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늘의 길’(전3권) 김지하 지음/학고재/ 각 1만3000원
김지하의 말이 아우르는 외연(外延)은 언제나 너무 크고 넓어 그 앞에서 아득해진다. 사람됨의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관심 범주의 광역성 때문일까. 김지하라는 이름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강신무(降神巫)다. 서로 죽고 죽여 피가 낭자하게 계곡과 내를 적시며 흐르는 험한 시대와 억울한 원귀들의 씻김을 위해 칼날 위에서 춤추는 강신무. 김지하의 언어는 안과 밖, 동과 서, 옛시대와 현재, 아(我)와 피아(彼我), 논리와 초(超)논리, 현실과 환영 사이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주술이다. 그의 말은 직관과 영감의 임계점까지 치받아 올라간다.
얼굴 가득한 주름에 새겨진 역사
어쨌든 이 책은 김지하의 개인사이자 가족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김지하는 1941년 음력 2월4일, 전남 목포시 연동 외가에서 태어난다. 그가 자신의 출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시대를 “때는 전인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지옥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어두운 때, 이 땅에서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국민총력연맹 조직, 황국신민화운동과 생산보국운동을 강행하던 때, 바로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 발발을 눈앞에 둔 험악한 때다”라고 쓰는 것도 당연하다.
이 책은 김지하의 회고록이자 시대의 회고록이다. 김지하라는 거울에 비친 시대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나르시스의 거울이자 시대의 거울이다. 나르시스의 거울에는 자기애와 내면이 비치고, 시대의 거울에는 한 개체의 삶에 작용하는 거대한 외부가 비친다.
김지하의 생애는 한 개인이 감당할 만한 이성의 기획과 그 경계를 넘어 파쇼적 권력에 맞서 저항한 민주세력의 기억, 집단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전위(前衛)의 풍경이다. 사상과 이념이 소용돌이치며 화석으로 남은 동시대의 풍경이다. 그 풍경은 파란과 격동의 한국 정치사가 김지하라는 개체를 거점화하고 요동치며 그 운명 안에 각인한 죽임과 죽임의 역사다. 그 역사는 세 겹의 내부를 갖고 있다. 박정희를 핵심으로 한 군부독재 권력이 질주하던 시대의 내부, 갖가지 종파투쟁으로 얼룩진 운동권의 내부, 혁명투사에서 생명과 영성을 선취하고 생명운동, 풀뿌리지역운동으로 나아간 김지하의 내부가 그것이다.
김지하는 이렇게 쓴다.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이것은 미당 서정주의 “애비는 종이었다”와 비견될 만한 내연(內延)과 울림을 갖고 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아비의 운명은 곧 자식의 운명이다. 이 한 문장 속에 김지하의 운명은 봉인되어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그 천부적 운명의 말랑말랑한 속살을 알뜰히 파먹은 표랑(漂浪)과 수배, 투옥과 고문, 반공법 위반자, 사형선고, 무기징역은 아버지의 사상적 정체를 단정하는 그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육십 생애 안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주문”이다. 김지하의 생은 이 비밀주문에 걸려 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 이념에 감염돼 한반도로 건너와 목포에 삶의 터전을 잡은 김지하의 아버지 김맹모(金孟摸)는 “인민군 점령하에서는 목포시 당 간부였음에도 두문불출, 집안에 묻혀 단파 라디오로 유엔군의 인천 상륙 정보까지 들어서 인민군의 패배를 환히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국군 상륙작전 때에는 동료들과 함께 영암 월출산에 빨치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패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실패한 공산주의자의 아들은 김지하가 피할 수 없이 수납한 운명이었다.
김지하는 죽지 않았다
전라도, 황톳길, 수배, 도피, 감옥…. 김지하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들은 1970년대 이후 소용돌이치던 한국사의 살벌한 내용물로 침착(沈着)한 것들이다. 그는 한동안 지하에서 지하로 소통되는 유언비어였다가 역사의 선봉, 최전선의 눈부신 상징이었다가 이제 역사의 화석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다. 서슬이 퍼렇던 젊은 시절의 투사시인은 간데없고 한복을 입고 앉아 난초를 치는 고요한 선비만 남아 있다. 파란만장한 항해를 마치고 김지하가 착지한 삶은 흰 빛, 흰 그늘의 삶이다.
“‘흰 그늘’은 도무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순이면서 통합입니다. 만해 스님의 그 ‘님’이 아픔이자 기쁨이고 ‘모심’이자 ‘살림’이듯이, ‘흰 그늘’은 ‘소롯한 예절’이면서 ‘힘찬 생명력’입니다. 그것은 세계와 우주로 열리는 고요한 삶의 ‘화개’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주 자체의 혁명적 ‘대역사’입니다.”
그의 이름 뒤에 따라다니던 투사의 이미지는 빛이 바래 벌써 민간에 구전되는 허황한 민담으로 바뀐 듯하다. 장엄한 문체로 씌어진 이 회고록은 그것에 반역하며, 돌연 그의 전생애를 현재진행형으로 바꿔놓는다. 김지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우렁우렁 발음이 불분명하고 어눌한 육성으로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저 환각과 가난과 전쟁으로 찢긴 황홀한 어린 날의 기억들을 털어놓는다.
1961년, 김지하는 ‘민족자주통일연맹’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조동일과 함께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의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회담’분야 남측 학생대표로 선정되어 이를 준비한다. 남북학생회담 개최 일주일을 앞두고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이 회담은 좌절되고, 김지하는 2학기 복학 때까지 목포 부둣가를 떠돈다.
김지하가 “우주로 사라지는 흰 운명의 길”을 본 것은 4월혁명 직후였다. 그는 “선배들의 퇴학 처분과 문교 당국의 위선에 심기가 뒤틀려” 등록을 포기하고 서울과 원주, 대학가를 떠돈다. 그 즈음 수원농대에서 연극 공연을 마치고 술을 마시다가 한밤중 창밖에 홀연히 펼쳐진 그 하얀 길을 목격한 것이다.
창밖에 홀연히 펼쳐진 하얀 길
“거기 양쪽 두 개의 소실점 밖으로 사라지는 길고 긴, 달빛 비치는 흰 신작로가 똑바로 누워 있었다. 가로수와 먼 곳 숲들은 모두 검고 길만이 새하다. 만월은 저 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운행하고 눈부신 구름들이 달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행길은 한없이 소실점 바깥으로 달려가 지평선 너머의 저 아득한 한밤의 흰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에 왠지 내 운명이 걸려 있는 듯했다.”
흰 길의 끝없는 현전! 예민하고 영감으로 가득찬 젊은 대학생은 신비한 빙의 상태에서 이 길에 홀려 몇 시간이고 걷다가 여명이 돋아올 무렵 퍼뜩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이 체험은 그의 운명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몇 번이고 상황을 바꿔가며 나타난다. 민청학련 사건 때, 여러 번에 걸친 투옥과 감방에서의 백일참선 때, 김지하는 정신과 의사의 권위를 빌려 이것이 감각적 착란이나 시각의 분열 현상이 아니라 종교적 환상이라고 분류한다.
1979년 10·26 직후 김지하는 감옥에서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그의 머릿속에 세 마디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김지하는 자기가 박정희를 결코 ‘용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누구나 언젠가 이승의 몸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생의 ‘무상함’을 깨달았다고 적는다.
김지하의 회고적 문체가 언제나 놀라운 황홀함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글들은 잘게 쪼개져서 각각 독립된 단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 파편화된 단상들에는 각각의 제목이 달려 있다. 제목은 기억의 구획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겠다. 때로는 모호한 사변(思辨)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흰빛의 상징성’을 설명하는 대목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진다. “‘흰 그늘’은 그 현대적 전개과정에서 동이적 상상력의 알심이기에 나아가 농경정착적인 생명의 에콜로지이며, 대륙과 해양 그리고 세계의 남과 북이 교류·교차하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서로 교합(交合)하는 새로운 후천세계(後天世界)의 구체적 창조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날렵한 요즘 글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장엄한 문체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