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줌 인

“오렌지색과 빨간색 차이 나중에야 깨달았다”

‘김성근의 아들’ 김정준 전 한화 이글스 코치

  • 이영미|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7-10-2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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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털 코디네이션’과 ‘월권행위’의 경계
    • 김성근 비난은 팀이냐 선수냐의 관점 차이
    • “선수 부족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어야”
    • ‘우린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왜 결과가 안 나올까’ 고민
    김정준(47) 전 한화 이글스 코치(이하 호칭 생략)를 만나려 한 것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구계에서 ‘김성근의 아들’로 살아온 세월을, 그 여정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접한 야구. 그리고 매우 짧은 선수 생활(1992년 LG 트윈스 2차 9순위로 지명받고 입단, 입스(YIPS) 증세로 1년 만에 방출, 1군 5경기에 나서 14타수 2안타 1득점 2삼진 기록). 은퇴 후 LG 트윈스에서 기록원 일을 시작한 그가 전력분석원 김정준보다 ‘김성근의 아들’로 부각된 것은 아버지가 LG 트윈스 사령탑을 맡고나서부터였다. LG에서 시작된 아버지와의 야구 인연은 SK로, 한화로 이어졌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혈연보다는 김성근의 야구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전력분석가였기 때문이다.

    지난 5월 23일 김성근 감독이 한화를 떠나면서 아들인 그도 한 달여 만에 보직을 내려놓고 팀을 나왔다. 전력분석에선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때론 누구의 아들이란 굴레가 이런 결정을 가능케 만들기도 한다.



    전력 분석의 대가

    김정준을 만난 것은 9월 중순, 대전야구장 인근의 한 카페였다. 6월에 팀을 떠난 그가 아직도 대전에 머물러 있었다. 10월에 서울로 이사갈 예정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정준은 LG 시절 전력분석 전문가로 성장했다. 이후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에서 전력분석 전문가로 자리 잡으며 ‘SK 왕조’를 세우고 우승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한화에서 맡은 역할은 전력분석 코치였다. 수비 시프트, 상대 투수 분석, 타자의 공격 패턴을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는 역할이었다. 팀마다 파트별 담당 코치들이 존재하지만 전력분석 코치는 토털 코디네이터처럼 모든 부문을 아우르고 관리하면서 선수들의 야구 이해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모습이 ‘월권행위’로 비치기도 했다. 해당 분야 코치들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감독의 아들이란 출신 성분은 김정준의 역할에 선입관을 덧씌웠다. ‘금수저’ ‘옥상옥’ ‘부감독’이란 부정적인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뒤로 넘나들었다. 전력 분석에선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이가 김성근의 아들이란 이유로 공격을 받기도 했고, 때론 혜택을 받기도 했다. 김정준으로부터 그 얘기를 직접 들어봤다.

    김정준 하면 ‘전력 분석의 대가’란 수식어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내가 머리는 좀 큰 편이다(웃음). 나를 왜 대가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김성근의 아들’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아버지가 도움이 된 부분도 있고, 아버지로 인해 손해 본 부분도 있다. 분명한 건 아버지가 없었다면 내가 야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통해 야구를 만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감이 클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일군 환경 덕분에 야구를 다른 시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철이 덜 들었을 때는 아버지와 연관되는 게 너무 싫었다. 모두가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덕이라고 하니 화가 나더라. 그러나 지금은 그런 얘기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아버지의 영향으로만 김정준이 존재했다면 지금까지 야구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빨간색과 오렌지색

    사람들 평가에 신경 쓰는 편인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최근의 지도자 경험을 거론한다면 SK와 한화로 나눌 수 있는데,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성격에 내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굳이 코치로 쓰려 했을까 싶다. 난 아버지를 야구장에선 ‘보스’라고 생각했다. 내 실력을 인정해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닌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SK에선 별다른 잡음이 없었는데 유독 한화에서 부자(父子)관계가 부각되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다. 진한 인생 공부를 했다. 허구연 해설위원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인생을 배웠을 것’이라고. 야구인으로 앞만 보고 살다가 옆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됐다.”

    SK와 한화는 당연히 색깔이 다른 팀이다. 어떤 차이점을 느꼈나.
    “대전에서 생활한 2년 반 동안 계속 고민한 게 ‘우린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왜 결과가 안 나올까’였다. SK 야구를 빨간색이라고 한다면 한화 야구는 오렌지색이다. 빨간색은 본질에 가까운 원색인 반면 오렌지색은 많은 것이 섞인, 더 대중적인 색깔이다. 오렌지가 탱탱해질 수는 있어도 빨간색이 되긴 어렵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빨간색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답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팀마다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 SK에서 하던 빨간색 야구를 한화에 접목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란 생각은 안 해봤나.
    “야구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빨간색으로 성공한 야구가 10년 전의 일처럼 오래된 건 아니지 않나. 사람들은 아버지와 함께 한화에서 행한 야구를 실패로 결론짓지만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선수들, 구단, 한화 이글스 팀 자체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고 믿는다. 좋은 건 받아들이고 나쁜 건 버리고, 그런 과정은 거쳐야 하겠지만 말이다.”

    야구 해설을 하다 김성근 전 감독이 한화 이글스 사령탑에 부임하면서 전력분석 코치로 현장에 돌아갔다. 다시 아버지와 일하게 된 상황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SBS스포츠에서 3년째 해설하며 나름대로 기반을 다진 상태라 갑자기 일하는 터전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았다. 고민이 많았다. 가족들은 내가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아버지한테는 한화가 마지막 프로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을 앞두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는데, 아버지도 내가 들어오길 바라시더라. 3년간 해설을 하면서 프로야구 전체를 들여다본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류중일, 염경엽 전 감독도 현장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해주셔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한화에서는 SK 시절보다 더 행동을 조심했다. 단, 현장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 무게를 간과했던 것 같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 야구인들이 나와 아버지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잘 몰랐다.”

    김정준은 한화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서 “‘바르다’라고 생각하던 부분이 흔들렸다. 틀린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게 흔들리면서 내 자신도 조급해졌다. 한화의 기존 컬러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도 어려움을 안겨줬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LG, SK와는 다른 환경

    전력 분석만이 아닌 코치 역할을 더하면서 오해를 샀다는 생각이 든다. 더그아웃에 들어갈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감독이 코치 직함을 달아줬다고 들었다.
    “한화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전력분석팀 총괄 코치였다. 분석팀을 총괄 관리하는 게 첫 번째였고, 세부적으론 수비 담당(배터리 포함)으로 우리 투수들의 상대 타자 공략법, 수비 위치 등을 관리했다. 이 캐릭터는 감독이 만든 것도, 감독이 내게 특별한 기회를 부여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LG 기록원을 하면서 계속 업그레이드됐고, SK에선 전력 분석으로 더 큰 역할을 맡았다. 그걸 감독이 끌어다 사용한 것이다. 내 역할은 프런트 야구가 만든 캐릭터다. 사실 전력분석 코치의 역할에 대해 나도 굉장히 고민했다. 솔직히 애매한 포지션이긴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역할에 더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고 그걸 신경 쓰고 관심 둘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전력분석 코치의 역할

    당신이 생각하는 전력분석 코치의 역할은 무엇인가.
    “타격 코치는 방망이로 공을 잘 치고, 투수 코치는 투수가 좋은 투구를 하도록 이끈다. 수비도 파트별 전문가가 있다. 내 역할은 승패의 원인을 평가하고 대책 방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팀이 제대로 가느냐는 관점에선 치고 던지고 막는 걸 봐야 했다. 그래야 승패에 대한 대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는 던지고 때리는 것보다 배터리 쪽이 취약했다. 그래서 (투수의) 공을 직접 받은 것이다. 전력 분석은 또 다른 의미의 트레이너다. 트레이너가 선수들의 몸을 관리하고 강하게 만든다면 난 야구에 관한 머리(지식 등)를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2016년 4월, 한화의 외국인 투수 에스밀 로저스의 투구 폼을 직접 지도하려 했다가 로저스와 불화가 생겼다는 소문이 야구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일이 있었다.
    “그 선수와 2년을 함께하면서 딱 한 번 공을 받았다. 그전에는 구속(球速)이 너무 빨라 받을 생각도 못했다.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하다 처음 공을 던지는 날이었는데, 조인성도 없어서 내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받은 것이다. 공을 받고 ‘좋다’는 말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이전에는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잘하면 박수 쳐주고. 이게 전부였는데 내가 그 선수를 어떻게 가르쳤다고 말하는 건지…. 이 일은 정말 화가 많이 났다. 후폭풍을 알고 있었지만 내 인생을 걸고 잘못된 소문과 싸우고 싶었을 정도다.”

    투수들의 공은 언제부터 받기 시작했나.
    “SK에 조범현 감독이 계실 때부터였다. 태국으로 마무리 훈련을 떠났는데 포수가 부족해 도움을 주고자 시작했다. 아버지가 계실 때도 그런 방식을 지속했다. 투수 공을 받는 게 전력 분석에도 도움이 됐다. 받으면서 손바닥으로 느끼는 감각이 기록이나 관념적인 부분보다 훨씬 정확하기 때문이다. SK 시절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때는 자연스러워 보인 행동이 한화에선 오해의 시선으로 변화된 것 같다. 그 일 이후론 감히 공 받을 생각을 못했다. 투수 공을 받을 수 있는 게 나 나름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예를 들면 한국 최고의 포수인 박경완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할 때 내 생각을 선수에게 정확히 이해시키려면 전력 분석 안의 숫자와 영상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몸으로 접하는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설명해야 선수들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한화에서도 그런 관점으로 투수 공을 받은 것이다.”


    야구 관점의 차이

    전력분석 코치란 역할 자체가 파트별 코치들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닌가.
    “미팅을 누가 끌고 가느냐가 중요하다. LG와 SK에선 이미 마련된 기반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으면 됐지만 한화는 내가 들어가서 바꿔야 했던 상황이었다.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대호가 타석에 들어서면 바깥쪽 공으로 대응하자고 말한다. 데이터가 나오면 1차적으로 우리가 플랜을 짜지만, 게임으로 들어가면 변수가 생긴다. 그건 배터리 코치 몫이다. 게임 후 평가하는 것도 배터리 코치 몫인 것이다.”

    전력분석팀을 감독의 스태프, 프런트의 스태프, 그리고 선수의 어드바이저로 분류한다면 어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나.
    “SK에선 프런트와 감독의 스태프였다면 한화에선 감독의 스태프였다.”

    일부에선 한화 이글스에서의 김성근 전 감독을 향해 ‘김성근 신화’의 몰락이라고 표현했다.
    “그 잣대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한화에 무엇이 남아 있는 걸까. 그에 대한 물음표를 갖고 있다. 왜 실패라고 몰아가는지. 아버지가 한화에서 나온 후 김태균과 로사리오가 ‘알아서’ 특타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흔적이 없었다면 경기 후 대전야구장에서 연습을 더 하겠다고 조명을 켜는 선수가 있었을까 싶다. 실력이 부족하면 연습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 부분은 아버지가 원한 방향이었다. 맞고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타 관련해서는 이전부터 지적이 많던 문제다. 프로 선수에게 아마추어 선수처럼 특타를 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내용이었다.
    “야구 관점에 차이가 있다. 그들은 선수를 보는 것이고, 아버지는 팀을 먼저 바라본다. 팬, 미디어의 시선은 선수한테 가 있다. 감독이 추구하는 야구는 팀이고, 팀이 있어야 선수가 있는 것이다. 그 논리가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연습량의 많고 적음도 팀으로 봤을 때와 선수 개인으로 봤을 때 관점에 차이가 있다. 야구장 불이 꺼질 때 이전에는 바로 퇴근하는 게 전혀 거리낌이 없었는데 어떤 이는 그냥 가지 못하고 불을 켜고 특타한다면 아버지가 강조한 정신이 남아 있는 거라고 본다. 아버지는 30대부터 감독직을 맡으면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올라오셨다.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컸다고 생각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어야 했다

    아들이 아닌 코치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한화 시절 김 전 감독의 선수단 운영에서 LG, SK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기본 철학은 굳건하지만 LG, SK, 한화를 맡으실 때마다 그 팀과 상황에 맞게 조금씩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응용하시더라. 아버지랑 같이 일하면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 볼 수 있는 시선을 배웠다. 만약 아버지와 함께 야구 인생을 걷지 않았다면 나도 헷갈렸을 것이다. 감독으로 모시고 야구인으로 살았고 내가 옆에서 직접 보고 느낀 부분이라 누가 뭐라 해도 사실을 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연세를 드실수록 냉정해야 하는데 냉정해지지 못하시더라. 선수가 풍족하지 않았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는 특히 코치들한테 냉정하지 못하셨다. 그냥 침묵하셨다. 아버지가 인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런 인연들이 지금의 김성근을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옆에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한화에서 경질되기 직전 아버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나.
    “당시 넥센에 만루홈런 맞고 삼성한테 3연패한 다음 날부터 아버지하고 전화 연결이 안 됐다. 팀에선 아버지가 사의를 표명했고 이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공식 발표를 했다. 발표가 나온 후에야 아버지와 전화 연결이 됐다. ‘괜찮으시냐’고 여쭤봤고 ‘이젠 감독과 코치 관계가 아니니까 아들 노릇 제대로 할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감독으로 계시는 동안 우린 철저한 감독, 코치 관계였다. 사석에서도 그 관계는 허물어지지 않았다. 둘이 만나 식사한 적도 없다. 사람들이 예상한 것보다 나와 아버지는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도 되고 속상한 일 있으면 전화도 드리고 위로도 주고받고, 같이 골프도 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선수들과의 약속

    김성근 전 감독이 팀을 떠날 때 김정준 전 코치도 바로 그 뒤를 따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곧장 팀을 떠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이상군 감독대행과 인천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아버지가 물러난 후 SK 원정 첫 경기를 이기고 둘째 날 아침이었다. 전력분석원으로 가달라고 하시더라. 아버지가 그만두신 날, 이상군 감독대행은 날 붙잡고 ‘가만히 있어라’ ‘같이 가자’며 내가 그만둘 것을 걱정했다. 나 또한 이 팀에 벌려놓은 일들이 있었고, 작년 가을부터 선수들과 함께 만들어가던 부분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전력분석원으로 가면 더그아웃에 들어갈 수 없고, 선수들의 수비 시프트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사라진다. 코치에서 빼는 건 내 존재가 뭔가 불편하다는 건데 내가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면 비켜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상군 감독대행에게 팀을 떠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나간 상황에서도 팀에 남았던 건 수비 코치 입장에서(2016년 전력분석 코치로 일하던 김정준은 2017년부턴 수비 보조 코치를 맡았다) 선수들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보직을 맡지 못한다면 더는 약속을 지키기 어렵고, 그렇다면 굳이 팀에 남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떠난 후 내게 쏟아진 시선을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견뎌내야 했다. 선수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면.”

    김정준은 한화를 떠난 소감으로 “벽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처럼 시원섭섭했다”고 표현했다. 전세 기간이 남아 대전을 떠나지 못하고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잠시 휴식기를 가진 그는 한 포털 사이트에 야구 칼럼을 연재하는 것으로 야구장 밖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잘 몰랐다. 그러다 팀을 떠날 때쯤 되니까 어느 정도 보이더라. 내가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이라고 설명한다.



    야신의 아들

    “나는 김성근의 아들이 되는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욕을 먹어야 했다. 한때는 그걸 피하려 했지만 그걸 피하면 나란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되더라. 내게는 팀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선수였다. 나머진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욕을 먹어야 했다면 설령 내가 피해를 본다고 해도 지켜봐야만 했다. 26년간 야구판에서 생존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공격받는다면 내가 답할 수 있는 게 없다. 시대 흐름에 따라 야구도 변화하지만 룰이 바뀌지 않고 9명이 야구를 하는 거라면 나도 크게 바뀌진 않을 것 같다.”

    김정준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해설을 하게 될지 현재로선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기회는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할 수도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분명한 건 한화로 들어가기 전보단 야구도, 인간적인 면에서도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겉으론 그의 야구가 잠시 휴식기를 갖는 듯하지만 어쩌면 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야구를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야신의 아들’이 아닌 김정준 그 이름을 갖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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