌잖아요. 우승도 해봤고, 투어도 미국 일본 다 뛰어봤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고… ‘할 것 다 했다’는 생각에 여유로워진 게 아닌가 싶어요. 만약 제가 지금처럼 성적이 안 나오는데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고 있었다면 짜증을 엄청 부렸을 거예요.”
“얼라인먼트가 무너졌어요”
요즘 홍진주의 경기 성적은 저조하다. 6월 초까지 KLPGA 투어 7경기에 출전해 2경기를 뺀 나머지 5경기에서 모두 컷오프로 탈락했다. 상금 순위 73위로, 내년 출전권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KLPGA는 경기 출전 선수가 늘면서 상금 순위 50위까지 주던 출전권을 내년부터는 60위까지로 늘렸다. 그래도 지금 순위라면 출전권을 잃을 수밖에 없다. 원인이 뭘까.
“예선에서 거의 한두 타 차이로 많이 떨어졌어요. 연습량도 좀 부족한 것 같고, 오래전부터 허리에 통증이 조금 있는데 다칠까봐 스윙도 신경 쓰이고…. 잘 안 되는 샷은 없어요. 그런데도 스코어가 안나오니까 조금 스트레스를 받죠.”
▼ 연습량이 부족한 건 아이 때문?
“그렇죠. 젊은 미혼 선수들처럼 연습에만 집중할 수 없잖아요. 집에 도와주시는 분이 있지만 아이도 봐야 하고, 집안일도 신경 써야 하고. 요즘 확실히 느끼는 게, 연습은 정말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 다른 문제는 없나요.
“얼라인먼트(alignment · 정렬)가 좀 안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무너졌어요. 샷은 잘 되는데, 자꾸 잘못된 방향으로 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가장 기본적인 게 제일 힘들어요. 제가 좀 기분파라서, 고비를 못 넘기면 의기소침해지는 면이 있거든요. 지금이 딱 고비인 거 같아요. 이 고비만 넘기면 남은 경기는 편안하게 갈 수 있을 듯해요. 그래서 지금 연습을 많이 하고 있어요.”
홍진주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골프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어머니한테 놀러갔다가 접하게 됐다. 학기 중에는 한국에서 아빠와 살다가 방학 때면 한 달 정도 일본에서 어머니와 지내면서 취미 삼아 골프를 배웠다. 어릴 적부터 키가 컸다.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이번엔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골프를 해보라고 적극 권했다.
“뭔가 가능성이 보였나 봐요. 그래서 중학교 때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까지 하면서 골프 유학을 간 거죠. 그때 박세리 언니도 대전에 있었고, 골프 유망주들이 대전에 많았어요. 중학교는 골프부가 없는 곳에 들어가서 학과 수업과 골프 연습을 병행하느라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어요. 예선 통과 한 번 못했죠. 골프로 유명한 유성여고에 들어가면서 실력이 확 는 것 같아요. 혼자 연습하다가 여럿이 같이 하니까 재미도 있고 동기부여도 되고. 고1 때는 잠시 골프를 관두겠다고 아버지랑 싸우고 가출도 하면서 방황했는데,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하면서 고2, 고3 때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죠.”
“미친 운동 같아요”
▼ 그때 성적은 어느 정도?
“단체전 우승은 많이 했는데, 개인전 우승은 못하고 준우승과 3위를 왔다 갔다 했어요.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힐 정도는 됐죠.”
대학에 다니면서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뛰던 2년이 그에겐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다.
“겨울마다 같이 합숙하고, 대회 나가면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고, 술도 마시고…. 마침 2002년 월드컵 때라 시합이 끝나면 맥주 들고 함께 축구 보면서 응원하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그때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지금은 거의 다 은퇴하고 없죠.”
국가대표 상비군을 마치고 2003년 프로에 입문한 홍진주는 2006년까지 3년간 국내 무대를 거쳐 2007~2009년 미국 LPGA 투어, 2012년 일본 JLPGA 투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제 다음 목표는 중국 투어다.
“미국 투어는 축제 분위기예요. 반면 일본 투어는 아주 조용하죠. 제 성향에는 일본보다는 미국이 좀 낫긴 한데, 미국보단 한국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사람들과 어울려 수다 떨면서 노는 걸 좋아하거든요. 마지막으로 내년쯤 중국 투어에 한번 도전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지금은 대회와 상금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언젠가는 커지지 않겠어요.”
▼ 언제까지 현역으로 뛰고 싶습니까.
“시드권(출전권)을 유지할 때까지 계속 뛰고 싶어요. 남편이 ‘우승 못해도 괜찮아,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하더군요. 버틸 때까지는 버텨보려고요.”
▼ 2부, 3부 투어라도?
“아뇨, 거기까지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 골프란 어떤 운동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음, 미친 운동 같아요, 하하. 어떤 날은 잘 맞다가 또 어떤 날은 잘 안 맞고, 기복이 심하잖아요. 공 하나에 울고 웃고…. 아무래도 정상적인 운동 같지는 않아요.”
▼ 그런데 사람들은 왜 골프에 열광할까요.
“조금만 하면 잘 맞을 것 같은데 맘대로 안 되고, 그러니까 오기가 생기는 거죠. 잘 맞을 때는 너무 재밌잖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공이 굴러가서 홀 컵에 빨려들어가면 정말 짜릿하거든요. 그걸 또 한 번 경험하려고 계속하게 되는 거죠. 뭐랄까, 연애랑 좀 비슷하지 않아요? 좋을 때는 죽을 듯이 좋다가 한번 싫으면 꼴도 보기 싫고…. 골프가 꼭 그렇거든요.”
‘그놈이 그놈’
▼ 자신에게 골프는 어떤 존재인가요.
“옛날에는 제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직업? 물론 골프를 사랑하긴 하지만, 평생 투어만 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 그만둘 때까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증 관계인가? 맞아, 그렇겠네요. 미워도 놓을 순 없잖아요, 지금은. 언젠가는 놔줘야겠지만.”
▼ 그게 언제쯤일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얼마 전 선배들하고 얘기하면서 시니어 투어에서도 만나기로 했거든요. 시니어가 만 43세부터든가? 한 10년쯤 남았네요.”
▼ 어떤 골프 선수로 남고 싶나요.
“운동하는 사람 처지에서야 우승도 많이 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좋죠. 하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선배로 남고 싶어요. ‘그 언니, 진짜 사람 괜찮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선배랍시고 후배들에게 무섭게 한다고 걔네들이 정말 무서워하진 않잖아요. 속으론 욕하지. 그래서 요즘 많이 착해졌어요. 욕은 안 먹고 다녀요, 하하.”
▼ 골프 선수 중에 인생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가 있습니까.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저 자신이 행복하고 보기 좋아요. 골퍼로서의 삶도 있지만, 저는 여자로서의 삶도 살고 있거든요.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후배들도 저처럼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후배가 저를 롤 모델로 삼을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이라는 게 정말 쉬운 게 아니거든요. 후배들이 어릴 때부터 큰돈을 벌다보니 눈만 높아져서 결혼하기 더 힘들거든요. 가끔 친한 후배들에게 ‘그놈이 그놈이다’라고 말해줘요. 서로 사랑하는 건 당연하고, 내 일을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남자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 골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한마디 조언한다면.
“요즘 후배들을 보면 실력은 좋은데 인성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너무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기밖에 몰라요. 그렇게 키운 부모들 탓도 커요. 골프를 하다보면 나이 많은 어른들을 대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분들이 불평을 많이 해요. 성적만큼 인성도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어요.”
▼ 요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은데, 올해 목표는?
“시드권(출전권) 유지하는 거죠. 물론 우승하면 좋겠죠. 그런데 우승은 실력보다는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 같아요. 열심히 연습하고 매 대회 최선을 다하면서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또 기회가 오겠죠. 쉽지는 않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