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

귀신 지갑도 여는 말솜씨로 중국 경제 삼키다

  • 글: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법학 khb@khu.ac.kr

    입력2004-06-01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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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브스’가 발표한 2003년 중국 최고의 갑부는 딩레이(丁磊ㆍ1972년생, 포털사이트 ‘왕이(網易)’의 설립자로 개인 재산 약 1조3000억원)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상인 서열 1위인 저장성, 그중에서도 닝보(寧波) 출신이다. 중국 100대 부자 중 저장성 출신이 18명으로 광둥성을 제치고 5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저장성 중에서도 닝보 출신은 딩레이를 비롯, 6명이나 된다. 고려시대 때 닝보항은 벽란도와 자웅을 겨루던 세계적인 항구였으며 닝보상인은 옛날 우리나라 개성상인과 비견되는 중국 최고의 상인이다. 중국의 27개 성과 자치구 중 저장성은 인구와 면적, 평야와 산악의 비율, 섬의 수 등 여러 면에서 한국과 가장 비슷하고 중국 투자적지로 날이 갈수록 각광을 받고 있으나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상인의 꽃 저장상인과 꽃 중의 꽃이라 불리는 닝보상인, ‘중국의 유대인’ 윈저우상인을 2회에 걸쳐 집중 소개한다(편집자).]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라 할 만큼 수려한 항저우의 명승지 서호(西湖).

    청나라 건륭황제가 저장(浙江)지방을 순유하고 있었다. 황제는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에는 수백 척의 범선이 돛을 달고 남북으로 왕래하고 있었다. 황제가 저장의 순무(巡撫)에게 물었다.“저 수백 척의 범선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고?”순무가 대답했다.“제 눈에는 한 척만 보입니다.”“어째서 그런가?”“폐하, 실재는 한 척뿐입니다. ‘이익’이라는 이름의 배 한 척입니다.”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중국의 성은 산둥성. 하지만 가장 닮은 성은 저장성이다. 약 10만㎢의 면적과 4500만 인구, 산악과 평야의 7대3 구성, 바다에 2000여개의 섬이 있는 것이 그렇다. 저장성은 장쑤성 광둥성과 더불어 중국에서 제일 잘사는 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뭐니뭐니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상인 서열 1위인 저장상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창조와 해방, 개혁과 개방, 실사구시 등의 상업정신을 가진 저장상인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행동이 민첩하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도 겸비한 사람들로, 그야말로 경영에 능수능란하다. 눈썰미가 좋아 돈 될 만한 장삿거리를 잘 찾아내고, 일단 기회를 잡으면 기막힌 상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중국 전역에 정평이 나 있다. 지금도 저장상인의 고급 인맥, 높은 저축률과 풍부한 자금동원력은 저장성 경제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용감한 자는 바다로 간다. 무역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지혜는 용기와 결합해야 빛이 난다. 바다는 순박한 농부에겐 말할 것도 없고 노련한 어부에게도 변화무쌍하고 간교하며 이상야릇하다. 바다에서 상인은 술수와 눈치와 재치를 배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자신의 역량도 무한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다는 상인에게 열린 ‘물의 땅’이며 포위당해 닫힌 육지를 초탈하려는 용기를 촉발케도 한다. 비옥한 논밭과 평원은 인간을 토지에 속박시키지만 드넓고 변화무쌍한 바다는 인류로 하여금 이윤을 추구하게 하고 상업에 종사하게 선동한다. 바다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 상업을 낳아 기르는 것 같다. 바다는 유동한다. 그 유동의 씨앗을 바다에 주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업의 발전이다.



    저장사람 치고 거지 없다

    범려와 서시의 후예인 저장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독특한 학술문화를 만들어왔다. 황종희나 루쉰 등 매우 창조적인 학자와 사상가도 이곳 출신이다. 저장성은 또한 인구유동과 각종 문화의 교류로 발전을 이룩해왔다. 지역문화 중원문화 서방문화가 이곳에 혼거하며 병존해왔다. 오늘날의 활달한 저장문화는 이러한 요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저장사람은 결코 수구적이지 않다. 오히려 항상 넓은 가슴과 근면한 창조로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저장사람은 이론적으로 실리와 실효를 추구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라도 결코 헛된 설교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과 거래를 할 예정이라면 무엇보다 그들의 이러한 상업인문 전통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저장성은 예부터 “쌀밥에 생선국 먹는 곳(魚米之鄕)”이라 불렸을 만큼 살기 좋은 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저장은 중국의 다른 성에 비해 토지는 좁고 인구는 많은 편이다. 주요산업은 농업이며, 자연자원은 부족한 편인데다가 공업기초가 부실했다.

    개혁개방 이전인 1978년만 해도 저장성의 1인당 평균주민소득은 410위안으로 전국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2년에는 27개 성(자치구 포함) 중 전국 1위에 올랐다. 무엇이 이처럼 저장성을 급성장시킨 것일까. 광둥이나 푸젠처럼 경제특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앙의 개혁개방정책에 의해 특별대우를 받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토록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한 장의 백지 위에는 가장 새롭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말은 아마 개혁개방 초기 저장경제의 발전을 나타내는 말로 아주 적합할 것 같다. 그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저장의 대형 국영기업의 비중은 크지 않았으며 계획경제의 통제력도 약한 편이었다.

    바로 이 점이 저장사람들로 하여금 경직된 고정관념으로부터 쉽게 벗어나도록 했다. 계획경제체제하의 ‘기다리고 기대고 요구하기’만 하는 의뢰심을 벗어던지고 시장경제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확립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고 싶었던 저장상인은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오자 시장의 큰 바다로 뛰어들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선봉대가 됐다.

    그들은 자금도 없고, 시장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노력만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빈곤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고생이나 더럽고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원의 허난 상인들과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과 식구를 먹여 살린다. 예부터 천시되어오던 시계수리공, 구두닦이, 두부장수, 열쇠장사, 봉제공, 솜을 타는 직종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한다. 그래서 저장사람 치고 거지가 없다.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

    닝보 시가지. 잘 정리된 주택가와 고층빌딩이 조화를 이룬다.

    1980년대 중반, 타이저우(台州)지역 한 군데만 자그마치 10만여명의 ‘두부군단’이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처에서 활약했다. 저장성 200만여명의 건설노무자가 전국 각처로 돈 벌러 나갔다. 또한 수많은 저장상인은 바다를 건너 세계 각지로 진출했다. 북두성이 방향을 틀면, 뭇별들이 자리를 옮기듯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구두수선공이나 두부장수들은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한푼 두푼 모았으며 그 과정에서 시장경제의 기본법칙을 배우게 됐다. 그들은 자본이 어느 정도 모이면 대부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창업했다. 아주 적은 수이지만 귀향한 자들도 물론 고향에서 창업을 했다. 타향에서 뿌리를 박고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했다. 저장 출신의 노무자들 중에서 유수한 기업체 사장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용감히 돌진하고, 뒤에 있는 사람이 바짝 뒤쫓아가는 게 저장상인 특유의 기질이다. 어디에 돈되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는 꼭 저장상인들이 있다. 저장상인이 활약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활기 넘치는 전문상가가 있다. 현재 저장사람 가운데 외지에서 상업을 하는 사람은 통틀어 300만명이 넘는다.

    저장상인은 이윤이 한 푼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장사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 방법으로 안되면 발상을 바꾸어 저 방법으로 새로운 돈벌이 길을 개척한다. 한 지방이나 어느 업종이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될 때는 새로운 희망의 땅을 찾아 나선다.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저장상인들의 중서부지방 투자는 900여억위안이고 기업은 7만여개다. 영특한 저장상인은 중서부와 저장에서 ‘전승’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저장상인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세관원이 입국심사대에서 저장 출신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 유리병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미사용 성수인데요, 프랑스에서 어느 천주교회당 신부가 담아준 것이오.”

    세관원이 뚜껑을 열었더니 코냑의 향기가 진동했다.

    “할머니, 이걸 어떻게 변명하시렵니까?”

    세관원이 따지자 저장할머니는 이렇게 외쳤다.

    “아, 만능의 천주시여! 이것은 정말로 기적이올시다.”

    저장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사람소리를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소리를 한다”고 한다. 그만큼 저장사람의 임기응변이 천하무적이라는 뜻이다. 사실 사람을 만나 귀신소리를 내고, 귀신을 만나 사람소리를 내면 좋을 리 없을 것 같다.

    저장성은 북쪽 산둥성과 남쪽 광둥성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그래서인가? 저장상인은 정직과 신용을 모토로 삼는 우직한 산둥상인과 돈을 신으로 섬기는 악착같고 약삭 빠른 광둥상인의 장점만 갖고 있는 것 같다.

    저장사람의 수완에 대해 중국무역촉진회(우리의 KOTRA에 해당) 부회장을 역임했던 팔순의 리우핑린(劉平林)은 이렇게 회고한다.

    “저장사람들은 정말 타고난 장사꾼이야. 장사 하나는 진짜 끝내주죠. 유대인들도 그 앞에서는 기를 못 펴. 세계 오대양 육대주를 수십 년 떠돌아다닌 중국사람 중 나만큼 본 것 많고 접촉한 것 많은 사람은 없어. 내 말 절대 틀리지 않아.”

    저장상인들은 몇 년 전 베이징 교외에 ‘저장촌’을 건설했다. 지금 베이징 사람들의 먹는 것, 쓰는 것, 입는 것, 상당 부분이 저장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밖에 베이징 시내의 부동산 임대업, 요식업, 영세 서비스업, 옷 수선, 신발수리 등도 거의가 남방 발음의 저장상인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저장은 팔고, 상하이는 소비하고

    베이징에서 사업한 지 10년이 넘은 산둥 출신 중국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 저장상인들에게 두 손 바짝 들었던 게 10년 전이야. 그때만 해도 세상물정 몰랐지. 이제는 그들에게 두 무릎과 머리, 두 손을 땅바닥에 찧고 또 찧고 있어.”

    중국의 상업 하면 제1의 무역상업도시 상하이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상인 하면 상하이 출신이 제일 아니겠는가 하고 어림짐작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상하이의 소비자는 상하이사람이고 판매자는 저장사람이다. 상하이의 경제권은 지금 저장상인들에 먹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참고로 2002년 11월15일 제1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당 서열 6위)으로 선출된 전 상하이시 1인자 당서기 황쥐(黃菊)도, 현 상하이 당서기 천량위(陳良宇)도 저장출신이다.

    아무튼 저장상인의 세력은 베이징이나 상하이 상권뿐 아니라 중국의 방방곡곡, 나아가 유럽과 미주와 남아프리카까지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

    항저우 음식 페스티벌. 항저우는 요리보다 ‘용정차’로 더 유명하다.

    천당에서 자본 일이 있는가. 나는 참으로 황송스럽게도 티엔탕(天堂)호텔에서 하룻밤을, 그것도 생시에 묵어보았다. 티엔탕은 말하자면 ‘파라다이스 호텔’인 것이다. 1995년 봄 어느 늦은 밤에 도착한 항저우 기차역에서 내가 아무렇게나 잡아 탄 택시기사가 추천해 준 3성급 호텔 이름이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

    상하이 체류시절 나는 무수히 이 땅의 천당이라는 쑤저우와 항저우를 가보았다. 처음에는 “과연 중국인의 뻥은 못 말리겠구나”라는 실망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풍경을 보는 눈이 약간 틔어 이곳이 천당은 아니더라도 천당에 버금가기는 하겠구나 하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예부터 욕심 많은 중국사람들은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살며 광저우에서 먹고 류저우(柳州: 광시성, 최고급 관의 재료로 쓰이는 목재 생산지)에서 죽길 원했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저장상인을 이야기하려면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닝보(寧波)상인이나 윈저우(溫州)상인을 먼저 해야겠지만 나는 항저우상인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항저우가 저장성의 수부(首府)이기도 하지만 ‘지상 천당의 주민’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저우상인은 여타의 저장상인과 다르게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 외지인은 토박이 항저우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항저우상인의 눈에는 항저우보다 더 좋은 곳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항저우상인은 차라리 항저우 시내의 청소부가 되면 됐지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토박이 항저우상인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상하이사람의 그것에 필적할 만큼 강하다.

    토박이 항저우상인의 고집

    1998년 10월에 개통된 상하이-항저우간 고속도로를 달리면 불과 2시간 거리에 있는 두 도시이지만 각 지역주민들은 서로 중국에서 최고 좋은 곳에 살고 있다며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

    항저우상인의 자존심에는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 절세미인 서시(西施)를 닮았다는 시후(西湖)를 비롯해 땅의 천당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첫째일 테고, 옛날 남송의 수도였다는 긍지가 둘째일 터인데 이는 상하이도 누리지 못했던 영광이다. 항저우상인이 항저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항저우상인은 선조의 영광과 역사의 유산에만 매달려 수구성과 폐쇄성으로만 일관하여 이렇다할 거부(巨富)가 없다. 그들은 모험과 개척정신이 충만한 닝보상인이나 원저우상인들과 달라서 같은 저장상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항저우상인의 상술을 절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항저우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 최대의 실크 집산지이며 중국 제일의 명차(名茶) 룽징(龍井)차를 거래하는 실크상과 차상(茶商)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항저우상인은 북방의 베이징상인들처럼 고급관료를 제일로 친다. 관계로 진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자랑인 것이다. 항저우상인은 관료가 되는 일과 연결짓기를 좋아한다. 19세기 항저우에 근거지를 두었던 거상 호설암(안후이 출신)도 따지고 보면 관상야합(官商野合)의 전형이다.

    항저우상인은 닝보나 윈저우상인처럼 자기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것을 노리지 않는다. 그래도 관료인지 상인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베이징상인보다는 천성이 사근사근한 편이라 관료적인 냄새를 풍기더라도 우아하고 ‘문화적’으로 풍기는 편이다.

    항저우상인은 또 체면을 중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체면을 잃는 것을 최악의 수치로 여긴다. 그래서 예부터 항저우사람은 찢어지게 가난해 냉수로 배를 채우더라도 부채를 들고 시후 호반을 거니는 것을 멋으로 알았다.

    어떤 면에서 수도 베이징상인보다도 더 체면을 중시하는 항저우상인은 큰돈을 벌 만한 장사를 하게 되었더라도 노골적으로 떼돈을 벌지는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비록 돈을 간절히 갈망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생업 위에다 체면이라는 외투를 걸치려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장사를 돈 때문이 아니라 여가생활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며 내놓고 할 만한 건 못되는 것으로 여긴다.

    중국인과의 비즈니스에서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가 항저우상인이라면 더더욱 체면을 살려주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거래 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항저우의 특정 제품을 여타 중국지역에 비해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할 일이다.

    거꾸로 항저우의 유구한 남송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 중국 제일의 실크와 명차산지, 항저우상인의 사업방식과 기질 같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다면 해당 사업이나 거래가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저우상인들의 체면을 잘 살려준다면 분명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양보나 편의를 답례로 듬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가격과 품질이 협상의 제일 조건이 아니다.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협상 성패의 최고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면 안된다. 체면을 중시하는 상대방의 특색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요구가 지나치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한 이유와 객관적 근거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

    저장증권사 건물.

    “전세계의 닝보방(寧波幇)을 동원하여 닝보를 건설하라.”

    1984년 8월1일, 덩샤오핑은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여름 휴양소인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아주 강한 어조로 지시했다.

    명나라 이전에는 ‘상(商)’은 있었으나 ‘방(幇)’은 없었다. 명나라 중엽 이후 ‘상방(商幇)’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산시(山西)방과 후이저우(徽州)방을 필두로 광둥의 차오저우(潮州)방, 싼시(陝西)방, 닝보방, 산둥방, 푸젠방, 장쑤의 둥팅(洞庭)방, 장시의 장유(江右)방, 저장 서부의 룽요우(龍遊)방 등 이른바 10대 상방이 중국의 돈줄을 움켜쥐고 경제계를 주름잡아왔다.

    그러나 격동과 고난의 세기였던 19세기 말엽과 20세기를 거치면서 어떤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또 어떤 것은 머나먼 이국 만리에서 이른바 화교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살아남았다. 모든 ‘상방’들은 오늘날 이미 ‘역사’가 됐다. 단 하나, 닝보방만 빼놓고.

    제국주의, 군벌, 중화민국의 자본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를 거치면서도 닝보방은 조금도 노쇠하지 않았다.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여전히 중국과 해외에서 불멸의 광채를 발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무역·금융의 제1도시인 상하이 상권의 10%는 광둥상인이, 20%는 기타 지역의 상인이, 나머지 70%를 저장상인이 잡고 있다. 그 저장상인 중 과반수가 바로 닝보상인이다.

    이렇게 닝보상인이 중국의 경제수도를 석권하고 있으니, 중국의 정치를 상하이방이 잡고 있듯 중국의 경제는 닝보방의 손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불사조 닝보방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과제다.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절대적인 경제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닝보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닝보방의 세력은 상하이와 베이징의 상권은 물론이고 중국 전체를 넘어 유럽과 미주, 남아프리카에까지 널리 확대되고 있다.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

    상하이와 닝보는 비행기로 20분거리지만 자동차로 5시간 이상 걸린다.

    저장상인이 중국상인의 꽃이라면 닝보상인은 꽃 중의 꽃이다. 닝보상인은 저장상인 중에서도 특수하다. 중국의 웬만한 외항선 선장은 대부분 닝보 출신이다. 뿌리가 깊고 튼튼하면 그만큼 가지와 잎이 무성한 법이다.

    닝보는 일찍부터 국내외에 이름이 파다했다. 닝보항은 9세기 초 이미 중국상인과 신라상인, 이슬람과 페르시아상인들의 흥정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국제적 무역항이었다. 동북아 해상왕국을 이끌었던 장보고 선단의 무역활동의 심장부도 바로 닝보항이었다. 또한 고려시대 개성 부근의 벽란도와 함께 자웅을 다투던 세계적인 무역항이기도 했다. 우리의 개성상인도 이들 지독한 닝보상인과의 흥정에서 이기려고 애쓰다 보니 한국 최고 상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쑨원도 극찬한 닝보상인

    닝보는 중국 해안선의 정중앙과 창장델타의 남부에 위치한 중국 제일의 양항(良港)이다. 상하이와 닝보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150km로 가까운 편이지만 국도로는 8시간 이상이나 걸리고, 1998년도 개통된 상하이-항저우-닝보간 고속도로를 달려도 5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다. 항저우 만이 두 항구도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갈 경우 20여분밖에 안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다.

    평소 비행기는 점에서 점으로, 기차는 선에서 선으로, 자동차는 면에서 면으로, 도보는 입체에서 입체로의 여행이라고 주장하며 될 수 있으면 자동차나 열차를 애용하는 필자 역시 상하이에서 닝보로 갈 때만은 비행기를 탄다. 물론 상하이-닝보간 비행기는 떴다 하면 곧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스튜어디스는 바쁘게 승객들에게 사탕을 던져주지만 승객들은 사탕 한 개를 다 먹기도 전에 벌써 착륙안내를 알리는 기내방송을 듣게 된다. 중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이렇게 짧은 운항시간을 가진 항공노선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런 닝보는 도시규모로 보면 항저우에 이어 저장성 제2의 도시이지만 경제력으로는 제1의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전체로 볼 때 정치 중심지가 베이징이고 경제 중심지가 상하이이듯, 지방 성(省)을 놓고 볼 때도 성도(省都)는 단지 제1의 도시인 정치중심에 지나지 않으며 제2의 도시가 경제력에서는 제1도시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바다와 면하고 있어 경제발전이 앞선 성들은 하나같이 제2의 도시가 제1의 도시보다 경제력 면에서 앞서 있다.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거명해보자면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보다는 다롄이, 허베이성의 스자좡보다는 탕산이, 장쑤성의 난징보다는 쑤저우가 우세하다. 저장성의 남쪽 푸젠성도 푸저우보다는 경제특구도시인 샤먼이 앞서 있고, 광둥성도 광저우보다는 역시 경제특구도시인 선전이 훨씬 발전했다.

    어쨌든 중국의 국부 손 중산(쑨원)은 닝보상인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높이 평가했다.

    “닝보상인들은 상공업 경험이 풍부하고, 비즈니스를 잘하기로 소문났으며 강한 기백을 가지고 있고….”

    기실 손 중산이 즐겨 입어 ‘중산복’(인민복)이라 불리게 된 중국식 정장도 닝보인이 처음 개발한 것이다. 닝보는 현재 북방의 다롄과 함께 중국의 의류산업 도시이기도 하다. 닝보상인은 근대 최초의 기성복과 양복을 재단해냈다. 중국의 패션의류업은 오랜 역사를 통해 시종 자급자족·수공업 식으로 유지돼왔다.

    청나라 때부터 싹을 틔운 닝보의 의류업이 최초로 베이징에서 기성복집을 연 것은 닝보의 예하 현의 하나인 쯔시(慈溪)사람이다. 청나라 초부터 약 200년 동안 닝보의 쯔시사람은 중국 전통 복식을 재단하며 베이징성의 기성복을 농단했다.

    20세기 이후 서방 복식문화의 침투로 기예가 정교한 진시엔(勤縣)과 퐁화(奉化)사람이 서양의 양복재단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붉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한 사람들의 양복을 깁고 민족특색이 충만한 하이파이(海派) 양복을 재단하였다.

    또한 닝보방은 중국 최초의 전문의류복장 전문학교를 개설하고 중국 최초로 양복 이론저작을 편찬해냈으며 앞서 중국 최초의 중산복(인민복) 한 벌을 제조해냈다. 1950년대에서 1990년대 베이징의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의복은 거의 대부분 닝보 출신 재봉사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현대 닝보 의류업의 부흥으로 중국의 패션의류업은 전통 수공업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산산(衫衫) 브랜드의 중국 의류시장 석권은 중국 현대 의류업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1997년 10월6일, 닝보는 제1회 국제 복장제를 열었다. 상하이 체류시절에 필자 역시 옵서버로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이 이벤트는 닝보 의류업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닝보의 산산, 그알(戈爾), 루어몽(羅夢), 이티(一體) 등 중국의 4대 의류브랜드는 중국을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 전체 의류생산량의 10분의 1을 닝보 의류업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회에서는 닝보방의 특징과 장점을 아홉 가지로 정리해보고 중국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윈저우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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