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의 이기(利器)는 종종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로 돌변한다. 아스피린과 두통약, 세제, 살충제 등 일상적으로 쓰이는 화학제품 또한 그러하다. 한해 7만여명에 달하는 화학물질 중독환자가 병원을 찾는다. 전문가들은 “해마다 수천 가지 새로운 화학제품이 출시되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우려한다.
동민이는 폐렴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 아로마 향초병에 든 기름은 파라핀이었는데, 이 방향족 탄화수소가 폐로 흘러들어가 기관지를 파괴, 폐렴으로 악화된 것이다. 동민이는 일주일 동안 입원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표백제, 살충제, 수은까지 삼켜
아이를 키우다보면 별의별 사건을 다 겪게 된다는 것이 ‘선임(先任)’ 부모들의 충고다. 동전을 빨고, 의자에서 떨어지고, 공을 주우러 차도로 뛰어드는 철부지 때문에 부모의 간담이 타들어간다. 먼저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은 “아이란 그러면서 크는 것”이라며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성장치레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위험한 어린이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사고로 인한 어린이 사망률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사고사망 어린이 수가 10만명 당 15명으로 스웨덴이나 영국보다 3∼4배 높은 수준.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도 줄곧 1위를 달리다 지난해에야 비로소 멕시코에 오명(汚名)을 넘겨줬다.
어린이 사고사망의 원인으로는 교통사고나 질식, 익사 사고가 가장 많이 꼽힌다. 그러나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도 무시 못할 정도다. 파라핀을 마셔 폐렴에 걸린 동민이의 경우처럼 가정에서 사용하는 각종 화학제품에 의한 중독사고는 어린이들이 응급실을 찾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5세 미만 영유아가 의약품이나 가정용 화학제품에 노출되어 병원을 찾는 경우는 연평균 8300여건. 통계청은 화학제품에 의한 중독사고로 사망하는 5세 미만 영유아가 연평균 8∼9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센터 임경수 응급실장은 지난 2003년 한 해 동안 응급센터를 찾은 어린이 응급환자의 사고원인을 분석했다. 총 3559명의 어린이 응급환자 중 57명이 화학물질에 중독된 경우였다. 이는 외상, 이물질, 화상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어린이 중독환자들이 집어삼킨 화학물질은 다양했다. 감기약, 혈압약, 항우울제, 소독약, 무좀약 등의 의약품과 살충제, 다리미풀, 방부제, 세제, 접착제, 체온계 수은 등이 철부지들의 호기심에 포획됐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은 그 종류를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각종 의약품을 비롯해 표백제, 합성세제, 모기약, 살충제, 체온계, 자동차 세정액, 샴푸와 린스, 접착제 등은 모두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제품. 화학물질의 종류 또한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이 10만여 종에 이르며 매년 1000∼20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대략 3만6000여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300~500여종의 화학물질이 새로 생산되고 있다.
화학물질은 생활에 유용하고 편리한 물질이지만, 동시에 중독사고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컵라면 용기나 음료수 캔 등에서 검출되는 환경호르몬이 장기적으로 인체에 해를 입힌다면, 가정용 화학제품은 즉각적인 중독을 일으킨다. 통계청은 연간 중독 사망자 수를 약 3400명으로 보고 있는데, 이중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가 60%에 달한다(나머지는 식중독이나 동식물과의 접촉에 의한 중독 등).
응급처치가 생사 좌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동안 7만여건의 화학물질 중독사고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이중 80%가 자살 등 고의적 중독이고, 나머지 20%는 사고에 의한 중독이라고 본다. 한 해에 무려 1만4000여명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학물질에 중독되는 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화학물질 중독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걸까.
사고로 인한 화학물질 중독은 특히 어린이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세 살바기 재영(가명)이는 세탁용 세제인 락스를 한 모금 마셨다가 응급실 신세를 진 경우.
“아이가 콜라병을 들고 마시는 버릇이 있어요. 제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사이에 누나와 화장실에서 놀다가 락스병을 들고 마신 모양이에요. 락스 색깔이 예뻐서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도 하죠. 독한 맛을 느끼고는 자지러지게 울어대서 119를 불렀어요. 병원에서는 아이가 며칠간 설사를 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날 이후로는 아예 화장실 문을 잠가두고 있습니다.”
별다른 탈을 겪지 않은 재영이와 달리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월 경기도 오산에 사는 2세 여아가 간질치료제를 집어먹고 전신쇠약증과 눈이 돌아가는 증세를 보였다. 가솔린을 마신 두 살바기 민규(가명)는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 민규를 담당한 서울 목동이화여대병원 응급센터 어은경 교수의 말이다.
“주말에 가족과 야외에 놀러나갔다가 종이컵에 따라놓은 버너용 가솔린을 한 모금 마셨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맛이 이상해서 곧바로 뱉어냈기 때문에 별 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밤새 아이가 보채고 기운 없이 축 늘어지니까 다음날 응급실로 데리고 왔죠. 가솔린이 폐로 넘어가 폐 점막에 모두 흡인된 상태였습니다. 산소 농도도 이미 많이 떨어져 있었고요.”
자살이나 자해 의도로 화학물질을 음독하는 성인과 달리 어린이의 경우 100% 사고로 인한 중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의 중독정보센터에 신고된 전체 오음(誤飮)사고 중 5세 이하 어린이 비율이 75%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어린이 화학물질 중독사고는 주로 가정에서 발생하는데, 서울 아산병원 임경수 교수에 따르면 2003년 국내에서 발생한 57건의 어린이 중독사고 중 가정에서 일어난 사고가 54건으로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어은경 교수는 “알약, 스프레이, 튜브 등 다양한 바퀴벌레약을 집어먹고 실려오는 어린이가 가장 많다”며 “몇 가지 제품은 특히 위험하기 때문에 부모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한다.
가정용 화학제품 중 가장 위험한 것은 방향족 탄화수소가 포함된 석유제품과 세정제 등. 강한 산성이나 알칼리성을 띠는 이런 제품들은 마시는 순간 위나 식도를 부식시켜 손도 못댄 채 심각한 고통을 겪다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어 교수는 “세정제를 물에 섞어 약수통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물로 오인하고 마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간암 증세 일으키는 두통약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먹는 의약품 또한 어린이들에게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다. 임신 여성들이 흔히 먹는 철분제제는 보통 초콜릿 모양의 알약으로 출시되는데, 이 때문에 어린이들이 한 움큼씩 집어먹는 사고가 빈발한다. 철분 성분은 위장에서 부식될 수 있고, 심장에 과부하를 일으켜 과다복용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
또 아스피린은 대사를 빨리 진행시켜 열이 나고 경련을 일으키다 역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타이레놀이나 게보린, 펜잘 등 두통약에 들어 있는 아세트아미노펜은 간 독성을 유발, 간성 혼수에 빠지게 한다. 어 교수는 “두통약에 중독된 어린이는 간암 말기 환자의 증세를 보이다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독극물관리센터에 따르면 어린이의 성장단계별로 중독 원인물질이 다르다. 기어다니는 단계에서는 마루나 침실바닥, 부엌 싱크대의 아래 쪽에 보관하는 제품으로 인해 중독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막 걷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뚜껑을 닫지 않거나 탁자에 놓인 제품, 기어오르기 시작하면 약장 속에 있는 약품 등이 중독 원인이 된다. 저녁 어스름 부모가 함께 있는 가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전체 사고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물론 화학물질 중독사고가 어린이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의 화학물질 중독은 대개 자살이나 자해 등 의도적인 경우가 많지만, 실수나 무지, 착오에 의해, 혹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화학물질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다. 어은경 교수는 “종종 주유소 직원들이 휘발유를 통에 옮겨 담기 위해 입으로 호스를 빨다가 휘발유를 마시고 병원을 찾는다”고 전했다. 인하대병원 약물중독센터장 노형근 교수는 “건설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다 휘발성 연기를 흡입하는 사고, 어선에서 냉동에 쓰이는 냉각매가 유출되어 중독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면서 “약물중독센터를 찾는 성인 환자 열 명 중 한 명은 사고로 인한 중독환자”라고 말했다.
식탁에 오른 강력 세척제
위해성이 큰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정윤미(가명)씨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올해 초 정씨는 외식을 하러 한 식당에 갔다. 식당 종업원은 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그만 착오로 세척제를 희석한 물을 가져다줬다. 이 세척제는 식당에서 석쇠의 그을음을 닦는 데 쓰이는 강알칼리성 화학제품. 물로 착각하고 세척제를 마신 정씨는 식도와 위가 부식되어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화상으로 치면 2도 화상에 해당하는 중상이었다. 정씨는 입원한 동안 식도와 위가 손상된 탓에 전혀 식사를 하지 못한 채 영양주사를 맞았다. 앞으로 식도에 협착(狹窄) 증세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식도의 통로를 넓혀주는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
3~4년 전에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가 음료수병 안에 든 강산성의 화학물질을 한 모금 마신 40대 남성이 3~4주 만에 결국 사망한 일도 있었다.
노형근 교수는 “장기 내부의 점막은 매우 얇기 때문에 손상되기 쉽다”면서 “강한 산성이나 알칼리성을 띠는 화학물질이 닿기만 해도 색이 변하면서 조직이 죽고, 다량 출혈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2차 세균감염이 일어나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두통약이나 수면제 등 의약품을 습관적으로 과다 복용하는 것도 중독사고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의사들은 체중 50kg의 여성이 두통약에 들어있는 아세트아미노펜을 7g 정도 섭취했을 경우 간 독성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시중에 판매하는 두통약 한 알에 든 아세트아미노펜은 보통 300~500mg. 즉, 두통약 10~20알을 먹으면 간 독성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노 교수는 “머리 아프다며 한번에 서너 알씩 한 시간 간격으로 복용하는 만성 두통환자들이 있는데, 잘못하다가는 반나절 만에 간 독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안전마개만으로도 화학물질 중독사고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시판되는 화학제품들은 대개 안전마개가 없다.
노 교수는 “자살 의도로 수면제를 50~100알 삼킨 경우 위 세척 등을 통해 빼내면 별다른 위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10알 정도 먹고 잠이 들면 수면제 성분이 모두 신체에 흡수되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 경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면 근육계통이 모두 파괴되는데, 심장이 멈춰 급성신부전으로 사망할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중독에 의한 사망 중 가장 비중이 큰것이 바로 농약 중독이다. 자살이든 사고든 농약 음독사고는 연간 2600여건(2002년 기준)에 달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농약 중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전체 사망 건수의 60%를 차지하는 제초제 그라목손. “그라목손을 마시면 100% 사망한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다. 한 모금(10ml)만 마셔도 치사율은 50~70%. 그 이상 마실 경우 치사율은 90~99%다.
이렇듯 위험한 그라목손이 관리 부실로 아까운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어은경 교수는 “할머니가 희석시킨 그라목손을 박카스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20대 손자가 술에 취해 음료수로 착각하고 한 모금 마셨다. 그라목손은 청년의 폐에 있는 모든 세포막을 파괴했고, 그는 폐가 점차 딱딱해지면서 사고 발생 한 달 후 사망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라목손의 엄청난 위험성 때문에 의사 300여명이 ‘그라목손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었을 정도다. 이들은 “일본에선 그라목손을 5% 농도로 희석한 제품을 판매하는데, 우리나라 시판제품의 농도는 24.5%라고 지적하면서 농도를 낮춰 판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안전마개를 장착해 충동적인 자살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경북 안동병원 응급의학과 김욱진 과장은 “부부싸움을 한 후 홧김에 그라목손을 털어 마시거나, 다른 병에 넣어둔 그라목손을 물로 오인해 마시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면서 “그라목손의 농도를 낮추고 안전마개를 장착하면 사고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과장은 “그라목손을 마시게 되면 곧장 식도에서 위까지 심한 궤양이 나타나고 간과 폐 조직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호흡부전 등 극심한 고통 속에 사망하게 된다는 얘기를 꼭 기사에 넣어달라”고 부탁할 만큼 그라목손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렇다면 이렇듯 급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화학물질 중독사고를 예방할 수는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안전마개 도입만으로도 어린이 중독사고의 상당 부분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시판되는 가정용 화학제품 중 안전마개가 달린 제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소비자보호원이 지난해 11월 안전검사 대상으로 지정된 방향제, 세정제, 접착제, 가구광택제 등 화학제품 49종을 조사한 결과 어린이 보호포장이나 보호용기를 갖춘 제품은 단 5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5개 제품은 모두 수입제품이었다.
특히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어린이 보호포장·용기 의무사용 대상으로 규제하는 29개 제품 중 수입제품 2개를 제외한 나머지 국산제품은 모두 보호포장·용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제품들은 방향제, 접착제, 세정제, 얼룩제거제 등으로 에탄올이나 이소프로필 알코올, 등유, 아세톤 등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용 앞면창유리 세정액 제품들의 경우 호흡곤란, 혈관과 신장기능 손상 등을 일으킬 수 있는 메틸알코올을 포함하고 있는 데도 안전마개는커녕 위험을 알리는 표시조차 없었다.
美, 안전마개로 사망률 90% 줄어
이 때문에 대한의사협회와 환경운동연합이 설립한 ‘21세기 생명환경위원회’는 화학제품에 안전용기 사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호용기 사용을 의무화한 화학제품은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철분 등을 함유한 의약품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 같은 식약청 고시(2003년 7월부터 시행)는 의약품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가정용 화학제품까지 안전용기 포장을 의무화하는 법률 제정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원민경 변호사(법무법인 자하연)는 “미국은 1972년 중독방지포장법을 도입한 후 어린이 약물중독 사망자수가 90% 이상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며 “어린이의 85%가 설명 없이 개봉할 수 없는 용기나 포장 등 명확한 기준을 삽입한 안전마개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호포장·용기, 즉 안전마개란 어떤 것일까. 지난 5월3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어린이독극물 사고 예방대책’ 심포지엄에는 안전마개를 사용한 여러 화학제품이 진열됐다. 이들 제품은 대다수 수입제품으로 성인의 경우에도 뚜껑을 여는 방법을 알아차리는 데 30초~1분이 걸릴 정도로 특수하게 고안된 것들이다.
뚜껑의 좌우를 잡고 돌려야 열리거나 힘을 주어 세게 밀어내야 열리는 마개, 액체가 아주 천천히 흘러나오도록 주둥이를 좁게 만든 용기 등이다. 간 독성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두통약의 경우 안전마개를 달고 알약 위에는 두껍게 솜으로 막아놓았다. 이날 전시된 제품 중 국산제품은 ‘옥시 코리아’에서 출시한 화장실 변기 전용 세정살균제가 유일했다.
‘21세기 생명환경위원회’를 이끌어온 안명옥 제17대 국회의원 당선자는 “위급한 상황에 놓인 노인들이 안전마약병을 빨리 열지 못해 생명을 위협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미국에서는 아예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파는 약품 용기와 어린이가 없는 가정에 파는 약품 용기, 두 가지를 시판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업계도 소비자를 이처럼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독원인 몰라 낭패
그러나 안전마개 도입은 화학물질 중독사고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첫걸음일 뿐이다. 중독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들은 “뭘 먹고 중독됐는지, 화학제품의 성분은 무엇인지, 해독제는 있는지 등을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털어놓는다. 대다수 화학제품이 성분 표시를 제대로 하지 않을 뿐더러, 라벨이 떨어져나갔거나 다른 용기에 제품을 덜어놓은 경우 음독한 제품의 성분을 알아낼 길이 막막한 게 현실. 서울 아산병원 임경수 교수는 “중독치료의 골든 타임은 음독 후 1시간 이내이지만, 화학제품 제조회사에 전화를 걸고, 관련 문헌과 인터넷을 뒤지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면서 “일부 제조회사는 ‘요즘 판매하는 제품이 아니라서 성분을 모른다’거나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해 답답할 때가 많다”고 했다.
두 살바기 승현(가명)이는 할아버지의 알약 몇 개를 주워먹고는 중환자실에 입원한 경우. 혈압이 떨어지고 축 늘어진 아이를 부모가 응급실로 데리고 왔지만, 아이가 먹었다는 약이 들어있는 병엔 중국제품이란 것 외엔 성분도, 유효기간도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승현이를 담당한 한 의사는 “부모는 단지 할아버지가 고혈압 때문에 먹는 약이라고만 했고, 아이가 몇 알을 삼켰는지도 알 수 없었다”며 “정확한 중독 원인을 밝혀낼 수 없을 때는 증세를 회복시키는 보존적 치료밖에 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3월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에서는 화학물질에 중독된 환자가 안타깝게 죽어갔다. 40대의 홍모씨는 아내가 일하는 세탁소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홍씨 곁에서는 용기 하나가 발견됐는데,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세제 종류로만 확인됐을 뿐 용기에는 정확한 성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심장 기능에 이상이 발생한 홍씨는 응급실에 실려온 지 80여분 만에 결국 사망했다.
임 교수는 “홍씨가 마신 화학물질의 용도나 성분을 알지 못해 일반적인 응급처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중독 원인을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홍씨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중독환자의 40%는 중독 원인이 파악되지 않는다”며 “중독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화학물질 해독제 또한 있으나마나”라고 지적했다.
중독관리센터 설립해야
이러한 ‘화학물질 정보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중독관리센터를 설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20~50년 전부터 중독관리센터를 설립해 중독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일반인과 의료전문가 등에게 화학물질 정보 및 응급처지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53년 시카고에 중독관리센터가 처음 설립되어 현재 73개 센터가 전국 각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국립의료원 응급의학과 황정연 과장은 “인구 1000명당 9.2명이 중독 노출에 대해 상담했으며 매년 400여건의 전화상담이 이뤄지고 있다”면서 “중독관리센터의 운영비는 중독환자 1명당 33달러 수준으로 응급실 진료비용을 대체하는 효과가 크다”고 했다.
일본은 1986년 중독정보센터를 설립, 연중 24시간 운영하고 있으며 한 해 3만 건 정도의 중독 관련 문의를 처리하고 있다. 노형근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민간 중독전문기관으로 인하대병원 약물중독센터와 천안 순천향병원 농약중독연구소가 있을 뿐”이라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인구 500만~1000만명 당 1개의 중독관리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말했다.
농약공업협회는 해마다 국내에서 시판되는 농약 전 품목에 대한 정보를 수록한 ‘농약사용지침서’를 발간한다. 2003년판 지침서의 두께는 7년 전인 1996년 지침서의 두 배다. 그만큼 새로운 농약제품이 해마다 급증하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증가속도는 의약품이나 가정용·공업용 화학제품도 마찬가지다. “사망자 1명 뒤엔 150건의 사고가 있다”는, 의학계의 충고를 받아들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