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공포영화 좋아하는 도시미인 김혜나

순진한 노랑머리가 카멜레온 같은 연기자로… “와인처럼 살고 싶어요”

  • 글·최영일│문화평론가 vicnet2013@gmail.com│정호재│동아일보 통합뉴스센터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0-03-05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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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영화 좋아하는 도시미인 김혜나
    김혜나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성격까지 싹싹한 도시형 미인이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해 먼저 시작된 사진촬영 광경을 구경하노라니, 어떤 패션이라도 눈도 깜짝 않고 능숙하게 소화할 것 같은 도전적 성격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실물은 출연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게다가 언뜻 포털사이트에서 본 프로필 사진에 불만이 생겼다.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여배우가 인터넷상에선 왜 실물의 미학을 반영하지 못했나” 싶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그녀의 이미지는 시시각각 변했다. 진짜 얼굴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마치 중국의 변검술사처럼, 김혜나라는 인물은 한두 가지 콘셉트로 정리하기 힘들었다. 결국 ‘설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자 김혜나는 물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0년 가을에 태어난 그녀는 21세기의 도래와 함께 영화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2001년 독립영화 ‘꽃섬’에 주연으로 데뷔하며 영화계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것. 극중 인물 역시 실제와 같은 이름의 ‘혜나’. 이후 지금까지 그녀가 출연한 상업영화는 적지 않다. 2003년 ‘거울 속으로’를 비롯하여 ‘아는 여자’‘신부수업’‘레드아이’‘역전의 명수’ 등을 두루 거쳤다.

    2008년에는 엄마 봉순(김해숙 분)이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경축! 우리사랑’에서 봉순의 딸을 연기했다. 지난해 개봉작 ‘요가학원’에서는 얽히고설키는 여성의 욕망을 연기했고, 올해 ‘카페 느와르’와 ‘연인’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거의 매년 한 편의 작품에 출연한 셈이다.



    또한 대중이 잘 모르는 다양한 독립영화의 필모그래피까지 그 틈바구니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무려 10년간 15편에 출연한 강행군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사이사이 쉬지 않고 연극무대에도 섰다는 점이다. 게다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KBS ‘못 말리는 결혼’에 출연했고, 현재 안방극장에서 주부들을 울리고 웃기는 KBS 아침드라마 ‘다 줄 거야’에서 열연 중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무슨 연기를 뽑아내는 기계도 아니고. 이쯤 되면 인터뷰 장소에 진한 다크 서클을 눈가에 드리우고 피로에 전 히스테리를 달고 나타날 만도 한데 지금 눈앞의 그녀는 밝게 웃으며 즐겁게 대화를 즐기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혜나는 카멜레온이다”

    ▼ 김혜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한 단어로 표현해주세요.

    “어? 첫 질문부터 너무 센데요? 어렵다. 음, 좋아요. 카멜레온? 저는 계속 변해왔어요. 지금도 변하고 있고요.”

    ▼ ‘천의 얼굴’을 가진 여배우?

    “그렇다고 말씀드리긴 쑥스럽고. 결국 자기자랑으로 시작했네요?(웃음) 10년 넘게 활동했고 지금도 활동 중이지만 일반 관객이 저를 쉽게 못 알아봐요. 저는 어떤 작품에서든 캐릭터에 녹아들어요. 그래서 제가 나오는 영화를 여러 편 본 분들도 등장인물이 모두 저라는 걸 연결짓지 못하시더라고요. 제가 봐도 신기할 따름이죠.”

    ▼ 그래서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면?

    “첫 작품부터 징조가 있었어요.(웃음) 데뷔작 ‘꽃섬’ 시사회 때 제 모습이 담긴 엄청나게 큰 포스터 앞에 감독님과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관객분이 와서 감독님께 사인을 받더니 이 여배우는 왜 함께 안 왔느냐고 묻는 거예요. 제가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요. 그렇다고 여배우가 ‘이게 저예요!’라고 외칠 수도 없고.”

    김혜나는 극중 캐릭터와 실제인물이 대중의 인식에서 분리되는 이런 기현상이 10년 동안 줄곧 이어져왔다고 토로했다.

    “될성부른 떡잎?”

    공포영화 좋아하는 도시미인 김혜나
    ▼ 카멜레온의 끼를 감지한 건 몇 살 때쯤이었나요? 성장기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게 말이죠…,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요. 학창생활 내내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는 것만 하고 말도 별로 없고, 친구들과 나가 놀지도 않고, 조용한 아이였지요. 틈나면 책이나 읽고. 연기를 한다는 건 주변에서나 저 스스로나 생각도 못해봤어요.”

    ▼ 끼를 늦게 발견했군요.

    “아, 생각난다. 다섯 살, 여섯 살 땐가 찍은 사진이 있어요. 제 여동생과 둘이 찍은 사진인데 멋진 소파에 제 동생이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고 저는 옆에 서서 울고 있어요. 엄마한테 ‘이게 무슨 사진이야?’ 물었더니 서로 의자에 앉겠다고 싸웠는데 제가 동생한테 얻어맞고 졌대요. 여동생에게도 지는 순진한 애였어요.(웃음)”

    ▼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연기를 전공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진학하게 된 건가요?

    “고등학교 때 전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결사반대를 하셨어요. 평범한 거 하라고, 그래서 국문학과를 갈까도 생각하다가 고3 때 본능적으로 예체능반에 갔죠. 대학 지원 때까지 진로에 대한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담임선생님도 아닌 생물선생님이 불러서 한예종이란 대학이 있는데 원서를 내보라고 알려주셨죠. 그래서 내봤는데 덜컥 합격한 거죠.”

    ▼ 그렇다면 나중에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게 되면 생물선생님을?

    “당연하죠!”

    ▼ 지원은 그렇게 했다 치고 어떻게 합격을 했나요? 경쟁률도 엄청났을 텐데….

    “우연의 연속이죠. 제가 그때 머리도 노랗게 염색하고 날티나게 입었어요.(웃음) 다 선발하고 저와 미모의 한 여학생이 남았는데 교수님들이 한예종에 날라리도 하나 있어야 한다고, 저를 뽑았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날라리는커녕 숫기 없는 아이였던 거죠. 어찌됐건 한예종의 창립 정신과 잘 맞아떨어지는 합격생이었던 셈이에요.”

    “김혜나의 변신은 무죄”

    ▼ 그런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요?

    “대학 첫 학기도 고등학생처럼 생활했어요. 시키는 것 얌전하게 하고, 친구나 선배가 도와달라면 도와주고. 그런데 스스로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착한 아이로 고마워하기보다는 이용하기 좋은 아이? 그런데 한 학기 지켜본 교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 잘해야 돼. 네가 잘못되면 널 선택한 내가 잘려’, 그래서 첫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 개강하자 전 강의실 앞에 나가 선언했어요. ‘나 이제부터 싸가지 없어질 테다!’(웃음)”

    ▼ 반응은?

    “친구들은 피식 웃었죠. 하지만 졸업할 때 다들 ‘너 그때 못되지겠다고 하더니 진짜 못되졌다’고요, 저는 인정했죠.(웃음)”

    ▼ 이젠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나요?

    “아뇨. 전 천성이 내성적이고 차분한가 봐요. 하지만 연기자로선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개발하는 거죠. 독립영화 배역들이 아시겠지만 뭐 낙태한 젊은 여성, 열악한 환경에서 몸부림치는 터프한 역에 독한 인물, 이런 거잖아요? 배우가 극중에서만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촬영 내내 그 캐릭터를 가슴속에 담고 생활해야 해요. 처음엔 역할을 소화해내기 힘들어 진짜 많이 울었어요.”

    개봉 대기 중인 ‘카페 느와르’

    ▼ 지난해 개봉된‘요가학원’이 흥행에 실패했어요. 배우 입장에선 안타까울 텐데….

    “흥행에 연연하지 않아요. 전 주로 대본을 읽고 출연작을 결정하는 편인데 제가 함께한 작품들은 다 대본이 좋았어요. 캐릭터도 살아있고. 초기에 1년을 기다려 출연한 ‘거울 속으로’도 그랬고, ‘요가학원’도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소름이 돋았어요. 개봉 후 반응에 전 별로 신경 안 썼는데 동료들이 인터넷 검색을 하고 ‘대박 났다고 한숨을 쉬더군요.”(여기서의 ‘대박’은 흥행이 바닥을 쳤다는 반어법이다)

    ▼ ‘거울 속으로’‘레드아이’‘요가학원’ 등 공포물 출연이 많은데 혹시 호러퀸을 꿈꿨던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요. 공포영화 촬영이 재밌어요. 특수분장에 피도 튀어있고, 뭔가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높아요. 귀신 분장하고 감독님 놀래주는 것도 신나고.(웃음) 코믹영화는 볼 땐 재미있지만 현장은 반대로 지겹거든요. 호러는 재미있어서 해요. 연기의 생동감과 만족도도 높고요.”

    ▼ 이제 개봉을 앞둔 ‘카페 느와르’ 얘긴데요. 걱정이 많아요. 몇 분짜리 필름이죠?

    “2시간 78분요.”

    ▼ 네?

    “2시간78분. 그러니까 3시간18분이요.(웃음)”

    ▼ 큰일이네요. ‘아바타’보다 길군요.

    “그런데 재미있어요.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아요. 감독님은 딱 맞게 찍었다고 하셔요. 여운이 오래가고 곱씹어볼수록 좋은 작품이에요. 잘될 거라고 믿어요. 꼭 보세요.”

    ‘카페 느와르’는 한국 영화평론가 1세대인 정성일씨가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으로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각색한 것이다. 김혜나는 신하균, 문정희 등과 함께 이 작품에 출연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정성일씨의 평론으로 난도질당했던 한국 영화제작자와 감독들이 일전을 벼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동안 씹기만 해온 당신은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자’라는 심리이리라.

    김혜나의 콤플렉스

    ▼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들고, 무대에도 서고 전문배우로서는 행복한 삶이네요.

    이 대목에서 김혜나는 잔뜩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털어놓는다. “그런데 모르시죠? 저 뮤지컬도 했어요.”

    ▼ 엇, 노래까지?

    “그런데 말이죠. 제가 노래가 안돼요.(웃음)”

    ▼ 뭡니까 그럼, 어떻게 뮤지컬을 하세요?

    “뮤지컬 ‘그리스’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는데 연출자께서 제 노래를 들으시곤 노래가 별로 없는 역할로 빼시더라고요.(웃음)”

    ▼ 그럼 앞으로 뮤지컬은 안 하시겠네요.

    “도전해야죠. 제가 노래가 꽤 늘었어요.”

    ▼ 노래방 애창곡은요?

    “이은미씨 노래들. ‘헤어지는 중입니다’같은 신곡도 좋아하고 ‘애인 있어요’도 부르고요.”

    김혜나는 ‘이해할께’를 부른 가수 김현성과 커플로 알려져 있다. 남자친구가 가수여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고 답한다. 국내에서 가장 존경하는 배우는 배종옥, 해외 배우로는 메릴 스트립이라고 했다. 역시 인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연기의 도를 틔우는 지향을 드러낸다.

    배우 김혜나는 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데뷔작 ‘꽃섬’으로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고, 그녀를 슬럼프에서 끌어내준 작품 ‘내 청춘에게 고함’과 ‘허스(Hers)’로 전주국제영화제 JJ 스타상을 받고 폐막작으로 선정되는 영광도 누렸다. 2009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에 단편영화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흥행하기 쉽지 않은 영화 ‘카페 느와르’를 꼭 보라기에 “왜 꼭 봐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제가 연기를 너무 잘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김혜나. 그녀는 연기를 천직으로 알고 끊임없이 새로운 캐릭터에 몰입해 즐기는 것이 바로 ‘행운을 만드는 법’이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점점 더 맛과 빛을 발하는 ‘와인’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단다.

    “저는 갑자기 찾아오는 행운과는 안 친한 것 같아요. 대신 천천히 오래 성장해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요.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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