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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⑫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지독한 승부근성으로 배구 코트 평정한 ‘제갈공명’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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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와의 운명적 만남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2010~2011 NH농협 V리그 남자부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 선수들의 플레이에 박수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신 감독은 “그때는 후위공격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다. 전위에 있던 선배들은 자기를 무시하고 강만수에게 볼을 주는 나를 크게 혼냈다. 그러나 나는 이후에도 똑같이 했다. 확률이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게 세터의 첫 번째 임무이기 때문”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삼성화재가 경기의 주요 승부처에서 무조건 가빈에게만 공을 몰아주는 이른바 ‘가빈 타임’으로 승리하는 방정식이 어디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 감독은 고교 시절에는 레프트 공격수, 대학에서는 세터와 센터를 맡았다.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뛸 때는 세터, 남자배구 대표팀에서는 세터와 레프트 공격수를 오갔다. 선수 시절 ‘컴퓨터 세터’로 이름을 날린 김호철 전 현대캐피탈 감독이 있을 때는 그가 레프트 공격수로 나섰고, 김 전 감독이 없을 때는 세터를 맡는 식이었다. 그 자신은 “어느 포지션도 제대로 한 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재다능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러 포지션을 뛰었다”고 웃지만 선수 시절 다양한 포지션을 섭렵한 경험은 오히려 나중에 지도자 신치용의 성공에 큰 도움을 줬다.

신 감독은 삼성화재를 맡기 전까지 15년간 한국전력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한전 코치 시절 그는 스카우트 파문으로 갈 곳 없던 신영철 세터(현 대한항공 감독)를 영입해 명 세터로 조련했다. 신영철 세터가 활약했던 한전은 무명 팀에서 일약 상위권 팀으로 도약했고 신 감독 역시 남다른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95년 삼성화재는 배구단을 창단하고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팀을 옮기기까지 많이 고민했다. 1998년 외환위기 여파로 고려증권 등 여러 배구팀이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탄탄한 공기업 부장 자리를 내놓고 신생 팀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단 하나.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전 시절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고려증권(해체) 등에 종종 지곤 했던 그는 “지겹게 져봤기 때문에 새로운 팀에서 과거의 강팀을 이기는 배구를 펼치고 싶다”고 말하고 삼성 행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창단 2년 만에 팀을 우승시켰고 이후에도 밥 먹듯 우승을 거듭했다. 여기에는 삼성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창단 직후 당시 ‘월드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김세진을 영입한 삼성화재는 1997년 한국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인 신진식도 품에 안았다. 둘은 단순히 삼성화재라는 한 팀의 좌우 공격수가 아니라 국가대표팀의 좌우 쌍포였다. 둘을 다 보유한 삼성화재가 남자 실업배구를 석권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신진식의 영입은 삼성화재의 최대 라이벌인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와 스카우트 파동까지 겪으면서 벌어진 일이기에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당시는 아마추어 리그였지만 자유경쟁 스카우트를 할 때라 선수들의 몸값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현재의 프로배구보다 선수 몸값이 오히려 더 비쌌다. 당시 누구나 고교 시절부터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왔던 신진식이 현대를 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삼성은 배구 사상 최고액을 베팅하며 신진식의 어머니와 그의 모교인 성균관대를 집중 공략했다. 당시 신진식이 받은 돈이 지금도 어마어마한 금액인 약 20억 원에 달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삼성화재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99년에도 당시 대학 최고 스타들인 장병철, 최태웅, 석진욱, 명중재를 모두 스카우트했다.

엄청난 훈련으로 77전승의 신화를 쌓다

이런 삼성화재의 선수 싹쓸이에 대해 비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 감독의 진가는 오히려 이때부터 발휘됐다. 조직력을 중시한 그는 스타 선수들에게 엄청난 훈련을 강요했다. 단순히 매일 정해진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령 달리기를 한다면 매일같이 선수 개개인이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나가야만 훈련을 끝내는 식이었다.

전술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호쾌한 스파이크 등을 보기 위해 배구장을 찾지만 신 감독은 경기가 있건 없건 선수들에게 개인기 위주의 공격이 아니라 수비나 기본기에 바탕을 둔 훈련을 시켰다. 특히 서브리시브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선수들로부터 “너무 고되다”는 푸념을 자주 듣곤 했다. 선수와 부모 간의 만남도 극도로 제한해 선수 부모나 배우자들이 “여기가 군대냐”며 항의할 정도였다.

신치용 감독 휘하에서 삼성화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진식 현 홍익대 감독은 “밖에서는 멤버가 좋아서 삼성화재가 우승했다고 하지만 정말 토할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는데 실전에서 지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렇게 1승이 쌓이고 쌓여서 77연승이 됐다. 배구 인생 최고의 기억”이라고 당시를 떠올린다. 덕분에 삼성화재는 2002년 시즌에는 시즌의 55경기를 전승했고 이를 77연승까지 확장했다. 아무리 다른 팀보다 우수한 전력을 보유했다 해도 77연승을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 신 감독은 2009년 5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창단 때부터 17년간 팀을 맡다보니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에 덧칠을 하는 게 아니라 백지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남이 그린 그림을 넘겨받았다면 내가 원하는 조직 문화를 심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창단 후 3년간 틀을 다져놓은 게 지금껏 흐름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도 덧붙였다. 아무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신생 팀의 초짜 감독이 스타 선수들을 데려다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면 이를 고분고분 따를 선수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성적으로 이를 입증하며 결국 선수들의 마음을 얻어냈다.

당시 그는 “김응룡 전 삼성라이온스 사장이 해태타이거즈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 18년간 같은 팀의 감독을 맡아 국내 스포츠지도자 중 단일 팀의 최장수 수장 기록을 갖고 있다. 내가 그 기록을 깨고 싶다”고도 말했다. 현재대로라면 그가 이 기록을 깨는 건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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