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광주엔 무자비한 진압만 있었을 뿐 어떠한 폭동도 없었다”

  • 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05-31 1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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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5·18에 대한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한 미국인 선교사의 5·18 광주 현장기록. 이 기록에 따르면 광주는 결코 폭동이 난무한 도시가 아니었다.
    • 광주의 분노는 ‘아주 못되게 행동한’ 공수특전단과 중앙정부에 대한 것이었으며, 중앙정부는 광주가 보기에 형평을 잃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광주사태 기간 내내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현지의 반미(反美) 분위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반미 분위기 조성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이 신군부의 병력 동원을 ‘승인(approve)’해 주었다는 말이 나돌았기 때문이며, 미국이 사태 악화를 방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광주 현지의 인식도 반미 분위기를 북돋웠다.

    주요 임무는 법과 질서 회복

    미국의 역할에 대한 광주 현지의 인식이 어떻든 간에 반미 정서나 반미 움직임이 발생한 데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주한 미 대사의 몫이었다. 주한 미 대사는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워싱턴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미국의 국익을 해칠 수 있는 반미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한 미 대사는 워싱턴에 설명을 해야 할 처지였다.

    군과 시위대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던 5월23일 금요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반미 문제와 미국의 역할을 주제로 한 전문(電文) 한 건을 워싱턴으로 띄운다. 글라이스틴이 광주사태 기간에 워싱턴으로 발송한 전문 곳곳에 반미 감정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지만, 아래 두 장짜리 보고문에서는 반미 문제라는 단일 주제만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이 보고문의 제목은 ‘미국의 위치에 대한 한국 국내의 반응’이다.

    『1980년 5월23일 09:03



    제목 : 미국의 위치에 대한 한국 국내의 반응

    1. 내용 전체

    2. 우리는 현 한국 상황에서 미국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일부 지역에서 반미 움직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 특히 미국이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특정 병력의 이동을 승인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될 수 있음. 아무런 무리가 방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곤혹스러우며 이 때문에 이런 비판이 더 커지고 있는 실정임. 이런 감정을 폭발시키기에는 미국이 더없이 편리한 희생양인 셈임.

    3. 위의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내의 모든 미국인 근무자와 미군은 지역 문제(광주 건 : 옮긴이)를 언급할 때 극도의 주의를 요하고 있음. 미국의 입장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에는 근무 요원 모두가 참고 사항에 언급된 공식 문안의 내용만 활용할 것이며, 한국 상황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는 관련되지 않도록 자제할 것임.

    미국의 병력 이동 승인 건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현재 주요 임무는 법과 질서의 회복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재확인할 것임. 우리의 이런 조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임.

    4. 워싱턴에서 나오는 그 어떤 공식 언급도 위에서 언급된 사항들을 감안해 주의해 줄 것을 요망함. 예를 들어 국방부 대변인(미 펜타곤 대변인 : 옮긴이)이 공식 회견 자리에서 미국이 광주에 병력을 떼주었다(chopped)고 한 발언이 한국 조간지에 일제히 보도되었으며, 이런 일은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음.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반미 분위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세를 낮추고 불필요한 언급은 삼가기를 요망함.』

    신중한 글라이스틴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전 주한 미 대사였던 윌리엄 포터나 필립 하비브에 비해 더 신중하고 세심한 편이다. 특히 워싱턴으로 타전하는 문건의 표현이나 기술 방법에 있어 포터나 하비브에 비하면 워낙 완곡하고 조심스러워, 문맥을 잘 뜯어보아야 할 만큼 두드러져 보이는 용어나 어휘는 잘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재외공관의 전문 작성 원칙과 관행을 벗어날 만큼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실한 문구를 선택하지는 않지만 전문 전체의 분위기가 꽤 차분하다는 것이 글라이스틴 재임시 주한 미 대사관에서 생산된 문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런 성품이 광주사태 당시 미국의 행동 결정에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원만하고 모나지 않은 원칙주의자로서 선비풍의 글라이스틴 대사가 박정희 시해에서 12·12 군부 쿠데타, 광주사태로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한국 정치 현실의 한가운데에 주역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뒷이야기는 풍성할 것임에 틀림없다.

    광주사태 막바지에 현지 수습대책위원리에서는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행동’을 요구한 적이 있다. 광주 협상이 대책위 내 강온파의 의견 불일치로 난항을 겪고 있던 5월26일의 일로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기 하루 전이다. 대책위에서 당시 ‘뉴욕 타임스’ 광주 취재 기자였던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를 통해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던 것이다. 주한 미 대사관은 당시 상황을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가 광주 특파원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의 기사를 게재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음. 광주 현지의 학생 지도부가 스토우크스 기자에게 요청하기를 미 정부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협상 중재역을 맡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의 기사임. 서울 주재 ‘뉴욕 타임스’ 기자인 헨리 캄은 이 문제를 당 대사관 정보담당관에게 알려왔으며, 정보담당관은 캄에게 대사관은 그런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통보했음.』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이때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고 썼다. 미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한국 내부문제인 광주사태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미국은 광주에 관한 한 끝까지 제3자의 입장이기를 바랐고 그런 원칙이 행동반경을 결정지었다.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된 병력 이동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대응에서도 이런 원칙은 끝까지 지켜졌으며, 5월27일 이후 전개된 전두환 정권 등장이라는 한국 정치에서도 미국의 원칙적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을 것”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광주사태를 전후로 전개된 한국 상황은 예측하기 힘들고 변화의 방향을 종잡기 힘든 일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가 한국에서의 사태 전개에 얼마나 곤혹스러워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두 건의 문건을 소개한다.

    하나는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으로 사태가 막을 내린 5월29일 자신이 직접 작성해 머스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이다.

    『1980년 5월29일 12:15

    제목 : 〈한국 초점〉 최근 상황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

    전두환 및 그 그룹이 실제로 정권을 장악한 것과 관련해 한국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워싱턴의 고위정책검토반이 궁금해하고 있으며 곧 주요한 고위정책 검토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점을 본인도 알고 있음.

    본인이 이전 참고사항 보고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는 한국인의 반응이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 만약 대부분의 한국 국민이 새롭게 부상한 권력 구조에 편안하게 적응해 살려는 의지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그 상황에 따라갈 수가 있음. 그러나 만약 한국민 대다수가 새로운 지도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새로운 권력과 대결 구도로 가게 된다면 우리의 입장에 변화가 있든지 아니면 우리는 개입하지 않을 것임.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는 한국 국민의 여론 향배에 대해 어떠한 신뢰할 만한 판단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님. 우리는 이 여론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고 있으며, 다음 주중에 이에 대한 보고가 있을 것임.

    많은 미국인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 (새로 부상한 권력층에 대해 : 옮긴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으나, 여러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상황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하지 못해 유감이며, 우리 보고서가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해 워싱턴이 당혹스러워한다는 점도 알고 있음. 그렇긴 하지만 우리의 정책은 미국의 예측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보며, 한국민이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좀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성이 있다고 봄.』

    이 문건에서 알 수 있듯이 5월27일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해 사태가 마무리된 이틀 후에 워싱턴과 주한 미 대사관의 관심은 이미 광주가 아니었다. 광주 유혈참극의 발단이 된 초기 공수특전단의 시위대 가혹 진압 때 글라이스틴 자신의 표현대로 미국이 ‘서울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듯이 광주사태가 유혈 마무리된 후 미국은 다시 전두환 정권 등장이라는 정치게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의 언론플레이와 여론조작

    광주사태 마지막 날인 5월27일 미 대사관이 작성한 ‘1980년 5월27일 오후 10시 현재 한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광주는 조용한 것 같음. 서울의 라디오 방송은 오후 3시 진압군의 광주 재진입으로 발생한 사상자 수를 수정 발표했음. 17명의 폭도가 사살당했고 295명이 체포되었다는 보도임. 군인도 두 명 사망했음. 사상자 수가 훨씬 많으며 진압군이 질서 회복을 위해 강경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서울에 퍼지고 있으나,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가택수사 같은 일은 군 병력이 아닌 경찰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

    5월27일 계엄사령부를 통해 광주 현지의 팀 워런버그, 주디스 체임벌린, 데이빗 도링거 등 미국인 평화봉사단원 3명의 안전이 확인되었다고 보건사회부 장관이 통보해 주었음.

    광주 현지가 상대적으로 조용해졌다고 판단, 당 대사관의 대기관찰(standby watch) 업무는 5월27일 오후 11시를 기해 종료함.』

    이 짤막한 마지막 보고문은 광주사태를 보는 미 대사관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한국 정부 당국이 발표하는 현지 정보에 의존하면서 광주 현지의 질서 회복이라는 피상적인 사태 파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질서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사살된 광주 ‘폭도’의 숫자는, 실명이 거론된 평화봉사단원 같은 자국민 보호에 대한 미 정부의 열정적인 의지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

    글라이스틴은 위 전문을 타전한 같은 날(5월29일) 새로 등장한 상대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는다. 새로운 정치 게임의 시작이다. 광주사태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서울 게임’을 시작하려면 12·12 사건 이후 누적되어 온 전두환 그룹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일방적인 언론 플레이와 미국의 입장에 대한 여론 조작을 꼬투리로 잡았다.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광주사태 희생자들의 관이 망월동 묘역으로 옮겨져 하관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을 잃은 노파는 슬픔도 잊은 표정이다.

    『제목 : 5·17 관련 미국 대응에 대한 언론 조작

    최근 전두환 장군은 언론사 발행·편집인 대표자 모임에서 미국이 12·12 사건을 사전에 통보받았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한국 신문은 5·17 사건과 관련해 ‘이해한다’ 또는 ‘승인했다’는 본인의 언급을 곡해 보도했음.

    본인은 당 대사관 언론 담당자인 노먼 반스에게 아래에 적은 구두 메시지를 전두환이 연설한 모임에 전달할 것을 지시했음. 전두환과 공개적으로 언쟁하기를 원치 않으며 이는 관련 발언 기록을 수정하는 데 과도하게 관련되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임. 아래 메시지는 구두로 전달된 것이며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음.

    메시지 인용 : 본인은 몇몇 오해가 발생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요구받았음.

    첫째는 특정 사건(12·12를 지칭 : 옮긴이)을 미국 정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통보받았느냐 하는 것임.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수 시간 동안 (정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해간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음.

    미 정부는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사실을 공표 약 4시간 전에야 통상적인 소문 차원에서야 알게 되었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는 공식적으로 공표 30분 전에 통보받았음.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 비상계엄령 선포를 추인하는 국무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국무회의 개최 약 30∼60분 전에 통보받았음.

    둘째는 5월23일 금요일 오찬모임에 대한 것임. 이 오찬모임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근 한국 상황과 관련, 양당 국회의원들에게 비공식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음.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날 발언 내용은 이튿날 ‘코리아 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스’에 영문으로 정확하게 게재되었으나, 일부 한국어 신문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5·17을 ‘이해한다’거나 ‘승인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했음.

    비상계엄령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학생시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첫 발언이었음. 그 다음 그는 정치 지도자 체포와 국회 해산, 그에 따른 정치 파탄 등에 반대한다는 강력한 의견을 개진했음.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런 자신의 견해가 5월18일 워싱턴 국무부 대변인의 공식 언급과 일치한다는 것도 국회의원들에게 상기시킨 바 있음.』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

    글라이스틴 발언의 왜곡 전달은 전두환 신군부와 글라이스틴 사이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골을 깊게 파놓았다. 언론 조작 건 외에도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 전달이 무산되는 등 신군부가 정치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어버리는 바람에 곤혹스러운 사태를 여러 번 겪었다.

    글라이스틴 입장에서 신군부는 ‘반칙’만 일삼는, 꼴도 보기 싫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위컴 장군(미8군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차이가 있다면 군인인 위컴은 끝까지 전두환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외교관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5월27일 새벽 5시30분, 광주는 마지막 피를 흘리고는 잊혀져버렸다. 이후 전개된 새로운 정치 상황을 보면 광주가 망각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이 그토록 바라던 ‘법과 질서’가 회복되었고, 정치가 재개되었던 것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새로운 정권 탄생 과정에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피의 제례’에 바쳐진 희생양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광주사태 배경으로 지역주의를 강조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유추할 수 있다.

    광주는 군(軍)과 민(民)이 아무런 매개체 없이 직접 부닥친 사건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이 일방적으로 민을 건드렸다. 당시 신군부는 정권 창출에 방해가 될 만한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우선 정치권을 동결시켰고, 학생시위를 원천 봉쇄했으며, 무엇보다도 일찌감치 12·12를 통해 군 내부의 정지(整地) 작업을 마무리했다.

    미국이라는 요소를 상대하는 데에도 신군부는 성과를 올렸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미8군 사령관은 12·12 이후 내내 신군부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면서 정권 창출에 바짝 다가섰다. 남은 일은 대세를 굳히고 반발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공포 요법’의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발단을 공수특전단의 가혹 진압이라는 우발적 요인에서만 찾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 국무부에 타전한 광주 관련 보고문건 가운데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insider)의 견해’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전문이 한 건 포함되어 있다.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한 지 2주 후인 6월10일에 작성된 장문의 문건이다. 이 문건에서 ‘내부자’란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있었던 한 미국인 선교사를 지칭하는 말이며, 원래 문건에는 선교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1993년 정보공개법(FOIA=Freedom of Information Act)이 발효되면서 이 문건이 비밀에서 해제될 때 이름이 가려진 채 공개되었다.

    기록 당사자인 선교사는 ‘광주 지역에 오래 거주해 지역 사정에 밝으며, 광주사태 전 기간에 걸쳐 광주에 있었던’ 사람으로만 소개돼 있을 뿐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선교사의 생생한 현지 기록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보의 진위 여부와 가치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평가해야 할 자리에 있었던 주한 미 대사가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까지 언급한 것은 꽤 이례적인 평가다.

    사태 당시 광주 현지의 생생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주한 미 대사 입장에서는 뒤늦게 입수된 것이긴 하지만(이 기록의 정확한 입수 시점과 입수 경로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선교사의 이 현장 기록이야말로 귀한 정보였을 것이고, 정보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은 이후 미국의 광주사태 사후 평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임에 틀림없다.

    모두 10부로 구성된 이 기록은 5월18일 이전 상황에서 시작해 날짜별로 사태 전개를 기록하고 있으며, 5월19일 공수단 병력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상황과 시민 수습위원회 강온파 사이의 의견 대립 등 중요한 순간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진압 병력이 가혹 행위를 했는지 여부와 관련한 소문에 대해서는 ‘직접 목격했다’ ‘소문은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등 사실에 근거해 기술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한국 광주에서의 5·18 사건에 대한 요약된 회고’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기록 내용의 일부는 사태 당시와 이후 시민단체의 자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알려졌으나 전체 내용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선교사의 원래 기록에는 특정 상황을 목격한 사람의 이름이나 직책 등이 밝혀져 있으나 이 문서에서는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본문 번역에서는 000로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다음은 5월19일 특전사 병력의 강경 진압을 전후한 초기 1주일 간 기록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광주 시위가 참혹한 유혈 사태로 번지게 된 배경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으며, 광주사태 전 과정에서 ‘우발’과 ‘의도’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먼저 사태 발단에 대한 기록이다.

    『〈5월18일 이전〉

    5월15일 목요일,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밤에는 횃불 시위도 있었다. 유신헌법과 계엄령 반대에 초점이 맞추어진 시위였다. 매달 15일에 있던 민방위 훈련이 이날은 취소되었고, 폭동 진압 경찰들이 포진했으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포진한 위치에서 시위대를 관찰만 했다.

    5월16일 금요일, 광주 일부 거리의 교통이 차단되었고 진압 경찰이 동원되었다. 밤의 횃불행진에서는 전두환의 이름이 거명되며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반대 구호가 나왔다(한국어를 잘 알아듣는 한 선교사는 시위대가 기독교 계통의 ‘내게 강 같은 평화’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진압 경찰의 움직임은 없었으며 시위는 자정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곳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전으로 출장을 가려 했던 선교사들에 따르면 대전행 버스표를 한 장도 구할 수 없었는데, 대전으로 이동하는 군인들 때문에 표를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 선교사들은 토요일에야 기차로 대전에 갈 수 있었는데 대전행 기차에는 현역 사병이 대거 타고 있었으며, 그 군인들은 민간인 승객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등 포악한 행동을 취했으며 군인들끼리 서로 치고받아 피를 흘리기도 했다. 장교는 보이지 않았다.

    5월17일 토요일, 광주는 조용했다. 일요일인 18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휴교령이 내려진다는 발표가 있었다.

    〈5월18일 당일〉

    광주에 있던 선교사들은 5월18일 일요일에 언제 어떻게 폭력 사태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나절에는 조용했으나 교회에서 돌아온 정오 무렵부터 일부 선교사들이 아침에 일어난 폭력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일요일 광주 시내에서 공수특전단 부대원들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침 9시에 봤다는 사람도 있고, 정오에 봤다는 사람도 있다.

    일요일 오후부터 공수특전단 부대원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청년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000와 000가 직접 그런 장면들을 목격했으며, 이들에 따르면 특전단 부대원들이 그냥 길을 걷고 있던 청년 몇 사람에게 잔혹하게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줄 수 있음).

    5월18일 하루 종일 또는 그 후 며칠 동안 선교사 가운데 그 누구도 민간인 신분의 진압 경찰이 시민들에게 잔혹행위를 가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며, 두 다리 혹은 세 다리 건너서도 그런 장면을 보거나 들은 사람은 없다. 진압 경찰은 공수특전단 대원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은 채 제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공수특전단 대원이 한 시민에게 잔혹한 폭력을 가할 때 이를 제지하려던 한 경찰관이 공수특전단원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나중에 들려왔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 교통 경찰관이 네거리에서 공수특전단 부대원 한 명과 다투는 것을 000가 목격했는데, 군인은 택시에서 한 여자를 내리게 하려고 했고 경찰관은 그 택시를 그냥 보내려고 하면서 경찰관과 군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이 장면을 목격했던 000 선교사는 가던 길을 가기 위해 그 현장을 떠났으므로 그 후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군인들의 행동은 실제 공격을 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겁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일요일 밤이 되면서 군인들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늘어났다. 일요일 오후 늦게 000는 광주 관광호텔 창문을 통해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남자들이 공수특전단원들에게 야경봉으로 두드려 맞고 발로 차이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런 무자비한 구타는 이제 흔한 장면이 되었다.

    광주사태 초기 상황을 전하는 이 선교사는 공수특전단의 ‘까닭 없는 잔혹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진압 대상이 시위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청년이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선교사의 이런 관찰은 사태가 마무리되는 5월27일 이후까지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으며,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곁들여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이 글을 쓴 선교사 자신을 지칭 : 옮긴이) 일요일 오전에 시외의 시골에 나갔다가 오후 일찍 돌아와 밤에는 시내에 있는 교회에 들렀으나 그 어떤 불상사를 보거나 들은 바가 없다. 무자비한 구타 행위는 주로 특정 장소나 대로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못된 전라도 놈들 죽이러 간다”

    『〈5월19일 이후의 사태 전개〉

    5월19일 월요일, 하루 전 일요일에도 공수특전단원들의 무자비한 구타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월요일에 집중적으로 나왔다. 필자의 가족들만 그런 불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남을 통해서라도 들은 바가 없는 것 같다.

    심각한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맨 처음 들어온 것은 월요일 아침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미 문화원장 데이빗 밀러가 관공서 건물을 방화하려는 시도(시도들?)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려준 월요일 오후에 처음으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소규모의 저항이라고 할 만한 일이 처음 벌어진 것이다.

    000의 목격담에 따르면 일요일 오후 3명의 군인이 한 행인을 구타하자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돌을 던졌다. 군인 한 사람이 계속 청년을 구타하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의 군인이 돌을 던진 사람들을 쫓아갔으나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월요일에도 돌을 던지는 투석 저항이 이어졌다.

    특전사 부대원들이 청년들을 찾아내기 위해 집을 수색한다는 보고를 처음 들은 것은 월요일이다. 시내버스를 세워 청년들을 내리게 한 다음 구타했다. 공공건물과 식당 건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이 개인주택도 수색을 하는지는 확실치 않다(광주 시민들은 특전사 부대원들이 개인주택도 수색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음).

    한 한국인 목사(필요하다면 이름을 밝힐 수 있음)는 특전사 부대원들이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못된 전라도 놈들(no-good cholla-do rascals)을 죽이러 간다’고 한 말도 들었다고 한다. 다른 목격자는 토요일 대전행 기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처럼 기강이 해이해진 행동을 하는 특전사 부대원들을 보았다고 한다. 또 조선대학교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술에 취해 있던 것이 분명하며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폭동이나 약탈은 전혀 없었다

    『그 군인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으며, 술을 먹였다는 소문도 있고, 또 거친 행동을 하도록 약을 먹였다는 소문도 있다. 소녀들의 옷을 벗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당사자들의 증언에 따른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우리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없다.

    공수특전단 대원들이 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말을 듣기 이전에는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동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가혹행위에 대한 얘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후에도 우리는 시위대가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장 진압 병력이 광주시에서 물러난 뒤에도 시위대들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동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무장 병력이 시위대를 진압할 때를 빼고는 광주에서는, 예를 들어 미국의 마이애미 사태처럼 도심에서 폭동이 일어나 무질서한 약탈이 벌어진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다.

    우리가 알기로는 월요일(5월19일) 이후에는 광주 시내에서 공수특전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 한밤중쯤 퇴각한 것으로 보이며, (전라북도에 주둔하고 있던) 다른 병력으로 대체되었다.

    5월21일 수요일 아침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진압 경찰이나 군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길거리의 시민들이 시위 학생들에게 성원을 보내고 광주시 전체가 학생들의 시위를 거들고 같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5·18 사건은 광주 시민 차원의 일이며, 학생들만의 시위로 한정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은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지만, 이것이 사태의 진실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요일 아침, 남녀 청년들이 픽업 트럭과 버스, 군용차나 경찰차에 올라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길가에는 젊은이와 노인들이 늘어서서 이들을 환영하며 성원을 보냈다. 필자는 한 여인이 차에 탄 청년들에게 음료수를 주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술을 주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술에 취한 학생도 없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극적인 일이다. 우리는 사상자에 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공수특전단이 철수한 뒤로는 무자비한 잔혹 행위가 일어났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진압 병력이 교체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광주의 상황이 무장 대치라는 형태에서 폭동 진압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광주 기독병원에 실려온 부상자 가운데 첫 사망자는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총검에 등을 찔린 사람이었다.』

    선교사들이 시민 구타 막아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직간접적 개입 여부는 사태 내내 광주 현지의 논란거리였다. 하지만 5·18 이후 시위대의 구호에 ‘반미’는 섞여들지 않았다. 선교사의 증언에서도 ‘반미’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쓴 이 기록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활동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주관적인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이번에 진압 군인을 비폭력적으로 제지하면서 미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한 단원은 군인한테 몽둥이로 구타당하고 있던 시민을 두 팔로 감싸 안아 구타를 막았다. 구타하던 군인은 그 시민을 내버려둔 채 다른 사람을 골라 두드려 패기 시작했고 그러자 평화봉사단원이 또 그 사람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함께 거주하는 우리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평화봉사단원들이 수많은 광주 시민이 미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는 점에 아무런 이견 없이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 단원들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봉사해야 할 대상인 시민들과 생명을 같이 나누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과 미국인이 진심으로 사태를 걱정하고 있음을 모든 이에게 보여준 셈이다.

    우리 선교사들은 주님에 대한 복종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지켰을 뿐이지만, 평화봉사단원들은 광주를 떠나라는 평화봉사단 상부의 지시에 거역하면서까지 광주 시민들 곁을 지켰다. 만약 평화봉사단 본부가 광주 현지에서 우리가 겪은 상황을 똑같이 겪었다면 봉사단 본부에서도 광주의 봉사단원들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했으리라고 본다.』

    5월15일부터 6월4일까지 20일간 광주 현장을 기록한 선교사의 이 증언은 광주사태 전 기간을 네 부분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5월18일 이전의 배경과 19일부터 22일까지의 사태 발단시기, 그 후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의 협상기간, 마지막으로 27일 이후의 광주이다.

    일부 기록에서 지칭 대상을 애매하게 표기하거나 표현이 또렷하지 않은 등 서둘러 작성한 흔적이 엿보이긴 하지만, 사태 전 과정을 시기별로 정리해 기술하고 자신의 견해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는 문장력이 돋보인다.

    공산주의 사주나 불순분자 침투 없어

    다음은 사태 전개 3기에 해당하는 23일부터 26일까지의 기록에 이은 증언의 마지막 부분이다. 필자 자신이 파악한 광주사태의 분석도 덧붙여져 있다.

    『〈5월23일부터 26일까지의 상황〉

    금요일에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나흘간은 군과 시민이 협상을 벌인 기간이다. 수습대책위원회라는 시민측이 주도권을 갖고 협상이 이루어졌다.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도 단 하루도 총성이 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000에 의하면 군인들의 광주 재진입이 협상을 통해 네 차례나 연기되었다고 한다.

    금요일 아침, 한 선교사 가족은 뒷동산에서 두 명의 군인을 봤으나 서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고 한다.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한 강경파 학생들은 대다수 협상안 수용을 거부하지 않았으나, 일부 학생들은 협상에서 조금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살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그룹을 지칭 : 옮긴이)이 문제였다.

    진압군에 의한 광주 재점령은 사실상 군인에 의한 재점령을 반대하지 않았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큰 피를 부르지는 않았다고 본다. 실제로 진압군에 의한 광주 재점령을 반대한 유일한 그룹은 우리가 보기에는 자살그룹이었으며, 고등학생도 일부 이 그룹에 들어 있었다.

    〈5월27일부터 6월4일까지〉

    5월27일 화요일 여명에 광주시는 진압군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진압군의 광주 재진입에 따른 후속 작전은 크게 보아 보복이라기보다는 끝까지 무기 반납을 반대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조치였다. 5·18사건(incident)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한 것도 아니고, 불순분자들이 침투해 그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광주를 재점령한 군인들은 그들이 공산주의 폭도를 상대로 작전을 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진압군에게 그런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진압군이 공산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희생자가 비교적 적을 만큼 자제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 : 옮긴이)이다.

    5·18사건을 겪고 난 후 우리는 (피해자에 의한 : 옮긴이) 보복의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민측에 동정적인 한 소식통은 “시 당국과의 계약(협상 결과를 말하는 것 같음 : 옮긴이)은 당국에 의해 깨졌으며 약속은 이미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무효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 만약 당국과의 약속이 무효가 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가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만약 당국과의 약속이 정말 무효가 되고 말았다면 이처럼 조용하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시민들을 포승줄로 묶어 연행하는 계엄군.

    약식으로 기록한 것이 이 정도의 장문이 되었다면,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해 보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 생애를 통해 한국인 친구들에게서 이처럼 경이로운 자긍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5·18을 겪으면서 내가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한국인들을 겪으면서 가장 한국인다운 점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았다. 한국인은 대가를 치러 선(善)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 선을 성취하려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첫 비극 며칠 후 군인들이 보여준 자제심과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던 현실의 순간에 시민들이 보여준 자제력과 원칙을 존중하는 자세가 특히 그렇다.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다.

    ① 광주는 폭동이 난무한 도시가 결코 아니었다. 시민들의 분노로 24시간 동안 일부 제한된 특정 지역에서 폭동 형태의 행위가 있긴 했지만, 그 시간조차도 광주시는 혼란스럽지 않았으며 광주 시민들은 이른바 폭동의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파괴적인 격분의 와중에서도 시 전체는 차분했고, 시민들은 길거리에서든 집안에서든 아주 안전했다.

    ② 광주는 또한 학생들이나 반정부 시위대 때문에 위험했던 지역이 결코 아니었다. 위기를 맞아 한데 뭉친 도시였다. 그 위기는 외부로부터 닥친 것이었고 시민들을 결집시켰다. 시민들은 심지어 진압 경찰도 무고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의 증오는 아주 못되게 행동한 공수특전단과 중앙정부에 대한 것이었으며, 중앙정부는 광주가 보기에 전적으로 형평을 잃고 있었다.

    ③ 시민의 권리와 인권, 민주주의 발전은 광주의 분노의 핵심이 아니었다. 학생 시위대가 이런 것들을 목표로 삼았고, 시민들도 이런 것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광주 사건은 이런 일 때문에 또는 이런 일을 위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광주 사건은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 때문에 일어났고, 그런 행위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④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광주 사건 전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느낀 점 한 가지는 시민 전체가 기적에 가까울 만큼 자제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소문과 사실 구분하려 애써

    선교사의 이 13일간의 기록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것으로 봐야 한다. 주한 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별도로 작성된 것인지, 아니면 필자가 자발적으로 작성해 대사관에 보낸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글 전개 방법이나 강조하는 대목들로 미루어 볼 때 광주의 진상을 알리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난다.

    필요하다면 더 상세한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고, 글 끄트머리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기술해놓았다. 또 자신이 직접 확인한 사실과 간접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구별 짓고, 소문과 사실을 구분하려고 애쓴 흔적도 역력하다.

    작성일은 6월5일부터 6일까지 이틀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5월27일 진압군의 광주 재점령으로 사태가 일단락된 뒤 사후 평가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사태 발단 시점, 진압군과 시민 수습대책위원회의 협상 핵심 내용 등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시간대별로 기술하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 현지 증언록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광주 현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함몰되지 않은 채 사태가 마무리된 지 10일 만에 사태의 발단, 전개, 마무리라는 기본 틀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전체 골격을 짜임새 있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최초 발포 시기, 전체 사상자의 대략적인 숫자와 피해 정도, 병력 이동, 수습대책위원회 활동 등 보다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는 필자도 밝혔듯이 요약된 기록이라는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록은 사태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고 현지 분위기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것으로 귀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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