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수업도 없이 3년간 혼자서 논문만 쓰라고?

한국·미국과 다른 영국의 대학원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0-03-04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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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사과정을 마친 지 10년 만에 두 아이를 데리고 ‘감히’ 영국 유학을 결심한 데는 영국의 대학원이 한국이나 미국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학부 3년, 석사 1년, 박사 3년이라는 기간만 보면 ‘가방 끈 늘이기’에 영국만큼 수월한 곳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같은 학제는 기본적으로 영국의 고교과정과 대학입시제도와 맞물려 있어 외국인 학생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럽다.
    수업도 없이 3년간 혼자서 논문만 쓰라고?

    영국 글래스고대 전경

    나이 마흔에, 아직 어린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영국으로 다시 유학을 결심한 내 사정에 대한 주위 반응은 두 가지였다. “미쳤구나!” 하는 직설적인 반대의견과 “너무 멋져요. 용기가 대단하세요!” 하는 감탄 섞인 선망. 재미있게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그토록 철이 안 드니” “나이 들었는데도 그렇게 무모하니”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던 반면, 친분이 덜한 사람일수록 “멋져요” “근사해요” “분명 잘할 거예요” 같은 격려가 많았다. 친정 식구들이나 친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를 뜯어말렸다. 반면에 전 직장 동료들이나 일을 하면서 알고 지낸 출판사 편집자들은 모두 훌륭한 계획이라면서 나를 한껏 치켜세웠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부정과 긍정의 반응이 친분 정도와 반비례해서 나타난 셈인데, 그렇다고 나를 격려해준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분들의 칭찬과 격려는 당연히 고맙게 여기고 있다. 아마도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유학으로 얻을 수 있는 성취보다는, 딱하다면 딱한 나의 처지-아이 둘을 돌보면서 혼자 공부해야 하는-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나이에 비해 철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 역시 이번 유학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될지는 떠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내가 글래스고대학으로부터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은 것은 2008년 초의 일이다. 그러나 막상 2008년 중순이 되어 짐을 싸려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여덟 살, 네 살인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비행기를 탈 용기도 없었고, 한국에 홀로 남을 남편 걱정에다 겨우 장만한 아파트(그 아파트가 상징하는 안락한 생활)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이제 좀 편하게 살까 하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나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학교에 입학을 한 해 미뤄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학교가 허락해준 한 해 동안 과연 이 때늦은 유학을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수없이 갈등한 끝에 2009년 8월,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도망치듯 유학을 떠나온 것이다.

    마흔 살 유학은 미친 짓?

    막상 영국에 와보니 “나이 마흔에 유학은 미친 짓”이라면서 나를 뜯어말리던 친구들의 말이 백 번 옳았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 한국에서 별다른 지위나 직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누리던 모든 기득권과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새삼 학생 신분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고 추운 집에, 말이 안 통해 친구도 사귀지 못하는 딱한 아이들, 그리고 좁은 부엌에서 10년 만에 김치를 담근다고 끙끙대다보면, “어휴, 내가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하는 한탄이 입에서 절로 나온다.



    하지만 내가 친구와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학을 떠나온 것은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다. 나는 10년 전에 런던의 시티대학교에서 예술경영과 예술비평 복수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국의 석사학위(MA, 또는 MSc)는 1년제다. 그래서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업 들으랴, 시험 치랴, 심포지엄 참가하랴, 튜토리얼(Tutorial) 하랴, 논문 쓰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박사과정에 비하면 다분히 짧고도 형식적이지만, 영국의 대학원에서는 석사과정도 튜토리얼을 해야 한다. 교수와 학생이 1대 1로 만나 논문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는 수업방식인데, 이 튜토리얼은 영국의 대학원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외국 학생으로서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지도교수와 1시간 이상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석사 시절 튜토리얼 당시 내가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라치면, 지도교수는 웃으면서 “그건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해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수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럼 이 주제는 교수의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다” 하고 넘겨버리고 다른 주제를 찾아내 이야기하곤 했다. 그렇게 숨가쁜 1년이 지나고, 마지막 3학기가 끝날 무렵(영국의 대학원은 보통 가을, 겨울, 봄의 3학기로 구성된다), 갑자기 지도교수가 “박사과정에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3주간 덴마크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 다녀오는 바람에 빠진 수업들을 보충하느라 정신이 없던 차라 교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눈을 깜박이다 “아니요, 저 박사과정 진학할 생각 없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교수는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 나는 네가 당연히 박사과정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나는 튜토리얼에서 교수가 가끔 얘기하던 “그건 박사과정에 가서 해라” 하는 말이 박사과정 진학을 권유하는 영국인 특유의 ‘간접 화법’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별생각 없이 교수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네, 그럼 이 주제는 나중에 할게요”라며 넘어갔는데, 교수는 내 말을 박사과정에 진학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는 영어로 시험 치고 논문 쓰는 일에 질려 있었던 데다, 계속 학교를 다닐 경제적 여유도 없었던 터라 교수의 제안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논문 준비 확실해야 입학 가능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직장에 다니고 아이를 키우는 바쁜 와중에도 가끔 교수의 제안이 흐린 밤하늘에 슬쩍 드러나는 초승달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러고는 ‘교수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나한테 공부를 계속할 소질이 조금은 있는 것 아닐까’하는, 가당찮은 망상도 불쑥불쑥 들곤 했다. 그러다 어영부영 나이 마흔에 이르고, 더 이상 허튼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자 교수의 제안은 점점 더 자주 내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나는 ‘그래, 까짓거 한번 저질러나 보자’하는 심정으로 영국 대학 세 곳의 박사과정에 지원했고, 그중 두 군데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내가 만약 미국에서 석사를 마쳤다면,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감히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길에 오를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석사를 마친 지 10년 만에 새삼 박사학위를 시작할 마음을 먹은 것은 우리나라나 미국과는 조금 다른 영국의 독특한 대학원학제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영국의 대학원 박사과정에는 ‘수업’이 없다. 우리는 흔히 박사과정을 ‘코스 2년, 논문 2년’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영국 박사과정은 ‘코스 없이 논문만 3년’이다. 수업이 없으니 중간에 시험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교수와의 튜토리얼, 그리고 연 1회 제출하는 연구진행 보고서가 전부다. 그리고 박사 논문을 제출하면 논문 제출 후 3개월 안에 ‘바이바(Viva Voci)’라고 하는 구두시험을 치른다. 구두시험을 통과한 학생은 그해 6월이나 11월에 열리는 졸업식에서 학위를 받는다.

    그러니 영국 대학원의 박사과정은 미국이나 한국의 대학원보다 원칙적으로 1년 빠르고, 시간을 구속하는 수업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번 도전해볼 만하지 않은가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내 주위 사람들은 “대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수업은 어떻게 들으려고?” 하면서 날 뜯어말렸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 와서 박사과정을 시작해 보니 ‘한번 해볼 만하지 않나’하고 생각했던 내가 참으로 어리석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문제는 영국에서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모든 학생은 학생이기보다 한 사람의 연구 인력으로 취급받는 데 있었다. 영국의 박사과정 커리큘럼에 수업이 없는 것도 이런 전제 때문이다. 이미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굳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게 박사과정에 대한 영국 대학의 시각이다.

    영국의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학생들은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박사과정에 지원할 때 학생들은 연구계획서(Research Proposal)를 내야 하는데, 연구계획서는 논문 주제와 내용, 연구 방법론 등을 간략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 이 연구계획서를 희망하는 대학원의 입학담당 교수나 학과장, 아니면 자신의 논문 주제와 가장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에게 보내는 것이 영국 대학원에 지원하는 방법이다. 물론 외국인 학생은 영어 시험 점수를 내야 하지만 이 연구계획서와 석사과정 지도 교수의 추천서 외에 박사과정 지원에 필요한 서류는 거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영국의 대학원은 자신의 논문에 대해 확실한 준비가 되어있는 학생만 받는 셈이다.

    대입, 전공 관련 과목만 평가

    수업도 없이 3년간 혼자서 논문만 쓰라고?

    영국 글래스고대 도서관

    미국이나 한국의 대학원처럼 2년간 수업을 들은 후에 논문을 시작하는 게 좋은지, 영국처럼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논문을 시작하는 게 좋은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얼른 보기엔 수업에 2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영국의 대학원이 훨씬 효율적일 듯싶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지 모르시는 말씀이다. 수업이 없는 대신 영국 대학원에서는 지도교수가 학생을 일일이 지도해주기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수업이 없으니 학생이 교수를 만날 기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튜토리얼뿐인데, 이때 교수는 학생이 미리 낸 연구보고서 초안(Research Draft)을 보며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사실 말이 ‘제시’지 교수는 학생이 나간 진도에서 한 발자국도 더 앞서나가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방향은 좀 잘못되었고 저러한 이론에 의거해서 논문을 진행시키면 좋겠다는 조언이 전부다. 학생은 안개 낀 숲에서 길을 찾아가듯이 혼자서 이런저런 책과 연구 논문들을 찾아 읽으며 조금씩 자신의 논문을 진척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적잖은 한국 학생은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며 큰 혼란을 겪는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공부는 해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하니 말이다. 나와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한 한국 학생의 말을 빌리면, 미국이나 한국의 대학원에서는 물에 빠진 학생을 일단 건져준 후에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는데, 영국 대학원에서는 물에 빠진 학생이 혼자 힘으로 물 밖으로 나올 수 있는지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온 학생은 지도교수가 이끌어주고, 물 밖으로 못 나오는 학생은 빠져 죽도록 가만히 둔다나? 생각만 해도 눈앞에 물이 차오르는 듯, 으스스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한국 남학생은 교수와 학생이 모두 공인하는 대단히 우수한 학생이다.

    영국의 대학원이 이처럼 연구에 비중을 두는 이유를 헤집어보면, 영국의 독특한 대학입시 제도에 그 원인이 있는 듯싶다. 영국의 대학교는 대부분 3년제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양과정’을 공부하지 않고 바로 전공과정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의과대학도 의예과가 없이 1학년부터 바로 의과대학 본과 수업을 시작한다고 들었다.

    이는 고교과정에서 배운 대부분의 과목을 평가하는 우리의 대입 시험과 전혀 다른 영국의 대입 시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흔히 에이 레벨(A-LEVEL)이라고 하는 영국의 대입 시험은 선택형이다. 학생은 여러 개 과목 중에 자신이 원하는 전공 관련 과목 서너 개를 선택해 그 과목에 대해서만 시험을 치르면 된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려는 학생은 에이 레벨의 여러 과목 중 역사나 문학, 지리 등 역사학과와 관련된 과목 서너 개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 서너 개 과목을 2년간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대입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대학에 지원한다. 대학 입학시험은 면접으로 결정되는데 대학마다 면접 일자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군데 대학에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 단 ‘옥스브리지’라고 불리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시험 날짜가 동일해서 두 군데 중 한 군데만 지원해야 한다.

    이런 입시제도 때문에 영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자신이 전공할 학문에 대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리고 1학년부터 3년간 전공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수업을 듣는다. 대학원과정도 석사 1년, 박사 3년에 불과하니 영국 학생들 중에는 20대 초반에 박사학위를 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도 스물세 살에 에든버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체 뭘 가르쳐줘야…’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과정을 사실상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학문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영국 대입 제도의 장점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제도의 폐해가 종종 지적되고 있다. 대입에서 서너 과목의 시험만 치르기 때문에 시험을 보지 않는 과목에 대해서는 자연히 소홀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기초적인 수학이나 물리학 이론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BBC 뉴스를 보면 특히 학생들의 수학 문제 해결 능력이 갈수록 뒤처진다는 우려 섞인 보도가 많다.

    박사학위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열심히 공부하면 3년 안에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분명 영국 학제의 큰 장점이다. 내가 다니는 글래스고대학의 대학원 요강을 보면 박사학위는 최소 3년, 최대 6년 안에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외국 학생들은 4년이나 5년 만에 학위를 받는 경우가 많다. 6년 안에 학위를 받지 못하면 박사보다 하나 아래 학위인 연구석사(MPhil) 학위를 받고 대학을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한 통계 조사에 따르면 영국 대학에서 6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는 데 성공하는 학생의 비율이 66%에 불과하다고 한다. 외국 학생들은 날로 강화되는 비자법 때문에 영국에 6년씩이나 체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3년 안에 반드시 학위를 받을 거야” 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아무튼 막 박사과정에 들어왔는데, 들어온 순간부터 논문을 쓰라니 어찌 보면 황당한 일이다. 중간 중간 단과대학(Faculty)에서 열리는 세미나나 워크숍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전공 수업이 아니라서 학생 개개인이 공부해야 할 방향에 대한 세세한 지침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아니, 대체 가르쳐줘야 쓰지. 혼자서 뭘 어떻게 쓰라는 거야?’ 하고 소리치고 싶어도 어디 들어줄 사람도 없다. 그러니 매일 연구실에서 바짝바짝 타는 입술로 이것저것 자료만 애타게 뒤적일 수밖에 없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난 1월 초부터 연구실 동료인 앤디가 타닥타닥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앤디, 너 요즘 새로 영화리뷰 쓰니?”하고 물었더니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앤디는 나와 같이 2009년 9월말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들어온 지 석 달 만에 논문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아이고, 나는 아직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너 혼자 논문 쓰면 어떡해? 너, 나보다 1년은 빨리 졸업하겠다” 하고 하소연하는 것도 잠시, 1월 말에 열린 튜토리얼에서 만난 지도교수는 “지난번에 낸 리서치 드래프트 잘 읽었다”며 이제부터 논문의 첫째 장을 쓰기 시작하라고 한다. 지도교수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날아오를 듯 기뻤지만 막상 교수 연구실을 나오는 순간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수님, 아는 게 있어야 논문을 쓰지요. 대체 뭘 쓰면 되나요?” 하고 하소연이라도 해볼 것을.

    자나 깨나 논문 생각

    요약하자면 짧지만 매우 집중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공부하는 게 영국식 박사과정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언뜻 보기엔 온화하고 물렁해 보이지만 막상 경험해보면 예상외로 깐깐한 영국인의 성격처럼, ‘혼자 하는 공부’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한 영국 교수가 말한 대로 연구실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주중이나 주말이나 쉬지 않고 자신의 연구 주제를 생각하며 연구에 대한 윤곽을 잡아나가야 한다(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난 이 교수님은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만이라도 연구 생각은 싹 잊고 놀려고요” 하는 내 말에 “박사과정 학생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잠자는 동안에도 논문 주제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수업도 없이 3년간 혼자서 논문만 쓰라고?
    전원경

    1970년 출생

    연세대, 런던 시티대 대학원(석사) 졸업

    월간 ‘객석’, ‘주간동아’ 기자

    저서 :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역사가 된 남자’ 등

    現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그런데 신기하게도 혼자 매일 논문과 책을 파고드니 조금씩 길이 보이는 듯싶다. 어렵기만 하던 이론들도 하나씩 이해가 되고, 지난번 튜토리얼 때 지도교수로부터 지적받았던 부분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연 내가 물에서 혼자 헤엄쳐 나와 지도교수로부터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 아니면 꿀꺽꿀꺽 물만 마시다 물 밑으로 꼬르륵 가라앉고 말 운명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사실 나는 수영에 영 젬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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